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08]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5)] 사랑, 율법의 완성 (롬13:8-10)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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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8]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5)] 사랑, 율법의 완성 (롬13:8-10)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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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3: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녹취록>



1. 사랑: 긍휼히 여기는 것

기독교의 최고 가치가 사랑이라고들 합니다. ‘사랑’은 인구에 많이 회자되며 이만큼 매스컴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을 찾기 어려운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무성한데 일어나는 일들은 전혀 관계 없는 것이 많습니다. 시기, 증오, 질투가 가득합니다. 무차별 총기 난사로 죄없는 사람들이 많이 죽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이런 뉴스를 보기 어려웠는데 요즘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전해집니다. 이로 인해 사랑이라는 것이 말로 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위로의 말로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참 아름답습니다. 격려하고 세워주고 힘을 주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사랑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부족한 시대라고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일단 가장 흔히 회자되는 것은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함께 잘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에로스의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남편도 아내도 모두 잘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없으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스토르게의 사랑이라는 것은 형제적 사랑입니다. 이것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함께 잘 되는 것인데 하나가 돼서 잘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나를 무너뜨리고 상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나는 부인되고 감추어지고 고생하고 상대를 올려주는 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 사랑이 모두 귀하지만, 말할 나위 없이 본문에 나오는 사랑은, 성경적 사랑은 아가페적 개념인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이라고 할 때 먼저 그려지는 것은 뭔가 채워지는 듯한, 혹은 누리는 듯한 느낌일 것입니다. 배우자를 찾고 기다리는 말을 하는데, 남을 잘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이 바로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중심에 세우고 내가 유익한데 상대편도 유익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은 구약에서 인자, 자비로 표현되는 ‘헤세드’입니다. 신약에는 사랑, 긍휼 등으로 표현되는 '아가페'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가장 먼저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므로 내 것을 빼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므로 아들을 죽여서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헤세드, 신약의 아가페,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런 마음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면 사랑이신데 살아 계시니 사랑이시다.’ 이렇게 뭔가 제 마음 속에 결론을 지었습니다. 가정법을 쓰는 것은, 사람은 살아 있으면 원수가 되기도 하고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하나님은 살아 계시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아 계시니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인정되면 전부 사랑입니다. 하늘의 별도 달이 창공에 붙들려 있는 것도 전부 사랑입니다. 비가 내리는 것도, 눈이 내려 녹는 것도 전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꽃의 피고 지는 것도 모두 그렇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시고 붙드시는(히 1:3; 6)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의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신분적이고 존재적인 사랑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으로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사랑은 윤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신분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 사랑으로 낳은 사랑의 자녀이고 사랑의 영을 받아서 사랑의 은사가 우리 안에 있는 사람들 입니다. 신분적입니다. 가정의 자녀됨이 신분이듯 사랑은 누구에게 주고 안 주고 내가 조금 더 정신차리면 행하고 아니면 떠나는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이신 아들 자신을 주시므로 우리가 사랑이 되게 하시는, 우리의 인격과 신분과 존재를 바꾸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이제 내가 조금 못나보여도 나는 사랑의 자녀입니다. 이제는 덜떨어져 보이고 여전한 허물이 있고 하나님 앞에 부족해 보여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 “..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계 2:8) 또한, 요한계시록 1장 5-6절은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시고 우리를 해방시키셔서 나라와 제사장 삼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3.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은사, 최고의 은사

우리는 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온전한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향이 들어왔으므로 향기를 내고, 빛이 들어왔으므로 빛을 비춥니다. 성도의 삶은 전부 은혜입니다. 내가 빛이나 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시고 향기이시므로, 그가 내 안에 들어오실 때 우리도 빛과 향을 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사랑이시므로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임하시므로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어떤 사람에게 은사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성도에게 다 은사로 주신 것입니다. 은사의 장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인데 그 중 최고의 은사가 13장에 나오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으면 사랑의 영을 받는 것이므로 오순절 초대교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떡을 떼고 서로 있는 것 없는 것을 나누어 갖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이 다 주셨습니다. 방언이니 예언이니 가르치는 것이니 권하는 것이니 은사가 많지만, 최고의 은사는 사랑의 은사입니다. 

