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4]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90)] 너희를 권하노니 (롬16:17-20)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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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4]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90)] 너희를 권하노니 (롬16:17-20)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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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롬 16: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롬 16:19)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롬 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녹취록>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성도
이제 로마서의 긴 편지가 마무리 단계에 와 닿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축복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손편지라고도 하는데, 저도 그런 편지를 많이 써보았습니다만, 사도 바울의 이 서신은 사람이 쓰는 사사로운 편지가 아니라 하늘로로부터 내려오는 말씀을 담은 편지입니다. 진정 로마에 들르고 싶은 마음과 애틋한 열정 등이 잘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모든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특히 사도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권고하면서 축복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무엇을 권한다는 것은 사실 축복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무엇인가 권하는 것은 축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권하는 것은 축복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오늘 내가 너희에게 권한다'고 합니다. 헬라어로 파라갈레오인데, 파라는 ‘나란히'라는 의미요, 갈레오는 ‘부른다'는 의미입니다. 즉, '같이 따라가면서 계속 부른다'는 의미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하듯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하면서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초대교회에서 형제는 성도들을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부르는 것도 초대 교회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제는 그야말로 피를 나눈 사람을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가 되었고 양자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함께 가지고 있으므로(롬 8:15) ‘형제들'이라고 불리는 것(히 2:12)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형제, 자매로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저를 목회자 이전에 형제로 생각하는 것이 주 안에서 온전하고 합당한 것입니다.
2. 믿음의 순종
본문을 통해 이 로마 교회에 사도 바울이 많은 것으로 감사함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은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며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합니다. 로마가 어떤 곳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곳입니다. 그런 로마에 순종의 소문이 자자해서 기뻐한다고 합니다. 로마 교회는 순종하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리스도의 도에 순종하는 교회였는데 이것은 죽기까지 순종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죽기까지 순종한 성도들의 순교적 순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자에게 산채로 뜯어 먹히는 순교, 옥의 형틀에 갇혀, 불에 태워져, 물에 빠드림을 받아 죽는 죽음에도 그들은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히파코에라고 합니다. 이 순종은 믿음이 없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5절은 '믿어 순종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도 원어를 보면 믿음의 순종입니다. 믿음이 들어오면 순종하게 되고 믿음이 없으면 순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믿음을 받은 사람은 순종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자질 혹은 어떤 의지나 대의명분으로 죽음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종하게 되는 것이 로마 교회였습니다. 그러한 순종이 있었으므로 짧은 시간, 2-3세기만에 기독교를 핍박하던 대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지으신 것은 마음과 뜻과 목숨과 정성을 다하는 순종을 받기 위함이요 사람이 가장 사람다운 것은 하나님께 순종할 때입니다. 인류가 한 때 휴머니즘으로 인간의 이성과 아름다움을 찬미했지만, 그 결과는 인간의 잔인함만을 드러내는 히틀러 같은 괴물의 등장이었음을 우리는 목격했습니다. 19세기 교만했던 문명, 인본주의, 실증주의가 지배하던 그 시대, 또한 20세기 실존주의, 인간에게 의미있는 것만 존재한다고 여겨 하나님을 믿지 않은 실존주의 시대의 끝이 그러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따라갈 때 그 끝은 괴물이요, 그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사람에게 추앙을 받는 사람이 적그리스도입니다.
3. 말씀과 기도의 순종
우리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멘하고 눈물 흘리고 좌표로 삼아 그것만을 소망으로 삼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말씀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고 한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자리에 서는 것이 순종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눈물로 따라가는 것이 순종입니다. 선지자에게 능력을 주고 유다를 다시 일으키는 사명을 준다면 감당할 수 있겠지만, 예레미야에게는 멸망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가리라는 말씀을 전하게 했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눈물로 순종했습니다. 믿음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백성입니다. 듣는 귀가 ’에바다' 하고 열려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향해 항상 열려 있어야 영적 눈이 열리고 여호와의 심장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길을 열어야 하는데 항상 기도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본 말씀의 보화를 기도로 캐내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에 나오는 그 말씀을 이곳에 와서 제가 처음으로 전한 적이 있습니다. 순종은 말씀을 믿으므로 그 가운데 감동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선포되는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믿음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소망 가운데 인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10절의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우리도 인내의 소망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옵니다. 그 말씀을 듣는 것이 순종입니다. 우리 한글에도 '잘 듣는다'는 것이 순종한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약이 잘 듣는다는 말도 합니다. 약을 바르면 작용하는 것입니다. 말씀도 잘 들어야 됩니다. 그것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로마 교회의 순종은 로마 제국을 뒤바꾸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일이 있었다면 초대교회의 로마가 기독교화 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을텐데 로마 교회의 순종이 그 일을 일으킨 것입니다.
