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17]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2)] 더불어 화목하라 (롬12:17-18)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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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7]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2)] 더불어 화목하라 (롬12:17-18)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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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2:17)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 12: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녹취록>

(*아래 녹취록과 동일한 내용이 "커뮤니티-목양자료-지기들의 삶터 묵상"에 주중 묵상 목적으로 요일별(월~금) 게시되어 있습니다.) 



1.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으로 사귐이 있음

본문 두 절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7-18) 우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므로 그의 백성은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18절,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 하라고 합니다. 요한일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그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는데 그리하여 우리가 보고 들은 이 말씀으로 다 사귐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 사귐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우리가 더불어 누린다고 합니다.(요일 1:3). 

즉, 태초로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그 말씀을 자세히 보고 자세히 듣고 만진바 되었는데 그 말씀을 전함으로 우리가 서로 사귀고 더불어 누림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본문 18절에도 나오는 '더불어 누린다’는 우리에게 어찌하여 가능합니까? 요한일서는 ‘우리에게 한 대언자가 있는데 그가 곧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라고 합니다.(요일 2:1-2) 오늘 설교를 요한일서로부터 시작하는데, 곧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3절은 태초로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자세히 보고 듣고 만진바 되고 그 말씀을 전함은 사귐이 있어 서로 사귀고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누리게 하기 위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2장은 우리에게 한 대언자가 있는데 대언자는 중보자, 위로자, 즉 파라클토스, 보혜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었다고 합니다.(요일 2:2) 전체적으로 로마서는 요한의 서신서들과 일맥상통합니다. 우리는 로마서가 나중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로마서가 요한복음보다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그의 서신서를 기록할 때는 이미 사도 바울의 글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죄가 들어온 후 인류의 상태

할 수 있는 대로 더불어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더 판단하고 각을 세우는 것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에덴동산에서는 모두 서로 화목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지식, 감정, 의지를 주셨는데, 지식을 가졌으나 알수록 더욱 기쁘고 채워짐이 있었습니다. 감정을 가졌으나 부족함이 없고 느낄수록 더 심오해지고 의지를 가졌으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뜻하고 작정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다스리고 지키라는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이는 더불어 성장해가라는 말, 온전해지라는 명령입니다. 압제하고 착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릴 때 들은 비유로 천국에는 큰 숟가락이 있어서 서로 먹으려고 하면 자기가 먹을 수 없고 서로 먹이려고 하면 행복하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바로 에덴, 천국은 남을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인 장소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유토피아, 천국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곳이 없습니다. 유토피아는 영어로 하면 nowhere 입니다. 그런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니 나를 위하기만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처럼 할 수 있으면 더불어 화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취하고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니 아는 것이 죄의 지식이 되었습니다. 알면 알수록 남을 이용합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마음이 착해지는 지식이 요즘 있습니까? 느끼는 것도 온전치 않습니다. 느끼면 즐겁거나 슬퍼하는 것이 감정의 해소가 되고 자존감을 가지게 해야 하는데 죄가 들어오니 느끼는 게 병이 되었습니다. 감정도 병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들어오니 의지하는 것이 죄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남을 채움으로 나를 채워 함께 자라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남을 밟습니다. 아무 이익이 없어도 그렇게 합니다. 똑같이 들고 있어도 남이 들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남이 비참해야 나의 행복이 돋보이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똑같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돋보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이 잘못되어야 합니다. 옆집에 그림 잘 그리고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 것인데 그런 꼴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더 좋고 귀한 것을 말하기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선은 드러나지 않고 악한 사람만 더욱 드러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익만 되면 아무 것도 분별치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화평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을 지어 우두머리가 되고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누구에게 갚으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은 잊어버리고 오히려 받을 것만 생각합니다. 은혜를 갚으려는 보은은 없고 보복만 있는 삶이 되었습니다. 내가 배고플 때 무지할 때 헤맬 때 나를 도와주고 이끌어준 그 사람에게 어쨌든 은혜를 갚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새는 잘 살기 때문에 웬만하면 한 가정을 도울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잘 되어 있는데 스승이 굶는 것을 그냥 못본 체 하는 일도 많습니다. 지난 주 어느 시인에 대한 뉴스를 우리가 보았습니다. 시집 한권 팔면 800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3. 선함: 진리에 서서 열매를 맺음 — 구원

함께 잘 사는 것이 없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담이 생긴 것입니다. 제주도야 바람을 막기 위해서 그렇다고 해도 인생의 담은 도둑을 막으려고 하다 보니 높이 쌓고 유리를 깨서 꽂고 철조망을 해 놓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무서우면 그렇게 하고 살아야 하느냐 말입니다. 어릴 때 시골에는 담이 없었습니다. 친구 집에 놀러 간 기억이 있는데 화장실에도 담이 없었습니다. 무조건 그것이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은 이 땅에 막힌 담을 헐러 오셨습니다. 우리 마음의 담이 얼마나 큰지 돌이켜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면 이 땅에서 그렇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잘 먹고 번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어울려 정답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자는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고 매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죄가 있는 이상, 우리의 생각과 지식과 느낌 모두 온전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합니다. ‘선하다’는 말이 구약에는 토브로, 신약에는 아가토스로 등장 합니다. 원어를 이야기하는 것은, 선하다는 말이 단순히 윤리적인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함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로 진리에 서고 두 번째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함에는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어 천국 곳간에 들이는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선하다고 할 때 진리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 복을 주셔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의미입니다. 

