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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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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1]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2)] 사자의 입을 막는 믿음 (단6:19-28)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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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1]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2)] 사자의 입을 막는 믿음 (단6:19-28) 문병호 목사 



<녹취록>

1. 우리로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는 주제로 매주 믿음을 주제로 하는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역정 가운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언제든지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을 손바닥에 새겨 기억하시고 이루시고 성취하십니다. 종살이 할 때도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고 포로생활 중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혜가 말세에도 계속됩니다. 말세의 여러 환란과 유혹 가운데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어떤 형편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그 형편에서도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이사야 49장 16절 말씀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손바닥에 상처가 나 본적이 있나요, 손바닥은 상당히 둔하기도 아주 예민하기도 합니다. 가장 뜨거운 것도 잘 잡지만 가장 예민한 것을 느끼는 기관입니다. 종이에 손을 베여보면 아주 예민합니다. 손바닥은 칼을 쥘 수도 있지만, 아주 예민한 것을 분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홍해 앞에 섰을 때도 그들을 헤아리시고 불에 있던 사자 굴에 있던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많아도 하나님은 지금 지금 역사하십니다. 영원히 현재로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내가 너를 보호하였으니 이제는 스스로 서거라고 말하신 적이 없습니다. 어제의 하나님이 오늘의 하나님이고 오늘의 하나님이 영원한 나중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살 때 은혜의 중량을 헤아리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역경과 고난은 잘 무게를 답니다. 내 일이 힘들고 피곤하고 어려운 것을 잘 헤아리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중량은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에 감사와 보람은 받은 은혜를 헤아려 볼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잘 헤아려보고 그 분동을 올려보면 은혜의 무게가 훨신 더 큼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봄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도 은혜가 넘칩니다. 히브리서 12장 3절입니다 —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우리가 피곤하고 낙심치 않도록 하려고 예수님이 죄인들의 그를 거역해도 참으신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힘을 주시고 절망할 때 희망을 주시려고 그 모진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거역하는 이들을 끝내 받아들이셨습니다. 본문 말씀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봅니다. 엘리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나의 하나님 여호와가 과연 여기 계시거늘', 우리 주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한 것처럼, 엘리 입니다. 그 예수님이 한 분 아버지를 부르면서 버림의 자리에 섰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도, 다니엘도 ‘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본문의 다리오 왕이 ‘다니엘의 하나님이’ 지키셨다고 합니다. 

2. 믿음의 목적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에 있음

우리의 믿음이 세상 것을 누리고 세상 것을 받는 데에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까지만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생의 삶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평생 찬미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목적이 보이지 않는 것, 아직 보이지 않는 것에 있으므로 우리의 삶과 부딪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철학은 공리를 쫓습니다.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그것입니다. 삼성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합니다. 포로기의 다니엘과 세 친구가 많은 사람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았다면 하나님을 기쁘게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할 때 식민지 지배에 사용하기 위해 사용한 사람들이 다니엘과 세 친구입니다. 우리도 일제시대 을사오적이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을 불러 식민지 지배에 사용하려고 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잘못 선택한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학문이 뛰어나고 서적을 많이 알고, 특히 다니엘은 거기에 꿈과 이상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성경에 나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잘못 선택한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이 알지 못하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끝내 다니엘은 총리 셋 중 한명이 되었고 가장 뛰어난 총리가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꿈을 맞히고 해석했습니다. 다른 술사들은 꿈을 말해줘야 해석해주겠다고 하니, 느부갓네살 왕은 꿈 자체를 맞히라고 합니다. 다니엘은 꿈을 맞힙니다. 첫번째 꿈은 신상의 꿈입니다. 두번째 꿈은 나무에 관한 꿈입니다. 이것을 모두 맞히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 왕이 죽고 그 아들 벨사살이 왕이 되었을 때에도 그의 꿈을 해석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가장 높은 총리 세 사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벨론은 당대 최고의 제국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전국을 다니엘을 통해 다스리고자 했습니다. 

