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이 알려주신 빌 바를 힘을 다하여 함께 비는 교회
오늘 로마서 15장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됩니다. 사실 교리적인 가르침의 말씀은 여기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마서 16장은 믿음의 일꾼들에 대한 칭찬과 인사말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뵈베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주의 일꾼들을 소개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특별히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함께 기도를 부탁하는, 그래서 ‘나와 힘을 같이하여 하나님께 빌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한 믿음, 한 성령, 한 주, 한 교회의 지체로서 이 땅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장막, 법궤가 움직이고 여호와의 제사장들이 나아가고 어린 아이들과 성도들이 따르는 그 광야 40년의 무리가 이 시대의 교회라고 본다면 특별히 그 무리가 하나가 되는 것은 함께 하나님이 기도의 빌 바를 알려 주시고 그것을 힘을 다하여서 비는, 함께 기도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 주간에 말씀을 통해서 본 것처럼 로마로 가기를 지극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쉽게 그 길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지는 서바나, 오늘날의 스페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곳에 가기 전에 로마를 들러서 로마 교인들이 허락하면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로마 교회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본문 32절은 ‘편히 쉬게하라’고 합니다. 로마는 당대의 수도이자 많은 핍박이 있는 곳인데 그런 이야기보다 오히려 편히 쉰다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언제 진실로 쉬는 것입니까? 무슨 일을 할 때 진정 쉼이 있습니까? 저는 제 삶에서 쉼은 냇물이 흐르는 개울가에 앉아 숨을 고르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움직이고 걸으면서 그 가운데 선뜻 선뜻 나그네가 구름과 별빛, 달빛을 보듯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 땅에서 궁극적인 쉼은 넘어지는 것입니다. 팽이는 돌아야 서 있습니다. 팽이가 서 있지 않는 것은 돌지 않을 때라야 그렇습니다. 즉, 일을 하든지 아니면 실족하든 둘 중 하나이지 그냥 쉬는 것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로마에 가서 많은 일들을 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서바나라는 곳은 그가 이방의 사도이므로 땅끝까지 가라는 명령을 깊이 마음에 새겨 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극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는 지나쳐 가지 않을 수 없는 곳입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니 말입니다. 하나님이 땅 끝까지 가라고 하셨으니 보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가운데 로마에 가서 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겨울에 우리가 찬 물에 손을 넣고 일찍 일어나 야음을 가르며 움직이는 것이 아주 힘든 일입니다. 따뜻한 곳에서 누워 있고 싶습니다. 우리 삶의 목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쉼이라는 것이 그렇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고 마태복음 11장 말미에서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쉼을 주시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배우는 것입니다. 쉼은 어느 조용한 곳에 가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그런 그리움이 많이 있습니다. 섬돌에 제 신발만 놓여 있는 방에서 책도 보고 성경 보고 글도 쓰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게 과연 쉼일까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2. 주의 멍에를 매고 주의 길을 가는 것
우리 교회에 하나님께서 옮김을 허락하셨습니다. 큰 일을 예비하실 것입니다. 화살은 뭉툭해서가 아니라 단단하고 날렵해서 과녁을 맞춥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게 보면 화살과 같은 모습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활에 먹여져서 하나님이 힘껏 당겨서 놓으시면 우리가 잘 사용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듯 우리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나아가는 은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을 주를 위해 살았습니다. 주를 위해 살고 헌신했습니다.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에 성령의 지시함을 받아 갔습니다. 그는 어떻게 보면 고난의 길을 찾아 갔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그저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희락을 느끼는 것은 주의 멍에를 매고 주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고 안식을 주시고 위로하시고 온전케 하십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면 주의 일을 행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세우시는 능력 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계획을 짜고 이루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는 자리에 올라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안식이 아닙니다. 오직 충만함은 여호와께만 있습니다. 그 충만함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오늘 새벽에도 말씀을 본 것처럼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하사 그 충만하심으로 만물을 온전케 하고 우리를 아버지와 화목케 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하나됨의 충만함을 누려야 합니다.
