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07]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87)] 성도를 섬기는 일 (롬15:22-29)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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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7]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87)] 성도를 섬기는 일 (롬15:22-29)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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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5:22)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롬 15:23)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롬 15:24)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롬 15:25)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롬 15:26)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롬 15:27)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또는 것으로 동정을 받았으면 
(롬 15:28)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헬, 인친 후에 
(롬 15:29)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녹취록>




1. 소명, 성도의 존재가치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는 먼저 부르심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구원받은 백성으로 부르는 것과 주의 일을 맡기는 것이 모두 포함됩니다. 신학교 들어오는 학생에게 면접을 치릅니다. 신학생의 자질이 있는지 평소 품행과 경건생활은 어떤지 필수 항목을 물어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소명입니다. 그러면 천편일률적인 답을 얻게 됩니다. 죽기까지 주를 위해 헌신하러 왔다고 말입니다. 옛날에 우리가 신학교 들어갈 때는 소명을 물으면 거창하게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무슨 계기로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맡고자 했다는 등으로 말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빛에 눈이 멀고 비늘이 벗겨진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전부 다 거창한 것이 많았는데 요새는 개인 구원의 소명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말입니다. 물론 간접적으로야 이야기가 되지만 신학교 입시 때 소명은 주의 종으로서 주의 일에 대한 소명을 묻는 것인데 말입니다. 개인의 회심, 소위 말하는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주의 일꾼으로서의 소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사실 아닙니다. 

본문에서 소명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로서의 소명을 지칭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 무슨 일을 감당하느냐 할 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명에 대해 이방의 빛,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고 명확히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만물은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풀대로, 짐승대로 다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항상 철학자들은 행복론이라고 해서 가장 존재가치를 잘 구현하는 것에 대해 행복이라고 합니다. 플라톤은 그것을 이데아라고 했고 그것은 만물이 주어진 원리, 목표를 말합니다. 그 이데아를 충족시키면 그것이 가장 복된 것으로 말하는데 정작 이데아가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국가론에도 이데아를 말합니다. 에피쿠로스, 쾌락주의자들은 모든 만물의 존재 이유는 그 자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짐승은 그 자체로, 식물은 그 자체로 존재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지요. 그래서 사람이 자기 존재에 가장 잘 부합되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원하는 것 바라는 것, 그래서 쾌락주의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존재가치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존재가치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가 기쁘고 즐겁고 정서를 만족시키고 이상을 실현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자이자 황제 아우렐리스도 인간의 존재이유나 가치에 대해 여러 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이방의 책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소명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 이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이유입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양을 치고 그 전에는 애굽 궁전에서 왕자로 살았는데, 그의 소명은 80세 때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서 받은 그것입니다. 애굽에 들어가서 그의 백성을 이끌어 내라는 하나님의 일을 소명으로 받은 것입니다. 비로소 존재 가치를 찾은 것입니다. 사울은 유대주의자입니다. 율법에 뛰어나고 잘 믿고 최고의 학자이자 로마 시민권자입니다. 그러나 존재 이유를 몰랐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듣고 빛에 눈이 멀고 쓰러졌습니다. 이전 것들이 눈에서 비늘 벗어지듯 벗겨졌을 때 비로소 그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에 예수쟁이를 죽이러 간 사람이 주의 부활의 도를 전하는 스데반과 같은 자가 된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자리에 있던 자가 말입니다. 그 존재 이유와 소명을 얻게 됐습니다. 

