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22]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17)] 뜻을 헤아리는 믿음 (합 3:16-19) 문병호 목사
(합 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합 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음향 수정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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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1. 주여 어찌하오리까,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무화과와 감람나무, 포도나무의 소출이 없고 외양간의 양과 소가 없어도 여호와의 이름과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라고 하면 즐겁고 기쁜 노래를 하는 자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하박국서를 읽어보면 구약의 도마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하나님 앞에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신중한 선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진지한 질문을 던진 사람이 아주 큰 기쁨을 누리는 것이 하박국서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1장, 2장에 거쳐 질문을 던지고 도마와 같이 의심하는 듯한 질문도 던지고 그리고 본문에서는 그 질문에 대한 깨달음과 답을 얻어 하나님께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이라는 이름은 매여 달리는 자입니다. 수레에 뭐가 붙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꼭 매여 질문하고 끝까지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매여 달리는 자’, '질문하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박국은 3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에는 두 질문이 나와 있습니다. 2-4절에 첫번째 질문이, 13절 부근에 두번째 질문이 제시됩니다. 그리고 이제 2장 이후로부터는 하나님의 답이 있고 이후는 3장부터 그것에 대한 하박국의 깨달음과 감사가 담겨 있습니다.
하박국이 던진 질문은 간단합니다. '왜 악인은 흥하고 의인은 고난을 당하는가?' 입니다. 우리도 쉽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당시는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잔인하게 몰살했는데 그들은 역사적으로도 아주 잔인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고난 후 이스라엘 민족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의 역사로 앗수르가 멸망되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메대와 바사 등 더 강한 민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선지자가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입니다. 요시야도 16세 때 종교개혁을 감행했으나 결국은 므깃도라는 곳에서 애굽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이 세우신 왕까지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첫번째 질문은 1장 4절입니다. —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두번째 질문은 13절입니다. —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이 두번째 질문은 왜 악인을 들어 의인을 판단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은 이해하는데 왜 악인을 들어 의인을 판단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입니다. 인간만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 인간, 직립하는 인간, 언어의 인간 등에 대한 칭호를 사용하지만, 인간은 무엇보다 질문을 던지는 인간입니다. 즉, 답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질문 가운데 자신의 능력과 무능을 판단합니다. 아이들이 엄마한테 물을 때는 그것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척도로 삼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상 고상한 질문을 던지는 자가 가장 고상한 인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보면 그 사람의 지식, 능력,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답을 몰라서 묻는 진정한 질문, 배움의 질문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밤에 찾아가서 사람이 어떻게 거듭나는지 물을 때 예수님이 사람이 어미의 태에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불로 믿어서 거듭남을 알려주십니다. 이런 질문은 참으로 우리를 발전시키는 건전한 배움의 질문입니다. 두번째 질문은 자신이 옳음을 확인해보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질문으로 자신의 철학을 정립했습니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을 다른 사람의 말을 이용해서 정립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은 악의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 입장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진리가 무엇인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므로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묻는 것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함입니다. 악의적인 질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명확하게 알고 하나님께 질문을 던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질문을 던질때는 몰라서, 배우려고 던져야 합니다. 밤에 찾아사거 니고데모와 같이 묻더라도 들려주는대로 받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에게는 먼저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이를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고’, '여호와가 일러 가라사대’ 등으로 표현됩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말씀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라고 합니다. 항상 다윗은 물었고 하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그것으로 다스립니다. 이것이 바로 신정(神政, Theocracy)입니다. 신정국가의 통치 방식입니다.그러니 그 아들 솔로몬도 일천번제를 드리면서 재판하는 지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달라고 구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비 다윗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연필 하나 볼펜 하나 사는 것도 여호와께 물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집에서 밥 짓는 것도 아이들에게 공책을 사주는 것도 그런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입니다.
