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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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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5]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16)] 하나님을 바로 아는 믿음 (호 6:1-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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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5]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16)] 하나님을 바로 아는 믿음 (호 6:1-6) 문병호 목사 


(호 6: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 6: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 6:4)○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호 6:5)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호 6:6)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음향 수정 완료)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 그의 앞에 다시 살게 하심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이지만 남북 모두를 향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본문의 4절은 ‘에브라임아’라고 합니다. 이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지칭하며 ‘유다야’라고 할 때 이는 남왕국 유다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특징은 다른 선지자와 달리 아주 큰 연단을 받는데 그것은 음란한 여인 고멜을 배우자로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정결한 여인을 배우자로 맞이하여 모범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음란한 여인 고멜을 통해 세 아들을 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맞추어 주셔서 어떨때는 아버지로, 교사로, 어떨때는 의사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라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만물의 주가 되시지 우리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을 아버지로 드러내셔서 갈한 것을 채우시고 교사로 자신을 드러내셔서 길을 알려주십니다. 또한 의사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서 치유하시고 낫게 하시고 고쳐주시고 온전케 하시니 곧 여호와 라파, 바로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드러내십니다. 특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한 가장 큰 사역은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각색의 병자를 낫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바로 호세아가 맞이한 여인을 아내로 둔 남편으로서 자신을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실상 하나님이 호세아의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멜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음란함, 우상숭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대신 느끼게 하여 그것을 통해 말씀을 선포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지서를 보면 대충 비슷한 유형이 나타납니다. 먼저 죄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죄를 다스리고 남유다의 죄를 이야기합니다. 이곳에서 더 나아가 만국의 죄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죄를 꾸짖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돌이키는 하나님의 싸매어주심이 있음을 함께 증거합니다. 본문 1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은 죄에 대해 먼저 치시고 찢어버리십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에게는 도로 낫게 해주시고 싸매어 주셔서 궁극적으로 회복시키셔서 함께 더불어 사시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헌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를 살리시고 일으키셨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떠오릅니다. 우리를 이틀만에 살리고 사흘만에 일으킨다고 하십니다.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다시금 살리시고 일으키셔서 그 앞에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려고 잘못한게 있으면 혼을 내십니다. 혼을 내면 흔적이 남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다시 약을 발라 주십니다. 찢어진 것을 다시 낫게 하시고 치신 것을 싸매어 주셔서 다시 살리시고 일으키셔서 무엇을 하시려고 하느냐 하니, 그 앞에 살게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선지서의 공통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선지서는 경고만 볼 것이 아니라 회복까지 보아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아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 죄와 허물로부터 말씀과 예배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한편 이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타락했느냐 하니, 이방신인 바알을 자신의 남편, 자신의 신으로 섬겼습니다. 남녀의 음란을 상징하는 신들을 섬기고 그것을 통해 자식이 생김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을 이제 하나님이 회복시키셔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돌이킬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은 바로 우리가 고멜의 자리에 있지 않는가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나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남편이 되시는데,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 남편이 되시는데 우리가 내 남편, 내 하나님, 내 예수님 하면서 사는지, 내 바알 하면서 세상의 풍요와 우상을 쫓는지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통해 낳은 세 아들은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 입니다. 