3. 믿음은 여호와를 바라보고 여호와를 앞세우는 것

다니엘의 삶을 보면 특히 그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일을 앞세우지 않고 결과를 앞세우기보다 믿음으로 기뻐하고 준비하고 판단하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항상 믿음을 중심에 두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믿음 안에서 즐거워하고 믿음으로 믿음의 세계를 바라봐야 합니다. 믿음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형통함이 없습니다. 믿음은 여호와를 바라보는 것이요 여호와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믿음을 단지 수단이나 과정으로 생각하고 결과를 이성으로 판단하면 온전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어떤 흠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서를 읽어보면 그는 흔들림이 없고 믿음 가운데 마음을 정했습니다. 아무 흠이 없으니 사람들이 시기해서 포로가 왕 밑의 최고 권세를 가지고 있으니 그를 시험합니다. 그래서 30일 동안 왕의 신상 외에 다른 것에 절하는 자는 전부 죽이자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제 왕의 인을 찍어 전국에 공표합니다. 다니엘에게 시험이 온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제 1계명에 관한 것입니다. 방금 읽은 것처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이 다니엘에게 던져진 시험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이방인들을 들어 계명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근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우리의 생김새나 재물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볼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관심사가 같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가입니다. 이방인들이 다니엘을 죽이려고 시험하지만, 다니엘의 다른 것이 아닌, 그의 믿음을 가지고, 제 1계명을 가지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 1계명과 그 당시 천하 대왕, 세계 제 1의 왕인, 문화사에 다리우스로 나오는 성경에는 다리오로 나오는 그 왕의 조서 중 선택하도록 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미 높은 관직에 있으므로 흔들릴만 합니다. 그러나 두번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니엘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세 사람 중 하나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결정해야 하는데, 어렵게 여겨질 수도 있으나, 답은 간단합니다. 다니엘이 총리가 된 것은 하나님이 지키신 것입니다. 무조건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 나라의 선지자냐, 세상 나라의 총리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처럼 볼 수 있으나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머리가 되고 일을 지혜롭게 감당하고 높아질 때, 그것이냐 하나님의 일이냐, 갈등하는 것 같아도 갈등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높아진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을 멀리하면 그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바로 그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므로 두번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포기하고 하는 총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포기하면 총리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총리도 시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꿈을 해석하고 지혜를 주셨기 때문에 총리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세상에서도 꼬리가 됩니다. 

4. 형편과 무관하게 하던대로 여호와를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

우리는 어떤 경우든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연 것은 마음의 중심을 연 것입니다. 은밀히 나무 뒤에 숨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중심을 예루살렘에 두고 ‘전에 하던대로’ 하루 세 번 기도를 무릎꿇고 했습니다. 이것이 말세의 신앙입니다. 전에 하던대로, 오늘 하던대로, 형편에 무관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려우면 당연히 기도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어려우면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일단 어려운 형편을 모면하고 기도하자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하던대로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일년에 52번 드리는 예배가 하던대로입니다. 하루에 한 번 날마다 은밀히 기도하지 않는 일이 없자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던대로입니다. 영적인 전사는 버릇이 있어야 합니다. 평소에 깨어서 손으로 물을 받아 먹는 300 용사는 쓰시지만, 물이다 싶어 전쟁도 잊고 머리를 굽혀 물을 먹는 자는 쓰시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 성도님들은 300 용사라고 생각합니다. 형편에 무관한 기도를 드리고 감사를 했습니다. 상황이 절박할수록 여호와를 더욱 의뢰해야 합니다. 다윗이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걸음 뿐이라고 기도했습니다.(삼상 23:7) 이 절박함이 다윗을 만들었습니다. 끊임없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왔을 때, 그 절박함으로 왕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절망하거나 의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한 우리의 모습과 형편,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절박함입니다. 나와 죽음 사이에는 한 걸음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가진 모습입니다. 

