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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9]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18)] 독생자를 영접하는 믿음 (요 1:9-14)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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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9]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18)] 독생자를 영접하는 믿음 (요 1:9-14) 문병호 목사 


(요 1: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음향 수정 완료)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구원: 믿음의 실체인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

우리가 지난 주 까지는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는 제목으로 구약의 말씀을 가지고 나누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신약을 주제로 약 20주간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는 주제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책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말씀에 믿음이라는 것을 넣으면 온전한 은혜가 있습니다. 창조, 은혜, 구속, 전적은혜, 전적타락, 성도의 견인, 재림, 영원한 천국의 삶에 대해 믿음으로 보면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신약은 시기의 문제라기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성육신하신 시점부터입니다. 본문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아들로 잉태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나신 것이 시작이 아니라 잉태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잉태로부터 시작되듯 말입니다. 

세대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지식도 많습니다만 아주 그릇된 사상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시대에는 행위로 구원을 얻고 신약시대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은혜로 살다가 재림하실 때는 전혀 새로운 은혜가 역사하고 새로운 교회가 생긴다고 하는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시기별로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단절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시대와 상관없이 일관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갑니다. 구약의 사람들도 (창 15:6; 합 2:4; 호 6:6)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성경은 말해줍니다. 오직 믿음으로, 여호와의 은혜와 자비로, 여호와를 온전히 아는 지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두 구약의 인물입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구원에 이르렀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9절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고 합니다. 빛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이 빛은 그냥 빛이 아닌 참 빛입니다. 또한 각 사람에게 왔다고 합니다. 구약이라면 이스라엘에게 임했다고 하겠지만, '각 사람에게'라고 합니다. 이것은 각자의 영혼의 구원을 말합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 각자에게 빛을 비추며 오신 것입니다. 사실 믿음의 모양은 얼굴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제가 밋밋하게 생겨도 세상 어딜 가도 제가 공부한 곳으로 가면 사람들이 저를 알아봅니다. 그러나 신앙의 모양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딱 한가지는 동일한데 바로 믿음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그 영접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삶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 구원입니다. 삶의 양식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가 나를 쫓아내고 주인으로 앉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되 그리스도가 함께 주인으로 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몸이 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신랑이 들어왔다고 신부가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말씀이자 빛인 그가, 참 빛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어둠과 흑암 가운데 있던 우리가 그 빛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빛과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요? —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하나님의 영광은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그 영광의 광채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느껴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아멘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느껴야 합니다. 물질을 보고 사건을 보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본체의 형상인 그분을 보고 느껴야 합니다. 본체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을 안 자도 보고 느낀 자도 없는데, 그 본체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빛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빛이라고 하면 세상의 빛과 혼동되므로 참 빛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빛이 무엇인가요? 빛이 들어오면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길을 알게 됩니다. 나그네는 태양이 떠야 길을 나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입니다. 그래서 빛입니다. 그리고 빛이 임해야 만물이 소생합니다. 빛이 있어야 소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래서 생명이십니다. 빛이 있어야 우리가 진리를 압니다. 진리를 알면 살아납니다. 이번에 태국에 기쁜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들을 구조한 사람들은 물길을 알았기에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 물길을 알았으면 아이들을 구조할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빛은 지하 만미터까지라도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빛의 무서움입니다. 어둠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자리에 있을 뿐이지만, 빛은 치고 들어갑니다. 진리가 없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종살이하고 사기꾼들 밑에서 고생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그저 우리에게 들어온 생명인데 그러려면 옛것을 죽여야 합니다. 의사들이 종기를 두고 주사를 놓지 않습니다. 잘라내고 처치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참 빛이요 부활과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 때 똑바로 길만 안다면 무식해도 연약해도 다른 사람들보다 잘 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길을 잘 모릅니다. 어떻습니까? 얼마나 많이 실수하고 그른길로 갑니까?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도 이후의 삶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길로 가십시오. 어떤 다른 책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서 길을 찾으면 늦게 가는 것 같아도 첩경을 내실 것입니다. 기도하면 지름길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빛입니다. 세상의 것은 일시적으로 좋아도, 여름에 시원한 것을 먹으면 곧 갈증이 배가되듯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생명력은 갈수록 즐거움과 생명이 더 커지고 용솟음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빛이 어떤 빛이냐, 세상 만물을 지은 빛입니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본문 10절은 말합니다. 그 빛으로 만물이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세상 만물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습니다. 그 창조의 빛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빛으로 세상을 다 지으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빛이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나면 우리는 하늘도 나무도 땅도 압니다. 사람도 알고 기업도 압니다. 물론 강단에서 이렇게 저렇게 기업하라고 말하지 않지만, 궁극적인 지식은 예수에게 있습니다. 예수가 만물의 원리입니다. 모든 운행을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오신 빛입니다. 

