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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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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4]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1)] 미쁘심을 믿음 (히11:8-12)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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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4]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1)] 미쁘심을 믿음 (히11:8-12) 문병호 목사 


<녹취록>



1. 하나님의 뜻과 미쁘심을 믿는 것

새로운 예배당에 와서 어떤 말씀을 나눌까 생각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되 믿음에 대한 내용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경과 교리의 특징은 반복해서 배우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금요기도사경회 때는 모세오경을 수요일은 교리강론으로 나누고 주일새벽은 옥중서신, 그리고 주일오후에는 2주에 한번 기독교의 진리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16개 주제로 나누어 보고, 일차로 끝나면 본격적으로 이 지역을 전도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16개 주제를 106개로 세분화하여 106주간 나누어볼 생각이 있습니다. 지난 주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해 읽어봤는데 찰스 핫지가 설교한 내용이 많이 들어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설교를 통해 선포된 내용을 잘 정리하면 후대에서 유익하게 읽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의 첫번째 설교였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합니다. 바라는 것들은 미래의 것이니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고 바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만 미래가 보입니다. 믿음으로 보이는 그 미래에 다른 증거는 없습니다. 이성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성적으로 추론하고 설명하지만 믿음으로 보이는 것은 믿음 그 자체가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몇주간 나눈 것은 말씀을 듣고 그것을 붙들고 기도하고 그리고 기다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림이 인내의 영역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을 총체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심과 어떠하심, 그의 뜻, 나를 먼저 사랑하시고 지금도 나를 여전히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믿음므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처음과 끝이 동일한 것입니다. 한 번 마음을 두시면 변개치 않습니다. 즉, 두번째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이런 정한 뜻을 끝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루신 것이 우리에게 최선이 됩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온전해도 능력이 없거나, 능력이 있어도 뜻이 부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뜻이 온전하고 뜻하신즉 끝내 이루시므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변개치 않으실 뿐 아니라 전능하십니다. 마음을 두시면 이미 이루십니다. 우리를 부르시면 이미 부르신 후의 결과, 끝까지 생각하신 것입니다. 본문 11절의 아브라함이 알 바를 모르며 나아가고 사라가 힘이 없으면서 잉태할 것을 믿은 것은 약속하신 하나님이 미쁘심을 믿은 것입니다. 이 미쁘심이 신실하심입니다. 자연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것은 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고 불변하십니다. 그리고 뜻하시면 이루시되 최선으로 이루십니다. 우리는 무능하고 불능합니다. 인간의 기본 조건이 불완전함입니다. 조금은 할 수 있어도 대부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합니다. 우리가 이 예배당을 지을 때 그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사람을 다 구해야 합니다. 전기선 하나를 넣는 것, 배수구를 만드는 것도 우리가 직접 못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잘못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제대로 못하는 것이 제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완전함을 찾고 온전함을 찾아야지 사람 앞에서 사람을 바라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불변하심과 변개치 아니하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 미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언약과 그 미쁘심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2. 믿음의 두 가지 속성: 가치관과 “나아감"

