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03]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83)]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 (롬15:4-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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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3]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83)]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 (롬15:4-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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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5: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롬 15:5)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롬 15:6)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녹취록>

1. 성도의 견인

하나님은 한 번 구원하신 백성을 끝까지 붙드시고 놓지 않으십니다. 한 번 은혜의 빛을 비추신 백성은 빛의 자녀로 삼으셔서 영원토록 빛나게 하시며 하늘 면류관을 약속해 주시고 그것으로 영생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성도가 끝까지 이끌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차를 견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견인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견인 당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끝까지 끌고 가십니다. 그런데 이처럼 성도를 끝까지 이끌어 가시는 것은 성도가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 가운데 하나님이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내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말세에 인내로 영혼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오래 참아야 합니다. 참아야 열매가 맺히고 굳어지고 온전해집니다. 그런데 인내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 때 상하고 애통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부모님이, 친구가 우리를 찾아와 따뜻한 위로를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이끌어 가실 때는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그 때 그 때 속삭여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보혜사 성령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속삭이는 영이요 중보의 영이요 위로의 영입니다. 그 보혜사 성령이 어떻게 우리를 위로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2. 말씀으로부터의 인내와 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으로 기록되게 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듣고 읽게 생각나게 하셔서 위로하십니다. 본문 4절은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우리의 소망을 가지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내와 하나님의 위로는 바로 성경으로부터 나옵니다. 예배 시작 전 기도에서도 그랬지만, 빌라델비아 교회의 칭찬은 인내의 말씀을 지킴에 있었습니다. 성경의 위로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인내의 말씀을 지킨 것인데 그것은 말씀으로 인내하고 참고 끝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서 성경이 우리에게 임하면 위로하면서 지식을 주시고 위로하면서 우리가 행동하게 하십니다.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교훈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길을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습니다. 하루 종일 헤매더라도 길을 모른다면 애쓰는 것이 무익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우리를 교훈합니다. 교훈은 진리를 알리는 것이요 책망은 그 진리를 우리 안에 비추어서 새겨지게 하는 것입니다. 교훈은 알려주는 것이고 책망은 새겨지게 해서 우리의 양심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행할 바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르게 함은 그 책망 가운데 그 말씀이 우리에게 새겨져서 우리를 친히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훈은 말씀을 듣게 하시고 알게 하시고 책망은 그 말씀이 새겨져서 양심의 가책과 결단을 주고 바르게 함은 그로 인해 우리를 참 삶으로 이끌어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3.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

그리고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의는 우리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 대속의 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 의로 우리를 교육하기에 합당한 것이 성경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교훈은 우리에게 알게 하심이요 책망은 우리 안에 새겨주심이요 바르게 함은 그것에 이끌려 나가게 하심이요 의로 교육한다는 말은 우리가 끝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영생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 것만으로 변화가 됩니다. 어떤 생물은 빛을 받으면 색이 변하기도 합니다만, 우리는 빛을 받았다고 물리적인 색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령의 색깔은 변합니다. 사람은 보는 것에 좇아서 마음의 색깔이 변하는 것입니다. 흐릿한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온통 마음에 자욱한 안개가 낍니다. 의심의 눈으로 보면 모든 만물이 의심스럽습니다. 밤도 낮도 해가 뜨는 것도 달이 지는 것도 의심입니다. 가을에 곡식이 열매 맺는 것도 전부 의심입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혼탁하게 가지면 눈을 혼탁하게 가지면 마음의 창도 혼탁해져서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맑은 눈으로 바라보면 어두운 것도 깨끗하게 되고 흐릿한 것도 오히려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배웠다고 해도 매일 어두침침한 눈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면 누가 그 사람에게서 기쁨과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덜 배웠다는 말을 듣더라도 마음과 눈이 맑으면 그런 사람은 힘과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창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말단의 지식도 알려주실 뿐 아니라 그 지식에 없는 눈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옳게 보는 것입니다. 옳게 봄으로써 옳게 생각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 책이 있었고 티비를 보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많은 경우 핸드폰이나 텔레비전이나 신문 이런 곳에서 정보를 얻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접하는 정보는 얼마만큼 진리일까요? 과연 기자들이 기사를 쓸 때 진리라는 것에 방점을 찍을까요, 아니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판매지수를 올리는데 관심을 가질까요? 잘 알 수는 없지만, 많은 경우 아니면 말고 식의 지식들이 많을 것입니다. 정말 거짓 정보의 홍수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정말 착한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이 과연 잘 조명을 받을 수 있는가? 우리는 입에 담기도 싫은 범죄를 최근에 하나 봤습니다. 부녀가 몸이 성하지 않아 세상에 광고를 해서 십억, 이십억을 모금했는데 갑자기 돈이 들어와 보니 호화생활을 하고 음란해지고 그러다보니 아내까지 음란한 곳에 팔아버리고 딸의 친구를 죽여버리는 것이 결국은 비진리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착하고 불쌍한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정말 무서울만큼 비진리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진짜 억울한 사람은 모함을 당하고 악한 사람이 착한 자리에 서 있는 이런 것이 세월이 갈수록 더하는 것 같습니다. 