다니엘은 전에 하던대로 기도했습니다. 에스겔서는 요나와 다니엘과 욥으로 믿음의 인물을 말합니다. —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4:14) 노아의 신앙은 홍수가 있을 것을 알지 못하고 120년 동안 방주를 준비한 것입니다. 욥의 신앙은 귀로 듣는 신앙이 아니라 내 정서,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눈으로 주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목도하는 신앙입니다. 욥은 질문을 했지만 의심의 질문이 아닌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자 한 것입니다. (욥 42:5) 그리고 다니엘이 나옵니다. 다니엘의 장점은 하던대로 형편에 무관하게 여호와를 의지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기도 가운데 다 녹였습니다. 그의 지위가 올라갔다고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을 닮아야 하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다니엘서를 읽으면 편안함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예레미야 선지자도 불안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런 불안함이 없이 초지일관입니다. 믿음의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니엘의 습관입니다. 다니엘은 여러가지로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중심이 합한 것입니다. 오히려 어렵고 핍박이 있을 때 오히려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을 열고 무릎을 꿇고 하루에 세번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신앙입니다. 지위가 높아져도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음모 가운데에서도 그대로 기도했습니다. 주변의 상황이 변해서 위기에 처했어도 전에 하던대로 그대로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순교의 신앙입니다. 전에 하던대로 그대로 기도했습니다. 이 그대로 기도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습관대로 산에 올라가서 잡히시던 밤에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주님도 하던대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로마 병정이 잡으러 오는 것을 다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에게 팔리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도 세 번이나 예고하셨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하던대로 하십니다. 주변은 난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그것에 따라 치우치지 말고 하던대로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반대되는 사람이 사울왕입니다. 다니엘은 높아져도 겸손하고 어려운 일을 당해 기도했다면, 사울왕은 높아지니 교만하고 어려운 일을 당해 무당을 찾았습니다. 야곱이 20년 밧단아람 생활 중에 배운 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삼촌에게 속으면서 오랜 세월을 지나고 돌아오면서 환도뼈가 위골될때까지 기도한 것입니다. 

5. 믿음은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나의 문을 열어놓는 것과 같다

본문 16절에도 나옵니다.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던대로입니다. 그리고 항상 섬기는 것입니다. 다리오 왕도 인정한 것입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 굴에 집어넣고 그 앞에 돌로 입구를 막고 그 위에 왕의 도장과 귀족들의 도장을 찍어 밀봉했습니다. 그러나 다리오는 다니엘이 죽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상당히 낯설 수 있지만,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사자 굴에 집어 넣고 밤이 새도록 금식하고 기도하고 오락을 그쳤다’고 합니다. 다니엘의 사자굴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무조건 시련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자굴에서 보호를 받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모함한 자들이 가족과 함께 다 죽었습니다.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대로 사자가 덮쳐서 죽였습니다. 주의 백성에게 시련이 있는 듯 하지만 그 사자는 다니엘을 삼키려는 사자가 아니라 대적하는 사람들을 삼키는 사자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신상에 절하지 않아 불속에 집어 넣었을 때도, 세 사람이 들어갔는데 네 사람이 돌아가며 춤을 췄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지키신 것입니다. 그 불을 칠배나 더 뜨겁게 해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건져내고 다른사람을 집어 넣었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죽이려고 장대를 준비했지만, 그 자신이 걸렸습니다. 홍해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백성을 쫓아오는 애굽의 기병이 죽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 이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흑암의 세력을 죽이기 위해 그의 백성에게 십자가를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죽음을 죽이는 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 미련하고 저주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이 영광이고 생명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으면 구원도 없고 대속도 없고 영생도 없고 부활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어려움이 가로놓일 수 있습니다. 사자 굴이, 불구덩이가, 홍해가, 여리고가 놓일 수 있고 모함을 당해 십자가에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끝내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높이십니다. 하나님의 대적, 믿는 자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오늘 다리오 왕이 다니엘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믿었음이니라.” 사자의 입을 막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다니엘을 바라보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사건이라기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하던대로 의뢰하고 그의 품 안에 있고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평소에 기도하고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평소에 기도하지 않고 닥쳐서 기도하기는 어렵습니다. 평소에 중심을 드려 기도할 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더 잘 기도하게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행동하시도록 내 문을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게끔 내 문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숨어서 왕이 저러니 내가 이렇게 해보자고 모의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게끔 열어놓는 것, 주일은 나는 쉬는 것입니다. 예배의 습관입니다. 판단하지 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본질적은 것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먹이는 것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예배, 기도, 찬송 당연히 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생각하는 영역이 아니라 습관대로 하던대로 범사에 항상 쉬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니엘의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믿었던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리라, 독하고 악한 다리오 이방 왕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이 인근이 십자가지기교회 성도를 볼 때 다리오가 다니엘을 보는 마음으로 헤아리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불로 연단해도 없어질 금보다 큰 믿음입니다. 전체적이 다니엘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왕국으로 보기도 합니다. 본문 26절 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실 일을 미리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 다니엘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6절은 다니엘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믿으니 이제 이방 왕이 그의 하나님이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마지막 절, 형통했다고 한 것은 시편 1편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말세에는 새로운 것이 아닌 그대로, 하던대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1-6) 선한 자리에 설 때 세상에서도 머리가 되는 은혜가 모든 성도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