2. 여호와의 비밀에 속한 것의 답을 얻기 위한 질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질문을 할 때 그것은 철저히 받아들이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답은 전부 다 비밀입니다. 그저 내 이성으로 이해되는 답은 없습니다.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구하는 질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해될만한 답을 금방 얻을 수 있어도 심오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폭과 깊이가 우리와 다르므로 우리의 이성을 무시하고 드리는 질문을 것입니다.그 질문이 하나님의 비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저도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봅니다. 진짜 몰라서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은 금방 배워 나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신의 지식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신학교 1학년 학생들이 그렇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교수에게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질문을 던질 때는 선입관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니고데모는 즉시 받아들였습니다. 사람이 모태에 다시 들어가서 육체로 다시 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불과 믿음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배우고 받아들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절망과 시기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답을 듣자마자 물동이를 던지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우물이 아니라 예수님이 갈하지 않는 생수임을 깨닫고 동네로 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질문을 던질 때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말하기 위해 하면 안됩니다.우리 성도님들도 장성하고 성숙하여 딱딱한 것을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끝없이 대들어서는 안됩니다. 한두번은 그리해도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자 베드로가 '그리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여호와의 비밀에 속한 것의 답을 얻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을 확인받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 꽃이 피는지 빗방울이 떨어지는지조차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매년 겨울을 맞지만 겨울에는 여름에 빛이 다시 올까 의심합니다. 장마철에는 햇빛이 날까 의심합니다. 겨울에는 여름에 다시 온기가 돌까 의심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운행은 일정하여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시고 사시사철 곡물을 주시고 인생을 살피십니다. 우리는 그리 마옵소서가 아니라 원대로 하옵소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질문입니다. 주여 어찌하오리까,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3.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우리는 죄인 된 것에 대한 고백
하박국은 왜 악인이 흥하고 의인은 망하느냐고 물었지만, 그 질문에는 결정적인 잘못이 하나 있습니다. 하박국은 이스라엘 사람을 의인으로 생각한 것입니다.바벨론, 앗수르 사람을 악인으로 생각하고 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과연 의인입니까? 기도하고 예배하고 제사하고 금식하면 그렇게 보이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어떻게 보면 맞는 이야기 같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너희들이 제사를 제대로 드리고 예배를 드렸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가졌는지 묻는 것입니다.— “.”(합 2:4) 이것이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입니다. 하박국은 공로와 자질로 접근합니다. 우리가 저들보다 낫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에 대해 너희도 같다고 하십니다. 그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은 정직하지 못하다고 하신 것입니다.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답은 하박국의 질문 자체를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그러했듯 말입니다. 자신의 의를 하나님 앞에 따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과연 우리가 뛰어나고 잘나고 의로워서 이웃 사람들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한데, 이웃들은 믿지 않는 자들이 경우도 없고 휴지도 함부로 버리는 것입니까? 너희야말로 정직하지 못하고 교만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답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닙니다. 흙탕물이 나는 깨끗하다고 하면 평생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스스로 흙탕물이라고 하면 새 물이 들어올 것입니다. 나는 더럽다라고 하면 새 물이 들어와서 깨끗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뛰어남은 그들의 자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질이 있어서 출애굽에서 열가지 재앙을 애굽백성에게 내려 건져주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그저 잠잠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 이후 모든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 그들은 기껏해야 불평하고 원망했지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롬 1:17)와 창세기(창 15:6)의 그 말씀이 하박국 본문에 나오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답입니다.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아 뛰어난 것이지 사랑스러워서 뛰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우리가 모여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것만이 우리를 낫게 해줍니다.우리가 뛰어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찾을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 밖에 없다는 어거스틴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뛰어남입니다.가장 고상한 인품자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가시고 빚어가신다고 고백하는 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4. 여호와를 주인으로 삼는 질문: 말씀 들으면 기도하고 기도하면 잠잠히 기다리고 순종할 때 반드시 응답하심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 2장 4절의 믿음은 같은 장 14절의 말씀에 연결됩니다. —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영광은 완전함입니다.우리는 불완전하나 여호와의 행사는 완전합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행사를 인정합니다. 바다에 가면 바닷물이 정말 많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경력, 자질, 가문, 기질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의이고 믿음입니다.더 많이 여호와께 영광을 올리는 자가 의인입니다.