3. 믿음으로 응시한 것을 기도로 캐내라
오늘 사도 바울은 특별히 힘을 다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0절은 너희 힘을 다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를 위하여'라고 얘기했습니다. 저는 지난 주 설교에 '우리 교회를 위하여' 협력하고 기도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의 교회는 사사롭게 행하지 않습니다. 사사롭게 행한다면 우리가 누구에게 의지하고 부탁하고 할 수 없습니다. 주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므로 사도 바울은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를 도우라고 많이 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교회의 하나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바로 기도하게 하시고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뜻하신 것을 이루지 않으시고 그의 백성이 간구하게 하시고 성취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자주 시편의 말씀을 통해 나누었습니다만, 기도의 두 요소는 부르짖음과 말씀입니다. 그 말씀대로 성취하기 위하여서 부르짖음의 자리에 우리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누리는 가장 큰 능력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되는데 그 도구로 사용되는 그때 필히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시키지 않고 하나님이 일을 이루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이루길 원하고 하나님 앞에서 화평을 누리길 원하고 자녀를 위한다면 기도가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를 이 로마서 마지막 장에 부탁하고 있음을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에는 이신칭의의 복음이 있고 구원의 전 서정의 은혜가 노래되어 있습니다. 예정론, 은사론이 있습니다. 전체 교리가 다 나옵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기도가 있어야 가르침이 온전해지고 기도가 있어야 믿음으로 본 것을 캐낼 수 있습니다. 제가 작년부터 우리 신학교에 예배당과 근처에 걸어 놓았습니다. 믿음이 응시한 보화를 기도로 캐내라고 말입니다. 말씀을 듣고 응시한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농부가 밭을 매다가 덜컥 걸리는 것이 있어서 보니 보화입니다. 자기 밭이이 아니니 그것을 발리 묻어 놓고 전 재산을 팔아서 그 땅을 샀습니다. 그 땅에는 보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그렇다면 전 재산을 팔아서 그것을 사야 하는데 그 전 재산이 바로 기도입니다. 보화를 발견했으며 묻어 놓고 기도하면 그것이 바로 농부가 전 재산을 판 것입니다.
4. 십자가의 미련함이 교회의 능력
그러므로 기도해야 하는데 교회는 특별히 두 세 사람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약속한 터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합심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의 기도제목이 많지요, 그렇게 본다면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위한 기도제목도 많을 것입니다. 세세하게 알 수 없지만 아가페의 형제애와 자매애를 나누면서 기도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십자가지기교회가 더욱 기도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일, 어떤 모습이든지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론이 기도하는 미련을 이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잘 할 수 있지만 무슨 이론을 낼 수 있지만 기도하지 않는 지혜가 기도하는 미련을 이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볼 때 기도의 미련함, 그 기도의 미련함이 십자가의 미련한 것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은밀하게 엎드려서 여호와여 여호와여 하나님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만족할 만하게 내놓는다고 하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만족할만하게 기도했다고 하면 교만입니다. 항상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이 내 소원의 간구와 헌신이 부족하다고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미련합니다. 홍해 강물이 흐르는데 그 강가에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합니까? 배를 만들던지 하다못해 지푸라기라도 모아야 하는데 기도하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지금이 기도할 때냐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 앞에서 무기를 만들어야지 기도할 때냐고 하는 것은 적어도 교회는 그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아프면 교회를 멀리하고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교회를 의지해야 합니다. 저에게도 그런 버릇이 생깁니다. 급하면 지금이 기도할 때냐는 생각이 들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때가 기도할 때라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기도는 부차적으로, 그저 우리가 건축하듯 큰 터를 만들어 놓으면 그저 장식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5. 기도, 하나님 자녀의 표
기도는 본질입니다.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가 자녀 된 것은 양자의 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기도의 영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기도하는 영을 받은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 보다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마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연보를 부탁하고 전해준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행적은 헌금을 받아 전달하는 것이 아닌, 빌립보서, 에베소서, 로마서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듯 기도하기를 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새로운 터로 옮겨감에 있어서 열심히 하나가 돼서 하나님께 비는 터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30절에 힘을 같이하여 하나님께 빌라고 말씀한 것처럼 말입니다. 기도하기 전과 기도하기 후는 다릅니다. 기도는 아무 흔적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기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 26절은 성령이 친히 탄식하시므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하나님께 빌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6. 예수 그리스도의 의
이번 주가 우리 교회의 사실상 이곳에서의 마지막 예배입니다. 2011년 9월 4일 우리 가족과 김재모 전도사님, 이인혁 전도사님과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예배 방해를 받아 보거나 항의조차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이 오피스텔 사무실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키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낯선 곳, 좁은 터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참 낯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셨습니다. 그 생각을 하면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막아 주셔서 아이들이 저기서 뛰어놀아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식사도 밖에서 하다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으나 우리가 미안해서 안에서 하게 되었고, 아이들도 크다 보니 밖에서 뛰어놀게 되었는데 어느 누구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번 주 마지막으로 교회를 떠나면서 다른 말씀으로 할까 하다가 지난 주도 그렇고 오늘도 로마서 말씀을 계속 전해도 우리에게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는 너무 바쁜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가서 굳이 많은 일을 한다기보다 그 자리에 있어야 일이 되고 하니 말입니다. 어쨌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교회를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것과 그 일로 인하여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저 먼지 마시면 몸에 해롭다고 생각되지만 그 먼지가 우리 속의 독을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 30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루신 사랑이요 성령은 그것을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시는, 적용하시는 사랑입니다. 교회에는 이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 그리고 그 의를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시는 성령의 의만이 있을 뿐입니다.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로 성령이 우리를 살리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살아남과 살아감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보장 받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한 번 택한 백성은 결코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하나님의 일로 우리가 구원 받았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시고 믿음 주시고 자녀 삼으시고 거룩한 백성 군병 삼으셔서 우리를 자기 자신의 나라의 백성으로 가정의 자녀로 삼으셨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충분한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의 외에 다른 의가 우리에게 필요가 없습니다.
