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12][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20)] 믿음으로 이르는 믿음 (롬 1:16-17) 문병호 목사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녹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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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음: 하나님의 의가 능력으로 작용하는 말씀
오늘 본문 말씀은 가히 우리 개신교가 있게 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가 이 로마서 1장 16절, 17절에 거치는 말씀을 들고 1517년 종교개혁을 주창했습니다. 본문은 복음, 믿음, 하나님의 의 등의 단어들이 주어로 나타납니다. 세상에는 믿음을 주제로 한 그런 학문이 없습니다. 믿음을 따지고 추구하고 수단으로 하는 학문은 없습니다. 그나마 교회 안에 믿음에 대한 강조가 있습니다. 칸트라는 철학자가 나오기 전 믿음은 하나님의 도구로 이해가 됐는데, 칸트가 믿음과 지식을 분리시킴으로서 믿음은 그 대상이 모르는 것에 대한 것으로 제한되어 부조리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이 지식과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서구 기독교가 몰락하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과연 믿음은 지식이 없이 내 마음을 쫓아 무작정 믿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야말로 가장 객관적이고 불변하는 지식을 대상으로 하는데 그것은 복음입니다. 믿음은 복음이 아니고서야 받아들여지지 않고 복음은 믿음이 없는 세계에서는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지조차 않습니다. 믿음과 복음은 함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복음은 무색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정확히 복음에 역사합니다.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능력으로 작용하는 말씀이라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 의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것을 빼앗고 혼내는 것이 아닌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고 그저 값없이 구원해주시는 의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복음의 능력이 믿음으로 역사한다는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이 진리는 갑자기 로마서 1장 17절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인정하신 것을 말해주며 하박국 2장 4절에도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보신다고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선조들이 잘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단어가 상식이지만, 처음 성경 번역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떤 신학자도 할 수 없는 최고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을 카타콤이라는 동굴에서 만들어 낸 것을 보면, 우리 성경도 개역개정으로 바꼈지만, 초창기부터 번역이 아주 멋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복음을 잘 번역했습니다. 복음은 헬라어로는 유한겔리온으로 좋은 소리, 소식, 복된 말씀 정도의 단어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조님들이 그것을 복음으로 잘 번역했습니다. 언약이라는 말도 잘 번역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번역한 단어 중에 하나가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에서 언약을 맺을 때 들려주시는데, 이것이 본래 약속이라는 뜻인데, '말씀 언(言)'자를 붙여서 이를 언약으로 번역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하여 약속하시는 것으로 참 번역이 잘된 것입니다. 로고스라는 단어 역시 태초에 말씀이 계시는 것으로 잘 번역했습니다.
2. 복음: 인간의 공로에 대한 보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오직 믿음으로 조건 없이 주시는 복된 소식
복음이라는 단어를 한 번 정의해본다면 "이 땅에 오신 생명의 말씀의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두 주 간 예수님이참 빛으로 이땅에 오셨고 또한 그 분은 말씀이라고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이 바로 이 땅에 오신 구원의 말씀의 소리임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 참 빛의 소리가 복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혀로는 맛을 보고 신체로 접촉하는 등의 오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감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이 오감에 휘둘립니다. 어떤 사람은 특정한 감각에 더 치우쳐 그것을 추구합니다. 모든 인류의 문명은 정신문화의 산물이라고 해도 잘 보면 이 오감이 움직입니다. 21세기 지금, 한국의 방송을 보십시오. 텔레비전만 보면 뭐든지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오감에 사로잡힌 것이며 이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감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오감으로 알 수도 없습니다. 복음은 오직 영으로만 반응합니다. 우리 영혼에 반응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 영혼의 기능 중 믿음이라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믿음으로만 반응합니다. 보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이 혹은 듣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 복음을 잘 듣지 않습니다. 영이 깨어 있는 사람만이 복음을 듣습니다. 복음은 영원하고 불멸합니다. 이것을 담는 그릇은 영원하고 불멸한 영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말씀을 담으면 새 하늘, 새 땅에 가고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버리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지고 가는 유일한 것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의 말처럼 말씀이 내 소유, 나의 힘입니다. 그것을 담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입니다.(벧전 4:14; 갈 2:20; 요일 3:23; 4:14) 우리는 하나님이 성령을 주셨으므로 이 영으로 반응합니다. 성령을 받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반응하는데 그렇게 해서 구원에 이르면 그것이 복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다섯가지 인간의 감각을 만족시키면 부끄러움이 없는데 복음은 영혼의 것에 대해 말씀하시므로 육체의 것과 부딪힙니다. 그래서 복음이 부끄럽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 학문의 학회에 가서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고 하면 비웃음을 당합니다. 열심히 인간이 추구하고 쌓아야 얻는 것이 세상의 학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육적인 사람에게는 미련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 16절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루터를 움직인 것입니다. 루터는 성경읽기보다 고행을 많이 했습니다. 그 고행으로 천국에 가서 상급을 받을 줄 알았는데,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들어가서 성경을 읽다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걸린 것입니다. 