3. 영접: 우리로부터 유래하지 않은, 불가항력적인 은혜

그런데 그 빛이 이 땅에 오셨으되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타락 이전 같으면 만물이 영접했을 것입니다. 지으신대로 찬양하는 것, 에덴 동산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타락하니 예수를 거절합니다. 뭔가 삐그덕거리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릴 때 보면 자랄수록 약간 삐그덕하는걸 즐거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은 질서대로 모든 것이 유지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뭔가 튀고 꺾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잠잠히 화평 가운데 둔 것에 대해서는 거역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거역할까요? 그것은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불어넣으신 생기(창 2:7)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것은 예수가 계시다는 것이고 예수가 계시다는 것은 우리가 빛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모르면 우리가 죽은 것이요 흑암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이 땅에 오셨는데, 그를 영접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4-15) 인터넷을 보다가 잔인해지는 마음이 들면 빠져나가십시오. 저 사람 잘됐다,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들면 빠져나가십시오. 월드컵도 보면서 불란서를 욕합니까? 어느 젊은 선수가 까불고 그런 것이 있기는 해도 불란서 나라 자체를 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국에서 공부할 때도 월드컵이었는데, 그 때 수리하러 온 분은 분명히 스코틀랜드 분인데 잉글랜드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잉글랜드 외에 모든 다른 국가를 응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발씻겨 주고 먹여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뭘 못했다고 우리가 그를 죽입니까? 우리가 생명의 주를 죽였습니다. 뭔가 한 사람을 미워해야 한 사람을 좋아할 줄 아는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참 빛이 되었습니다. 빛은 한쪽에 나눈다고 해도 다른 쪽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자식사랑이 대단해도 우리는 우리 자식만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은 거라사의 광인도, 세리도, 창기도, 사렙다 여인도 사랑할 수 있는 나누어도 갈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 빛입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 성도님들은 잘 아십시오. 저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내 사랑 뺏겼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참”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하나님께 쓰입니다. 인간은 전부 고갈되고 거짓됩니다. 기름 하나도 참기름을 먹는데 우리가 참 빛을 만나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의 불빛을 쫓아다니지 말고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참 빛을 쫓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뛰어노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세상은 인위적인 거짓 빛을 쫓아가더라도 작은 것 하나주고 만가지 훔쳐내려고 하는 그 악한 세상의 사탄의 빛이 아닌,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그저 주시기만 하시는 참 빛을 쫓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내 마음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어제 나에게 많이 주셨으니 내일 주시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참 빛은 고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참 빛입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이 빛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거역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고 끝내 못박아 죽였지만,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바로 영접하는 영을 주신 것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 말로 영접은 거창한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영접은 헬라어로 파라람바노, 즉 같이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 쪽에서 준비해서 하나님을 맞이하는 것은 처음부터 안되는 말입니다. 어느 인간도 내가 준비해서 하나님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잘 준비해서 내가 준비가 되니 하나님이 오셨다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요새 많이 더우니 그늘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영접입니다. 그늘은 나를 잡아당기고 나는 그것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영접은 누리는 것입니다. 겨울에 태양빛이 있는 양지 바른 곳에 우리가 옹기종기 모입니다. 이 때 내가 준비해서 태양의 빛을 당겼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늘이, 빛이 거기 있으니 내가 끌려가는 것입니다. 가지 않을 수 없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이고 신음 뿐입니다. 죽었다고 고민하고 허탄하고 허무한 가운데 있다가 생명의 빛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도피처입니다. 영접이 바로 이것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은혜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기온이 25도 30도는 몰라도 40도가 되면 거역할 수 없습니다. 그늘이 있으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가항력적인 우리의 영접입니다. 내가 영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어떤 사람은 늦게 들어옵니다. 그래도 한 데나리온을 주십니다. 어릴 때 믿은 사람도 있고 죽기 전에 믿는 사람도 있지만, 한 데나리온, 같은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새 새벽예배 때 골로새서를 보지만 이것이 가장 귀하게 다가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이신데, 그 예수를 영접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품 속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영접입니다. 영접은 그래서 우리가 가장 힘들 때 한 것입니다. 가장 힘들 때 영접한 것입니다. 가장 더울 때 그늘로 들어가고 가장 추울 때 불가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바로 영접의 의미입니다. 