4. 위로의 주,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변함없는 진리를 알려 줍니다. 우리는 성경의 눈을 가져야 근심을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을 합니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것은 삶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쓸데없는 근심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속적인 근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와 영생을 이룬다고 성경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으로 우리를 온전케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합니다. (딤후 17) 우리는 분별도 온전하지 않고 분별이 온전하다고 해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참으로 능력이 없습니다. 살아갈수록 무능함만이 보이고 내 마음의 약함부터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들어와서 인내하게 하고 위로 받게 하고 그 가운데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거짓 소망이야말로 우리를 헛되게 합니다. 참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바램이 온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이 온전히 움직이는데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인내와 위로 가운데, 그 말씀 가운데 온전합니다. 이사야서는 1장부터 39장까지는 구약에 해당하고 40장부터 66장까지는 신약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 40장 1절에서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약의 시작은 바로 위로입니다. 그리고 같은 장 8절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고 합니다. 위로와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위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꽃은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니 그것이 우리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말씀이 육신이 되사 우리에게 임합니다. 같은 장 11절은 ‘그는 목자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끌어 안으시며’라고 합니다. 이사야서 40장이 신약을 잘 보여줍니다. 위로의 주가 오시는데, 그 분이 8절에 세세토록 영원히 있는 말씀인데, 그 말씀이 목자로 오셔서 어린 양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위로는 말씀이요 끝내 그 위로는 그리스도 예수가 목자로 오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에 위로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아이들이 날이 서있고 여유가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말 한마디 붙이기가 힘듭니다. 좋은 것을 좋다 하기도 힘든 세상입니다. 얼마나 아이들이 날카로운 모습으로 있는지요. 그러나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욕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위로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서릿발 같이 계속 쫓기기만 하고 위로의 말을 많이 못들으니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번 주에 참으로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일로 나서지 않았다면 힘들지 않았을텐데, 저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로 욕을 얻더라도 가르쳐야 합니다. 소를 키워도 부드러운 것만 가지고 먹이지는 않습니다. 딱딱한 풀도 먹여야 합니다. 우리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서로 판단만 합니다. 학생과 교수가 서로 판단합니다. 교수 평가니 이런 것을 하고 교수는 학생들에게 시험 성적을 매기고 말입니다. 위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도 학생들을 책망하는데 빠릅니다. SNS에 안좋은 내용이 올라가있다고 바로 연락이 옵니다. 공공에 안좋은 내용이 바로 퍼집니다. 그것이 요즘 세상입니다. 그런데 어제 밤늦게까지 학생들로부터 '금요일 기도하면서 교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졌다’는 등의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제가 참 모자란 사람이고 학생들이 나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위로가 참으로 필요한 세상입니다. 신약시대가 바로 위로로부터 시작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부부 간에, 부자, 모녀 지간에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판단은 넘칩니다. 평가는 넘칩니다. 가족이 서로 평가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위로해야 합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우리도 모이면 서로 위로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참 살갑게 부드럽게 위로하면 좋겠는데 제 마음은 그런데 연약합니다. 그러나 위로하면 좋겠습니다. 굳이 표정이 아니라도 정이 있고 따뜻한 것 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판단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부족하지 않기는 커녕 전혀 없는 것 같은 세상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신 세상입니다. 헤롯에 짓밟히고 로마에 짓밟히던 그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의 주님으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평강의 왕으로 화목의 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위로의 성령을 받았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위로의 성령입니다. 흐트림 없이 길을 가되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좌우의 균형을 맞추고 듣는 귀를 크게 열고 손을 균형 있게 흔들고 발의 걸음도 반듯하게 할 것입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 온전해야 합니다. 유교적인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가 우리에게 넘치면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를 위로로 키우면 모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가 나면 안됩니다. 참 어렵습니다. 어디 가나 날카롭게 베는 역할만 합니다. 어딜 가도 끌어안고 끌어 모으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우리 자녀를 키워야 합니다. 