인간의 조건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단을 찾습니다. 그러다보니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이 길을 열어 놓으시는데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완전함과 약함을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세상은 99가지 다하고 한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입니다. 할 수 있는게 한가지도 안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온전한 것, 완전한 것을 찾고 사모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그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열두 해 혈루병 환자, 38년된 병자, 소경 바디매오와 이방 백부장이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것은 예수님 앞에 나아간 것 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고 합니다. ‘나아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못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 맡기고 급할수록 하나님을 먼저 찾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기도가 나에게 버릇이 되어 있고 중얼중얼 찬송이 나온다면 그것이 바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가장 큰 믿음은 가장 나아갈 수 없을 때 나아가는 것입니다. 막연히 사람을 찾고 점쟁이를 찾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지만 죽은 사무엘을 찾습니다. 선지자가 아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두가지 속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내 가치관을 버려야 합니다. 갈대와 우르는 완전한 땅 정착된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떠나라고 할 때 가나안 땅에 흉년이 기다립니다. 곧 애굽과 블레셋으로 내려갑니다. 약속의 땅을 받았지만 이방인처럼 지냈고 장막 가운데서 지냈습니다. 장막이 말이 좋아 장막이지 매일 옮겨다니는 것입니다. 믿음은 첫째로 가치관을 바꿔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메소포타미아가 가장 좋습니다. 그곳은 씨 하나를 뿌리면 천개가 납니다. 그곳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갔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첫번째 의미입니다. 두번째는 가치관을 쫓아서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갈 수 없는 곳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가치관을 분명히 가지는 사람은 현실의 삶과 조건을 넘어섭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께 발을 내딛었습니다. 혈루병은 부정한 병이므로 사람들에게 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 이세벨의 고장 사람입니다. 그도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백부장은 전쟁 때 사람을 죽이는 자입니다. 가장 잔인하고 모진 자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나아갈 수 없는 가운데 나아간 것입니다. 노아는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를 받고 120년간 방주를 지었습니다. 홍수가 있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바로 믿음의 두번째 속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3. 믿음의 자세(1): 순종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잘 보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했습니다. 이것에서 우리의 믿음의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 순종해야 합니다. 성전에 머무른 사무엘만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어떤 일로 어떤 뜻으로 결단으로 기도할 때 날마다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했습니다. 이 부르심이 소명입니다. 소명에 대한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거창하지 않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소명이 아니라 휴지 하나 줍는 것 음식 하나 나르는 것도 소명입니다. 내 펜 하나 움직이는 것도 소명입니다. 그것도 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애써 힘쓰는 것이 소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저 감정적으로 뜨겁다고 하여 날뛰는 것만이 소명이 아닙니다. 환경적으로 총체적으로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과 손 잡으시고 요구하시는 것이 소명입니다. 아브라함은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했습니다. 순종은 내가 아는 것, 헤아리는 것, 그것을 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습니다. 내 할일, 내 시간 다 챙기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고 판단과 능력조차도 내려놓고 하나님께 붙들리는 것이 순종입니다. 순간 순간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 앞에 열어두는 것입니다. 빈 그릇이 되어야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꽉 찬 그릇은 하나님이 채우시지 않습니다. 그 비어있는 것을 하나님이 덜어서 그 안에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긍휼의 그릇으로 보화를 넣어 채워 주십니다. 

순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습관과 사람의 지시가 아닌 성령의 감동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순종해야 능력이 있고 머리가 됩니다. 내 주장하고 잘 나선다고 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자루같이 겸허히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대해 대화한 중에 우리 교회가 썩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썩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땅이 씨를 받아들이려면 푸석푸석해야 합니다. 아스팔트는 매끄럽다고 칭찬받을지 몰라도 생명의 역사가 없습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무능해집니다. 순종은 광석에서금을 연단해내는 채입니다. 우리가 다 광석까지는 발견하는데 그 돌을 버려서 되겠습니까? 그것을 발견했으면 그것을 채로 걸러내야 합니다. 정련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정금같이 나오는 것이 순종입니다. 

제가 어제 모처럼 자전거를 탔습니다. 개포동까지 가봤습니다. 겨우 내내 세달 타지 못했던것 같은데 모처럼 타도 잘 나가더랍니다. 그런데 올 때가 문제입니다. 바람을 안고 타는데 아무리봐도 자전거가 고장난 것 같은데 봐도 멀쩡합니다. 알고보니 바람입니다. 전에 누가 말했는데 자전거는 갈 때보다 올 때를 더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람을 따라서 잘 가면 올 때는 힘듭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바람을 불면 그것에 맞서면 안됩니다. 성령의 바람이 부는대로 가야 합니다. 맞서다가는 끝내 쓰러지고 맙니다. 순종해야 능력이 있고 아름답습니다. 죄를 짓고 아담이 불순종하니 전적으로 추해지고 무능해집니다. 

