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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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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5]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6)] 친히 행하심을 믿음 (출33:12-2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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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5]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6)] 친히 행하심을 믿음 (출33:12-23) 문병호 목사



<녹취록>
 



1. 인간의 지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역사

본문에서 우리는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만나게 됩니다. '주의 목전에서 은총을 입었으면'이라는 말을 다섯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정의 가정이 아닌 하나님 앞에 다짐하는, 하나님이 은총을 입게 하셨으니 나를 도와달라는 기도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모세가 그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돌판에 말씀을 받아 내려오는데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이이 금송아지를 만드는 일을 보고 이 일로 하나님의 진노가 있어서 삼천명이 죽임을 당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드리는 지도자의 기도입니다. 나를 홀로 보내지 마시고 함께 보낼 자를 지시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의 길을 알려달라고, 그리고 주의 영광을 보여주고 우리와 친히 함께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잠시라도 하나님을 쉬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머물러 계시거나 주무시고 계시는 듯 다시 깨우는 마음이 드는 애통함이 있습니다. 양재천에도 가보면 잉어와 오리도 있는데 어떨 때는 가만히 서있습니다. 죽은 듯 합니다. 밤에 보면 오리들이 가만히 있습니다. 그림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보면 우리가 보기에 마치 죽은 듯 계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기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우리가 또 찔러보고 하지만, 그 때도 급히 반응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가만히 계시는 듯 합니다. 하나님은 큰 번개를 내시지만 우리 눈에는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 귀에 하나님의 음성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다 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듣고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만든 우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가만히 계시는 것 같아도 움직이고 말씀하고 계시므로 여호와가 여호와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들을만한 많은 음파 중 오직 가청 주파만 들을 수 있고 보는 것도 맛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많이 보고 듣는 것 같아도 제한된 것이 인간입니다. 열가지 재앙이 내려도 꿈쩍 않는 바로의 모습이 역으로 보면 하나님이 죽으신게 아니라 인간이 죽은 것입니다. 우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바로의 완악함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우리를 어찌 그대로 두시냐고 한탄합니다 —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분명히 열가지 재앙과 독수리 날개 업음으로 우리에게 하신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간혹 무모하게 내가 볼 것만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2. 믿음으로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넘어섬

우리가 보고 싶어해도 보여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큰 분으로 아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고 듣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안으로 다 담을 수 없습니다. 향을 피우고 부적을 붙이는 것은 이방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골조를 갖추고 지붕을 올려 예배를 드릴 뿐입니다. 무엇인가 치장하거나 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으로는 본문 20절과 같이 인간이 그를 보고 살 자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피조물인 태양의 빛 한줄도 보지 못하는데 어찌 감히 천지 만물의 조물주를 감히 보려고 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취한 가운데 그를 통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보여주면 겨우 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 보여주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본문은 일하고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28) 그가 우리 안에 살아있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아멘하고 그것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잠시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영 죽으신 것처럼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우레와 천둥, 구름과 불이 있는 가운데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주심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잠시 모세가 부재하자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 거짓 신으로 위로함을 받으려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잠시 쉰다고 해서 노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쉬어도 국이 끓고 있습니다.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주변, 환경을 통해 일하고 계십니다. 안식도 하시지만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집을 일터가 아닌 쉼터로 만듭니다. 하나님이 쉬는 것과 일하는 것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훈육도 잘 하지만 우리 집을 외부에서 상처를 받으면 또한 쉬고 치유되는 안식의 터로 만듭니다.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으시는 것 같아도 지시하고 준비해 두시고 역사하십니다. 인간은 보아야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안으로 보는 것은 온전하나 육안으로 보아 믿고자 하는 것은 온전치 않습니다. 도마와 빌립이 그런 믿음을 가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지 않고 믿는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보는 것만 믿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첫번째 나쁜 습성이요, 두번째는 내 논리와 이성으로 이해되어야 믿으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기적을 보이셔야 하는데 내가 이해되는 기적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이성주의와 신비주의의 교집합이 있습니다. 이성주의자들이 기적을 원하는데 그들이 보기에 이해되어지는 기적입니다.오병이어,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표적은 쫓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기적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성주의자들, 내 생각을 믿는 자들은 교회를 신비주의로 바꿉니다. 내 머리로 이해하는 신을, 그가 행하는 기적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이 이해되는 기적만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것이 신비주의입니다. 열광주의, 광신주의 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 맡기고 내 논리와 생각을 넘어서서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우상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더 잘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결론은 우리 생각 안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없으면 하나님을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 그런 기적을 안 보이니 그저 때리면 맞고 이방의 빌라도 앞에서 제사장들 앞에서 무릎 꿇고 도수장의 양과 같이 잠잠히 가니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무능해보여도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미련한 것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우상은 보려고 만드는 것이요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보려고 만들면 보지 못하게 됩니다. 우상이 우리의 눈을 가려 진정한 하나님이 아닌 그림과 형상만 보게 됩니다. 