중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전통을 높이고 예수를 부끄러워하고 사제를 높이던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루터가 붙들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이후 말씀을 통해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3. 복음: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내어 주시는 것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입니다. 이 복음은 오직 성령을 받은 영의 사람에게만 받아들여집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복음을 자랑합니다. 세상은 미련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복음을 자랑합니다.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사도 바울은 그동안 세상의 지식, 바리새 학파의 지식을 위해 살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에는 예수를 제외한 것으로 아무 것도 알고자 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의 소욕으로 살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면 제일 먼저 오는 것은 세상 것이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세상이 가장 앞자리에 있었다면 세상 것은 이제 성령을 받으면 뒷자리에 가게 됩니다. 하나님만 보이고 십자가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영이 임하면 그렇습니다. 영은 영을, 신령한 것을 분별하고 깊은 것을 통찰합니다.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13) 우리는 이 지식을 첫번째 지식, 근본지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첫번째 지식은 본문의 말씀,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으로 즐거워하고 열매 맺고 소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지식, 근본 지식입니다. —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 1:9);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 1:7)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요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복음은 복된 소식이 아닙니다. 구약을 읽을 때도, 오실 예수님을 바라봐야 복음이 되며, 신약도 오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아멘이 되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오실 것을 이사야는 처녀에게 잉태될 것과 온갖 고난을 당하고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화목 제물로 드려질 것을,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닌 오실 예수가 성전이요, 그 품에 안고 품에 거하는 것이 장막절이요 초막절임을, 시편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라고 고백했고 그가 발등상에서 우리를 다스리신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는 그 분이 다윗의 주가 되신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이 복음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지지난 주에는 참 빛으로 영접했고 지난 주에는 말씀으로 영접했음을 봤는데 오늘은 그것이 바로 복음임을 보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복음을 만나게 됩니까? 언제 우리가 의사를 찾아갑니까? 어릴 때 저는 많이 아팠습니다. 음식을 가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화를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너무 아파서 마루를 기어 내려가 병원에 가서 주사를 놔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큰 병 나보면 압니다. 주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언제 우리가 복음을 영접하냐, 그것은 우리가 가장 힘들고 병들고 부패했을 때입니다. 바울은 가장 혈기가 충천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차세대 지도자로 추종을 받아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기 위해 다메섹, 지금의 시리아 지방까지 가는 길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의 참 빛, 말씀의 빛이 그를 고꾸러뜨리고 눈을 멀게 했습니다. 세상 것 잘 보는 눈을 닫아버리고 성령의 눈을 개안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불과 사흘만에 눈의 비늘이 벗겨지니 다메섹에 들어가서 사람을 잡는 것이 아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영접하는 것은 내 공로가 아닙니다. 너무 아파서 의지할 곳이 없으니, 열두해 혈루병 여인이, 사마리아 여인이, 맹인이, 앉은뱅이가 주님을 영접하듯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아무도 세상의 빛을 쫓아가서 하늘에 올라가서 끌어내려 빛을 받는 자가 없습니다. 빛이 나무까지 와줍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 계시는 바로 예수님이 드러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참 빛을 말씀을 이 더울 때 구름기둥, 추울 때 불기둥으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셔서 우리가 그 속에 잠기는 것입니다. 빛을 찾아서 못올라갑니다. 지금 나사에서 세계적인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태양 속으로 우주선을 쏘아 들어가는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태양 빛이 우리에게 올 뿐이지 우리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복음도 그렇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4. 복음: 살아 있고 즉시 능력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그런데 복음의 조건은 단 한가지 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도 섭리도 주장도 운행도 통치도 하시지만, 가장 큰 일은 인간을 회복시키셔서 찬양의 도구로 삼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역사요, 그 구원의 능력이 복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므로 영생을 얻게 합니다. 복음을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됩니다.(롬 8:9, 17; 롬 1:6) 복음을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것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복음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계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형제라 불리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살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을 주장해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그가 주장해 주십니다. 이것이 구원을 주시는 주님의 능력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일부를 치료하거나 일부를 떼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대학에 와서 안암동에 있었는데 밥을 먹고 기숙사까지 걸어보자고 해서 신설동, 종로 등지로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낙원상가도 가게 됩니다. 낙원상가에 가니 낙원이 아닙니다. 얼마나 낙원상가가 낙원이 아니고 복잡하고 그 밑에 순대 같은 것도 팔고 하던지요.
