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27]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2)] 부활하신 주님의 사도 (롬1:1-7)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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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7]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2)] 부활하신 주님의 사도 (롬1:1-7)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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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녹취록>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과 빛에 속한 사람, 죽음에 속한 사람과 생명에 속한 사람 입니다. 다 살아있는 사람인데 왜 누구는 죽은사람이라고 하고 누구는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하는지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육체의 생명만을 생명으로 여길 뿐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생각합니다.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빛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햇빛 앞에서 녹아버리는 것이 멸망이라면 우리는 오히려 빛 앞에서 자랍니다. 초는 열 앞에서 녹아 없어지지만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빛과 열, 이 봄의 온기 안에서 온전히 자라갑니다. 지난 주에도 같은 절의 말씀을 보며 로마서의 주제에 대해 전체적으로 살펴 보았다면 부활 주일을 기념하면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우리가 부활절을 기억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사셔서 첫 열매가 되었다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가 그와 함께 부활의 다음 열매가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을까요? 그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을까요? 그는 많이 배운 자로 학식이 뛰어난 유대인의 지도자로 촉망받는 젊은이었습니다. 말씀을 꿰뚫어볼 줄 아는 지식과 그에 따른 권위가 있는 자였습니다. 바울은 작다는 뜻입니다. 라틴어적인 이름입니다. 작은 바울은 사실 그 전에는 권위가 있다는 사울이라는 이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열두 지파 중에서도 고급스러운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열두 지파 중에서도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그런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잡아 죽이려는 혈기가 등등했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했는데 그 머리가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예루살렘에서 다 색출하고 그들이 흩어지니 따라가서 잡으려고 현재 시리아 지역인 안디옥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모든 제자보다 늦게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고 거꾸러져 사흘동안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곧 옛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눈에 비늘이 벗겨지자 이제 사울은 바울,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에 비늘이 벗겨지자마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부르심을 받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극적인 인생의 대전환을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된 사울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도 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죽음과 옛사람, 사망과 질곡과 신음과 절망의 비늘이 벗겨져 소망과 사랑, 하나님 안에서의 영생과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았고 오늘 이 자리가 그런 생명의 빛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자는 죽지 않고 살아서 죽는 자는 영원히 산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의 종이 된 것입니다. 

한편 1절의 '종'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주인의 돌봄을 받고 갈곳 없는 사람을 거두어들여 동등하게 먹이고 입히는 의미의 종입니다. 자신을 자녀삼아 주었지만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종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종으로 오셨고, 그를 만나는 자들도 다 예수를 닮고자 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빌2:6-7) 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종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자들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천성을 향해 나아가지만 이 땅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종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낮추고 종처럼 된 사람만을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2:9-11) 하나님은 자기를 비워 종이 된 사람만을 높여 모든 자들로 하여금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백성의 권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을 살때 종의 마음으로 남을 돕고 섬겨야 합니다. 

옛날에 헬라와 라틴, 오늘날로 그리스, 로마 시대에 종이라는 것은 하나의 도구, 물건처럼 여겨졌습니다. 팔면 팔리고 주인이 하라는대로 해야 하는 신분입니다. 옛날에 가구는 세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첫째, 말할줄 모르는 가구입니다. 찬장이나  옷장입니다. 둘째, 반벙어리 가구입니다. 이는 개와 소같은 짐승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는 가구, 바로 종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뛰어난 인물들은 다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열국의 아비로 부르신 아브라함을 '내 종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셨고(창26:24) 시편기자 역시 '하나님이 그의 종 아브라함'(시105:42)이라고 부르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 안에서 자녀가 된 자는 종이라고 불립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종 모세와는 친히 얼굴을 마주하면서 이야기'한다고 하셨습니다.(민12:7-8)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내 종 모세와는 대면하여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낮아져야 여호와가 보입니다. 겸손하고 낮아져야 하지만, 젊은 시절의 모세는 혈기가 강했습니다. 그러나 떨기나무 불꽃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온유해졌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면 그만큼 이 땅에서 온유한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종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대면하여 만난다고 하셨습니다. 종이 되어야 대면하여 만나주십니다. 종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주님 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종이고 주인입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이 대면해주십니다. 