내가 난 사람, 든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주님의 구원하심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의로움이요 고상함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 20절은 '온 땅은 그 앞에 잠잠할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박국의 답입니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방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너희가 나쁜 것으로 하면 100배 더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기회를 주고 보호와 은혜를 베풀었는데, 이방의 돌이라도 그만큼 사랑하면 너희보다 나으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잠잠하되, 한번 택한 백성은 버리지 않으시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결론입니다.그러니 잠잠하라는 것입니다.가장 중요할 때 잠잠하라고 하십니다. 여리고성을 돌 때, 홍해를 건널 때 그렇습니다. 여리고성을 돌고 나서 마지막에 외치는 것은 공로가 아니라 감사의 기쁨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가지 말씀을 특히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로 말씀을 깊이 붙들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즐거이 듣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아멘 하며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 붙들고 기도하면 필히 이루어주시는데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지 못해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연약함을 안고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주인이 되는 질문은 그만하십시오. 여호와를 주인으로 삼는 질문을 던지십시오. 백부장의 믿음이 큽니다. 그는 주님께 오라가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합니다. 내가 주인되는 질문을 던지지 말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질문을 하십시오.여호와 하나님이 주인으로 되는 길과 삶으로 이끌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호와의 열심으로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하고 묻는 것입니다. 주님은 100% 답해 주십니다. 그것에 대해 우리는 아멘하면 됩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묻되 예 하고 순종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높은 은혜를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때리는 매가 있습니다. 매가 없이 자녀들을 교육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도 가보면 다 때립니다. 기술적으로 어떻게든 때립니다. 매를 들고 때려도 잘 때는 손을 잡고 품에 안고 잡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질문을 던질 때 단 것만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매를 드십니다. 앗수르, 바벨론, 메대의 매를 드십니다. 하나님의 매는 매섭습니다. 세계 최강국을 들어 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싸매어 주시고 낫게 하십니다. 다시 회복시켜주십니다. 지난 주 본 말씀입니다. 우리가 질문할 때 매를 드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를 자녀로서 사랑하시니 그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웃 아저씨는 매를 들지 않습니다. 말씀 들으면 기도하고, 기도하면 기다려야 합니다. —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또한 본문 장의 2절입니다. —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시라는 마음이 우리 안에도 가득합니다. 이 동네를 다니다 보면 전부 다 빚진 자 같이 보입니다. 하박국의 마음이 있습니다.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5. 구원받은 성도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백이 있을 때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는 은혜가 풍성함
우리 교회는 인근에 말씀을 전합니다. 홈페이지도 만들었습니다. 별것 아니지만 우리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전도지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가가호호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있는대로 전하려고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터도 있고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쉴 때 여기와서 쉬십시오. 아주 시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노 중에라도 긍흉를 보이십니다. 본래 긍휼은 자궁, 태라는 의미입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서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긍휼입니다. 있는 것을 보고 따져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조건을 찾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면 하나님이 베푸십니다. 저 이방민족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고 어찌보면 더 악하나 하나님은 변개치 않으십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과 언약을 맺었으므로, 구약에 280번이나 나오는 언약을 맺었으므로, 사랑해야 되므로 사랑하시는 것이며, 변개치 않는 여호와가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본문 16절은 외적인 현실이 나옵니다. 하박국이 질문한 때와 상황은 동일하니 하박국의 반응이 달라진 것입니다. 외적인 현실은 동일하나, 즉, 뼈를 썩이는 것이 들어온 것 같은 외적인 현실과 소출이 없는 내적인 현실이 여전할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가만히 있어도 기뻐야 합니다.어떤 일, 사건, 사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해도 뭔가 모르는 기쁨이 있는데 그것이 내 존재입니다.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 존재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 가운데 19절은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로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18절의 존재의 고백이 있어야 19절의 삶이 따릅니다. 그때 우리는 높은 곳으로 다니며 나의 발이 사슴과 같게 하십니다. 이 순서를 잘 알아야 합니다. 높은 곳에서 다니려고 한다고 다녀지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큰 성도입니다. 큰 일을 한다고 큰 성도가 아닙니다. 여호와를 인정하고 그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그 고백이 있으면 높은 곳에 다니는 자가 가장 큰 성도입니다.
저도 대관령에 이번에 다녀왔습니다. 양의 눈이 얼마나 예쁜지 그것을 어찌 잡아 먹을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십니다. 여호와를 인정하시고 그가 가라는 곳으로 가십시오. 목자가 가라는 곳으로 안가면 양은 죽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인생이 그리 복잡하고 어렵지 않습니다. 결국 내 자신입니다. 내 자신이 하늘나라 가는 것입니다. 교회 건물도 주보도 홈페이지도, 교회 바닥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완전하십니다. 완전한 것은 예수님 밖에 없고 그것이면 됩니다. 형편이 변해서가 아니라 형편은 여전하나 외부에서는 적이 들어오고 내부에서는 농사가 안되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니 우리의 발을 사슴과 같이 날렵하게 하사 높은 곳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십니다. 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 세우십니다. 이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넘치시기를 원합니다.
