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20]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8)] 내려가서 취하는 믿음 (삿7:9-18) 문병호 목사
(음향 수정 완료)
(*음성파일: 클릭하여 다운로드 하시면 됩니다.)
(삿 7:9)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삿 7:10)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삿 7:11)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이에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군대가 있는 진영 근처로 내려간즉
(삿 7:12)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삿 7:13)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삿 7:14)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
(삿 7:15)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
(삿 7:16)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삿 7:17)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삿 7:18)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녹취록>
1. 여호와의 말씀을 떠난 악
본문에서는 기드온과 300 용사 그리고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대전을 치르는 전쟁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당시 주변의 족속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산에 있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받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고 그 산이 시온의 성전으로 대로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의 백성이라고 하며 여호와는 산에 계신다고 합니다. 산에 있음으로 인해 그들은 평야의 기름진 것을 누리지 못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자리잡은 곳도 고지입니다. 평지는 서쪽으로 블레셋이 동쪽으로는 모압과 암몬과 에돔이 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사방에서 협공하는 형상입니다. 산은 쉬기 좋지만 먹고 살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산에서 주로 포도나무와 밀을 가꾸고 염소를 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양을 많이 친 것이 아니라 염소를 치고 밀과 포도를 먹고 살았습니다. 대농이 아닌 산간경작을 한 것입니다. 산 속에 있으므로 그들에게는 기병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전쟁에 능하시지 이스라엘 백성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사시대는 혼란과 암흑의 시대입니다. 각각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중심이 없는 시대입니다. 끊임없는 전쟁과 점령, 다시 하나님이 세운 장수를 통한 회복이 이어집니다. 사사는 왕과 다릅니다. 평소가 아닌 위기 시에 임시로 세우는 자입니다. 전쟁의 용도로 또 일시적인 재판 담당자로 세운 자들입니다. 특히 전쟁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단련시킴을 사사시대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모압, 메소포타미아, 가나안의 손에 붙이기도 하시면서, 특히 미디안의 손에 붙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길들이십니다. 미디안은 아두람과 후첩 그두라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들입니다. 아주 거칠고 유목을 하는 강한 백성입니다. 낙타를 많이 몰고 다니며 상업도 합니다. 그래서 요셉이 미디안의 상인에게 팔려감을 우리가 보기도 하였습니다. 상업을 하고 임기응변이 강하고 군사적으로 외교적으로 강한 미디안 백성입니다. 평소에는 대상을 하고 상업을 하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추수하고 탈곡해 놓으면 와서 훔쳐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미디안에게 7년간 내어주었다고 사사기 6장은 말합니다. 어떤 악을 행했기에 그러합니까?
첫째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삿 6:10) 두번째 악은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바알과 앗세라 신을 섬겼습니다. 바알은 남신이요 앗세라는 여신입니다. 그들을 섬기니 음란이 극에 달한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악이었습니다. 이런 악의 근본은, 여호와를 떠나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이방신에 빠져든 것은 여호수아 때까지는 하나님을 알았는데, 이제 여호수아의 세대가 지나가고 난 후에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가 행하신 일들을 알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에 하나님이 하신 큰 일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주신 말씀을 잊어버린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악의 근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말씀을 주셨고 여호수아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그것을 지켰습니다. 이런 시대에는 이방이 결코 이스라엘 백성을 넘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지도 배우지도 지키지도 않는 시대가 되니 각국의 이방을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치게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심, 샬롬
사사기의 악순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배우지 않으니 죄를 짓고, 이 우상을 섬기는 가운데 여호와가 우상을 쳐부수고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기 위해 적들을 세우고, 이제 그 적들이 흥왕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신음소리를 내면 사사를 세워서 그를 통해 다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복이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바로 사사시대의 악순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속되는 망각과 하나님의 깨우침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런 관점에서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디안 사람을 대하여 기드온이라는 사사를 세웠습니다. 기드온은 일개 농부일 뿐이었습니다. 화려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천한 이력을 가졌습니다. 