3.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복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실 때 간혹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만큼 그 너머로 드러내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끝까지 자기 생각을 주장합니다. —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출 32:9)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아이가 가장 즐겁고 편한 때는 그저 엄마 품에 바짝 붙어 있을 때입니다. 그래야 엄마가 좋은 곳도 많에 데려갑니다. 아이가 목을 꼿꼿이 세우면 가다가도 돌아옵니다. 입으로는 이야기를 하지만 목으로는 안 넘어갑니다. 심령으로는 안들어 갑니다. 말로만 여호와를 인정하지 목이 굳어 신령한 것이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가지 못합니다. 목이 곧고 굳어 내려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입니다. 내가 옳아야 옳고 내가 좋아야 하나님도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다른 계명보다 우상에 대한 계명에서 어기면 3대, 4대까지 벌을 내린다고 하시고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스스로를 밝히십니다. 우리 신앙고백은 교회 중심, 말씀 중심,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말씀을 붙들고 교회에서 우리가 자라가는 것이 우리가 목을 꺾는 것입니다. 연약해도 들어가야 합니다. 빛은 한줄기라도 들어가면 공간을 넓게 밝힐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목을 곧게 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여호와를 인정하고 향하여 믿고 기다리기를 원하십니다. —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출 33:3) 하나님이 가나안에 함께 들어가지 않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저는 하나님이 무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없으면 그런 땅도 없습니다. 역설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아이와 함께 놀이터에 가지 않으면 아이가 어떻게 놉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인데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 눈에 보이는 것만 따지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찬송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신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우리 가정이 새 하늘입니다. 주님을 모시니 말입니다. 공간이 어디인지 따질 것이 없습니다. 가장 얼굴을 맞대고 마주보는 곳, 그곳이 새 하늘과 새 땅, 영화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주시는 것입니다. 우상은 바로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조급하게 하나님을 바라지 않고, 그 안에서 바라보고 함께 사는 것이 아닌, 내 지각에 잠시라도 인식되지 않으면 급히 다른 것을 쫓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모세는 다시금 여호와여 돌이키사 주의 길을 내게 보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시 25:4) 일체 모든 것을 멀리하고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고 여호와를 중심에 두는 백성이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른 것, 땅이나 물건에서 기업을 찾지 않습니다. —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시 16:5) 여호와가 바로 우리 재산이요 분깃입니다. 여호와가 있고 다른 것이 있지 않습니다. 

4. 만세반석, 우리와 동행하시는 구름기둥, 불기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본문 모세의 기도, 12절, 13절은 그가 얼마나 간절히 여호와께 붙들려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목전에서 은택을 베푸셨으니 길을 보이시라고 다섯번이나 말합니다. 절대 하나님 없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모세는 신앙의 본질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호와가 없는 젖과 꿀은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재물도 귀하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갈 자, 주를 내게 보내달라고 합니다. 오늘 모세가 기도하는 함께 갈 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구름기둥, 불기둥은 누구일까요? 만세반석을 열어 우리를 잠시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는 분은 누구인가요?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하나님께 성자 하나님의 동행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6) 예수 그리스도의 동행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신전의식입니다. 본문 바로 앞절은 모세가 친구와 같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입버릇 같이 ‘목전’에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오셔서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내가 친히 가고 우리를 쉬게 하리라고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16절 역시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우리를 만민으로부터 구별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를 만민 가운데서 선택하셨으면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십니다. 이번 주에 저도 어려움과 마음의 고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미묘한 섭리를 깨닫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이번 겨울에 교회 예배당 미약하지만 돕는다고 종일 와 있을 때 그 때 하나님은 환란을 피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어려움을 피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시간에 여기 있어서 실족하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무슨 일인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는 않지만 미묘하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구별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걸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본다고 해도 우리가 자녀를 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별한 백성은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쉬지도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습니다. 구별된 백성을 위해 언제나 살아계시는데,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이성에 가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대로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습성을 버려야 합니다. 잠잠이 여호와를 바라고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여호와를 잠잠이 바라면 그의 행사가 기이하고 놀라워 큰 역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이 일하신다

기독교 역사 상 가장 어려울 때가 산업혁명, 과학혁명 시대 입니다. 사람이 이성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만 인정하는 이신론, 이성에 맞는 신만 인정하는 사상이 발흥하여 교회가 많이 힘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운명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의 신과 같이 인간의 운명으로 장난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태엽 감은 시계처럼 움직이는 분도 아닙니다. 볼 뿐만 아니라 손으로 친히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의 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에도 있습니다. 우리를 보고 감찰하시고 눈으로만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내 속에서 내 옆에서 내 주변에서 일하십니다. 모든 일을 하십니다. 본문 17절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로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제 이름을 압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어도 여호와는 내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롬 9:15) 이 말씀이 본문 19절에 풀어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선한 것을 우리 앞에 지나가게 하신다고 합니다. —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본문 16절과 같습니다.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셨다고 합니다. 그의 기뻐하심과 놀라운 경륜으로 주님이 우리를 이끌어내시는 것입니다. —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시 44:3)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의 평화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뻐하여 밥을 주듯 우리를 그저 기뻐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십니다. 

본문 마지막은 모세에게 반석에 서라고 하십니다. 그곳에 서니 모든 영광이 지나가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다 보면 우리가 죽으므로 손으로 덮으시고 반석에 숨기십니다. 그 반석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보니 얼굴은 보이지 않는데 등만 보입니다. 여러분, 등은 우리 어머니가 보이는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 앞에 앉아 밥먹는 모습이 아닌 돌아서 일하는 모습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등이 기억납니다. 물감도 안 들인 흰옷만 입고 계셨습니다. 부엌에서도 항상 가면 뒷모습만 보입니다. 자식 앞에 앉는 시간도 꾸짖는 시간조차도 없지만, 등을 보이는 것입니다.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우리가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