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24]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3)] 선으로 악을 이겨라 (롬12:19-21)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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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4]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3)] 선으로 악을 이겨라 (롬12:19-21)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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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2: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녹취록>
(*아래 녹취록과 동일한 내용이 "커뮤니티-목양자료-지기들의 삶터 묵상"에 주중 묵상 목적으로 요일별(월~금) 게시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어떠하심: 끌어안고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고 기다림

지난 주 17절 말씀에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배웠습니다. 악의 순환이 있고 선의 순환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중 선순환의, 선의 고리의 삶을 살아야 된다고 배웠습니다. 두 손이 모두 때리는 데에만 열중하면, 가정의 부부가 네 손으로 때리기만 하면 그것은 악순환입니다. 한 손이 화를 내면 한 손이 말리고 두 손이 화를 내면 두 손이 말리는 선의 고리가 있어야 합니다. 선으로 악을 다스려야지 부창부수라고 같이 끝없이 악의 굴레로 들어가는 것은 안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조금 남한테 거슬린다고 나는 그 사람을 더 왕따 시키거나 미워하면 그것이 악순환입니다. 어쨌든 모났더라도 감싸주려고 하면 조금 더 잘 적응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선순환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요즘에는 그러지 못하지만 40대에는 학생들과 함께 축구, 농구를 같이 했습니다. 그런데 시합을 하다 보면 학생들이 1학년 때는 다 거칠게 하고 서로 잘잘못을 따지다가 자주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2학년, 3학년이 되면 나아집니다. 그 축구장에서도 선순환이 작용하므로 사람이 점점 착해져서 예의도 지키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닮으라고 합니다. 산의 어떠함은 온갖 이산화탄소나 더러운 것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화시켜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산이 있으므로 인간이 뿜어내는 매연과 오염물질이 정화됩니다. 그러므로 자연이 온전히 회복되는 것입니다.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가면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물도 그렇습니다. 태안반도에 기름이 유출되었을 때 미세한 바위 틈, 땅 속까지 기름이 스며든 것을 보면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자연이, 바닷물이 들어가서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끌어안고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고 채우고 기다리는 사랑입니다. 

2. 인간을 축복하신 예수님

우리가 지난 주 보았던 14-18절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반부라면, 오늘 본문 21절까지는 특별히 판단하지 말라는, 원수를 인간이 직접 갚지 않고 하나님이 갚도록 하라는 말씀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주는 14절까지는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는 명령이 강조됩니다. 축복은 나쁜 말이 아닌 좋은 말을 빨리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은 체휼하라고 합니다. 체휼이라는 것은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우는 것입니다. 16절은 높은데 올라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고 낮은 데 처하라는 겸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7절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18절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화목을 말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안고 축복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면서 축복했고 십자가에서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셔서 체휼하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슬피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한탄하셨고 우리의 죄 때문에 심히 근심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땅에서 높은 곳에 자리를 두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어 종의 형태를 가지셨습니다. 최고 낮은 말 구유에 오시고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위선자를 미워했지만, 악을 미워했지만 악한 사람조차도 사랑하시고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사람을 해코지 하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유다 지파에서 오신 분이지만 사마리아 여인, 거라사 광인 등 세상이 가 닿지 않고 팽개치는 그 곳에 주님께서는 가 계셨습니다. 

3. 믿고 영접하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남

이러한 마음을 품는 가운데 본문 19절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 "내 사랑하는 자들아.” 이것은 사도 요한이 많이 쓰는 것이지만, 바울도 이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에 모든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에 대해 사도 바울이 가지는 사랑으로도 볼 수 있지만, 주 안에서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 즉 주님의 사랑 가운데 함께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7절입니다.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또한 요한복음 1장 12-13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4장 7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고 영접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이요 사랑하는 자들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끔 하고 우리 안에 사랑의 영을 넣어주셨으므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성경에는 무엇 하나 우리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누구를 사랑할 수 없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땅하다'는 말은 할 수 없이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빛이 들어오면, 향이 들어오면 빛이 나고 향이 날 수 밖에 없듯,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부부의, 형제의 사랑이 있으나 그것도 주어진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임하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베풀 때 우리의 기질, 성정, 성격을 보지 않아야 합니다. 마치 내가 사랑을 베푸는 존재 같이 여기는 것이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4. 가인의 마음과 아벨의 마음 —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음을 인정함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

