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10]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84)] 영광의 소망 (롬15:7-1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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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0]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84)] 영광의 소망 (롬15:7-1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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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5:7)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 15:8)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롬 15:9)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15:10)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롬 15:11)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롬 15:12)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롬 15:13)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녹취록>

1. 지상의 삶과 천상의 삶을 잇대는 영광

성도의 삶이 지상에서 끝난다면 사실상 그리스도인의 삶은 비참할 것입니다. 주님의 공생애가 십자가 죽으심으로 긑이 났다면 주님의 생애 만큼 비참한 생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 이 지상의 삶이 끝이 아니고 지금 현세도 주님과 더불어 살지만 이후 영원토록 주님과 더불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는 얼굴을 맞대고 보는 영광스러운 영화의 상태로 살아간다는 소망이 있으니 성도의 삶은 복되고 즐거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질고와 환란이 많습니다. 태생적으로 겪는 일도 가족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애통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 때 그 때 지나치면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지만 인생은 각양 각색의 환란과 수고와 수치로 감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면 이런 것들이 다 그쳐 갑니다. 주님의 빛은 녹이지 못할 고난이 없고 가져가지 못할 염려와 수치와 근심이 없습니다. 주님은 어떤 빛보다 밝으셔서 그 앞에 서면 모든 것을 태우되 우리 자신을 남기셔서 단독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설수 있게 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만물은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이 없으면 그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미류나무가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며 물의 고기도 의미가 없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리 인생을 두시되 천지 만물 중 우리 인생을 마주보시기 위해 인류와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은 인생에 봉사해야 하고 인생은 만물을 위해 선과 의를 회복해야 합니다. 인생이 악한 이상 자연도 신음합니다. 모든 것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온전해야 합니다. 

이 땅의 삶과 천상의 삶을 잇대는 것은 영광입니다. 영광을 구약에서는 카도시, 신약에서는 독사라고 합니다. 영광이 지상의 삶과 천상의 삶을 이어주는 터널과 같습니다. 영광은 하늘이 빛이 지상의 우리에게 내려쬐는 통로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만 강한 빛을 받고 눈이 먼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다 영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옛 것을 씻어버리고 거듭나는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의 도구요 영광을 맛보는 자입니다.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영광이라는 단어만큼 어려운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단어도 없습니다. 수치스럽고 욕되고 연약한 것을 심어 영화로운 것을 거두는 그것이 이 지상의 삶의 의미입니다. 농부가 봄날 씨를 뿌려 가을에 걷이를 한다면 우리 인생의 수확은 온전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빛되신 하나님과 마주하고 영원히 마주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질병과 고통이 있지만, 온전히 기쁨만 있는 영화로운 모습으로 하나님과 살아가는 것이 이 지상의 삶과 천상의 삶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우리를 참여시키셔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심

로마서는 본문이 포함된 15장에서 사실상 내용적으로 끝납니다. 16장은 15장의 말씀을 좇아 잘 산 일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서로 받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영광이라는 단어는 어렵습니다. 누구나 그 단어를 사용하지만 아무도 잘 알지 못합니다. 제가 영광이 뭔지 생각할 때 그것은 완전한 것, 부족한 것이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 이상 채워지지도 그릴 수도 보탤 수도 없는 상태라고 생각됩니다. 바늘 하나 들어갈 만큼도 틈새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영광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나타난 빽빽한 구름입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보았고 그룹과 스랍들의 찬미 가운데 거룩, 거룩, 거룩이 세 번 외쳤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3은 완전을 뜻합니다. 더 이상 치고 들어갈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땅에서 불완전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팽이는 언제 멈춰설지 모르는데 그것보다 더 불안하게 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영광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광의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므로 사실상 영광을 받을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더이상 채워지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림으로 하나님을 채운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것을 쉐키나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서로 완전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고백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무변하시고 절대자이십니다. 시작과 끝이십니다. 하나님은 더이상 채워지지 않는 분, 우리가 무엇을 드려서 갚음을 받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영광 혹은 다른 어떤 것을 드리거나 돌릴 수 조차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거래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단 한가지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 우리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를 통하여서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의 광채십니다. 그리고 본체의 형상이시라는 것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 빛이 우리에게 온전히 밝아져 역사하는 것입니다. —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10-11; 21) 여기에서 영광이라는 것을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그 분은 스스로 완전하시고 채워질 것이 없으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돌려드릴 때 우리가 완전함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우리가 완전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나의 것을 떼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음 비우셔서 채우십니다. 우리는 채움이 채움이지만, 하나님은 채움이 비움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편의 자리에 앉혀 주시는 것입니다. (엡 2:5-6)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히 베풀어주시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벧전 4:11; 1:21) 베드로전서 이 본문은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받으셨다고만 하거나 돌렸다고만 해야 하는데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영광을 주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신앙 생활에서 이것을 잘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인생과 다르십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주었으니 내가 받겠다는 생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은 사실 완전하신 하나님의 그 자리에 우리를 세우셔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벧전 5:1) 베드로전서나 후서는 당시 소아시아에서 네로의 박해를 앞두고 있는 교회에 권면의 말로 기록되었습니다. 즉, 이런 고난을 통해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3. 성도의 고난이 영광