4. 선으로 악을 이김

악은 비진리이고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악인은 나는 겨와 같고 티와 같습니다. 흥왕하는 것 같아도 뿌리가 없고 방향이 없습니다. 결코 악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악은 그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먼지만 끌고 다니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선한 일은 바로 진리 가운데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으로 악을 대하는 그런 악순환에서 벗어나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선의 순환의 고리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이 이것입니다. 세상이 선을 행해봤자 뭐하냐고 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면 악에 지는 것입니다. 선순환으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조류는 악이 선을 이기는 것인 것 같습니다. 저도 가끔 방송국에 나가기도 했는데, 가서 보면 그런 것을 느낍니다. 말을 잘하고 조금 더 모진 사람이 방송국에서 통합니다. 물론 그 짧은 시간에 행간의 뜻을 다 전할 수 없지만, 얼마냐 깊이 생각하느냐가 중요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저 모질고 더 말 잘하는 것이 환영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도가 인생을 살면서 악이 선을 이긴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인생을 거룩하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면전에서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이 다 악이 선을 이긴다고 생각해도 우리 믿는 성도만큼은 선이 악을 이기고 오래 참음이 낫고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갖다 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오른 뺨을 맞고 왼 뺨을 갖다 대면, 그 사람의 나머지 손이 미안해서 안 아프냐고 어루만지게 됩니다.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순환입니다. 

그런데 오른 뺨을 맞았다고 오른 뺨을 나도 때리면 그 사람이 나의 왼 뺨을 때리고 이것이 반복되게 됩니다. 보복의 심리입니다. 선순환을 만들기 위해서는 참아야 합니다. 맞아야 합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입니다. 당한 만큼 갚아주겠다고 생각해서는 이 세상의 악한 영에게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정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은 그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해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학생들이 그렇게 자주 묻습니다. 왜 초대교회에는 기적과 이사가 있는데 요새는 없냐고 말입니다. 그러면 저는 초대교회만큼 기도하냐, 선한 일 하냐, 나누냐고 되묻습니다. 내 마음의 선이 하나님의 말씀 중심성이 없는데 기적과 이사를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현상적으로 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처음 저주의 무리였습니다. 신명기에 따라 장대에 달려 백주 대낮에 나무에 달려 벌벌 떨다 죽는 죽음이었습니다.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저주의 죽음을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그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저주받은 사람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닮아서 보혜사 성령을 받으니 남을 사랑하고 서로 없는 것, 있는 것 나눠서 먹고 기도하고 찬미하므로 (행 2:47) 온 백성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저주의 무리라고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이 나중에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무리가 된 것입니다. 오른뺨 맞으면 왼뺨을 대고, 사자에게 물려 죽이면서도 찬송하고, 자기를 찔러 죽이는 병정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니, 두려워하다가 나중에는 칭송한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맞서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니 처음에는 두려워하다가 이후에는 칭송하고 함께 모여 찬송해보자는 마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본문 말씀이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가토스, 우리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토브,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장 고상한 사람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은 누구나 다 합니다. 부귀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합니다. 그러나 밑지더라도 참고 온유한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오른뺨을 맞고 왼뺨을 댈 때 그 싸움이 끝납니다. 그렇지 않고는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오른뺨을 맞고 왼뺨을 갖다 대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고후 6:2-7) 

사도 바울은 지금은 구원의 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에게서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어쨌든 믿는 자들이 거리끼지 말라게 하라는 것은 소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연자 맷돌을 매서 바다에 빠뜨리는 것과 같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많이 참고 주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많이 힘들게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천한다는 말은 아무도 몰라줘도 자신은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나빠서 지탄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나를 일꾼 삼으셨으니 자천한다는 것입니다. 