2. 소명 주신 분이 은총과 능력도 주심

소명에는 은총과 능력이 따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일을 맡길 때 반드시 부여하시는 은총을 은사라고 합니다. 은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선한 마음과 가르치는 자에게는 가르치는 능력을, 권하는 자에게는 권하는 능력을, 구제하는 자에게는 재물을 주시는 것이 은사입니다. 소명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은사가 거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아멘 할 때 은사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사 있는 곳에 직분이 있다고 하지 않고 직분이 있는 곳에 은사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의 뛰어남에 따라 일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하는 베드로에게 일을 맡기니 능력을 주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입니다. 이 순서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기도하면 뭐가 보이는 것 같고 능력이 나타나고 내 마음이 선한 것 같은 것 등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자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일을 맡기셨다고 생각한다면 교만한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일을 맡기면 하나님이 그 때마다 아주 족한 분량의 은사를 주셔서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날마다 엎드려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 준비시켜놓고 이제 일어나서 일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 때마다 일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소명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시고 우리는 구원을 이룬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는 칭의라면 거룩한 삶인 성화를 통해 상급을 얻습니다. 성화 가운데 거룩해지는 이생의 삶 가운데 우리에게 상급을 주시는 방법은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다음 다음 주에 보면 로마서 16장에 한 장 전체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상급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소명을 받아 능력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일 시킵니다. 그러나 내 자질, 능력, 배경 보고 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능력과 배경과 자격을 주시려고 일 시키십니다. 그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주여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내 입술은 부정합니다’라고 합니다. 선지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선지자가 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입술을 숯으로 지져서라도 하나님이 쓰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 사용하시는 사람이 먼저 준비되어서 맡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기가 되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물이 필요하면 반석을 쳐서 나오게 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라도 내리셔서 그렇게 하십니다. 삭개오가 구원받고 예수를 만났을 때 즉시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 때 그는 구원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의 소명도 받았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떼어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던져 놓고 메시아를 전합니다. 남편도 없이 몸을 팔아 살던 그 여인이 소명을 받으니 입이 열리고 힘이 생겨서 예수를 전한 것입니다. 

3. 충만한 복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전하는 것

이처럼 소명에는 은총과 능력이 함께 따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소명 의식을 가집니다. 이 땅에서 삶을 살 때 소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명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의식입니다. 본문 22절은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다'고 합니다. 이 '여러 번'이라는 말에서 소명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신학교 면접을 하다 보면 50대에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10대 때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이제야 왔다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에게 로마로 가야 하는 마음을 여러 번 주신 것입니다. 부르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인간적으로 끈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계속적인 소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져갈 줄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로마에 가기를 원한 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충만한 복, 성도의 최고의 복은 무엇인가요? 부모가 자식에게 어떤 것을 가장 즐거워할까요? 잔치가 아닐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충만한 복을 가져간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복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전도하고 섬기는 헌신 공동체, 예배, 전도, 선교 공동체가 되는 의미한 것입니다. 교회는 많은 것을 먹고 마시고 누리는 것을 복되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런 지향점을 가지면 안됩니다. 제가 다양한 부서를 섬겨봤는데 그런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진정 충만한 복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그들에게 전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악기의 복은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사용되어야 합니다. 나무의 복은 그저 화가 앞에서 그림의 소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의 복은 향기를 내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베토벤의 악보가 얼마에 팔렸다고 합니다. 훈민정음 해례본과 관련된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 종이가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훈민정음의 가치는 말이니 말할 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4. 성도의 가치: 말씀대로 사는 것

성도의 가치는 움직일 때 있습니다. 사람은 움직일 때 가치가 있습니다. 남 앞에서 그저 모델이나 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물론 그것도 자체로 가치가 없지 않지만 본질적인 사람의 가치는 움직이는 것입니다. 말이 필요한 사람에게 말해주고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먹여주는 것이 사람의 본질적인 가치입니다. 음악에도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작곡가가 유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의 대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있습니다. 그는 스탈린 시대 때 어용이라는 오해도 받는 불쌍한 삶을 살았으나 천재적인 작곡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옆에는 므라비스키라는 지휘자가 있었습니다. 그 지휘자가 곡을 잘 연주해 주었으므로 곡의 가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곡은 누군가가 연주해 줄 때 복이 있는 것입니다. 구스타프 말러도 부르크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휘자가 잘 지휘를 해서 아름답게 남은 것입니다. 