가장 연약한 지파인 므낫세에 속하고 무명자 아비엘의 가문에서 요아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저 농사짓고 밀을 이방인들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조금씩 꺼내서 타작하는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런 기드온과 함께 계시도다 하면서 큰 용사로 부르신 것이지 그가 원래 큰 용사가 아닙니다. 장사라고 부르지 않으십니다. 다윗은 되돌아보지조차 않은 막내였습니다. 그 다윗이 중심이 합하니 하나님이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가문이 이력이 출중해서가 아닌, 큰 용사여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니 큰 용사로 만드셔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궁색한 농부입니다. 미디안에 대적할 용기도 갖지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신 약속 외에는 그가 가진 것이 없습니다. 여호수아도 가나안의 칠부족을 멸하고 강하고 담대한 용사가 되었으나 태생이 보잘것 없었습니다. 모세의 회막지기였습니다. 모세를 수종들던 이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좌우로 흔들리지 않으니 하나님이 그를 쓰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회막지기라면 오늘날 십자가지기입니다. 십자가지기가 바로 여호수아인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우리 교회 십자가지기가 여호수아 회막지기인 것입니다. —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1:5)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용하는 용사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리라고 약속하신 자들입니다. 이 여호와는 샬롬(삿 6:22-24)입니다. 얼굴을 비춰주시되 여호와를 보기만 하면 마음이 평안한 것이 샬롬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면 죽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마음에 평강을 누린 것입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여호와를 만나고 죽지 않을 뿐더러 마음의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습니다. 샬롬은 여호와의 안전에서 살면서 그 가운데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중에 평화로다'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다른 것이 아닌 항상 함께 계시리라는 것과 샬롬이 되리라는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3. 육신의 전쟁과 영적인 전쟁
우리가 큰 일을 할 때는 여호와의 면전에 서야 하고 그를 마주봐야 합니다. 그의 얼굴을 마주봐야 우리가 그의 마음을 알게 되고 권능을 얻게 되고 그의 일을 담대하게 감당하게 됩니다. 물론 여호와는 물리적으로 그 얼굴을 우리에게 보이시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강을 누릴 때 우리가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바로 야곱이 얍복강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이 얼굴을 보고 이스라엘이라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야곱에게 얼굴을 보이시되 져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져주신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 져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심령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위로하고 기뻐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드온은 어떤 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병기를 준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함께 하리라, 내가 너의 평강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기드온이 담대해져서 바알의 신당을 다 부수게 됩니다. 먼저 아실 것은 우리가 육신의 전쟁을 치르기 전에 영적인 전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바알과 다투어 이긴 자라는 것입니다. 먼저 미디안과 눈에 보이는 전쟁을 하기 전에 영적인 전쟁을 한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면서 우리가 무슨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예와 아니오가 분명하여 아닌 것을 깨부수고 오직 여호와 한분만 바라보는 것이 영적 전쟁의 원리입니다. 할례를 거해 절뚝거리고 무교병을 먹어 배고픕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오히려 그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의 원리입니다. 내가 칼을 갈고 낫을 갈고 혈기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죽이면서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산중에 거하며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산에 도망가 사니 산 밑에서 진을 치고 적들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가라고 다섯번이나 말씀하십니다.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쟁하라고 하실 때 높은 곳에서 먼저 위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삿 6:34) 여호와의 영이 임하니 담대해진 것입니다. 기드온은 여러번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원래 담대하지 못한 자였습니다. 한번은 기드온이 양털에만 이슬을 내리도록, 도 한번은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 택한 여호와의 영이 임하면 우리가 절뚝거리고 의심이 있어도 다시 붙들어 일으켜 세우십니다. 여룹바알, 바알의 산당을 깨뜨린 것도 백주대낮이 아닌 밤에 한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두고 이방의 산당을 깨뜨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기질과 용기와 힘으로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니 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제 기드온의 병사들 3만 2천명 중 1만명을 남기고 그 중에서 또 300명만 추리십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대군을 형성해 전쟁을 하는데 기드온의 전쟁은 반대로 했습니다. 그들이 특수부대도 아니었습니다.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만 있었습니다. 농사도구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쟁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들보고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4.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시는 신령한 것
