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17]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85)] 복음의 제사장 (롬15:14-1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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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7]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85)] 복음의 제사장 (롬15:14-1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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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5:14)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롬 15:15)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롬 15:16)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녹취록>



1.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

로마서는 크게 교리적인 부분과 삶의 부분이 있습니다. 11장까지는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하시는 은혜의 도, 교리를 이야기하고 있고 이후 12장부터 16장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12장 1절은 우리 자신을 영적 산 제물로 드려라,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15절,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대략 썼다고 기록합니다. 로마서의 집필 계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쓴 개인 서신입니다. 베드로서가 베드로가 쓴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개인의 서신으로 보는 것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편지가 아닙니다. 어느 한 저자가 아주 유명한 소설을 써서 많은 사람들이 읽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또 내가 글을 쓰는데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편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만방에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성경으로, 하나의 서신이 아닌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다면 그 서신은 어느 것보다 귀하고 고상할 것입니다. 

이 성경의 뛰어난 점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이 감동시키셔서 은혜로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가 분명히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쓴 편지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편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영으로 기록해서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정통신앙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쓰는 이유에 대해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로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다’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 말씀을 그저 개인의 서신으로 보지 아니하고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므로 이것을 사사로이 풀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알려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믿는 백성에게 쓴 편지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창세기는 모세가 그저 기록하고 쓰신 것이 아니라, 모세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들을 쓰게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한 나머지 모세 오경을 쓰게 하십니다. 나머지 성경에도 모두 하나님의 뜻과 명령과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성경보다 더 우리에게 아름답고 와닿는 말씀이 없습니다. 성경은 그저 사변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건입니다. 창세기가 있고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있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만큼 어떻게 보면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책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역사적 규모가 큰 책이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소설보다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에는 짤막짤막한 몇 줄의 말씀도 큽니다. 삼손의 이야기가 이야기가 길지 않지만 그것으로 오페라도 만들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2. 주의 말씀 없이는 신앙생활 할 수 없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것이 보는 것이고 그를 믿어 아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보여달라는 것은 어린이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를 믿고 아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엄연히 역사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한 개인의 편지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야 하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상한 심령을 기뻐하고 여호와를 아는 것을 기뻐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성경 없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고 하면 그것은 내 만족과 기쁨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몸을 끌면서 울면서 절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원하십니다. 내 정서, 내 감정을 만족시키는 것은 다 넘어집니다. 봄날 꽃 필때 기뻐하지 않는 사람 엇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은 장마철과 한파 때에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좋을 때 좋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 같이 감옥에 있어도 웃고 찬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잡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시면서 찬미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주의 말씀을 가지고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우리의 심령에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선율과 성령의 역사가 말씀을 통해 튕겨지면 우리의 심령이 거문고와 같이 울립니다. 우리의 심령이 그런 하나님의 악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의 경줄과 위줄이 짜여져야 합니다. 말씀으로 심령이 직조되어야 합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믿고 아멘하고 신뢰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현의 소리의 길이가 달라집니다. 짧은 실로폰 소리일지 큰 피아노 소리일지 결정이 됩니다. 진중한 소리와 깊은 소리를 내려면 말씀의 현이 있어야 합니다. 옥중의 바울과 실라도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들었습니다. 

3. 복음의 제사장 직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예배드리고 기도함

본문 16절은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 직분은 첫째로 제사드리는 것과 둘째로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백성을 대표해서 제사드리는 것과 백성의 입이 되어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구약의 제사장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특별한 정결례와 의식이 있습니다. 권위를 주시고 일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갈 권한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예배드리고 기도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안에는 항상 말씀이 용솟음쳐야 합니다. 항상 우리 안에 새겨져야 합니다. 성경을 덮어놓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요 내 신앙이지 하나님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님의 말씀을 좇아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그릇된 신앙생활, 사울왕과 같은 질서 없는 임의의 신앙생활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우리에게 큰 지식이 없어도 하나님 말씀 듣기에 힘쓰고 말씀 의지하고 예배 때 말씀에 귀기울이면 됩니다. 잘 배워서가 아닙니다. 세상의 지식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전 6:17) 한 영이라는 말은 한 성령으로 기록된 말씀을 한 성령의 역사로 아멘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6장 16절은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셔놓은 곳입니다. 말씀을 읽는 곳입니다. 작년에 예루살렘에 가보니 두루마리 말씀이 성전에 놓여 있습니다. 성전은 말씀이 귀한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고 할 때, 주와 합하는 자가 한 몸이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모셨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귀한 것은 내 정서와 감정과 기분을 채우는 것이라서가 아닙니다. 내 영혼의 가장 고귀한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귀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부요한 자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 계시의 영을 받아 내 마음에 말씀을 채우는 것입니다. 매 끼 식사는 한끼라도 거르면 안되는데 말씀을 한 주 거르고 한 달 거르면 안됩니다. 말씀이 부족하니 고린도 교회가 다투는 것입니다. 