4. 순종이 제사보다 나음: 영적, 내적 순종
사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의 뜻을 내세워서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대로 기뻐함을 구하려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순종에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거역하는 것은 경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우리는 먼저 영적인 내적인 순종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멘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고 없고는 그냥 두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감동에 아멘해야 합니다. 먼저 내가 할 수 있고 없고를 따져 역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는 조건으로 삼으면 안됩니다. 내 능력과 경험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조건 아멘해야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아멘하는 것은 아멘이 아닙니다.
또한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 눈물이 있고 가슴 치는 것이 있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를 갖춰 그럴듯한 물건을 갖고 오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낫다고 한 것입니다. 또한, 완고한 것이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죽은 신인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사무엘이 경고합니다.(삼상 15:22-23)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우리도 결코 말씀을 버리면 안됩니다. 어쨌든 말씀을 부여잡고 잠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나는 어찌할 수 없다고 하면 안됩니다. 어쨌든 말씀하시면 듣겠다고 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어쨌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어제 설교 준비를 마치고 자려고 하니 열시가 막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빌려준 추리소설을 읽을까 하다가 내일 주일이니 하고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기도하며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를 보니, 누워서 보고 있었는데, 전부 줄 그을 데요 말씀에 감동이 컸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버리면 안됩니다. 사실 아무도 말씀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소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작게 여길 때 지파의 머리가 되는데(삼상 15:17) 그것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들을 때입니다. 반대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는 젊을 때 자기를 의지하다가 늙어서 사람을 의지합니다. 멸망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삼상 15:19) 그래서 사울이 죽은 사무엘이라도 불러달라고 한 것입니다. 말씀이 떠나면 내가 힘이 있으면 나를, 힘이 없으면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것이 멸망입니다.
5. 지혜와 선포
본문 17절은 '너희가 배운 교훈을 바로 가지라'고 합니다. 이 교훈을 디다케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진리인데 로고스입니다. 말씀이 진리인데, 이 진리가 두 가지로 작용을 합니다. 그 두 가지 중 첫번째가 지혜고 두번째가 선포입니다. 지혜는 디다케, 선포는 캐리그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태초에 말씀에 계시는데 그것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진리입니다. 이 말씀이 진리인데 이 말씀이 진리로서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은 첫번째로, 그것을 배우면 디다케,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호크마입니다.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가 배운 교훈이 말씀, 그리스도의 진리를 배워서 우리 안에 배워 작용하는 지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디다케입니다. 이 교훈과 함께 케리그마라고 하는 것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선포되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교 시간에 듣고 배워 아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는 배워서 알고 선포되어서 아는 것인데 그러므로 교회의 두 가지 당위는 가르치는 교회(디다케)와 선포하는 교회(캐리그마)입니다.
6. 한 진리와 교훈, 한 능력과 성령
특히 본문은 그 가르침을 거스리는 사람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교훈을 잘 새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고 확신한 일 가운데 거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배우고 들은 것을 마음에 잘 새겨야 합니다. 다른 교훈은 없습니다. 다른 교훈은 바른, 좋은 교훈이 될 수 없습니다.(딤전 1:3) 다른 교훈은 바른 교훈이 아닙니다.(딤후 4:3) 또한 좋은 교훈이 아닙니다.(딤후 4:6) 오직 진리와 교훈, 능력과 성령, 교회는 하나입니다. 다른 교훈은 바를 수도 좋을 수도 없습니다. 다른 것 있다고 생각하지도 좇아가지도 마십시오. 배운 것과 선포된 말씀을(살전 2:13)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십시오. 기독교의 말씀이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순종에 이르면 온전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들은 것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새로운 것 찾아다니지 마십시오. 다른 남편, 아내, 밥상, 숟가락이 좋아 보여도 그것은 다 양분이 없는 것이요 집에서 먹는 밥이 뚝심을 주는 것입니다. 사먹는 밥은 끼니를 떼우는 것일 뿐입니다. 다른 교훈은 없습니다.
로마 교회의 칭찬이 여기 있습니다. 로마는 당대 최고의 도시이므로 철학과 이론이 많아 끊임없는 사탄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당장 이 교회를 벗어나면 그렇습니다. 특히 요즘 눈에 새겨지는 것은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이단교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신림동 봉천동에 이단교회들이 진치고 있습니다. 전라도 광주에 가보니 캠퍼스 앞에 이단교회들이 많았습니다. 불법의 영은 사람을 그리스도의 자리에 세우고 미혹의 영은 현세에 마음을 쏟게 만듭니다. 미혹은 현재가 끝입니다. 지금 좋은 것이 영원히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미혹입니다. 진리의 영은 이 세상의 것은 분토와 같고 잠시 이 세상에 내가 사는 동안 환란의 경한 것이 없지 않으나 영원한 복락과 천국시민의 삶이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진리의 영의 속삭임입니다. 미혹의 영은 그러나 현세의 삶을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 4:1) 이런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쉬쉬하면서 뒤에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오늘 새벽에도 말했습니다. 교회 일을 하는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을 안하는 사람은 판단하므로 교만해집니다. 세상 일은 자기 일을 하므로 끝내 교만에 이르지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친히 사람을 사용해서 하므로 결국 겸손에 이르는 것입니다. 분쟁에 이르는 불법과 미혹의 영은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합니다. 양약은 쓰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거치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그 사람들은 미혹하는 것입니다. 달콤한 이야기만 하고 좋은 이야기만 합니다. 사기꾼의 특징입니다. 심지어 감옥에 가서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전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 사탄에 잡힌 자, 불법과 미혹의 영에 잡힌 자들은 공통적으로 교회를 통해 자기 이익을 채우는 자들입니다.