사랑의 요소는 겸손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남을 나보다 업신여기면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 앞에 서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어떤 주어진 마음이지, 내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나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의 마음으로 빚어 주셔서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사랑하는 자들은 모든 것을 받았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으니 스스로 성취했다는 가인이 아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다는 아벨의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모이기에 힘쓴다는 것은 서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예수님이 나를 온전케 하시고 자유자로 부르시고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으므로 그 기쁜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잘 살기를, 아름답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용서하고 베풀고 참고 많이 베풀 때 아름답지 않을까요? 악하고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세상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 오순절 성도들이 받은 영은 베푸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취할 기회를 얻었다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남을 사랑하고 나보다 낫게 여겼다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 그리스도인은 어찌됐든 화목하게 해야 합니다. 화목하지 못하면 화목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나누고 당 짓는 것을 잘해서 성숙한 성도가 아닙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5. 오직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을 주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을 대적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 안에 들어오면 아무도 우리 원수가 없습니다. 본문 19절은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합니다. 원수는 처음부터 없습니다. 내가 옳고 저 사람은 그릇되었다고 하므로 원수 삼습니다. 내가 못나고 상대방이 착하다고 생각할 때는 결코 원수가 될 수 없습니다. 판단하는 것은 나는 옳고 반듯하지만 저 사람은 잘못되고 모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면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임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라도 나도 하나님의 원수이니 말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께서"(딤전 1:12)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능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능하게 하셨습니다. 주님 없이는 무능하며 말씀과 기도 없이는 거룩한 것이 하나 없습니다. 살아갈수록 그것을 느끼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 거룩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깨끗한 것도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가 있을 때만 거룩해집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내 안에 있는 그대로 거룩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은혜도 그렇습니다. 내 행실도 그렇습니다. 지식도 그렇습니다. 날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룩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를 능하게 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옳다 그러면 판단할 수 있지만, 나를 능하게 하신 분이 그리스도이므로 나는 그저 은혜를 이야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를 원수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원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러므로 실제 우리에게 원수는 없습니다.

6. 육체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라: 주님과 같이 참고 기다리고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내가 먼저 긍휼을 입은 것은 예수님이 나에게 오래 참으심을 드러내셔서 나보다 늦게 믿은 자에게 본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믿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먼저 구원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은 우리보다 늦게 믿는 사람들도 나와 같아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었듯 남에게도 그렇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 19절 역시 '원수를 친히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합니다. 하나님만이 판단자입니다. 내가 판단하다가 내가 넘어갑니다. 우리의 육체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다름아닌 주님과 같이 참고 기다리고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판단하고 덫을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화평이 있고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 잔에 채웁니다.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존귀하게 하려면 그와 같이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순간 내가 부끄러워집니다. 

우리는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합니다. 악에게 지는 것은 다름아닌 악을 악으로 갚는 것입니다. 욕하면 나도 욕하고 맞으면 나도 때리는 것이 악입니다. 억울해도 참으십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고 계십니다. 주님이 적절한 시기에 우리의 고개를 들게 하십니다. 다시금 세워주십니다. 절대 우리 십자가지기 성도님들은 코람데오, 여호와 앞에 살아야 합니다. 투서 쓰거나 댓글 달거나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을 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우리 신학생들도 댓글을 달고 한 사람을 음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댓글을 달지 말고 글을 쓰세요. 아름다운 글을 써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절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겨갈 때 자기를 저주한 노인 시므이를 그대로 놔뒀습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시게 놔뒀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뛰어난 점입니다. 그렇게 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꼭 참으십시오. --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신 32:35) 우리가 생각할 때는 더디 오는 것 같아도 악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일을 온전케 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참고 하나님께 판단을 맡겨야 합니다. 

