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26]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82)]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음 (롬15:1-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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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6]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82)]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음 (롬15:1-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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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롬 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롬 15: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녹취록>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운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되 사람들에게 비난거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핍박과 비난은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핍박은 선을 행하다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받는 고난과 핍박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끝내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운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 이것이 어찌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크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보면 안티 기독교 등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요소 요소에 주의 백성들이 많은 큰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끝내 세상도 알아 줍니다. 끝내 세상 사람들도 그 성도를 지도자로, 머리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중심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되 그 가운데서 이웃에게 칭찬을 받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즉각적으로 이웃에게 칭찬을 받는 일은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참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올바르고 인내하면 끝내는 세상이 그 사람을 진주와, 옥과, 보화와 같이 알아 주는 것입니다.
2. 내 안의 그리스도의 영의 소욕을 따라 삶으로 그리스도를 섬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사람에게 칭찬을 받느냐,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입니다. 지난 주 18절에서 이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이웃에게 칭찬을 받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왕에게 하듯 떠받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우리를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이 보시는 줄 알고 내 안의 그리스도의 영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것, 처한 장소와 상황에 상관없이 내 안에 주신 그리스도의 영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3. 믿음을 따라 행함 —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잘 누리는 것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은 믿음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은 전부 죄라고 지난 주 23절에서 본 바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데,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물레방아가 있습니다. 물이 떨어지면 물레방아가 돕니다. 섬긴다는 것은 이것과 같습니다. 물을 받아들이면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것처럼 은혜를 받아들이면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주의 백성들은 성령의 역사대로 성령의 소욕대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누리는 것이요, 그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양지 바른 곳을 좋아하고 향기로운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퇴폐한 것은 일시적으로 향기로우나 썩는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담배는 가장 향기로울 줄 모르나 우리의 속을 가장 타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것은 선한 것입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 뿐’이라는 찬송가 가사가 있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던 예수 의지한다고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 밖에 없습니다.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잘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4. 믿음은 믿는 대상에 있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세상의 친구를 신뢰하는 것과 다릅니다. 믿음은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믿는 대상에 있습니다. 무엇을 믿는지가 중요합니다. 믿음의 대상에 따라서 내 믿음의 열매가 결정됩니다. 세상의 친구를 열심히 믿었는데 그 친구가 나와 동떨어진 것이라면 내가 아무리 잘 믿어도 그 믿음은 허무합니다. 세상에서 동업자를 믿었는데 그가 참된 사람이 아니라면 믿음이 의미가 없습니다. 황금송아지가 문제입니까? 아무리 나무 앞에 가서 세상이 말하는 치성을 드린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음식을 믿고 의복을 믿어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형식주의, 의식주의입니다. 형식을 믿고 의식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윤리적으로 온전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면 그것은 윤리주의입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경건주의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명예를 가지고 부를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인 양 여기는 것은 기복주의입니다.
우리는 복음,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니 복음주의입니다. 말씀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은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 자를 감당하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약하고 강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강한 사람은 강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약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믿는 대상을 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믿음이 좋은 것입니다. 약한 믿음이란 하나님은 그저 우리가 열심히 뛰면 바람막이 하고 도와주시는 분 정도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깊이 바라보라고 자주 나눕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요? 내가 그저 돈 잘 버는 친구 만나듯, 힘센 친구 만나듯 하나님을 바라보거나 기도하고 있지 않는가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우리 속 깊은 곳까지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영원이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냐가 믿음의 약함과 강함을 결정해 줍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 생길 때 기도합니다. 요셉을 건지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길을 인도하시고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터뜨리신 하나님, 다니엘과 세 친구를 사자와 불에서 구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능력과 전지하심이 우리의 믿음의 질을 결정합니다. 