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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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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14)] 18/06/24 지혜로운 믿음 (잠 3:13-24)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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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14)] 18/06/24 지혜로운 믿음 (잠 3:13-24) 문병호 목사


(음향 수정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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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6:5)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시 116:6)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시 116:7)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시 116:8)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시 116:9)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시 116:10)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녹취록>

1. 지혜: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 붙어있는 것

우리가 흔히 천지창조를 혼돈에서 질서로 옮겨가는 과정에 하나님이 하신 일로 말하곤 합니다. 물론 혼돈이란 개념 자체도 하나님이 두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없는데서 유를 이루셨는데 그 가운데 질서와 조화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에는 다 길이 있습니다. 새와 태양과 별이 가는 하늘의 길도 있고 물고기가 다니는 물길, 인간이 다니는 사람의 행로도 있는 것입니다. 나무도 꽃도 방향을 가지고 자라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되 뚜렷한 질서와 법도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심령에 새겨주셨는데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와 법도와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그 형상을 쫓은 인간도 그것을 따라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지식과 감정과 의지, 즉 지, 정, 의가 있습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도 이와 같은 지정의가 있고 심신이 연약한 사람도 인간인 이상 지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지정의 가운데 살고 꿈꿉니다. 꿈꾸는 순간조차도 감정과 의지를 가지는 존재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이런 자연적인 질서 가운데 지정의를 주셨는데 우리는 그런 사람이로되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삼아 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길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자녀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천로역정이라는 작품에서 고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국까지의 역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분명한 그들의 길이 있습니다. 아무 곳이나 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알고 뜻하고 행하는 자연적인 지정의가 아니라 거듭난 지식과 거듭난 감정과 거듭난 의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지식에조차 거듭나게 하시므로 아는 것이 새롭습니다. 신령한 것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영원한 것에 관심을 갖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성도의 길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감정도 세속적인 것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지만 성도들은 경건한 정서를 즐깁니다. 경건한 정서, 내적 정서, 신령한 정서를 즐깁니다. 다 먹고 놀아도 우리는 그것이 없으면 허전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뜻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행위하되 하나님의 뜻대로, 그래서 거듭난 의지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런 거듭난 지정의를 다 모아서 성경은 지혜라고 합니다. 지혜는 지식, 정서/감정, 의지적/행위적 영역을 아우릅니다. 지혜는 그저 느끼고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개념입니다. 알되 제대로 알고 그 가운데 느끼되 하나님의 뜻을 우리 심정에 기쁨으로 받고 여호와께서 즐거워하므로 내가 즐거워하며 행하되 하나님의 뜻을 쫓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녀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지혜라고 합니다. 지혜라는 말은 구약에서는 호크마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소피아라고 합니다. 호크마는 본래 굳게 붙들다는 의미입니다. 매미가 나무에 꼭 붙어있는 것처럼, 물고기가 물에 붙어있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나무가 지상에 뿌리를 박고 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나무가 뿌리를 땅에 붙이고 있어야 수분도 양분도 끌어들입니다. 물고기도 물에 있어서 먹고 자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 붙어있는 것, 그의 말씀과 뜻에 붙어있는 것이 호크마입니다. 집나간 탕자 같이 자녀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붙어있는 것이 호크마, 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붙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붙들려 있는 것 자체가 지혜입니다. 한나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알아듣지 못할만큼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린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 앞에 성전에 데려다 놓습니다. 그러자 그 성소에서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데려다 놓으니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2. 지혜의 근본인 경외: 진리 가운데서는 죄와 연약함을 깨달으나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하나님 앞으로 이끌려 가는 것