7. 여호와를 향한 감사의 회복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대적이 많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내가 남에게 그렇게 될 때도 있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큰 시험거리이고 고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누군가는 나로 말미암아 힘들어할 수도 잠이 못 들 수도 있습니다. 그 일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 수 있나요? 우리는 다만 그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상대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그렇게 하지 말고, 선의 고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것입니다. --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시 35:1; 9)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죄인인데, 일만 달란트를 빚졌는데 이를 변제 받아 구원 받았다는 믿음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또한, 오늘 새벽기도회 때 본 것처럼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가 가능할 때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습니다. —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시 35:12-13) 즉, 내 원수가 병들었을 때 하나님 앞에 굵은 베옷을 입고 근심하면서 (그를 위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내 원수가 병들었는데 고소해하지 않고 베옷을 입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입니다.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어머니를 곡함 같이 하였도다."(시 35:14)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원수가 아픈데 형제와 자매 같이 그들을 위하여 슬퍼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곡하듯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저 시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해 주셨으니 300 데나리온으로 남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황금을 트럭 한 가득 실은 것과 같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금액입니다. 300 데나리온은 일년 치 삯에 준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려면 사람을 향한 판단을 그치고 여호와를 향한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을 향한 판단을 그치고 여호와를 향한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능히 구원하시기도, 능히 멸하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냐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축복해야 합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다윗의 시편 35편 시와 같이 나에게 악으로 갚는 대적이 아플 때 조차  형제와 부모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으 주시리라."(잠 25:21-22) 정말 원수를 보복하고 싶으면, 오히려 먹이고 마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핀 숯을 머리에 올리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원수에게 선대하는 것이 그것과 같다는 것인데,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원수를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오늘날 기독교가 무력한 것은 내 판단으로 안된다고 하고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히려 더 철저히 원수를 갚고 정죄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판단이 들어오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저 축복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나갑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화저를 들어 숯불을 들어 원수의 이마에 대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합니다. 빛으로 어두움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관용으로 판단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시기하는 자를 상대 편을 낫게 하는 마음으로 이기라는 것입니다. 평화로 전쟁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요즘 미국 대통령을 보면 미국의 격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막무가내인 북한을 상대한다 해도 어찌 저런 품위 없는 방식으로 서로 맞상대를 하면서 미국의 격을 떨어뜨리는지 답답합니다. 누가 봐도 트럼프는 미국의 중산층, 백인 기독교인들이 뽑아서 당선되었는데, 참 답답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는다면, 물론 미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지 않지만, 그래도 미국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기독교적 가치관인데,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클린턴의 예를 봐서도 그렇습니다. 개신교의 가치가 있습니다. 오히려 프랑스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카톨릭이 들어가 있어서 부정해도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정치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저 성경으로 봤을 때 답답하다는 말입니다. —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4) 이것은 성도들 사이의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남의 하인'은 같은 하나님의 자녀 된 다른 성도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니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특히 성도들 간에 그렇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악에게 지지 마십시오. 우리 가정도 선이 악을 이겨야 합니다. 더 악해지면 안됩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그 가정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기도하는 쪽으로 그 가정을 몰아 가십니다. 아빠도 엄마도 모두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삶에 배어야 합니다. 가정에 기도 중심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기도 외에 판단, 나의 경험, 지식 등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은밀히 기도하는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은밀히 그리스도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누군가 은밀히 우리 가정에 기도하고 있다면 그 기도가 우리 가정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모든 성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세상에 원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붙들면 원수도 기쁨이 됩니다. 판단하려고 하면 집니다. 그러나 참고 기다리십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이 다 드러나게 하십니다. 등경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말 위에 두어 마을을 비추게 하십니다. 밝은 들은 구석에 두지 않습니다. 높이 들어 사용하십니다. 내가 밝으면,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나를 높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