4. 믿음의 자세(2): 인내와 소망

두번째로 믿음의 자세는 인내입니다. 본문 9, 10절은 아브라함이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보내 놓았는데 계속 장막 생활을 합니다. 갈대아 우르보다 좋기는 커녕 정착도 할 수 없는 땅으로 보내십니다. 그래서 이방의 땅에 있는 것처럼 약속의 땅에 거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불평하지 않았씁니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이 약속의 땅인데 이방의 땅과 같았습니다. 족장 길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장막을 들고 많이 왔다갔다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소망 가운데 인내가 있었습니다. 터가 있는 성을 바란 것입니다. 만세 반석이 있는 터, 옮기지 않는 터가 있는 성을 바란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었으면 그저 시민권이 있는 내국인으로 살았을텐데 그곳을 떠나 외국인과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은 약속의 땅이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고 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내입니다.(눅 21:19) 불법의 영과 미혹의 영이 많습니다. 많은 경우 몰라서 혹은 없어서가 아니라 참지 못해 넘어집니다. 믿음을 가진 자로서 인내를 가지고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오래 참음의 은사로 감당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이루어보려면 참는 버릇부터 들이십시오. 그것 없이 맺는 열매가 없습니다. 낙엽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양분을 열매로 주고 떨어지는 것입니다. 열매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때입니다. 시절입니다. 때를 위해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가 맞는 그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에 대해 정확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때가 되면 터가 있는 성을 이루실 것으로 믿어 그 후손 이삭, 야곱이 장막 가운데 거했찌만, 끝내 예루살렘의 성,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 산, 시온의 성전을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의 인내 지수를 확인하십시오. 기술과 재주는 좋은데 인내가 없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세번째, 믿음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방금 말씀처럼 터가 있는 성을 바랬다고 합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미래에 대한 현재의 소망이 있다면 아직 청년입니다. 과거형 인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도에게 과거는 감사의 영역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고 후회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모든 정신병은 과거가 정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한 현재의 소망이 있어야 과거를 감사할 수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정산된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감사로 판단되는 영역입니다. 미래에 대한 현재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과거를 감사합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고 소망하지도 않는 사람은 과거만 불평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풀꽃과 같으면 어떻습니까? 내가 꽃 한송이를 피우겠다는 소망이 있다면 과거의 어려움, 역경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향한 현재의 소망이 있어야 과거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금 큰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릴 때로 말하면, 시골의 아주머니가 어머니 같은 그 분들이 내년에는 소망이 있다고 합니다. 콩나물 두 시루를 내년에는 판다는 것입니다. 시루는 둥그런 단지입니다. 집에서 콩나물을 키워서 올해는 한 시루를 팔았다면 내년에는 두 시루를 파는 것이 소망입니다. 미래에 대한 현재의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감사합니다. 부모 원망 안합니다. 자기 자신이 소망도 없고 청사진도 없는 사람은 원망하고 외부적인 것을 탓합니다. 가정을 하되 미래에 대해 해야지 과거에 대해 해서는 안됩니다. 되지 않는 과거에 대한 가정만을 합니다. 

5. 순종과 소망과 인내의 믿음

지금 노력하고 있으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처럼 큰 것을 이루고 이익을 남기려고 계획하는 것이 부질없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아브라함이 떠났습니다. 이것이 영생이고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성을 가지고 아브라함은 나아갔습니다. 첫번째는 순종이 있고 두번째는 인내가 있고 세번째는 소망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대해 소망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고 적고를 떠나 복음을 전하겠다는 소망이 많이 생깁니다. 오면서도 저도 모르게 마리아에게 이곳에서 전도하다가 죽을거라고 말을 하게 됩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어제도 처음으로 겨울에 우면산에 올라가 봤는데요, 전에는 그냥 올레길만 왔다갔다 했는데 이제는 그곳에 있는 집이 보입니다. 우리가 천명에게 전도하고 만명에게 전도해서 한 생명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보다 귀한 일이 없습니다. —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히 6:11) 작은 것 하나도 소망해야 합니다. 소망이 있어야 영혼의 닻이 놓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소망거리가 있습니다. 닻은 큰 배라도 정착할 때 필요한 것입니다. 순종과 함께 소망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사라에게와 같이 잉태할 힘이라도 얻습니다. 칼빈은 본문을 주석하면서 아브라함은 반은 죽은 상태요 사라는 완전히 죽은 상태라고 했습니다. 잉태할 힘을 주십니다. 죽은 것과 방불한 그 여자가 잉태해서 본문 마지막 절에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처럼 후손들이 생육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역사입니다. 그들이 소망하고 인내하고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요.”(시 21:19) 여호와께서 힘을 주십니다. 음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를 믿는 것은 약속하신 이가 미쁘신 줄을 믿기 때문입니다.(히 11:11) 이 순종과 소망과 인내의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경주를 다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