4. 성도: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므로 성령의 역사가 있는 자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성령의 전인 것입니다. 말씀에 내 자신을 두기만 하면 그것에 내가 반응합니다. 그것이 성도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 때 부대낍니다. 말씀은 목사님이나 듣는다고 하는 생각은 사탄의 궤계입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다 소망을 가지고 어떤 감동과 감화를 받을지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매번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저도 그런 것을 느낍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므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성령으로 사니 그가 한 말이 성경에 기록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성령의 거룩한 전이 된 것입니다. 법궤가 지성소에 있으니 성전인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이 없는데 어떤 보석으로도 성전이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변화산에서 주님을 만난 것,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어떤 힘으로 살았을까요? 바로 그의 영광의 힘으로(골 1:10-11), 영광의 능력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이 영광의 능력이 어떤 것으로 표현할 수 없지만,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전부터 저에게 와닿았습니다. 예배 드릴 때,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빽빽한 구름, 이사야가 선지자로 직분을 받을 때 성전에서 거룩, 거룩, 거룩, 외쳐진 것, 그것이 바로 영광의 힘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냈습니까? 떨기나무에서 불은 있는데 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가운데서 그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전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온전히 임하였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 안에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육체로 나 자신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우리는 다 성령의 택함을 받은 자로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자입니다. —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15; 21) 생각나게 하려고 베드로서를 기록하신 것입니다. 본문 15절과 같은 말씀입니다. 

5. 성도: 말씀이 떨어져 썩고 열매를 맺는 영혼이 되었음

말씀이 우리 안에 임하면 급할 때 생각납니다. 그러나 평소에 가보지 않은 곳은 갈 수 없습니다. 꽃길이 아닌 뱀길로만 가본 사람은 개 피하다가 뱀길로 가서 뱀에 물립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나에게는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 학문도 배워서 바로 써먹지 못합니다. 저도 법학을 했지만 말입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삶의 길 생명과 영생의 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의 삶을 사는 방법을 알려 주는 곳입니다. 생각나게 합니다. 주일날 예배드리고 평소에 말씀 듣고 하면 아무 쓸모 없는 것 같아도 나를 굳게 잡아주고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우리는 진리의 성령을 받았으므로 말씀을 들으면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주 기쁨이 넘치는데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영광의 임재와 소망과 인내가 생깁니다. 오히려 급한 일일수록 잠잠해집니다. 당대 최고의 이집트 군대가 쫓아올 때도 홍해 앞에서 잠잠할 수 있습니다. 요새 제가 그런 마음을 많이 가집니다. 일은 여러가지 있는데 기쁨이 있습니다. 일이 한개, 두개일 때는 신경을 쓰는데 여러가지 동시 다발적으로 생기니 그저 하나님께 맡깁니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믿음 주신 분이 평정을 주셨습니다. 영어로 security 입니다. 안전하고 담대하고 담담하고 화목하게 사랑하게 하십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시면 이것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면 말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옥토가 되었다는, 말씀이 떨어져 열매를 맺는 영혼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가 아닌 자는 말씀을 들어도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이 떨어지면 먼저 썩습니다. 썩을 때 몸부림치기도 하고 갈등 영적인 전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다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호흡, 공기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썩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6.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