성도의 삶은 고난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 고난이 영광입니다. 그와 함께 영광받기 위하여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는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추위를 맞이하면 이미 따뜻함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계절을 불평하기보다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막연히 감사해야지 막연히 불평하면 안됩니다. 특별한 일 없으면 감사해야 합니다. 괜히 감사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매사 만사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빛이 비추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그 소아시아의 네로의 박해를 앞둔 성도들에게 이 귀한 진리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이 단에 누워 아비의 칼을 맞을 때 그 이삭의 마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유일한 것,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인 죄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왜요, 우리를 위해 고난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그 때 하늘에서 음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우리는 주를 위한 고난과 열심이 있을 때, 이 하늘의 음성을 미리 맛보고 들어야 합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애매하게 고난을 당했습니다. 죄 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때, 그 아버지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심

본문 7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으니 우리도 서로 받으라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받으셨습니다. 받았다는 말은 번역이 잘 되었습니다. 어려운 말로 용납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받으셨습니다. 세리, 창기, 소경, 병자, 다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도무지 사람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너는 이러하니 오지 말라고 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태생, 악함, 어리석음을 이유로 오지 말라고 하신 자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올렸습니다. 이방 백부장도 받았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자입니다. 전쟁에서 최고 앞서 칼을 휘두르는 자입니다. 많은 사람을 죽인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역시 받아들이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받았습니다. 이세벨의 고향이 수로보니게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도 받으셨습니다. 그 쪽으로 유대인은 가지도 않습니다. 저주의 땅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도 받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셔서 받으셨나요? 우리가 이방 백부장이요, 수로보니게 여인이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내가 38년 된 병자, 열두해 혈루병 앓는 자, 세리, 창기입니다. 내가 돌을 들고 앉아 있는 부정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받으셨습니다. 아이가 오는 것도 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아직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아이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찾으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런 자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애통할 때 그런 우리를 받으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받으셨고,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올렸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피를 흘릴 죄가 없으십니다. 그 예표가 본문 8절의 할례입니다. 주님은 할례를 받으시지 않아도 됩니다. 할례는 모든 인류가 타락한 가운데 하나님의 가정에 들어가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온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셔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다 지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은 이 땅에서 죄인들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가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것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한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무변함, 변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뜻, 창세 전에 작정하신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의미합니다. — “.”(엡 1:4) 주님은 저주의 자리에 서실 분이 아니지만 십자가 장대에 매달렸습니다. 죄가 없으므로 버림받을 일이 없는데 죄가 없으신 분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면서 버림받는 자리에 서시고 끝내 죽으셨습니다. 원죄에 속하지 않으므로 죽을 죄가 없는 분인데 죄인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받으셔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그리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와 같은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아무도 영광의 도구가 되지 못합니다. 