복음은 능력입니다. 살아있는 능력입니다. 명목이 아닙니다. 머리 속에 지식과 이론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빛은 능력입니다. 빛이 임하면 우리 물이 따뜻해지듯 우리 마음이 변합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가 변합니다. 즐거워집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우리를 소생시킵니다. 바로 복음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 이론처럼 적용해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면 말씀이 역사해서 즉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믿고 인정하고 구원받는 것을 동시에 다하는 것입니다. 먼저 연구해서 이론으로 정립해서 교회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으면 믿음이 바로 들어옵니다.(엡 2:8) 교회 다니는데 믿음 없다고 하면 안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믿음을 선물로 주심으로 믿음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아멘하는데, 그것이 복음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 일이 오늘 나타난 것입니다. 루터가 평생 연구하고 몸부림쳐도 발견하지 못한 것을 이 말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사제가 근거도 없는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것이고 예수 십자가의 그것이 우리에게 복된 것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루터입니다. 이제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능력을 받았으므로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루터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5. 믿음으로 믿음의 증거를 삼음
믿음을 정확히 가져야 합니다. 뜨뜻 미지근하게 신앙생활 해서는 안됩니다. 즉, 괜히 의심하고 고민하지 말고 나는 성령의 사람이요 그 역사로 믿음을 선물로 받았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가지 인간의 감각은 변덕이 죽끓듯 합니다. 그러나 영의 것은 불변합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정서적으로 힘들고 갈등이 있어도 내 영은 잠잠함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내 안에는 믿음이 있음을 믿어야 성도입니다. 보는 것, 느끼는 것에 끌려가면 안됩니다. 육체를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육체와 영혼을 모두 주관하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저도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저는 연약하고 흠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여 믿음으로 복음을 받으니 저를 통해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인데 그것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하면 우리는 의례히 잘못하면 혼내고 잘하면 상주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의 의는 (롬 3:21-22, 24) 용서하고 참아 주시는 의, 그저 값없이 구원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의입니다. 그래서 17절에 설명된 하나님의 의는 아들을 주셔서 아들을 믿는 자마다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의를 자랑해서 아버지가 영광받도록 하는 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주인이 재산을 맡겨 놓았더나 팔아서라도 주인을 칭찬받게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은혜입니다. 나에게서 찾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의는 도표를 그리고 평가를 해서 상을 주고 벌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루터가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일하면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것을 의로 생각해왔던 그에게, 갚아주는 것이 아닌 그저 주시는 선물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요새 기독교강요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기도를 했는데 기도를 하면서 이것을 번역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회개 부분이 나오는데 얼마나 긴지 죽겠습니다. 라틴어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칼빈이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징벌과 징계가 있는데 징벌은 택함받지 않은 자에게 보복하는 것이요 징계는 택함 받은 백성에게 돌이키게 하시려고 주시는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잠시 우리에게 징계는 있을지언정 영원한 징벌은 없습니다. 이 징계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듬고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의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우리의 공로가 없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 믿음의 증거를 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잘사는 것 등을 증거로 댑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살면 믿음 있고 아니면 믿음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믿는 자녀를 잘 살게 하시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릅니다. 믿음으로 믿음의 증거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이 들거든 할 수 없습니다. 믿으십시오. 지금 선포되는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세계가 열립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티끌만한 것도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릅니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평균적인 것, 경험적인 것을 이야기합니다. 철학은 평균인들의 보편적 상식, 경험을 정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정의는 기적입니다. 우리가 믿어 구원에 이른 것은 다 기적입니다. 루터는 그렇게 인과관계를 찾으려 애썼으나 인과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베푸셨는데, 그러나 내 부석거림을 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누가 그 작은 떡과 물고기로 되었다고 합니까? 그러나 부석거림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기적입니다. 우리는 부석거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곧 기적입니다.