모세에게도 여호수아에게도 다윗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종'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은 자녀, 언약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녀 됨을 종 됨으로 여겼습니다. 여호와의 빛이 임하니 이제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습니다.(롬6:18) 죄를 짓지 못해 끙끙 앓지 않습니다. 어떻게 앙갚음할까 억울해하는 사람은 죄의 종입니다. 그러나 의의 종, 부활된 자들은 남을 위하고 주를 위하여 살기를 애씁니다. 기도하니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종의 마음입니다. 이 종을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이 종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벧전2:9), 하나님의 것입니다. 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것임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띠를 두르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후 베드로가 "종이 주님을 사랑하시는 줄 주께서 아나이다"라고 고백하니, 예수님께서 '이제는 네 띠가 아닌 하나님의 띠를 두르고 다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종입니다. 자기 띠가 아닌 하나님이 그의 띠로 우리를 묶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굴레와 억압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는 발걸음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위험하고 더러운 곳에 가서 좌절하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우리에게 띠를 띠시면 어머니가 애들을 포대기에 안고 다니듯, 종은 안전합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출19:5-6) 우리는 다 종임을 내세웁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설립되고 가장 처음 설교한 것이 이사야서의 '종의 노래'입니다. 그 책에는 종의 노래가 계속 나옵니다. 그 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종의 노래가 나오는데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종이 되고 싶어집니다. 왜요? 예수를 닮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상석에 서지 않고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주기를 힘씁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모습입니다. 넉넉하니 섬깁니다. 은혜를 넉넉히 받았으니 섬깁니다. 남이 나보다 많이 있다고 생각하면 섬기지 못합니다. 초대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서도 대적자들을 축복하고 구원한 것은,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나는 빛과 은혜를 받아 부활의 백성으로 사는데 저들은 그렇지 않으니'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구원하려거든 가족에게 축복하십시오. 그것이 길입니다.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 사도 바울이 이방의 빛으로 여김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택하여서 이방의 빛으로 사용하셨습니다. 3차 전도여행을 가고 마지막으로 로마에가서 순교를 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부르심을 받고 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이제 우리를 보냅니다. 열두 제자를 보내고 권능을 주신 것처럼 우리 주님도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내심이요, 주님도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보내신 이는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땅에 더 이상 사도 직분은 없습니다. 목사, 장로, 집사가 있으나 이것은 특별한 계급이라기보다 모두가 다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소명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고 회개하고 거듭나고 의롭게 되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목사만 아니라 전부가 이방의 빛 이방의 사도입니다. 왜요? 빛은 임하면 빛을 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빛은 숨길 수 없습니다. 그게 빛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물리적인 빛보다 더 큰 빛을 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도 바울이 만났을 때, 일순간 그의 눈이 멀었습니다. 육체로는 그 빛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영화로운 몸을 감당할 수 없어 눈이 멀어졌는데 다시금 눈을 뜨게 하심은 영적인 눈을 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 변화가 다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부르셔서 이방의 사도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합니다. 모세를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선지자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도 말을 잘 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입술이 부정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단의 불로 이사야의 입술을 지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눈을 지졌습니다. 그러자 이사야가 '내가 여기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답합니다.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아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구별할줄 모르는 아이와 같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그를 불러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택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임신 전, 출생 전에 '내가 너를 택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빛은 머물러 있으면 비추이지 못합니다. 좁은 곳에서 빛이 모여 있으면 더 밝을 것 같아도 창문이 커야 밝습니다. 밖으로 퍼져 나가야 밝습니다. 내가 즐거우려면, 빛되게 살려면 나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일어나 빛을 비추일 때 내가 즐거워집니다. 그것을 안고 있으면 빛이 즐겁지 않고 따갑습니다. 이 빛을 나누어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빛을 받았을 때 자기가 죽인 스데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직접 돌을 던진 것이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당시 사회에서 남을 돌로 쳐서 죽이려면 율법사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그 허락을 한 율법사가 바로 사울입니다. 옷을 던지는 것이 허락의 표였는데, 사울이 옷을 벗어 던지자 사람들에 스데반에게 돌을 던진 것입니다. 그러자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했습니다.(행 7:55-56)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신 것을 스데반은 봤습니다. 청년 사울은 아마 스데반의 얼굴에서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주를, 그 빛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고 오랫동안 그 빛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사실사 사울이 스데반을 죽인 것인데, 스데반은 사울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빛이 얼굴에 있고 감사했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곳, 장로교 본산지인 스코틀랜드, 에는 뒤에 언덕과 같은 산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부활절에 떼굴떼굴 굴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림이 아닌 계란을 굴린다고 합니다. 저도 부활절 아침에 거기에 가서 본 기억이 납니다. 부활절에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저는 그것이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빛을 받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공로가 내 것이 되고 그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어서 내가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찬을 거행합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미하지만, 계속 죽어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의 피와 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성찬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죽음을 죽으시는 죽음'을 죽으사 사망의 쏘는 것을 되받아 사망에게 쏘아버린 그의 권능이 부활로 나타난 것입니다. 세상의 흑암을 모두 십자가에 모아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어두움을 가져가신 것입니다. 죄된 어두움을 다 모아서 우리의 부정, 음란, 사욕 등 모든 것을 모아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사흘 동안 죽어 계시고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화평하게,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육체가 있어 여전한 곤고함이 있지만, 가슴치며 절망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빛이시므로 우리를 즐겁게 회복시킵니다. 예수를 만나야 빛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야 비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고 맑은 물이 우리 안에 흐르고 빛이 가득합니다. 빛으로 어둠을 깹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 빛을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예수는 육신으로는 유다 지파에서 나시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성결의 영은 주님이 받은 성령 혹은 주님의 신성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입니다. 본문 3절은 예수님이 사람이셨다는 것을, 4절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은 사람이자 하나님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그의 소유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3)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이니 그가 우리를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다. 책임지십니다. 보호해 주십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보호하듯 말입니다. 자녀를 사랑하거든 잘 믿으십시오. 요새 험악한 뉴스가 많습니다. 육신의 부모는 부모라도 자녀를 돌볼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도 자녀에게 가 닿을 수 없습니다. 자녀를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를 돌보시게 해야 합니다. 자녀를 내 것으로 부르기보다 하나님이 자녀를 하나님의 것이라고 부르시게 해야 합니다. 자녀에게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났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차이가 납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빛이 역사합니다. 특히 한 가지 주된 차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예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영화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음악을 이야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소유를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소유에 매여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많이 이야기하고 자랑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주님을 자랑할수록 내가 커집니다. 내가 부요해집니다. 주님을 자랑할수록 그렇습니다. 축복할수록 그 축복이 내 것인 됩니다. 주님의 이름에는 그런 비밀이 있습니다. 주님께 관심을 가지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것이고 그의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5절에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가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 지금 죄로부터 멀어지셔야 합니다. 욕심과 미움을 버립시다. 이 부활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을 바라보면서 서로 사랑합시다. 판단이 있으면 그 마음을 버리고 가족과 친척과 주변 이웃을 귀하게 여기고 나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