저는 어제 집에서 모처럼 쇼파에 앉아 싱크대를 봤습니다. 저희 교회를 만들면서 싱크대가 비싼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전에는 무심했는데 저희 집에 있는 것도 이제는 비싼 것으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그릇이 가득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지혜라는 것은 바로 주인에게 사용되기 위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쓸 것 같아도 어머니들이 언젠가 각자의 그릇을 용도에 맞게 쓰는 것처럼 호크마도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자리를, 지혜를 우리에게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은 지혜와 명철은 얻은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방점은 “얻은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얻고 누리는 것입니다. 지혜는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혜와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신다고 합니다.(잠 2:6) 잠언은 지혜서라고도 합니다. 지혜서는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통칭합니다. 모세오경, 역사서, 선지서, 지혜서가 있습니다. 모세오경은 하나님의 법을 알려주며, 역사서는 그것을 지키는 족적의 기록이요, 선지서는 그 법도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그리고 지혜서는 종말의 도상에서, 천로역정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갈 것인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지혜서 중에서 지혜를 직접적인 주제로 다루는 것이 잠언입니다. 이 책에서는 지혜와 명철과 지식이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본문 19절, 20절이 그렇습니다. 지혜와 명철과 지식을 잠언에서는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혜서는 문학서이므로 동어를 반복하되 다른 용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 지식, 명철을 여호와께서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지혜가 무엇인가요? 본문에 지혜를 얻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이 지혜가 무엇이길래 복이 있느냐, 잠언은 바로 지혜의 근본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잠 1:7; 9:10) 경외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는 두려움 가운데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 두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이 경외입니다. 사실 계산하면 도망하고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중심까지 보시고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 삶을 살피므로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이 자리에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자리에 이끌어 내십니다. 의인이라서가 아닙니다. 죄중에서 그러합니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여전한 죄와 곤고함 가운데 있는 우리의 모습을 고백하는 회개를 반드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라는 것은 제 자리에 꼭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여호와의 임재에 있는 것이 지혜인데, 그것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외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잠언 3장 3절은 이것을 두가지로 표현합니다. 인자와 진리가 내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목에 매며 마음판에 새기라고 합니다. 인자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경외, 즉 지혜의 첫째 요소이고 두번째는 진리입니다. 진리 가운데서는 죄와 연약함을 깨달으나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하나님 앞으로 우리가 이끌려 가는 것이 경외인데, 그것이 바로 지혜의 근본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근본은 아이들이 밖에서 막 놀다가도 밤이 되어 이름을 부르면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밤이 되었는데 아직 밖에 있는 것은 사생아요, 탈선입니다. 낮에 놀다가도 해가 지면 이끌려 가는 것이 바로 경외입니다. 집에 가면 어머니가 혼을 낼 수도 있으나 그래도 집에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집에 가면 사랑과 밥과 훈계가 있습니다. 사랑과 훈계, 인자와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3. 여호와의 선하심: 진리로 드러난 죄에도 불구하고 인자로 불러내어주심

그러므로 우리의 지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두가지 요소를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인자는 구약에서 헤세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신약에서는 아가페입니다. 인자와 그리고 진리입니다. 진리는 구약으로 말하면 에메트입니다. 신약에서는 알레테이아입니다. 인자와 진리가 함께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인데, 여호와를 알면 그의 진리 가운데 우리의 죄가 드러나므로 ‘화로다 나여’ 하는 탄식이 생깁니다. 진리의 역사에는 쓰라림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감사한 것은 여호와는 사랑이시므로, 인자와 진리가 함께 있으므로 그것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면 바로 그것을 우리는 선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면 그것의 두 요소는 인자와 진리입니다. 진리 앞에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죄로 인해 쫓겨나고 저주가 있으나 인자가 진리와 함께 있으므로 하나님 앞으로 이끌려 갑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말씀이 구약에 가장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바로 이처럼 인자와 진리를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만 우리에게 비추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공의 가운데 그러하십니다. 저는 그것이 담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사랑만 베푼다면 그저 옆집 아저씨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 가운데 베푸시므로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옆집 아저씨는 몸에 안좋은 것도 다 먹게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몸에 좋은 것을 먹게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가 우리 쪽에 비추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4. 성도의 복: 여호와의 선하심을 누리는 것

그러면 그 선하심을 누리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복입니다. 본문 13절에서 말하는 복입니다. 이것 외에는 복이 없습니다. 요새 기독교에서 행복한 교회, 행복한 성도 등으로 얘기하는데 기독교의 본질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바로 이것입니다. 지혜의 근본인 여호와를 경외하는데, 경외의 요소는 인자와 진리인데 그것을 비추는 것이 선이요, 그것을 누리는 것이 복입니다. 진리로 간혹 징계하셔도 내가 자녀이니 그러신 것으로 알고 또 감사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있고 스스로에 대한 가슴침이 있을 때 하나님이 자라게 하고 문을 열어 주시고 부요케 하시고 열매를 주십니다. 바로 그것이 복인 것입니다. 본문의 그 복을 14절부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지혜를 얻는 복은 은을 얻는 것보다 정금과 진주보다 낫다고 합니다. 어떤 소유보다 이 지혜를 갖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저 비유의 말이 아닙니다. 은보다 정금보다 진주보다 낫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쫓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16절은 그의 오른손에 장수가 있고 왼손에 부귀가 있다고 합니다. 이 시대의 장수라는 개념은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개념입니다. 전쟁을 해도 지혜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수명의 개념이 아닙니다. 고대에는 대부분 전쟁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있는 자가 전쟁도 잘한다는 의미로 보면 됩니다. 물론 자연적인 생명을 누리는 것도 포함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17절은 그 길이 즐겁고 평강이라고 얘기합니다. 