[20180812][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20)] 믿음으로 이르는 믿음 (롬 1:16-17) 문병호 목사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녹취록>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1. 복음: 하나님의 의가 능력으로 작용하는 말씀
오늘 본문 말씀은 가히 우리 개신교가 있게 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가 이 로마서 1장 16절, 17절에 거치는 말씀을 들고 1517년 종교개혁을 주창했습니다. 본문은 복음, 믿음, 하나님의 의 등의 단어들이 주어로 나타납니다. 세상에는 믿음을 주제로 한 그런 학문이 없습니다. 믿음을 따지고 추구하고 수단으로 하는 학문은 없습니다. 그나마 교회 안에 믿음에 대한 강조가 있습니다. 칸트라는 철학자가 나오기 전 믿음은 하나님의 도구로 이해가 됐는데, 칸트가 믿음과 지식을 분리시킴으로서 믿음은 그 대상이 모르는 것에 대한 것으로 제한되어 부조리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이 지식과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서구 기독교가 몰락하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과연 믿음은 지식이 없이 내 마음을 쫓아 무작정 믿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야말로 가장 객관적이고 불변하는 지식을 대상으로 하는데 그것은 복음입니다. 믿음은 복음이 아니고서야 받아들여지지 않고 복음은 믿음이 없는 세계에서는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지조차 않습니다. 믿음과 복음은 함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복음은 무색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정확히 복음에 역사합니다.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능력으로 작용하는 말씀이라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 의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것을 빼앗고 혼내는 것이 아닌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고 그저 값없이 구원해주시는 의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복음의 능력이 믿음으로 역사한다는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이 진리는 갑자기 로마서 1장 17절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인정하신 것을 말해주며 하박국 2장 4절에도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보신다고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선조들이 잘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단어가 상식이지만, 처음 성경 번역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떤 신학자도 할 수 없는 최고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을 카타콤이라는 동굴에서 만들어 낸 것을 보면, 우리 성경도 개역개정으로 바꼈지만, 초창기부터 번역이 아주 멋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복음을 잘 번역했습니다. 복음은 헬라어로는 유한겔리온으로 좋은 소리, 소식, 복된 말씀 정도의 단어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조님들이 그것을 복음으로 잘 번역했습니다. 언약이라는 말도 잘 번역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번역한 단어 중에 하나가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에서 언약을 맺을 때 들려주시는데, 이것이 본래 약속이라는 뜻인데, '말씀 언(言)'자를 붙여서 이를 언약으로 번역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하여 약속하시는 것으로 참 번역이 잘된 것입니다. 로고스라는 단어 역시 태초에 말씀이 계시는 것으로 잘 번역했습니다.
2. 복음: 인간의 공로에 대한 보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오직 믿음으로 조건 없이 주시는 복된 소식
복음이라는 단어를 한 번 정의해본다면 "이 땅에 오신 생명의 말씀의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두 주 간 예수님이참 빛으로 이땅에 오셨고 또한 그 분은 말씀이라고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이 바로 이 땅에 오신 구원의 말씀의 소리임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 참 빛의 소리가 복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혀로는 맛을 보고 신체로 접촉하는 등의 오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감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이 오감에 휘둘립니다. 어떤 사람은 특정한 감각에 더 치우쳐 그것을 추구합니다. 모든 인류의 문명은 정신문화의 산물이라고 해도 잘 보면 이 오감이 움직입니다. 21세기 지금, 한국의 방송을 보십시오. 텔레비전만 보면 뭐든지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오감에 사로잡힌 것이며 이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감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오감으로 알 수도 없습니다. 복음은 오직 영으로만 반응합니다. 우리 영혼에 반응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 영혼의 기능 중 믿음이라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믿음으로만 반응합니다. 보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이 혹은 듣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 복음을 잘 듣지 않습니다. 영이 깨어 있는 사람만이 복음을 듣습니다. 복음은 영원하고 불멸합니다. 이것을 담는 그릇은 영원하고 불멸한 영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말씀을 담으면 새 하늘, 새 땅에 가고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버리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지고 가는 유일한 것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의 말처럼 말씀이 내 소유, 나의 힘입니다. 그것을 담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입니다.(벧전 4:14; 갈 2:20; 요일 3:23; 4:14) 우리는 하나님이 성령을 주셨으므로 이 영으로 반응합니다. 성령을 받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반응하는데 그렇게 해서 구원에 이르면 그것이 복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다섯가지 인간의 감각을 만족시키면 부끄러움이 없는데 복음은 영혼의 것에 대해 말씀하시므로 육체의 것과 부딪힙니다. 그래서 복음이 부끄럽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 학문의 학회에 가서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고 하면 비웃음을 당합니다. 열심히 인간이 추구하고 쌓아야 얻는 것이 세상의 학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육적인 사람에게는 미련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 16절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루터를 움직인 것입니다. 루터는 성경읽기보다 고행을 많이 했습니다. 그 고행으로 천국에 가서 상급을 받을 줄 알았는데,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들어가서 성경을 읽다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걸린 것입니다. 