본문에서 특히 내려가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쟁의 방식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내려가면 집니다. 평지에서 철기병과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어쨌든 적군들을 산으로 유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여기서도 기드온이 주저하니 브라라는 장군과 함께 먼저 내려가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힘과 용기를 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려가보니 그 이방군대가 메뚜기떼와 같이 꽉 차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한 적군 병사가 꿈 이야기를 합니다. 꿈을 꾸었는데 보리떡이 굴러 내려와 장막을 치니 장막이 넘어져 망하는 것입니다. 화살이 아니라 보리떡입니다. 보리떡은 농부인 기드온이 생산하는 것입니다. 이 병사의 이야기를 듣고 기드온이 힘을 냅니다. 내려가라는 말은 전쟁적으로 하면 지는 것이나 여호와가 함께 하시니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여리고성에서 활을 창을 던질수도 있는데 그 성을 무기 없이 돌라고 한 것과 같은 전쟁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항상 하나님의 방식, 영적인 방식으로 합니다. 내가 병기를 갖춰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신대로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전쟁했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여호와께서 전쟁에 능하시고 그가 이기신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내려가기 전에 위에서 신령한 것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잡히시고 내려가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것을 먼저 취해야 합니다. 영적인 전쟁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권능 가운데 그가 나와 함께 계시도다라는 놀라운 약속을 가지고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위를 향하여 기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랫것으로 위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위의 것으로 아래로 내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양식과 만나와 꼴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려가서 철기병을 상대하기 전 먼저 높은 산에서 여호와를 만나야 합니다. 모리야산에서 시온산에서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우리가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환상을 보고 자기 혀가 부정하니 핀 숯으로 혀를 온전케 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고 타지 않는 나무의 거룩한 일을 보았기에 내려가는 것입니다. 내려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 싸우러 가는 것이요,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그런 영적인 전쟁을 하러 가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높은 산에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베드로 요한 야곱은 3대 제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그 모습을 보여주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확한 표입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변화되신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3대 제자입니다. 우리가 제자라고 해서 높고 낮음을 따질것이 없지만, 바로 그 변화산을 높은 산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높은 산에서 우리 주님이 변화되니 그 얼굴의 희기와 옷의 희기가 눈부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5. 높은 곳에서 드려지는 예배
우리는 지성소에서 주님의 영적인 만나를 먹어야 합니다. 오늘 예배가 높은 곳에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이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여호와께 아멘하고 말씀의 꼴을 먹고 하나님의 변개치 아니하는 엄정한 말씀을 듣고 아멘함으로 부요함을 얻는 것입니다. 가장 엄정할 때 가장 부요합니다. 가장 하나님의 말씀에 똑바로 서있을 때 가장 지경이 넓어집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면 끝입니다. 그러나 중심을 붙들고 있으면 여호와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사방을 보라고 하십니다. 롯은 기웃거리다가 소알, 고모라 땅을 구했습니다. 처음에는 기름진 땅 같았지만, 유황불로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 가운데 중심을 가지니 지금 보기에는 척박한 땅이지만 오늘 이스라엘 땅을 선택한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여호와를 중심에 만나야 합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 성도님들 이 말씀 붙들고 기도하는 성도님들 되기 바립니다. 그것 밖에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기도하면서 하나님 말씀 들려주는 것보다 기쁜 일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이 내려주시는 성령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영으로 이제 우리가 삽니다. 이것이 높은 산에 속한 것입니다. 높은 산에 양식을 먹고 땅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보리떡의 전쟁입니다. 칼과 창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물맷돌로 전쟁했습니다. 평소에 목동일 할 때 가지고 다니던 도구입니다. 긴 창과 투구의 전쟁도구가 아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중심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세상 것 없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만나를 먹고 그것이 있으면 보리떡이 뒹굴어 미디안의 장막을 넘어뜨립니다. 보리떡에 무슨 권능이 있을까요, 그러나 그것에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하니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드온입니다.
기드온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농사짓고 밀을 미디안 몰래 빻아 저장하던 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영이 임하니 그가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강함이 되는, 바울과 같이 부득불 자랑하노니 약함을 자랑한다고 한, 그 때만 하나님이 일하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20180520] [주일낮예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8)] 내려가서 취하는 믿음 (삿7:9-18) 문병호 목사
(음향 수정 완료)
(*음성파일: 클릭하여 다운로드 하시면 됩니다.)
<녹취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