[20180722]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17)] 뜻을 헤아리는 믿음 (합 3:16-19) 문병호 목사
(음향 수정 완료)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주여 어찌하오리까,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무화과와 감람나무, 포도나무의 소출이 없고 외양간의 양과 소가 없어도 여호와의 이름과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라고 하면 즐겁고 기쁜 노래를 하는 자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하박국서를 읽어보면 구약의 도마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하나님 앞에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신중한 선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진지한 질문을 던진 사람이 아주 큰 기쁨을 누리는 것이 하박국서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1장, 2장에 거쳐 질문을 던지고 도마와 같이 의심하는 듯한 질문도 던지고 그리고 본문에서는 그 질문에 대한 깨달음과 답을 얻어 하나님께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이라는 이름은 매여 달리는 자입니다. 수레에 뭐가 붙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꼭 매여 질문하고 끝까지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매여 달리는 자’, '질문하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박국은 3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에는 두 질문이 나와 있습니다. 2-4절에 첫번째 질문이, 13절 부근에 두번째 질문이 제시됩니다. 그리고 이제 2장 이후로부터는 하나님의 답이 있고 이후는 3장부터 그것에 대한 하박국의 깨달음과 감사가 담겨 있습니다.
하박국이 던진 질문은 간단합니다. '왜 악인은 흥하고 의인은 고난을 당하는가?' 입니다. 우리도 쉽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당시는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잔인하게 몰살했는데 그들은 역사적으로도 아주 잔인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고난 후 이스라엘 민족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의 역사로 앗수르가 멸망되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메대와 바사 등 더 강한 민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선지자가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입니다. 요시야도 16세 때 종교개혁을 감행했으나 결국은 므깃도라는 곳에서 애굽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이 세우신 왕까지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첫번째 질문은 1장 4절입니다. —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두번째 질문은 13절입니다. —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이 두번째 질문은 왜 악인을 들어 의인을 판단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은 이해하는데 왜 악인을 들어 의인을 판단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입니다. 인간만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 인간, 직립하는 인간, 언어의 인간 등에 대한 칭호를 사용하지만, 인간은 무엇보다 질문을 던지는 인간입니다. 즉, 답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질문 가운데 자신의 능력과 무능을 판단합니다. 아이들이 엄마한테 물을 때는 그것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척도로 삼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상 고상한 질문을 던지는 자가 가장 고상한 인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보면 그 사람의 지식, 능력,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답을 몰라서 묻는 진정한 질문, 배움의 질문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밤에 찾아가서 사람이 어떻게 거듭나는지 물을 때 예수님이 사람이 어미의 태에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불로 믿어서 거듭남을 알려주십니다. 이런 질문은 참으로 우리를 발전시키는 건전한 배움의 질문입니다. 두번째 질문은 자신이 옳음을 확인해보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질문으로 자신의 철학을 정립했습니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을 다른 사람의 말을 이용해서 정립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은 악의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 입장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진리가 무엇인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므로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묻는 것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함입니다. 악의적인 질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명확하게 알고 하나님께 질문을 던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질문을 던질때는 몰라서, 배우려고 던져야 합니다. 밤에 찾아사거 니고데모와 같이 묻더라도 들려주는대로 받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에게는 먼저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이를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고’, '여호와가 일러 가라사대’ 등으로 표현됩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말씀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라고 합니다. 항상 다윗은 물었고 하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그것으로 다스립니다. 이것이 바로 신정(神政, Theocracy)입니다. 신정국가의 통치 방식입니다.그러니 그 아들 솔로몬도 일천번제를 드리면서 재판하는 지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달라고 구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비 다윗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연필 하나 볼펜 하나 사는 것도 여호와께 물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집에서 밥 짓는 것도 아이들에게 공책을 사주는 것도 그런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입니다.