7. 여호와의 영의 역사로 능치 못함이 없음
제 말씀을 해서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경험은 있었습니다. 유학 가고 그 전에 신학교 들어오고 할 때 말입니다. 여러 가지 일이 겹칠 때 더 일이 잘된다는 것 말입니다. 뭔가 한 가지 일만 몰두하면 그 일이 잘 될것 같은데 하나님이 여러 일을 주셔서 한 가지 일 외에 또 다른 일에도 신경쓰게 하십니다. 저는 성경교리정해라는 책을 쓰고 오래 후에 아카데미를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보니 한달 후에 바로 했습니다. 6년 이상 십자가지기교회를 섬기는 가운데 30주제로 풀어쓴 기독교 강요, 칼빈 신학, 교회의 하나됨과 교리의 하나임, 기독론,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책으로 낸 기독교의 진리가 출간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섬겼기 때문에 그 책을 쓰게 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십자가지기교회에서 설교를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 책을 쓰게 하셨을까 생각을 합니다. 이 교회에서 제가 정말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그 때 그 때 사용하셔서 책을 쓰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건강이니 나이니 탓하여 쉬면서 쉼을 누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움직이면서 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쉬는 제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봅니다.
이 땅에는 쉬는 곳이 없습니다. 이 땅에는 잠시 머무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쉬려고 하면 불평, 불만이 더욱 생깁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남편이 다섯 있어도 쉼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갈하지 않는 생수를 마시게 됩니다. 영원히 썩지 않는 신령한 양식을 먹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금요예배 때 창세기, 시편, 잠언, 전도서 말씀을 나누면서 설교 때마다 많은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예배 때는 히브리서, 요한복음, 에베소서, 빌립보서, 계속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제가 말씀을 잘 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말씀을 전할 때마다 제가 먼저 배웠고 하나님이 말씀해주시는 확신을 했습니다. 주석을 몇권 보고 했지만 설교 당시에는 항상 하나님이 말씀해주시는 확신을 했습니다. 주일 설교는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그리스도의 중보 계시 등을 했고, 로마서 강해가 지금 이제 거의 새 예배당에 들어가서 본당을 갖추고 입당 예배를 드리게 될 때 쯤 끝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그저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에 집사님들 세우고, 아이들 세례주고, 부족하지만 교회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특별히 주의 종들이 전도사로 오셔서 강도사 돼서 나가기도 하시고 목사가 되서 유학도 많이 가셨습니다. 군데 군데에서 잘 섬기고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부피가 크다고 뭉툭하다고 좋은 화살이 아닙니다. 날렵하게 매끈하게 올곧게 잘 다듬어진 화살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사람이 많아서 적어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300 용사, 하나님이 뽑은 용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옮겨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괜히 하는 말이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생각합니다. 아주 하나님이 그 때 적절하게 마음도 주시고 3년, 4년 전에도 옮겨볼 시도를 했으나 그 시도조차도 버리지 않고 사용하셨습니다. 이전할 장소가 정해지기 얼마 전 점심식사에서 때 새로 옮길 장소는 때 버스 정류장에서 한 10분 떨어지고 40~50평 되면 좋겠다고, 너무 목 좋지 않고 주차하기 좋고 자연하고 가까우면 좋으나 도심 사는 곳에서 너무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누었는데 그대로 주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두렵고 떨려서 말씀을 안드렸지만, 그대로 꼭 그 자리로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어렵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생각이고 여호와의 영의 역사로 능치 못함이 없으니 하나님이 그곳으로 인도하셨고, 또 다른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고 소망할 것입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어색하고 누구에게 교회 개척했다고 말을 할지, 이것이 과연 교회인지 등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정말 하나님이 부족한 종과 성도님들에게 교회란 무엇인가를 알게 하셨습니다.