지름길에는 본래 도적이 많고 뱀이 있습니다. 저 도시까지 가야 되는데 질러서 가려고 하면 위험한 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지혜가 역사하면 지름길이지만 평강이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이나 시편은 시입니다. 그리고 문학입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을 살펴서 보면 의미가 깊습니다. 장수한다고 하면 그저 오래 사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말씀의 지혜로 활을 피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름길로 가지만 평강의 길이라고 합니다. 지름길로 가려고 하면 불안합니다. 그러나 아셔야 합니다. 주님은 지름길로 내모시되 평강의 길이 되게 하십니다. 세상에서 지름길에 가려고 하면 뱀에 물리고 덫에 걸립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이 첩경을 내 주시되 평화롭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진리 가운데 말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심이요 그에게 피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합니다. 십자가지기 성도님들 잘 알아야 합니다. 사랑도 구하지만 진리도 구해야 합니다. 인자와 진리를 함께 구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호와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내 정서적 만족, 충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감정, 지식, 의지를 만족시키는 것을 구해야 합니다. 잘먹고 잘사는 것, 육신의 지정의를 만족시키려다가는 세속적인 덫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거듭난 지정의를 구하면 주의 종, 자녀로 더욱 자라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주님이 알려주시는 지름길 외에는 절대 찾지 마십시오. 

최근 어떤 집사님이 5억만 투자하면 1조가 남는다고 하면서 변호사 위탁 수임료만 빌려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말했습니다. 쉽게 들어오면 쉽게 나가는데 나갈 때는 있는 것조차 싹 다 가지고 나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항상 진리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우리 십자가지기 성도님들 그러므로 조금 모자라게 조금 덜입히고 조금 덜 먹여서 자녀를 키울 필요도 있습니다. 항상 그런 마음으로, 항상 먹이고 입혀야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자식이라도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는 사랑과 인자를 구하지만 진리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를 아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입니다. 그 길은, 주와 함께 길가는 것은 즐거운 것입니다. 주와 함께 길가는 것은 즐거운 길입니다. 찬송도 있습니다. 본문 17절과 같은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는 이런 길이 없습니다. 첩경에는 평안함이 절대 없습니다. 첩경이면서 이익도 많이 남고 마음도 편한 그런 길은 절대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함께 가시면 첩경이라도 샬롬, 평강, 여호와가 나와 함께 있는 평안이 있습니다. 샬롬이 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제 자리에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5. 여호와의 선하심을 믿음으로 신령한 것을 얻고 세상의 것에 대해 양보하는 지혜 

이 지혜의 근본이 경외인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18절, 그 얻는 자에게 생명나무라고 합니다.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있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지혜는 생명의 지혜를 우리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신약시대는 소피아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입니다. 그래서 철학을 필로소피라고 합니다. '필'은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철학은 지혜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생명나무인데, 철학자들은 그러므로 생명을 좋아해야 하는데, 근, 현대 철학은 말이 필로소피이지 생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살리는 지혜가 되어야 하는데 퇴폐주의,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지혜가 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니체나 사르트나 러셀,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들의 공통점은 허무입니다. 어디로 돌아갈까, 까뮈의 소설에 나오는 그런 것입니다. 헤밍웨이의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물고기를 잡았는데 돌아와보니 뼈만 남은 것입니다. 무기여 잘있거라도 그냥 빈 차로 돌아갑니다. 그 허무한 장면이 결론입니다. 그러나 진짜 지혜는 세상이 철학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에서 구해야 합니다. 진짜 지혜는 생명나무입니다. 이 지혜는 우리의 마음을 살리고 눈을 뜨게 합니다. 

19절과 20절은 그 지혜로 하늘과 땅과 바다와 만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23절, 24절은 그 지혜가 있으면 우리의 길이 평안하고 잠이 달다고 합니다. 본문은 지혜 절대주의 입니다. 지혜 지상주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인데, 인자와 진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이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비추는 것이 여호와의 선하심입니다. 이 지혜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지혜로운 믿음입니다. —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 34:9)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슬기로운 처녀와 같이 기름을 준비하는 자입니다. 밭을 갈다가 보화를 발견하면 세속적인 전재산을 팔아 신령한 보화를 얻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하늘나라 가져갈 것은 예비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믿고 과감하게 세상의 것에 대해 양보할 줄 아는 자입니다. 이삭과 아브라함과 같이 말입니다. 롯은 세속적인 지혜를 가진 자였습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양보하는 지혜입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컷 우물을 파면, 예전에는 대를 걸쳐 파는 것이 우물인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합니다. 다른데 가면 하나님이 또 우물을 주시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은밀히 구하면 은밀히 주님이 갚으십니다. 이런 지혜를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이런 삶의 방식을 우리가 따라야 합니다. 양보하십시오. 하늘을 놓으시고 땅을 놓으시고 바다를 가르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므로 직장에서도 양보할 것은 과감히 양보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데 그런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시 34:9) 

이런 지혜는 우리가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은 “얻은” 자는 복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런 지혜를 얻으시고 그것을 누리는 모든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