이스르엘은 꺽어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전쟁을 못하게 만들어버리신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로루하마는 긍휼을 베푸시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 로암미는 더이상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세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와 저주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활을 들고 병기를 들어도 그들이 흩어지고 망하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을 베풀지 않고 백성으로 삼지 않을 것임을 말하는 가운데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 회복의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백성됨은 신약의 자녀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삼지 않으시겠다는 것은 자녀삼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요? 그것은 바로 본문에서 보듯 남편에 대한 무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이것이 본질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바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알려고 하지 않고 방치해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한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린다’고 하십니다. ‘율법을 잊어버렸으니 나도 너희를 잊어버린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하나님을 알고자 애쓰면 하나님도 우리를 알고자 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율법을 묵상하지 않으니 하나님도 그들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음란은, 성경에 많이 나오는 음란은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다른 것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즉시 들어옵니다. 구덩이를 파면 어딘가로부터 물이 들어오듯, 여호와를 아는 참 지식이 없으면 헛지식이 들어오고 우상의 지식, 쓸데없는 지식이 들어옵니다. 즉, 음란은 여호와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히브리어로 다트입니다. 다트와 같은 것이 야다라는 말입니다. 야다는 부부 간에 아는 것을 지칭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부부간에 아는 지식, 세상에서 가장 친밀히 아는 것이 부부입니다. 자식이 모르는 것도 남편과 아내는 압니다. 부모가 모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부 간의 지식, 야다가 없어서 망하도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음란한 것이 우리에게 들어왔다고 할 때 육체적 성적인 것보다 오히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전치 않을 때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다 음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가 무엇을 원하는가, 여호와가 어떤 분이고 무엇을 바라시는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없는 제사에 지쳤다고 하십니다. 제사보다 인애를 원한다고 하십니다. 본문 6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여호와는 제사를 받기 원하고 절기 지키기를 원하시지만 더 중한 것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성전에 나오고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4절은 ‘너희의 인애가 아침 이슬이나 쉬이 없어지는 구름’ 같다고 합니다. 인애는 헤세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헤세드는 난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본문 1절의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았으므로 우리가 그에게 자녀입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가듯 그러므로 우리가 그에게 돌아가는 것이 인애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일상의 죄와 허물과 연약함으로부터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율법사들이 율법에 정통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아닌 두렙돈 낸 과부, 세리, 창기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 애통하는 자, 눈물 흘리는 자, 가슴 치는 자, 울며 기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어깨를 내밀고 당당히 걷는 힘있는 장수가 아닌 곧 쓰러질듯 하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3.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에만 음란하지 않을 수 있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은 남편에게 다가가는 길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자로서 성도의 이 길을 도울 수 있다면 저에게 더 큰 일이 없습니다. 제가 별을, 꽃을 만들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운 길을 인도할 수 있다면 목회자의 기쁨이자 본분일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관심이 중요합니다. 지금 나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의 주 관심사가 무엇인가요? 여러 것이 있지만, 그 중 주된 것을 말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중심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에 있고 여호와를 바라는 것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은 진리를 아는 것이요 그 진리 가운데 생명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의를 사랑하시고 공의 가운데 생명이시기 때문에 절대 비진리 가운데서는 생명력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돌이키고 싸매고 낫게 하셔서 생명력을 발휘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죄 중에서는 생명력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일단 죄부터 없애야 합니다. 허물부터 없애야 합니다. 그것부터 힘써야 합니다. 어떤 다른 선한 일을 많이 하기 전에 말입니다. 그래서 의인의 길은 좁은 문이고 좁은 길이요 여호와를 향해 가는 길입니다. 