2. 여호와의 비밀에 속한 것의 답을 얻기 위한 질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질문을 할 때 그것은 철저히 받아들이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답은 전부 다 비밀입니다. 그저 내 이성으로 이해되는 답은 없습니다.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구하는 질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해될만한 답을 금방 얻을 수 있어도 심오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폭과 깊이가 우리와 다르므로 우리의 이성을 무시하고 드리는 질문을 것입니다.그 질문이 하나님의 비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저도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봅니다. 진짜 몰라서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은 금방 배워 나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신의 지식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신학교 1학년 학생들이 그렇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교수에게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질문을 던질 때는 선입관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니고데모는 즉시 받아들였습니다. 사람이 모태에 다시 들어가서 육체로 다시 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불과 믿음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배우고 받아들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절망과 시기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답을 듣자마자 물동이를 던지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우물이 아니라 예수님이 갈하지 않는 생수임을 깨닫고 동네로 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질문을 던질 때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말하기 위해 하면 안됩니다.우리 성도님들도 장성하고 성숙하여 딱딱한 것을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끝없이 대들어서는 안됩니다. 한두번은 그리해도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자 베드로가 '그리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여호와의 비밀에 속한 것의 답을 얻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을 확인받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 꽃이 피는지 빗방울이 떨어지는지조차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매년 겨울을 맞지만 겨울에는 여름에 빛이 다시 올까 의심합니다. 장마철에는 햇빛이 날까 의심합니다. 겨울에는 여름에 다시 온기가 돌까 의심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운행은 일정하여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시고 사시사철 곡물을 주시고 인생을 살피십니다. 우리는 그리 마옵소서가 아니라 원대로 하옵소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질문입니다. 주여 어찌하오리까,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3.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우리는 죄인 된 것에 대한 고백
하박국은 왜 악인이 흥하고 의인은 망하느냐고 물었지만, 그 질문에는 결정적인 잘못이 하나 있습니다. 하박국은 이스라엘 사람을 의인으로 생각한 것입니다.바벨론, 앗수르 사람을 악인으로 생각하고 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과연 의인입니까? 기도하고 예배하고 제사하고 금식하면 그렇게 보이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어떻게 보면 맞는 이야기 같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너희들이 제사를 제대로 드리고 예배를 드렸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가졌는지 묻는 것입니다.— “.”(합 2:4) 이것이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입니다. 하박국은 공로와 자질로 접근합니다. 우리가 저들보다 낫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에 대해 너희도 같다고 하십니다. 그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은 정직하지 못하다고 하신 것입니다.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답은 하박국의 질문 자체를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그러했듯 말입니다. 자신의 의를 하나님 앞에 따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과연 우리가 뛰어나고 잘나고 의로워서 이웃 사람들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한데, 이웃들은 믿지 않는 자들이 경우도 없고 휴지도 함부로 버리는 것입니까? 너희야말로 정직하지 못하고 교만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답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닙니다. 흙탕물이 나는 깨끗하다고 하면 평생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스스로 흙탕물이라고 하면 새 물이 들어올 것입니다. 나는 더럽다라고 하면 새 물이 들어와서 깨끗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뛰어남은 그들의 자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질이 있어서 출애굽에서 열가지 재앙을 애굽백성에게 내려 건져주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그저 잠잠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 이후 모든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 그들은 기껏해야 불평하고 원망했지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롬 1:17)와 창세기(창 15:6)의 그 말씀이 하박국 본문에 나오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답입니다.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아 뛰어난 것이지 사랑스러워서 뛰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우리가 모여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것만이 우리를 낫게 해줍니다.우리가 뛰어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찾을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 밖에 없다는 어거스틴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뛰어남입니다.가장 고상한 인품자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가시고 빚어가신다고 고백하는 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4. 여호와를 주인으로 삼는 질문: 말씀 들으면 기도하고 기도하면 잠잠히 기다리고 순종할 때 반드시 응답하심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 2장 4절의 믿음은 같은 장 14절의 말씀에 연결됩니다. —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영광은 완전함입니다.우리는 불완전하나 여호와의 행사는 완전합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행사를 인정합니다. 바다에 가면 바닷물이 정말 많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경력, 자질, 가문, 기질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의이고 믿음입니다.더 많이 여호와께 영광을 올리는 자가 의인입니다.