5. 믿음의 희락과 평온함과 인내

주님이 주시는 믿음에는 항상 표현이 따릅니다. 믿음의 요소에는 분명히 지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믿습니다.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아드립니다. 그것이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에는 지식과 더불어 성령이 주는 평온함이 따릅니다. 그래서 믿음이 우리에게 역사하면 말씀의 지식을 얻을 뿐 아니라 희락이 있고 먼저는 즐거움이 들어옵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즐거움이 들어옵니다. 원수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해도 오리가 아닌 십리를 같이 가라고 해도 즐겁습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우리에게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를 즐거움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믿으면 희락이 있고 우리에게 말씀이 임하면 잠잠히 여호와의 행사를 바라보게 됩니다. 홍해 앞의 이스라엘 백성, 여리고 성을 도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잠잠한 마음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면 요동함이 없습니다. 내 영혼 평안하다는 찬송가도 있습니다. 이 잠잠함이 인내인 것입니다. 인내는 최고의 열매를 따기 위한 마지막 은혜입니다. 인내가 없으면 다 놓칩니다. 마지막 99%까지 했는데 1%를 기다리지 못하면 풋과일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가 무르익을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따먹는 것입니다. 농부들의 최고의 덕은 무엇일까요? 어부에게는요? 농부의 최고의 덕은 열심히 씨를 뿌리고 밭을 일구고 김을 매는 것이라기보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가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농사 지을 줄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어제 뿌리고 오늘 헤쳐서 자랐는지 살펴봅니다. 어제 고구마를 심고 오늘 꺼내서 싹이 났는지 살펴봅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주님도 하나님의 때가 차매 오셨다고 성경에서 말합니다. 때가 찬 경륜을 이루는 그것이 인내입니다. 가장 인내가 부족한 국민이 우리 국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일본은 잘 참고 중국은 더 잘 참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머리가 좋아서 금방 99%까지 가는데 1%가 모자라서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외교도 그렇다고 합니다. 머리가 비상해서 명분도 이기고 좋은 위치에 있으나 기다리지 못한다고 많이 이야기합니다. 주 안에서 잠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역사 가운데 인내할 수 있습니다. 저도 신학교 들어와서 주의 종으로 그나마 배운 것이 참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많습니다. 급하게 움직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밤새 동풍을 불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6. 믿음의 소망과 인내 