우리의 정성을 보고 이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밤새 율법을, 여호와의 전능하심을 묵상한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므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닌 지금, 그리고 미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걸음을 주장하시므로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것입니다. 믿는 바가 곧 현상이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지금 내가 아닙니다. 나 혹은 목사가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목사도 교회도 아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절대 선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편재하시고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분이고 무한하신 분이며 절대적인 자존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많이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면 확신이 생깁니다. 길이 보입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면 모든 일에 주 안에서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그 자체가 증거입니다. 기도하 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증거를 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증거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히 11:1) 바라는 것은 미래의 것이며 아직까지 오지 않은 것인데 믿음의 세계에서는 이미 실상입니다. 왜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 마음에 ‘예' 하면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그리하여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나아갑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 이루어주셨으므로 그리스도의 육체를 생명의 길로 여기고 (요 19:30) 그리스도의 말씀을 부여잡고 하나님께 나가면 그의 모든 의를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내가 강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약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중요합니다. 무소부재, 전지전능하시고 내 속 깊은 곳까지 살피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가 믿음이 강한 자입니다. 다윗이 율법을 다 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군마가 아닌 하나님을 믿고 물맷돌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 우리의 중심을 맞추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우리된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도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간증을 잘 안하지만 간증이 많습니다. 주저앉은 적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잘 응답해주시니 말입니다. 하나님 아니면 어떤 것도 어떤 현자도 이룰 수 없고 계획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믿는다고 하지 말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십시오. 여호와를 인정하는 자가 믿음이 강한 자입니다. 여호와를 마땅히 여호와로 모시는 자가 믿음이 강한 자입니다.
6.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해야 함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자리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죄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는 죄를 알지도 생각지도 않으며 마음의 유혹도 받지 않는 분입니다. 원죄에 속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 자리에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권능을 갖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거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내가 아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십시오. 본문 3절은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내가 기쁘고 즐거우면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기뻐해야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데 내가 기쁜 것은 빨리 분별해서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내가 기뻐해야 합니다. 남에게 베풀고 불의와 거짓에 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면서도 자기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이 기쁨을 보신 것입니다. —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소망 가운데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7. 능력 주시는 이도 영광 받으시는 이도 하나님
가장 큰 믿음은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와서 주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 가장 큰 우리의 영광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가장 큰 일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요일 5:14) 우리의 담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을 써서 많은 것을 이루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고 영광 받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아멘'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능력 주시고 길을 열어 주십니다. 가장 큰 믿음은 갈렙의 믿음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것은 내 능력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가장 강한 족속의 땅을 정복하러 나가면서 이미 연로한 노인이었지만 그 고백을 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이 큰 일을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교회의 수가 만명이라도 순교자가 나지 않을 수 있지만, 열명이라도 서른 명의 순교자를 낼 수 있다는 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갑바도기아 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이단이 횡행할 때 그곳에 세 명의 뛰어난 신학자, 바실과 두 그레고리(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닛사의 그레고리)를 세워 기독교 진리를 지켰습니다. 소아시아, 오늘 터키의 그 작은 마을에서 세 사람의 걸출한 신학자가 배출되어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 전 교회를 모아 회의를 하고 기독교의 진리를 지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고 참 사람이라는 것을 지킨 것입니다.