이제 남편의 자리에서 여호와께서 호세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다면,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가 남편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 이 비밀이 이제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신랑되신 남편되신 예수를 아는 지식이 있어야 음란하지 않은 것입니다. 직시하십시오. 예수를 알면 모든 음란한 것이 없어집니다.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면 모든 음란한게 없어집니다. 예수 지식 없으면 음란하지 않을 사람 아무도 없이 다 넘어집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주가 나를 위해 죽으시고 죄를 가져가시고 온전케 하셨다는, 남편, 신랑되신 예수를 바라보면 정욕과 음란과 욕정이 빠져나가고 싫어집니다. 그러나 예수가 떠나가면 예수가 희미해지면 엉뚱한 조명이 들어옵니다. 예수님의 의로운 광선이 아니라 세상의 조명이 나를 지배하고 비춥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남편으로 오신 것입니다. 호세아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금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처럼 진실도 인애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는 것입니다. —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호 4:7) 


4. 말씀을 통한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한국교회의 오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러면 안된다고 하지만 과연 한국 교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까? —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호 4:1) 우리가 그 진실,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우리가 회복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처럼 즐거운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를 알면 어떻게 압니까? 만나거나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압니다. 그것이 시편입니다. 우리 정서의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우리 정서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입니다. 시같이 쓴 것은 있지만, 우리의 정서를 이야기하는 것은 오직 시편입니다. 성도의 정서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항상 시편을 볼 때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시편 전체를 강해하고 나서 그렇게 좋아졌습니다. 어려운 것도 아니고 확실한 주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고, 오늘날로 말하면 성경 읽고 말씀 듣고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었기에 다윗이 다스립니다. 우리 교회도 매일 묵상이라고 하여 홈페이지에 말씀을 정리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말씀을 아는 것이 여호와를 아는 것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칼빈이 말한 바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주이요 또 하나는 구속주인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 ‘힘써 알자'고 하는 지식은 여호와가 천지 만물의 창조주임을 말합니다. 늦은 비와 같이 새벽 별의 빛과 같이 일정하게 여호와의 빛이 우리를 비추십니다. 우리에게는 사과 하나를 먹을 때도 하나님의 섭리와 긍휼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의 빛을 일정하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자연이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유학간 어떤 분이 외국의 자연을 보며 그렇게 고백한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에 가장 빨리 아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저도 주의 종이 되어 가장 큰 은혜를 누리는 것 중 하나가 자연을 달리 보게 된 것입니다. 정말 표현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늘, 꽃, 비 한방울 내리는 것도 마음에 감동이 되고 감사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이 지식이고 인애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 돌리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연 만물을 여호와께서 만드신 것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지식이고 인애입니다. 성경에서 사랑은 내가 너 안에 너가 내 안에, 돌아온 탕자와 같이 픔 안에 있는 것이요, 인정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지으심과 베푸심과 새벽빛처럼 일정하게 내리쬐는 돌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태국에 17일간 아이들이 갇힌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교사가 지혜롭다고 생각되는데, 손전등도 아껴썼다고 합니다. 음식도 자신의 것을 아껴 아이들에게 줬다고 합니다. 빛 하나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자가 부요합니다. 불평하는 자는 가난한 자입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말입니다. 빛 하나라도 감사하는 자가 부자입니다. 


두번째 지식은 바로 본문 1절의 ‘우리를 싸매고 낫게 하시는’ 주, 곧 구원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 두 가지 지식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허물과 애통함이 있어도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우리를 싸매고 낫게하시고 그리하여 여호와 앞에서 살게 하실 것입니다. (호 6:2)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중심을 보고 허물을 보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앞에 삽니까? 다 싸매고 치료하고 용서해주시니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이 두 지식을 균형있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치우칠 수 있습니다. 자연 혹은 자신이 가진 재주, 재능은 잘 올려드리는데 연약하고 힘들고 실족하면 회복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주권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이 구속의 하나님이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 부족합니다. 그저 엉엉 울 때 하나님이 그 손으로 우리를 만지시고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런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다 올바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5. 힘써 여호와를 알고 찾는 것: 말씀과 예배


우리가 여호와를 힘써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힘써 알자고 본문 3절은 말합니다. 나라가 망하는데 병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병사를 키우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약에는 구약의 힘써 알아야 할 하나님이, 남편되신 하나님이 이제는 남편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어 믿는 도리의 사도,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원컨대 성도님들은 성경의 말씀 한 줄이라도 읽으십시오. 하루라도 은밀히 기도하지 않는 날이 없도록 하십시오. 저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1분이라도 무릎을 꿇고 침대에 가고 어느 구석에라도 기도한다면 모든 것이 온전하리라 생각합니다. 기도가 끊이지 않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기도 안할 때가 문제입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있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엇이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일로 기도하고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기도하고 있으면 괜찮습니다. 저는 요새 교회에서 많이 기도합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홈페이지를 하면 홈페이지로 기도합니다. 어제 새벽 한시까지 팀장하고 옥신각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니 기도하면 또 하나님이 해주십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다. 기도 안하면 기계만 갖춰놓지 동력이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습니다. 힘써 여호와를 아는데, 우리가 여호와께 나아가고 여호와를 바라야 합니다.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사와 절기를 싫어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우선 알고(인애) 그 가운데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성경 꼭 읽고 설교 꼭 들으십시오. 홈페이지에 있습니다. 매일 묵상도 있습니다. 본문 말씀이 그것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아는데, 우리에게 지금 그것은 우리 교회가 예배드리는 것 말씀 한 번 더 듣는 것입니다. 누굴 불러서 특강을 하고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면 그것이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많이 말한 다른 선지자는 아모스입니다. —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6) 이 말씀을 꼭 붙들면 우리의 눈물과 애통을 기쁨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