4. 영접과 신앙의 정서

영접은 지식으로만 맞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접은 그 안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그늘은 시원하다고 할 때 그것은 영접이 아닙니다. 열사의 더위에 그늘 안에 들어가봐야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이고 믿음입니다. 그 그늘에 들어가보면 믿어집니다. 겨울에 불가로 나아가면 믿어집니다. 여호와의 임재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호와의 임재가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계시고 역사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살아계시는 분, 바로 그 자체의 인격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살아계시는 하나님,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느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느끼는 것, 정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적인 느낌이 아닙니다. 내 감정 조심해야 합니다. 사탄이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 내 감정입니다. 여기서 말한 정서에 대해 칼빈,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드가 말합니다. 이 거장들이 이런 상태를 뭐라고 '신앙의 정서' 영어로 ‘religious affection'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늘 안에서, 겉으로 사진을 찍으면 안나타나지만, 내 마음에 넘치는 것, 그것을 신앙의 정서라고 합니다. 빛이 임하면 안보이는데 물이 따뜻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의 정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면 마음에 화평과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넘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잠잠해집니다. 조용히 여호와의 행사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정서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홍해 건널 때, 여리고 돌 때 잠잠한 것은 여호와를 영접한 것입니다. 물이 잠잠히 보여도 뜨겁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입니다. 

5. 영접: 자녀된 권세를 잘 누릴 때 열매 맺게 하시고 상급 주심

또한 영접은 누리는 것입니다. 시원함과 뜨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번에 강원도에 가보니 고랭지 배추가 맛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맛있는 이유는 일교차가 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추위도 누리고 더위도 누리면 자라감이 있습니다. 성도의 자라감입니다. 이것이 영접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시원하게도 했다가 따뜻하게도 하다가 잘 익은 열매가 되어 맛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인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권세는 자녀이자 상속자가 되는 것이요, 무엇이든 아버지께 구하면 아버지가 들으시는 것입니다. 양자의 영을 주신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영을 주신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서늘하고 따뜻한 정서가 있거든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잠잠히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3-14) 이것이 바로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영접한 것으로 이제는 절대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너무 필요하니 그늘 밑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성경은 전부 우리가 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감사한 것입니다. 다 하나님이 하시고는 우리에게 했다고 하시고 그리고 상급 주십니다. 여름에 더워서 그늘에 들어간 것이 어찌 인간의 공로입니까? 그늘되신 하나님의 공로이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착하다고 하시고 우리를 상주십니다. 탕자가 들어온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큰일을 한 것처럼 집으로 돌아온 것에 상급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추워서 불가에 갔는데 잘했다고 칭찬하시고 상급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밥 잘먹었다고 아이들을 칭찬하듯 말입니다. 혈통으로 말하면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육정으로 하면 모두 세상 것을 쫓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뜻으로 한다면 자기 삽을 들고 자기 무덤을 파게 됩니다. 나쁜 사람에게 유혹당해 재산을 탕진하면 안타까워하지만 우리가 모두 그런 인생입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일 1:13)라고 합니다. 요한일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요일 1:6)고 합니다. 동참도 있고 교제도 있지만 이 단어가 참 좋습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거의 잘 나오지 않습니다. 사귐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더울 때는 그늘이 필요하고 추울때 불이 필요하다면 하나님께도 은혜와 진리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은혜만 강조하면 광신, 기복주의, 신비주의가 됩니다. 진리만 강조하면 기계같은 냉랭한 신앙이 됩니다. 남을 판단하고 죽이는 것만 합니다. 그런데 은혜와 진리가 함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사귐이 있는 것입니다. 자녀가 곁길로 가면 하나님은 진리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것이 좋습니다. 저는 누가 저에게 이러저러하게 살라고, 기도하라고 말해주면 좋겠습니다. 진리입니다. 그러나 간혹 제가 기고만장하게 행동할 때 사랑해라, 용서해라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귐입니다. 

영접이라는 것은 내가 물에 뛰어들어가는 것입니다. 더워서 들어갈 때 그것은 그러나 내 공로가 아닙니다.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입니다. 영접을 내 공로로 자랑하면 안됩니다. 영접하면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누리면 자랍니다. 햇빛과 그늘을 누릴 때 맛있는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가 지금 하는 것이 말씀과 기도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붕의 박처럼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다 영접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냥 있으면 죽는데, 그늘, 여호와의 임재가 있어서 내가 그리로 뛰어들어갑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영접해서 사는 은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