그리고 담대함, 평화,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성령이 역사하면 말입니다. 칼빈이 이야기한 것입니다. 본문도 그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딤후 3:16) 그 말씀의 역사 가운데 우리가 인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내가 없으면 모든 것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젊은이들은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겠지만, 그것과 더불어 얼마나 기다릴까를 많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익한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이생의 지식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세의 지식도 가르칩니다. 현세와 내세의 지식을 함께 가르칩니다. 절대 인내가 없이는 열매를 딸 수 없습니다. 참아야 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잘 하는 사람이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조금 뒤쳐지지만 참는 사람에게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인내의 말씀, 빌라델비아가 받은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립니다. 참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금방 확인하려고 하고 주고 받으려면 사랑이 아닙니다. 지켜보고 봐주고 믿어줘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잠잠히 바라봅니다.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여호와가 우리를 잠잠히 바라봅니다. 성경은 이생의 삶과 내세의 삶을 연결시켜주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참아야 합니다. 성경의 위로는 인내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를 교훈하면 참고 위로를 받게 되고 그 가운데 우리는 필히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그것을 물어보십시오. 당신은 무엇을 바라고 지향하는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없는 믿음은 헛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소망의 실상입니다. 인내가 있는 사람은 내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한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한다는 사람은 인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인내하게 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므로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신다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의 말씀에는 위로가 있고 그 인내와 위로 가운데서 우리는 소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스스로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 대해서 저는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6년동안 우리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우리 교회는 한 달란트 교회가 아니라 다섯 달란트, 열 달란트 받은 교회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렇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친히 이끄실 줄 믿고 소망 가운데 인내하고 인내 가운데 소망하는 그것이 우리 교회가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너희는 오히려 이 때 잠잠하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위로는 우리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요 하나님이 내 안에 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적인 살이 붙는 것입니다. 위로가 없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열매가 없고 형식만 있지 살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위로가 넘치는 삶은 살이 붙습니다. 왜요? 여호와께서 그 틈사이를 넓혀주시고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니 성품이 닮아가므로 영적인 살이 붙습니다. 그래서 위로가 넘쳐야 평강이 있고 그래야 사랑하고 그 가운데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참으면서 그 가운데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얄팍한 종잇장 같은 우리의 심령이 무엇을 참고 이룰 수 있나요? 영적인 살이 붙고 영적인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위로입니다. 이를 위하여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함께 먹고 주무셨습니다. 세리와 창기와 더불어 먹고 마시시고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고 그들과 함께 주무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위로입니다. 한번 왔다가 돈 받고 상담해주는 정신과 의사 같은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먹고 자고 사는데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목자는 한시도 양을 떠나지 않습니다. 양을 떠나면 양이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일수록 품에 안는 것입니다. 철들지 않은 양일수록 품에 안습니다. 훈련받지 못한 양일수록 품에 안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위로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롬 15:5) 예수 그리스도가 여기에 위로자로 나타나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 소망 가운데 참을 때 그 참음은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에는 창조적인 권능이 있습니다. 겨울에 고드름 하나도 인내입니다. 고드름은 위에서 아래로 달립니다. 밑에서 위로 쌓이는 것은 그렇다고 하지만, 거꾸로 알알히 조금씩 결정체를 붙여가면서 고드름을 내립니다. 그것이 인내입니다. 설치면 다 떨어집니다. 냉기가 서리고 서려서 쌓인게 고드름입니다. 인내는 그저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는 것이야말로 큰 창조적인 권능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참으시고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이 침묵하셨습니다. 주님의 침묵이 세상의 모든 말을 이기는 권능을 지니신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라는 교부는 그는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이 잠잠하셨으나 영원하신 말씀이셨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말씀입니다. 로고스입니다. 그런데 그가 잠잠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즐거움 가운데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본문 6절, 한 마음과 입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잠잠히 기도하십시오. 아무리 사람 천만명을 만나도 전화를 천통, 만통 해도 잠잠히 기도해야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평안함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일로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나를 다 삼킬 것 같아도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애굽의 병정이 쫓아와도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습니다. 불안해 하지 않고 찬미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도 불속이 놓이고 사자 앞에 놓였습니다.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삼킬만한 불안은 없습니다. 평안한 마음 가운데 주님 안에서 위로 받으십시오. 그 가운데 잠잠히 인내하면서 소망하십시오. 오늘 세 단어가 나옵니다. 인내, 위로, 소망입니다. 이 세 단어가 다 붙어 있습니다. 인내하려면 위로가 있어야 하고 인내 가운데 위로 받고 그 가운데 소망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위로하십니다. 아무 것도 없는 백짓장 같은데, 여호와의 위로가 들어오면 살이 붙고 내 마음에 두께가 생깁니다. 나도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잠잠할 때 그렇습니다. 들리고 떠들면 위로가 없습니다. 가룟 유다같이 여기 저기 제사장 찾아 돈 던지고 없는 걸로 하자고 하면 위로가 없습니다. 다윗과 같이 큰 죄를 지었어도 금식하며 기도하면 그 때 위로가 생깁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전 3:23) 이것이 우리의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인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에 속한 백성,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땅에 보낸 것처럼 그 위로주를 우리의 목자로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슬픈 일이 있습니까? 억눌린 일, 애통한 일이 있습니까? 무조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나를 애매하게 모함하고 힘들게 하더라도 십자가만 바라 보십시오. 오늘 새벽에 나눈 말씀입니다. 안나스, 가야바, 빌라도, 헤롯, 4대 악에게 주님은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주님이 죄 덩어리 4인에게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주님은 도수장의 양과 같이 침묵하셨습니다. 사람으로 상처 많이 입고 지나가는 시선으로, 일로 힘들더라도 십자가만 바라 보십시오.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러게 하십시오. 본문 5절입니다. 위로받고 인내하고 소망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겁내지 마십시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이끄시고 역사하시고 터를 잡으시고 기둥을 세우시고 지붕을 덮으십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부족한 종이 뭘 알겠습니까? 다만,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우리가 바랄 뿐입니다. 그 일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할 뿐입니다. 저는 십자가지기교회가 우리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으로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그저 즐겁고 복되고 베푸는 교회가 아니라, 그것도 틀리지 않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 높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소망 밖에 없습니다. 그저 간판이라도 걸 수 있으면, 십자가를 만들어 세울 수 있으면, 피아노치며 찬송할 수 있게 해주시면 좋겠다는 바램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지기교회라는 이름을 길가는 사람들이 보기를 소망합니다. 다르게 거창하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로하시고 이 때 참게 하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이 어려운 우리 교회의 귀한 시기에 더욱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더욱 불쌍히 여겨 주시고 위로가 넘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사야서 40장, 시대의 전환기에 위로가 있듯 우리 교회도 이전을 계획하는 시점에 하나님이 큰 위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