중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전통을 높이고 예수를 부끄러워하고 사제를 높이던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루터가 붙들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이후 말씀을 통해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3. 복음: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내어 주시는 것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입니다. 이 복음은 오직 성령을 받은 영의 사람에게만 받아들여집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복음을 자랑합니다. 세상은 미련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복음을 자랑합니다.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사도 바울은 그동안 세상의 지식, 바리새 학파의 지식을 위해 살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에는 예수를 제외한 것으로 아무 것도 알고자 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의 소욕으로 살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면 제일 먼저 오는 것은 세상 것이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세상이 가장 앞자리에 있었다면 세상 것은 이제 성령을 받으면 뒷자리에 가게 됩니다. 하나님만 보이고 십자가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영이 임하면 그렇습니다. 영은 영을, 신령한 것을 분별하고 깊은 것을 통찰합니다.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13) 우리는 이 지식을 첫번째 지식, 근본지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첫번째 지식은 본문의 말씀,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으로 즐거워하고 열매 맺고 소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지식, 근본 지식입니다. —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 1:9);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 1:7)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요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복음은 복된 소식이 아닙니다. 구약을 읽을 때도, 오실 예수님을 바라봐야 복음이 되며, 신약도 오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아멘이 되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오실 것을 이사야는 처녀에게 잉태될 것과 온갖 고난을 당하고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화목 제물로 드려질 것을,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닌 오실 예수가 성전이요, 그 품에 안고 품에 거하는 것이 장막절이요 초막절임을, 시편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라고 고백했고 그가 발등상에서 우리를 다스리신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는 그 분이 다윗의 주가 되신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이 복음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지지난 주에는 참 빛으로 영접했고 지난 주에는 말씀으로 영접했음을 봤는데 오늘은 그것이 바로 복음임을 보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복음을 만나게 됩니까? 언제 우리가 의사를 찾아갑니까? 어릴 때 저는 많이 아팠습니다. 음식을 가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화를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너무 아파서 마루를 기어 내려가 병원에 가서 주사를 놔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큰 병 나보면 압니다. 주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언제 우리가 복음을 영접하냐, 그것은 우리가 가장 힘들고 병들고 부패했을 때입니다. 바울은 가장 혈기가 충천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차세대 지도자로 추종을 받아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기 위해 다메섹, 지금의 시리아 지방까지 가는 길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의 참 빛, 말씀의 빛이 그를 고꾸러뜨리고 눈을 멀게 했습니다. 세상 것 잘 보는 눈을 닫아버리고 성령의 눈을 개안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불과 사흘만에 눈의 비늘이 벗겨지니 다메섹에 들어가서 사람을 잡는 것이 아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영접하는 것은 내 공로가 아닙니다. 너무 아파서 의지할 곳이 없으니, 열두해 혈루병 여인이, 사마리아 여인이, 맹인이, 앉은뱅이가 주님을 영접하듯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아무도 세상의 빛을 쫓아가서 하늘에 올라가서 끌어내려 빛을 받는 자가 없습니다. 빛이 나무까지 와줍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 계시는 바로 예수님이 드러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참 빛을 말씀을 이 더울 때 구름기둥, 추울 때 불기둥으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셔서 우리가 그 속에 잠기는 것입니다. 빛을 찾아서 못올라갑니다. 지금 나사에서 세계적인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태양 속으로 우주선을 쏘아 들어가는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태양 빛이 우리에게 올 뿐이지 우리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복음도 그렇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4. 복음: 살아 있고 즉시 능력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그런데 복음의 조건은 단 한가지 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도 섭리도 주장도 운행도 통치도 하시지만, 가장 큰 일은 인간을 회복시키셔서 찬양의 도구로 삼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역사요, 그 구원의 능력이 복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므로 영생을 얻게 합니다. 복음을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됩니다.(롬 8:9, 17; 롬 1:6) 복음을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것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복음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계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형제라 불리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살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을 주장해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그가 주장해 주십니다. 이것이 구원을 주시는 주님의 능력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일부를 치료하거나 일부를 떼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대학에 와서 안암동에 있었는데 밥을 먹고 기숙사까지 걸어보자고 해서 신설동, 종로 등지로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낙원상가도 가게 됩니다. 낙원상가에 가니 낙원이 아닙니다. 얼마나 낙원상가가 낙원이 아니고 복잡하고 그 밑에 순대 같은 것도 팔고 하던지요.