성경 말씀도 귀하고 그 자체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가치는 종이에 인쇄된 것이 아니라 이 말씀대로 사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충만한 복을 가지고 로마 사람들에게 전하러 가는 것을 그리고 서바나, 스페인까지 가는 것을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습니다. 서바나는 당시 세계관의 땅 끝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 로마에 들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인이 무작정 가고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보내주면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곳까지 가서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라고 하니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미친 자입니다. 복음이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곳에 가는 길에 로마에 들러 기쁨을 나눈 후에 그들이 보내주면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로마에 갈 길이 막혔는데 예루살렘에 구제헌금을 전달해야 하는 일이 생겼으니 그렇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이 헌금은 누가 보내는 것이냐 하니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입니다. 현재 그리스 국가가 위치한 곳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헌금을 예루살렘에 보내는 것입니다. 

5. 복음에 빚진 자

당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은 유대인,이스라엘인인데 그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져 영적인 복을 받았으니 육적인 것을 나눈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본문 27절입니다. 복음을 받고 영적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육적인 것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으로 나눈다는 것인데 이를 잘한 대표적인 교회가 고린도 교회 입니다. 그 교회는 음란과 분열과 이방인, 사도권 논쟁 등으로 문제가 많았는데 연보는 잘했습니다. 헌금은 잘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빚진 자라는 기본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밥을 한 끼 사주는 것은 빚이라 생각하는데 복음을 받은 것을 빚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제가 목회자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먹을 것을 한 끼 얻어먹은 것에 대해서는 빚진 자라 생각하는데 말씀의 빚을 지는 것을 빚지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면 안됩니다. 연보는 헌금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려움 가운데 건축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떤 누구에게도 저희 교회 어렵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릅니다. 교회 일이니 말입니다. 사모에게도 이야기 안했는데, 여러 곳에 다 전화했습니다. 부산의 개척교회 하는 제자에게도 이야기했습니다. 수원에, 전주에 다 전화했습니다. 왜요, 십자가지기교회의 예배당 이전은 십자가지기교회만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설교를 듣는다면 오늘 말씀같이 복음의 빚을 졌으므로 그 빚을 갚는 것이 합당하다는 말입니다. 이 설교를 누군가가 듣는다면, 기도하고 감동이 되면 십자가지기교회를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왜 복음 듣는 것에는 빚진 마음이 없냐는 말입니다. 제가 헌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의하는 순서 상 오늘 말씀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하기 위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7) 또한 본문 14절은 연보는 넉넉한 것으로 부족한 것을 채워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한 쪽이 힘든데 한쪽에 남는 것이 있다면 성도는 마땅히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다 우리가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으니 우리 믿는 성도들 중에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도와야 합니다. 종교개혁 시대, 칼빈 시대에는 헌금의 거의 절반을 구제에 사용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 그런 일을 감당하기 어렵지만 말입니다. 연보를 서로 나누고 어느 교회가 어려우면 다른 교회가 도와주는 것, 그것이 지체이고 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라고 고백하는 성도의 하나됨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감사가 넘치고 풍성한 의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연보입니다. —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고후 9:10) 

6. 예수를 만나니 소유를 나누어 성도를 섬김

여러분,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감사합니다. 참 간사한 것이 인간입니다. 넓은 터 달라고 해서 터 주시면 그곳에 세울 것이 없다고 불평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새로 이전할 곳에 자모실도 나눠놨고 사무실도 나눠놔서 크게는 다 됐습니다. 이제 이번 주에 천장만 하면 됩니다. 가서 예배 드릴 수도 있습니다. 다다음주에는 무조건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열립니다. 열려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이 있는 곳에 은사가 있듯 말입니다. 발을 디딜 때 물이 마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룬 것입니다.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10) 서로 봉사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디아코니아라고 합니다. 봉사입니다. 디아코노스는 집사입니다. 집사는 봉사하는 직분입니다. 서로 봉사하라고 합니다. 본문도 25절도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간다고 합니다. 봉사입니다. 관리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이 것을 나눠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를 만났으면 삭개오 같이 자신의 소유를 나누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때 디아코니아와 케이트로게오라는 말을 쓰는데 다른 단어입니다. 영적인 것을 나누어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섬긴다고 할 때 섬김은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라 칼빈은 주석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전제와 같이 붓고 화제와 같이 태워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것입니다.