이번에 교회 이전 때도 조금만 힘들게 하십니다. 제 믿음이 적으니 말입니다. 가압류 된 일이 있었을 때도 기도하라고 시련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 로마 교회 사람들은 괜찮았습니다. 본문 14절입니다.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선함이 가득하고 지식이 차서 서로 권하는 자였습니다.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서 복받는 것입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토브입니다. 신약으로는 아가토스입니다. 이 선하다는 말은 그저 길가다가 재물 주워 복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서대로 살아갈 때 복받는 것입니다. 질서 있는 가운데 열매맺음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러십니다. 기도할 때도 선하신 하나님입니다. 선함은 항상 복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그저 그런 것이 아니라 탕자의 상태와 같은 것이 아닌 가정에 뿌리를 내리고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시키는 이유는 그 선함을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을 깨닫고 뿌리를 내립니다. 기도는 열매가 목적이 아닌 우리를 제자리에 박아놓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되고 밀착시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바로 토브입니다. 로마 교회 사람들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다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리고 지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로마 교회 지식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대충 한 것이 아닙니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 같이 지혜로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4절, 능히 서로 권한다고 합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도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선하고 질서 가운데 복받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탈법하고 불법해서 재산 많이 모으는 것을 바라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착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세상에서 향기가 되고 선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방법 여하를 막론하고 고관대작이 되거나 치부하기 원치 않습니다. 선하고 지식이 있고 서로 권하기를 원합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잘 사는 것을 권하는 교회가되서는 안됩니다.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저 착해야 되고 속고 살아도 내가 속이는 것보다 것을 기뻐하고 핍박하는 것보다 핍박 당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 가운데 서로 권함이 있습니다. —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사랑과 진리가 넘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의 1월 15일 이전이 결정되었습니다. 정말 급박하게 하나님이 이끌어 가셨습니다. —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시 85:7) 이 가운데 우리가 한가지 할 것이 본문 15절,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위해 로마서를 썼다고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선하도다, 너희가 지식이 있도다, 그러나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고 이 로마서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 강단의 말씀이 우리 성도님들에게 지혜와 지식을 생각나게 하기를 원합니다.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음료수도 마십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영역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바위에 앉으면 그 바위가 그저 평평하고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 바위가 깨진다고 그래서 생수가 나온다고 합니다. 영의 세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비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입니다.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육체의 소욕을 좇거나 육체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성령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단단한 바위일수록 천년 만년 생수가 흐릅니다. 쉽게 터지는 진흙은 잠시 물을 내지만 곧 닫히고 만세 반석 위에 예수 그리스도 위에 터를 잡으면, 깨지기만 하면 영생수가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역사하면 비밀스러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가지고 신령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의 생각과 사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면 신령한 생각을 하게 되고 신령한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7. 먼저 자신을 말씀 위에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드리고 다른 사람을 권함 

사도 바울은 이런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자기가 가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제사장입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직분입니다. 공식적인 직분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의미적으로 그렇습니다. 복음의 제사장 직분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말씀으로 예배드리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제사장 직분인데 성도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모두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바위가 깨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신령한 세계에서는 바위가 깨집니다. 불이 타면 다 소멸한다고 생각하지만 신령한 세계에서는 불이 타지만 소멸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생각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꾸 육체로 헤아리는 생각 하지 마십시오. 듣기와 읽기와 말씀으로 기도하기에 힘쓰십시오. 그 이후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내 신앙생활의 연조를 자랑하지 마십시오. 어린아이와 같이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 믿습니다. 상징이 아닙니다. 만세 반석 열려 들어가는 것보다 더 기적적으로 구원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내 마음의 곤고와 환란이 만세반석보다 더한 것 같지만 밤에 기도하다 보면 그것이 깨집니다. 내 아집과 완고한 생각과 마음은 만세반석보다 더 강합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이 확 뒤집어 주십니다. 기도하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선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성도는 그 환상을 봐야 합니다. 신비주의적 환상이 아니라 말입니다. 말씀을 볼 때 열매가 열리는 환상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이방인의 기복적인 것이 아니라 말씀 위에 서 있는 열매입니다. 윌리암 퍼킨스라는 청교도 작가가 황금가지라는 그림을 자신의 책에 그렸는데 그 가지에 열매가 많이 맺혀 있습니다. 성경 말씀의 복을 주렁주렁 달아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복을 누려야 합니다. 복음의 제사장 직분으로 이방인들을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는 것은 자기가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감당해서 로마 사람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의 성도의 삶의 대원칙입니다. 우리의 자신을 영적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소경과 같이 그릇된 길로 빠드리는 것이 아니라 권면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우면동 시대로 옮겨갑니다. 하나님의 큰 뜻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자신이 예배드리고 말씀 들어야 합니다. 꽃도 많고 공기도 맑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말씀의 터가 되어야 합니다. 깊은 소리를 가지는 심금의 현이 울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역 사람들을 복음으로 전해서 제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세번째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감당해서 전국교회 세계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기뻐하고 기도하시고 능히 감당하게 하시니 영광 받으시는 가운데 일을 이루시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터가 넓어지면 어려움도 생길 것입니다. 얼 곳도 터질 곳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조금 우리 교회를 단단한 것 먹으라고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저 즐거워하시면 됩니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느혜미야가 성벽을 지을 때 한 말입니다. 따지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할 때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