복음은 능력입니다. 살아있는 능력입니다. 명목이 아닙니다. 머리 속에 지식과 이론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빛은 능력입니다. 빛이 임하면 우리 물이 따뜻해지듯 우리 마음이 변합니다.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가 변합니다. 즐거워집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우리를 소생시킵니다. 바로 복음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 이론처럼 적용해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면 말씀이 역사해서 즉시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믿고 인정하고 구원받는 것을 동시에 다하는 것입니다. 먼저 연구해서 이론으로 정립해서 교회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으면 믿음이 바로 들어옵니다.(엡 2:8) 교회 다니는데 믿음 없다고 하면 안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믿음을 선물로 주심으로 믿음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아멘하는데, 그것이 복음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 일이 오늘 나타난 것입니다. 루터가 평생 연구하고 몸부림쳐도 발견하지 못한 것을 이 말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사제가 근거도 없는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것이고 예수 십자가의 그것이 우리에게 복된 것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루터입니다. 이제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능력을 받았으므로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루터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5. 믿음으로 믿음의 증거를 삼음
믿음을 정확히 가져야 합니다. 뜨뜻 미지근하게 신앙생활 해서는 안됩니다. 즉, 괜히 의심하고 고민하지 말고 나는 성령의 사람이요 그 역사로 믿음을 선물로 받았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가지 인간의 감각은 변덕이 죽끓듯 합니다. 그러나 영의 것은 불변합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정서적으로 힘들고 갈등이 있어도 내 영은 잠잠함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내 안에는 믿음이 있음을 믿어야 성도입니다. 보는 것, 느끼는 것에 끌려가면 안됩니다. 육체를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육체와 영혼을 모두 주관하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저도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저는 연약하고 흠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여 믿음으로 복음을 받으니 저를 통해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인데 그것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하면 우리는 의례히 잘못하면 혼내고 잘하면 상주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의 의는 (롬 3:21-22, 24) 용서하고 참아 주시는 의, 그저 값없이 구원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의입니다. 그래서 17절에 설명된 하나님의 의는 아들을 주셔서 아들을 믿는 자마다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의를 자랑해서 아버지가 영광받도록 하는 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주인이 재산을 맡겨 놓았더나 팔아서라도 주인을 칭찬받게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은혜입니다. 나에게서 찾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의는 도표를 그리고 평가를 해서 상을 주고 벌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루터가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일하면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것을 의로 생각해왔던 그에게, 갚아주는 것이 아닌 그저 주시는 선물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요새 기독교강요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기도를 했는데 기도를 하면서 이것을 번역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회개 부분이 나오는데 얼마나 긴지 죽겠습니다. 라틴어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칼빈이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징벌과 징계가 있는데 징벌은 택함받지 않은 자에게 보복하는 것이요 징계는 택함 받은 백성에게 돌이키게 하시려고 주시는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잠시 우리에게 징계는 있을지언정 영원한 징벌은 없습니다. 이 징계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듬고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의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우리의 공로가 없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 믿음의 증거를 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잘사는 것 등을 증거로 댑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살면 믿음 있고 아니면 믿음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믿는 자녀를 잘 살게 하시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릅니다. 믿음으로 믿음의 증거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이 들거든 할 수 없습니다. 믿으십시오. 지금 선포되는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세계가 열립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티끌만한 것도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릅니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평균적인 것, 경험적인 것을 이야기합니다. 철학은 평균인들의 보편적 상식, 경험을 정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정의는 기적입니다. 우리가 믿어 구원에 이른 것은 다 기적입니다. 루터는 그렇게 인과관계를 찾으려 애썼으나 인과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베푸셨는데, 그러나 내 부석거림을 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누가 그 작은 떡과 물고기로 되었다고 합니까? 그러나 부석거림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기적입니다. 우리는 부석거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곧 기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