7. 성도의 순명

우리는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그 부르심에 응해야 합니다. 제가 이번 주에 설교를 하러 가는 교회가 있습니다. 너무 바빠서 연기하고 싶었는데, 이미 여러 번 미뤘으므로 이번 주 수요예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오후에 부산에 갔다가 드리고 당일 올라올 것입니다. 그 교회의 이름은 온천제일교회입니다. 총회장까지 했던 분이 목사님인데 그 분이 자서전에 '순명'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에 순수히 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일을 맡길 때 순명해야 합니다. 십자가지기교회에 일을 맡길 때 순명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 성도님들께서는 한국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소명을 순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에 순순히 따라야 합니다. 그 때 우리에게 후히 넘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우리 존재의 가치가 있습니다. 모양만 내고 가치가 없는 것을 독버섯이라고 합니다. 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에쁘게 생긴 것이 독버섯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이 죽어야 씨를 퍼뜨립니다. 우리 성도는 가만히 서서 모양만 내는 것이 아닙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내가 태워서 소금이 되고 맛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존재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것을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하나님의 명에 순순히 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형통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명을 아멘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막힙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안하는 것 같지만, 매번 설교 때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는 역사가 중요합니다. 이 교회에서 배운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때가 찬 경륜으로 우리 교회를 위하여 이루십니다. 뛰다 보면 단내가 납니다. 예전에 저희 장인어른이 3차 교회 건축을 하실 때 옆에 가면 입에서 단내가 났습니다. 고생을 많이 하시니 말입니다. 저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엊그제 치과에 가니 이를 갑니다. 그 때 단내가 났습니다. 교회 공사 현장에서 쇠를 자를 때도 단내가 납니다. 지난 주간 제가 맡은 냄새가 그것입니다. 치아가 안좋아서 치과를 가서 맡은 냄새와 공사 현장에서 맡은 단내, 그것이 인생의 가치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단내가 나야 합니다. 쓰레기를 줍고 하수구를 건져내는 손이 아름답지 예쁘게 차리고 보이기만 하는 것은 고상한 것 아름다운 것이 안입니다. 주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토와 같이 다 버렸습니다. 오직 주의 일을 하는 것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에 순명하고 아멘 하십시오. 홍해를 어떻게 건넙니까. 여리고를 어떻게 함락시킵니까. 지금 우리를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성숙하게 하실 것입니다. 기쁜 마음을 가지고 감사하십시오. 제가 무슨 교회를 양적으로 늘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김범서 집사님이 오셔서 잠시 얘기하면서 지금은 지하에 들어가 있지만 나중에 건물을 다 사자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개혁주의인데 어떻게 그리 생각할 수 있으리랴 생각했을텐데, 사도 바울이 여러번 가려고 했으나 하나님이 막으셨는데 이제 또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서바나에 가는 길에 로마에 간다고 한 것처럼 우리 교회도 지금 이 때에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일꾼도 붙여 주십니다. 많이 기도하십시오. 우리 교회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병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병사들을 사용하셔서 할 때는 정예 병사를 남겨 놓으십니다. 목이 마르다고 고개를 쳐박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변을 살피며 경계하는 물 마시듯 안마시듯 마시는 그런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저도 하나님께 사용되고 상급받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도 다 상급 받아야지요, 존재의 이유와 가치를 잘 구현해야지요. 지금 이 교회도 아름답습니다. 이제 가려고 하니 교회 주차 관리하시는 분도 아깝고 귀합니다. 함께 모시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는 곳에는 도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관리하는 분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화로의 고기가 좋아도 우리는 가야합니다. 무조건 다음 예배를 마지막으로 갑니다. 새 땅에서 새해에 새 열매를 먹었더라고 여호수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때 만나와 메추라기가 그쳤습니다. 한 단계 올라가는 이러한 은혜가 우리 교회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명에 순순히 응하는 순명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밤에 주무실 때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즐겁게 사용하실 것을 기대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