7. 순전한 마음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를 통해 영적인 유익을 얻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갑니다. 잘 알아야 할 것은 교회가 나에게 세속적 이익을 주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를 다녔더니 세속적인 일이 잘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기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생명의 꿀을 먹는 것이요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며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처녀와 같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것을 교회에서 취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교활하고 아첨하는 말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봉사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주를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고 그 가운데 신령한 꼴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빼앗고 앗아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흔들어 부요하게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일차적으로 관심을 가지므로 세속적인 것으로 영혼이 피해입고 죽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 질서를 잘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온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이끌어가시고 이 모든 것을 더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지기교회 성도님들이 순전한 자들의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18절은 순진한 자들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원어 그대로 하면 악함이 없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아카카오라고 합니다. 카카오는 그릇되다는 의미입니다. 아카카오는 그러므로 그릇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흠이 없고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그런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말세에 우리 십자가지기교회가 있습니다.
이제 이전의 마지막 절차로 교회 간판을 도안해보고 궁리해 보는데 기도하는 가운데 소망이 있습니다. 정말 십자가지기교회에 머무는 우리 지체, 성도님들은 순진한 마음을 가지기를 말입니다. 창조적이고 월등한 마음보다 순진한 마음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정말 순진한 가운데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을 들고 중무장해서 나서는 것이 아니지만 중심이 선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를 바립니다. 본문 19절은 순진한 사람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한 자입니다. 악에 대해 잘 알고 선에 대해 무지한 자가 아니라 선한 데는 지혜롭고 악한데는 미련한 자입니다. 죄를 짓는 데는 남보다 뒤쳐져도 됩니다. 새치기하는거 안배워도 된다는 것입니다. 남보다 앞서가서 서류 하나를 더 떼고 차를 더 빨리 타는 방법을 몰라도 된다는 것입니다. 악한 것은 아닐지라도 몰라도 괜찮습니다. 세상에서 조금 밑져야 신령한 것으로 채워주지 않겠습니까? 마리아는 자기 이야기를 설교 때 하지 말라고 하는데 저는 삶의 반경이 뚜렷해서 별로 할 다른 얘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는 미안하지만 다시 얘기를 합니다. 어제 밥을 먹는데 찌개가 맛있어서 전라도 맛기행을 둘이 가자고 말하니 마리아가 교회 일을 마치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회개했습니다. 마리아가 그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중심이 됐다는 것과 제가 얼마나 엄살을 피웠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한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지기교회 성도들 뭔가 덜떨어졌지만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한 자라는 얘기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건물 청소 안하더라도 너무 화내지 마십시다. 그리스도가 귀하지 건물 깨끗한 것이 뭐가 중하겠습니까? 그래야 교회에 소문이 나지 않겠습니까? 로마 초대 교회 순교사를 보니 글을 읽고 있는 저도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저렇게 당하고만 있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소문났습니다. 그 답답함이 꽉 차니 로마가 멸망한 것입니다. 저 교회는 빠르고 챙기는 것 잘해서 당해낼 수 없다는 말을 듣지 맙시다.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너무 예민해서 이런 것을 더 신경쓰는지 몰라도, 그렇습니다. 물이 흐르면 조금 더러우면 어떻습니까? 지하 동굴에서 예배드린 카타콤이 있었는데 우리도 예배드리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은 창세기 3장 15절과 관계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우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싸우시고 모든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우리가 이 터에서 마음껏 기도하십시다. 이곳에서 기도와 찬송을 채워야 합니다. 디다케와 케리그마, 지혜와 선포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건물 외적인 것은 완성되었으나, 진정 있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눈물로 방석을 적셔야 하고 이 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기도해야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로마 성도들이 소문났는데 그들이 배운 교훈을 거스리지 않았듯, 우리 성도들도 주님이 가르쳐주신 교훈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거역하면 안됩니다. 무조건 말씀을 듣고 무조건 성경을 펼쳐야 영적인 생수가 흐르고 은혜가 넘칩니다. 능력이 샘솟습니다. 진리를 온전히 듣고 전하고 가르치는 십자가지기교회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20180204]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90)] 너희를 권하노니 (롬16:17-20)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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