5. 우리도 서로 받아야 함

그러니 우리도 서로 받으라고 7절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서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잘 안됩니다. 될 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저 용서하고 허물을 덮고 이해해면 되는데, 잘 안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것 나눠먹으라는 정도가 아니라 받을 수 없는 것을 주님과 같이 받으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받을 수 없는 가운데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하나님이 바꿔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사는 곳이 한평이고 두평이면 어떻나요? 그저 그리스도와 같이 받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바로 오늘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도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이 받아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 그 영광의 대상 혹은 도구가 이제는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들도 포함된 것입니다. 우리를 받으셔서 하나님의 자녀이자 영광의 도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입니다. 대적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언제든 우리는 이 긍휼하심으로 영광을 돌리게 하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순되어 보입니다. 우리가 뭘 돌린다고 하면 내가 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것은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받을때이니 말입니다. 정말 찌질한 나를 받아주시니 그때 영광 받으십니다. 내가 뭔가 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이방을 영광의 도구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사함이 적으면 올림도 즉 감사도 적다는 것입니다. 사함이 많은 자가 영광을 많이 돌립니다. 저 같은 사람도 사함을 크게 받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내가 긍휼히 여김을 받지 않으면 영광 받으실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 여긴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지 못하면 안됩니다. 교인을 잡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촉망받는 유대의 지도자인 사울입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에서 그랬다면, 바울이 이스라엘에게 이런 입지였습니다. 이런 사울을 되돌려서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6.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때 하나님께 영광

여러분, 긍휼을 구하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야 싹이 납니다. 다른 것은 모두 옮기는 것 밖에 안됩니다. 내가 아무리 해도 옮기는 것 뿐입니다. 벽돌 하나 옮기면 그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으면, 때가 되면 시절을 좇아 과일을 맺습니다. 이것은 옮기는 것과 다릅니다. 성도들의 삶은 이런 부요함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기계적, 산술적인 법칙이 아닌 생명의 법칙입니다. 겨자씨가 눈에도 안보이지만 싹이 나서 큰 나무를 이뤄 그늘을 내는 생명의 법칙이 있습니다. 내가 나서서는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산술적인 것 밖에 안됩니다. 잘되어 봐야 1+1은 2인데, 그것마저도 도둑이 들어와 0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야 합니다. 그 가운데 본문 10절에서 12절 말씀이 있습니다. 12절은 이새의 뿌리라고 하는데, 이새가 다윗의 아버지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 11:10)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고 했는데, 이사야서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고 했습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고 그것이 이제 열방을 다스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보아스, 이새, 다윗의 후손으로 에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십니다. 미가서에서 예언된대로 말입니다. 시편 2편 2절과 7절에 예언된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씀하고 본문은 소망을 두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13절은 소망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7. 그리스도인의 소망: 하나님 자녀 삼음 받는 것

소망은 본질적인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소망은 말입니다. 존재적인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사건적인 소망이 아니라 말입니다. 나무는 나무로서 즐거워야 합니다. 어느 행인이 칠을 해준다고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즐거운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어떤 일의 즐거움보다 본질적인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왜 이새의 뿌리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나요? 그것은 우리 자신을 바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소망입니다. 본문 13절은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라고 합니다. 기쁨은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강은 자기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나는 내 자리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계십니다. 평강은 여호와는 여호와의 자리에 나는 내 자리에 있는 것인데 그 자체가 믿음 안에서 소망입니다. 소망은 다름아닌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우리가 복받는 것입니다. 큰 복이 이것입니다. 큰 복을 받으려면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나에게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와 나의 자리가 뚜렷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고관대작이되어도 교회에 와서 무릎 꿇고 청소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세계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강은 하나님과 내 자리가 정확히 정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학식이 깊고 예술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릎 꿇어야 합니다. 다윗은 왕이라도 옷이 내려갈만큼 춤추면서 법궤를 옮겼습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자세입니다. 세상에서 지위가 올라가고 재산이 올라간다고 교회에서도 거드름 피우려고 하면 절대 안됩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은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충만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소망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니 말입니다. 세상에서 잘 사용되어야 하는데 그 상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집을 지는 것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안락하게 살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께 사용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교회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생업이 상위 개념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틈만 나면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틈만 나면 사랑이라는 말을 써야 합니다. 

이 겨울에 한해가 가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만나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고, 사마리아 여인은 전도자가 되었고, 청년 사울은 이방의 빛이 되었습니다. 구례네 시몬은 주님을 만나 주의 십자가를 지고, 아리마대 요셉은 새로 산 묘를 주님의 시체 안치하는 곳으로 사용했고, 갈릴리로부터 쫓아와 주님을 따른 여인들은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나 유익하게 사용되는 소망, 그 일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이생의 삶 가운데 사용되는 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 생, 우리 가정, 자녀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광을 잇대어 삽니다. 지상과 천상을 영광의 통로로 잇대어 삽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불평하지 마시고 괜히 감사하고 괜히 즐거워해야 합니다. 습관이 아닌 성령 충만입니다. 손이 시렵다고 불평하지 말고 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그러면 손 시려운 것도 건강에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