8. 기도할 때
사도 바울은 본문 31절에서 유대인들을 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큰 전환입니다. 로마인들에게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이미 기도는 민족을 넘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이방과 유대인이 없어진 것입니다. 어찌 이방인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자존심을 가진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연약한 아이들이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어찌 아이들이 기도하냐고 하지 마십시오. 래은이가 기도해야 합니다. 이래가 기도하고 건우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시언이가 기도해야 힙니다. 그 아이들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야말로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부탁해서 유대인들의 불순종을 돌이켜달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교만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방인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유대주의자들을 돌이키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무엇을 가진 사람이 소유를 가지고, 세상의 지식을 가지고 소유가 없는 자를, 지식 없는 자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질서는 기도로 돕는 것입니다. 기도로 권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30절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한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권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부탁하고 또 기도 가운데서 권하는 것입니다. 절대 지금이 기도할 때냐고 말하지 마십시오. 지금이야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적군의 화살이 날아올 때 지금이 기도할 때입니다. 너희는 잠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말입니다. 우리는 당장 눈 앞에 큰 사람이 다가올 때, 지금이 기도할 때냐, 도망칠 때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지금이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 기도할 때입니다. 지금은 무엇을 구하고 뭘 찾을 때가 아니라 지금이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봤을 때 너무나 답이 분명할 때 그 때가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9. 하나님께 드린 바 되었다
그리고 본문 31절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라’고 합니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좋은 효과를 불러온다고 할 수 있지만, 주의 일은 선한 일일수록 시험이 많습니다. 지금 연보하는 일이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빵을 받는 사람이 잘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누구를 위하여 헌금하는 것도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입니다. 섬기는 일도 그들이 받을 만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나쁜 일 해서 나쁜 반응 얻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착한 일 해서 좋은 반응 얻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쯤 되면 왠만히 좋은 일 하거든 잊어버리십시오. 그래야 상급 받습니다. 절대 표내지 마십시오. 그래야 상급 받습니다. 정말 그래야 하늘 나라에 쌓입니다. 좋은 일 하고 욕 안 얻어먹으면 다행입니다. 3년 내내 장학금 도와주고 그 학생에게 욕 안 들으면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에 상급이 쌓입니다. 은밀히 행하면 은밀히 갚으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선한 일 하다가 지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마귀 사탄은 간단한 사람은 악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선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선을 가지고 낙심하게 합니다. 이렇게 좋은 일 하는데 항상 욕을 얻어먹느냐고 하지만, 당연합니다. 내가 딱딱한 것을 먹을 수 있으니 하나님이 그 자리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일구고 교회 위해 헌신하고 기도할 때 하늘 나라에 상급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루살렘에 연보를 보내니 예루살렘 사람들은 당연히 우리를 환영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받을 만하게 하라고 합니다. 받는 쪽에서 더 말이 많다는 것입니다. 빵을 주는 쪽보다 받는 쪽이 말이 더 많습니다.
특히 주의 일은 더 그렇습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칭찬 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그저 그 일로 하나님께 올린바 되었다고 생각하십시오. ‘고르반’ 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악용했지만, 우리는 진정한 고르반을 해야 합니다. 오늘 내 눈물과 수고가 하나님께 드린 바 되었다고, 우리 십자가지기교회의 행로와 역정이 하나님께 드린 바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의 역정이 지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로,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는 역정이 되는 것입니다.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 하고 두개 했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제가 막내라서 그런지 몰라도 저는 그런 경향이 큰데 저희 둘째 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를 회상해보면 제 복주머니 용돈에 가득 차는데 둘째 형은 말을 안해서 안받은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더 많이 받았더란 말입니다. 말을 안해서 더 많이 받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10. 새 땅에서 새 열매를 먹는 은혜
우리 십자가지기교회가 이 곳을 떠나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함께 이 때 새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역사적 교회, 역사의식을 가지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이 시대에 지나가듯 누구에게 칭찬을 받는 교회가 아니라 교리사적, 교회사적 의미를 갖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번째로, 어려울 때 칠천 명이 모여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엘리야 시대 때 아합과 이세벨의 농간과 핍박이 심할 때 숨겨둔 칠천 용사가 우리 교회에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으로 말씀으로 서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경우든 말씀을 넘어가지 말고 말씀이 기준이되어 말씀으로 기뻐하고 서로 권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들끓는 칭찬을 받지 못할지언정 후대가 인정해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다졌자면, 우면동에 가서 뒷산에 싹이 나듯 싹이 나는 교회, 역사적인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칠천 용사,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는 전부 칠천 용사 안에 드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넘어가지 말고, 가감하지 말고,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그저 내 습성, 내 버릇, 내 경험을 앞세우지 말고 말씀이 그렇게 있으니 하여 그곳에서 멈추고 출발하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 오후에 짐을 꾸리고 옮길터인데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새 땅의 새 열매, 지난주도 얘기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넘어 길갈에서 할례를 받고, 그제야 만나와 메추라기가 그치고 유월절을 지나면서 새 땅에서 새 열매를 먹었던 그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새 땅에서 새 열매를 먹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장성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180114]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88)] 힘을 같이하여 빌어 (롬15:30-3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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