큰 교회라고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히터가 없어서 추운 것이 아닙니다. 네비게이션이 없어서 길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호세아 선지자 아모스 선지자가 얘기했습니다. 공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불빛이라도 기준이 되고 먼 곳에서 큰 배가 방향을 잡는 그런 교회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없습니다. 강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믿음이 강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누구라고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다윗과 사울의 차이입니다. 사울은 자기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에게 힘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목동이지만 자기는 힘이 없고 하나님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더 많이 가졌다고 왕관을 썼다고 강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누구라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사자의 입이라도 막을 것이요 홍해라도 건너게 할 것입니다. 불속에서라도 건질 것입니다. 아들을 내어주신 이가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 빛이 임하고 아주 기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과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나보다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우리의 단순한 조력자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독수리 날개 같이 싣고 날으시는 분입니다. 아예 우리를 실어 날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생각하면 찬양이 나오고 기쁨이 넘칩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여리고를 무너뜨리셨습니다. 사람이 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한다고 하면 힘을 빼십니다. 모세에게 사십년 동안 힘을 빼게 하신 후 사용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힘을 빼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가 흥왕해지면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라도 민족도 없어진 그 때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려거든 먼저 길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에도 길이 있습니다. 나를 죽여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십니다. 큰 일일수록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두레박을 가져와서 퍼낸다고 홍해 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잠잠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리고성도 그렇습니다. 마지막 함성은 믿음의 함성이요 하나님이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8. 강한 믿음으로 약한 믿음을 용납함
우리는 강한 믿음으로 약한 믿음을 감당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내가 믿음이 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 약하다는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스스로 믿음 없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는 없고 하나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 것이 믿음이 강한 것입니다. 남들 비난하는 것은 벌써 믿음 없는 표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런 믿음 가운데 본문 2절은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선은 뭔가요? 우리의 선은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하면 그것이 선입니다. 들어오지 말라고 하면 그것이 악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용납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아주실 일만 하십시오. 그것이 선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9. 선: 참된 것을 행함으로 복을 받음
그런데 이 선에는 항상 두가지가 있습니다. 구약의 선은 토브요, 선약은 아가토스입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진리요, 두번째는 복입니다. 참된 것을 했을 때 복을 받는 것이 선입니다. 성경의 선은 윤리적 개념이 아닌 언약적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순종할 때 복을 주시는 것이 선입니다. 그래서 선하신 하나님, 선을 베풀러 왔노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그러므로 선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진리 가운데 서야 합니다. 진리 없이 복주시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칼 쥐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를 알아야 복을 주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선을 이루라는 것은 옳은 가운데 복을 주시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뜻, 올바름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보입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람으로 어렵다면 다시 기도 하십시오. 기도하고 아멘 하면 그것이 선입니다. 저 멀리 진리가 있지 않습니다. 깊고 오묘한 다른 진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백성에게 괴롭히는 자들을 붙여놓으셨다면 복주시려고 붙여 놓은 것입니다. 힘들게 하려고 붙여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 안하고 혈기대로 하면 정말 어렵습니다. 그저 순종하십시오. 말씀대로 원수를 살아하고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갖다 대십시오. 세상에서 하는 이야기를 따르지 마십시오. 선하신 하나님은 말씀대로 좇아 살때 복을 주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 강한 것입니다. 그리고 덕을 세우라고 합니다. 준법이 아니라 건덕이다. 세울 건입니다.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법만 지키면 된다고 하면 안됩니다. 법은 일에 관한 것이고 덕은 자기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일이 이루어져도 사람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덕스럽지 않은 것입니다. 전부 법만 빠져나가면 문제 없다고 한국 교회도 사회도 그렇습니다. 법은 소유에 관한 것이고 덕은 존재,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절대 우리 자신을 지키십시오. 우리 자신이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너무 우리 한국 교회가 세상 법정에 왔다갔다 많이 합니다. 세상 법 아래 교회가 가 있습니다. 교회를 아무 것도 모르는, 부처 믿는 판사가 교회 판결을 하면 교회가 따라야 합니다. 이런 것 때문에 우리 장로교가 생긴 것입니다. 가이사는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저도 교회 세금 문제 때문에 방송에도 몇번 출연했지만, 다 이런 측면이 있습니다. 덕스럽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한다고 했습니다.
10.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강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알고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고 믿음이 강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고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한 마음을 가집니다. 한 마음은 나도 보고 친구도 보고 하나님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 보는 사람은 나 보다가 빠져 죽습니다. 줄을 잡으면 되는데 말입니다. —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8) 두 마음으로 정함이 없는 자가 믿음 없는 자입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를 위해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지금 예배 가운데 계십니다. 지금 우리를 보고 계시며 자녀들 다 살피고 우리 상황을 알고 싸매 주십니다. 우리 안에 빛으로 임하십니다.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정결해지고 힘이 생깁니다. 걸음이 가벼워집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주님께 주여 주여 하면서 맡기십시오. 인생에 특별한 일이 없습니다. 주님만 바라 보십시오. 두 마음 품지 말고 말입니다. —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 1:6) 하나님만 바라보시면 됩니다. 이런 은혜가 성도님들 가운데 있기를 원합니다. 사울왕은 왕이었지만, 자기를 바라보므로 미쳤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목동이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니 골리앗을 이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171126]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82)]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음 (롬15:1-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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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