5. 자기부인과 자기사랑 —  주님 안에서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고후 6:8-9) 

이후 8절, 9절은 영광이 있으나 치욕이 있으나 주의 일꾼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같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성도의 한 가지 철학으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요'라고 한 후, '우리 인생의 최고 큰 전염병은 맹목적인 자기 사랑'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아무리 미사여구로 꾸며도 성도에게는 한 가지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부인과 자기사랑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인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을 하십시오. 그러나 맹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고 주 안에서 감사하고 주 안에서 사랑해야 합니다. 맹목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존감이 있고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값 주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교만하지도 자기학대적이지도 않습니다. 간혹 우리 자신을 보면 이 세상에서 너무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피곤하게 하는 것 같지만 반대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서는 답이 없습니다. 유일한 차이 한 가지는 누가 주님을 붙드느냐입니다. 누가 누구를 더 해치느냐를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똑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이 서로 해치는 것은 자체로는 답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하나님을 바라보느냐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되 주 안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열매 맺는 자기애를 가져야 합니다. 끝내는 뿌리도 없고 스스로 무너지는 자기 사랑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간혹 자기 자신이 불쌍하고 서글픕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다면 열매 맺는 자아가 될 것입니다. 

6. 이 사회의 악의 고리를 끊을 자, 성도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신, 주의 영이 거하는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그의 아들을 보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10) 구약으로 샬롬, 신약으로 에이레네 입니다. —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엡 5:15) 화평의 언약을 맺어 새 사람을 입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있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죄가 없는 가운데서도 맞고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악의 고리를 끊었습니다. 

누가 이 사회의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있나요? 기독교인들이 해야 합니다. 도리어 악의 고리에 참여해서는 안됩니다. 조금 더 취하고 착취해서는 악의 고리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은 무죄한 피를 흘리고 죄가 없는 가운데서도 맞으셨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뺨을 갖다 대야지 손이 남았다고 끝없이 휘둘러서는 악순환을 끊을 수 없습니다. 나머지 뺨을 마저 갖다 대야 부부간의, 부모 자녀 간의 악순환이 끝납니다. 보복이 아닌 보은의 논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짐승도 은혜 갚을 줄 압니다. 개도 주인을 위해 죽을 줄 압니다. 하물며 사람이 은혜를 갚지 못하면 안됩니다. 끊임없이 취할 것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갚으려거든 부모의 은혜를 먼저 갚으십시오. 그것 없이는 세상의 생활이 온전할 수 없습니다. 받으려고 따지는 사람은 결코 큰 지도자가 못됩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참아야 합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선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가급적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선이 바로 열매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 준비하고 사십시오. 오른뺨 맞거든 반대 뺨 댈 준비를 하고 사십시오. 그래야 머리가 됩니다. 악을 선으로 끊어야 선한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공동체가 끝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0-13) 서로 용납하며 피차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 

7. 맞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  화목하게 하는 직분

말씀을 전하는 부족한 종도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이 땅에서 크리스천이 사는 의미는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이 땅에 맞으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맞아야 선순환이 될 것이요 우리도 같이 때리면 악순환이 됩니다. 세상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죄가 나쁜 것입니다. 마귀 사탄의 사슬을 끊어야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 사탄의 사슬이 우리를 끊임없이 옭아맵니다. 적당히 거짓말하고 모질어야 한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끝까지 당하십시오. 훔쳐가거든 그냥 당하십시오. 나도 훔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18-20)

십자가지기는 하나님 안에서 영광의 공동체입니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전자는 영광의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는 다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여 천국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우리 가족도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영광 공동체입니다. 서로 용납하고 화목하고 그 위에 사랑을 더하는 이것이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 사도들도 서로 다툴 때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 바울과 바나바도, 마가도 바울과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들은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도 한국교회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화목하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여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참읍시다. 맞읍시다. 직장에서도 간, 쓸개 다 내놓고 나가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십니다. 오른뺨, 왼뺨 아예 준비하고 나가십시오. 그리고 다시 말씀 드리지만, 밤에 사람 아닌 하나님 떠올리면서 주무십시오. 그러면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악의 고리를 선의 고리로 전환시키는 사람이 지도자가 됩니다. 악의 고리에 부화뇌동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은 결코 지도자가 아닙니다. 많이 맞으니 초대교회가 성장한 것입니다. 맞지 않고는 한국교회도 전도할 수 없습니다. 요새 우리 성도들이 맞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쟁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같이 때리고 오히려 더 명예를 얻고 이기려고 합니다. 상술에서, 또 모든 것에서 더 이기려고 합니다. 차를 타도 밥을 먹어도 더 빨리 하고 더 많이 누리려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 은혜라고 간증합니다. 

주님과 같이 맞아야 합니다. 밤새 기도하는 것은 그 다음 날 수모 당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밤새 기도했습니다. 왜요? 그 다음 날 십자가에서 수모 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큰 인물이 되려면 수모 당할 생각부터 하십시오. 아무나 수모 당할 수 없습니다. 밤새 기도하는 사람만 수모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끝내 지도자가 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선이 바로 진리요 열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벗어나면 겨와 티 밖에 남지 않습니다. 집 나간 탕자같이 됩니다. 아무 것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진리 가운데 선하면, 화목하면 됩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이 우리 성도들에게 넘치기를 원하며 세상에서 어렵더라도 굳건히 이겨내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