내가 난 사람, 든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주님의 구원하심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의로움이요 고상함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 20절은 '온 땅은 그 앞에 잠잠할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박국의 답입니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방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너희가 나쁜 것으로 하면 100배 더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기회를 주고 보호와 은혜를 베풀었는데, 이방의 돌이라도 그만큼 사랑하면 너희보다 나으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잠잠하되, 한번 택한 백성은 버리지 않으시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결론입니다.그러니 잠잠하라는 것입니다.가장 중요할 때 잠잠하라고 하십니다. 여리고성을 돌 때, 홍해를 건널 때 그렇습니다. 여리고성을 돌고 나서 마지막에 외치는 것은 공로가 아니라 감사의 기쁨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가지 말씀을 특히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로 말씀을 깊이 붙들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즐거이 듣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아멘 하며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 붙들고 기도하면 필히 이루어주시는데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지 못해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연약함을 안고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주인이 되는 질문은 그만하십시오. 여호와를 주인으로 삼는 질문을 던지십시오. 백부장의 믿음이 큽니다. 그는 주님께 오라가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합니다. 내가 주인되는 질문을 던지지 말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질문을 하십시오.여호와 하나님이 주인으로 되는 길과 삶으로 이끌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호와의 열심으로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하고 묻는 것입니다. 주님은 100% 답해 주십니다. 그것에 대해 우리는 아멘하면 됩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묻되 예 하고 순종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높은 은혜를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때리는 매가 있습니다. 매가 없이 자녀들을 교육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도 가보면 다 때립니다. 기술적으로 어떻게든 때립니다. 매를 들고 때려도 잘 때는 손을 잡고 품에 안고 잡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질문을 던질 때 단 것만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매를 드십니다. 앗수르, 바벨론, 메대의 매를 드십니다. 하나님의 매는 매섭습니다. 세계 최강국을 들어 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싸매어 주시고 낫게 하십니다. 다시 회복시켜주십니다. 지난 주 본 말씀입니다. 우리가 질문할 때 매를 드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를 자녀로서 사랑하시니 그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웃 아저씨는 매를 들지 않습니다. 말씀 들으면 기도하고, 기도하면 기다려야 합니다. —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또한 본문 장의 2절입니다. —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시라는 마음이 우리 안에도 가득합니다. 이 동네를 다니다 보면 전부 다 빚진 자 같이 보입니다. 하박국의 마음이 있습니다.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5. 구원받은 성도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백이 있을 때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는 은혜가 풍성함
우리 교회는 인근에 말씀을 전합니다. 홈페이지도 만들었습니다. 별것 아니지만 우리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전도지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가가호호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있는대로 전하려고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터도 있고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쉴 때 여기와서 쉬십시오. 아주 시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노 중에라도 긍흉를 보이십니다. 본래 긍휼은 자궁, 태라는 의미입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서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긍휼입니다. 있는 것을 보고 따져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조건을 찾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면 하나님이 베푸십니다. 저 이방민족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고 어찌보면 더 악하나 하나님은 변개치 않으십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과 언약을 맺었으므로, 구약에 280번이나 나오는 언약을 맺었으므로, 사랑해야 되므로 사랑하시는 것이며, 변개치 않는 여호와가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본문 16절은 외적인 현실이 나옵니다. 하박국이 질문한 때와 상황은 동일하니 하박국의 반응이 달라진 것입니다. 외적인 현실은 동일하나, 즉, 뼈를 썩이는 것이 들어온 것 같은 외적인 현실과 소출이 없는 내적인 현실이 여전할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가만히 있어도 기뻐야 합니다.어떤 일, 사건, 사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해도 뭔가 모르는 기쁨이 있는데 그것이 내 존재입니다.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 존재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 가운데 19절은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로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18절의 존재의 고백이 있어야 19절의 삶이 따릅니다. 그때 우리는 높은 곳으로 다니며 나의 발이 사슴과 같게 하십니다. 이 순서를 잘 알아야 합니다. 높은 곳에서 다니려고 한다고 다녀지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큰 성도입니다. 큰 일을 한다고 큰 성도가 아닙니다. 여호와를 인정하고 그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그 고백이 있으면 높은 곳에 다니는 자가 가장 큰 성도입니다.
저도 대관령에 이번에 다녀왔습니다. 양의 눈이 얼마나 예쁜지 그것을 어찌 잡아 먹을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십니다. 여호와를 인정하시고 그가 가라는 곳으로 가십시오. 목자가 가라는 곳으로 안가면 양은 죽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인생이 그리 복잡하고 어렵지 않습니다. 결국 내 자신입니다. 내 자신이 하늘나라 가는 것입니다. 교회 건물도 주보도 홈페이지도, 교회 바닥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완전하십니다. 완전한 것은 예수님 밖에 없고 그것이면 됩니다. 형편이 변해서가 아니라 형편은 여전하나 외부에서는 적이 들어오고 내부에서는 농사가 안되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니 우리의 발을 사슴과 같이 날렵하게 하사 높은 곳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십니다. 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 세우십니다. 이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넘치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