4. 사랑의 빚: 불가항력적 은혜

본문 마지막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요, 피차 사랑의 빛 외에 지지 말라고 합니다. 사랑이 최고의 은사고 사랑은 모든 자녀에게 다 주셨습니다. 제가 여기서 설교하고 가르치지만, 이 은사도 사랑의 은사에는 가 닿지 못합니다. 사랑의 은사가 최고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그 은사는 모든 성도가 다 받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임하여서, 그런 사랑할 자격이 있고 사랑할 빚을 진 존재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어릴 때부터 성격을 잘 다듬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은 잘해야 에로스요 스토르게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에 동참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요, 불가항력적인 빚입니다. 본문의 사랑의 빚은 불가항력적인 빚입니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입었으므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빛을 비추면 내가 즐겁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왜요? 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나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겹고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랑할 때 즐거운 것입니다. 초는 빛을 낼 때 즐겁습니다. 소금은 맛을 낼 때 즐겁습니다. 성도는 사랑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할 때 즐겁고 내 가치관이 구현되고 이 땅에 온 목적이 이루어집니다. 큰 기업을 경영하는 것도 좋은 차를 타는 것도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의 사도로서, 사랑의 심부름꾼으로서, 은혜의 빚을 졌기 때문에 사랑하고 빛을 비추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여기서 빚은 갚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갚으면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는 갚을 빚이 없습니다. 즐겁게 행합니다. 즐거운 노래, 피리 소리를 들으면 춤 추는 것이 노동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즐겁습니다. 왜요? 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내 신분과 존재가 보혜사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온전히 역사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베풀고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때 내가 내 사랑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가 사귐이 있다고 합니다. (요일 1:7)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으므로 우리와 그 사이에 온전한 사귐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사귀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들어와 이제는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인데, 그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함으로 사귀는 것입니다. 

5. 사랑할 때 하나님과 온전한 사귐이 있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내 안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온전히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온전한 사귐이 있습니다. 주여, 주여 기도해야 합니다. 가슴을 치면서, 뒹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온전히 이룰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해집니다. 초는 빛을 낼 때 빛납니다. 나를 빛내는 것이 아닌 바깥을 비추려고 탈 때 초가 빛나는 것입니다. 꽃도 바깥으로 향기를 낼 때 향기롭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웃을 사랑할 때 그렇습니다. 본문 9절에 여러 계명이 있지만,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에 모든 계명이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 봅니다. 사랑은 신분입니다. 사랑은 윤리가 아닙니다.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사랑의 자녀가 되고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때 즐겁습니다. 속일 때 즐거운 것은 육체입니다. 이제는 육체의 소욕이 아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의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므로 내가 진정 기뻐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입니다.  우리가 언제 기쁜가요? 줄을 서서 남보다 먼저 먹을 때가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양보해서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받아 먹게 할 때 우리의 영이 기쁩니다. 하루를 결산할 때 양보하고 어려운 말을 듣고도 참았다고 하면, 그 때 기쁜 것이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에도 사랑의 말씀이 많이 나오지만, 요한일서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말씀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본 서신을 사랑의 편지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있으며, 진리를 알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고, 무엇이든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고, 그리고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요일 2:9; 20; 25; 3:20; 4:13) 그래서 정리하면,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고 그 빛이 내 안에 들어와 생명으로 역사해 그 생명의 역사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 3:1) 

여러분, 우리는 사랑할 수 있게 은사를 받았습니다. 가장 큰 은사를 받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물을 한 컵, 문이라도 한 번 열어주는 것, 그것이 최고의 은사입니다. 은사로 날아다니고 바위를 깨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필요하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최고의 은사는 신분적, 인격적, 존재적 은사입니다. 다른 것은 다 들락날락거립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은사입니다. 그리고 은사는 교회에서 활용될 때만 역사합니다. 어떤 사람이 은사를 받았다고 뒷산에 앉아 있다는 등의 말은 헛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은사는 떠나지 않습니다. 사랑의 은사입니다. 사랑의 은사는 떠나지 않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아들을 주셔서 아들로 사랑을 이루고 이제 보혜사 성령을 주시니 그 영을 받은 사람은 다 사랑의 은사를 받습니다. 세 가지는 떠나지 않습니다. 영생과 믿음과 사랑입니다. 성도들에게는 믿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한 번 믿음을 주셨으면 그것으로 영원히 살게 하십니다. 신분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어제까지 있다가 오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주셔서 자녀삼아 주시면 사랑의 은사를 주셔서 자녀답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것이 살아남도 살아감도 은혜라는 말입니다. 칭의와 성화도 모두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나의 나된 것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지금 여기 게신 우리 성도님들이 가장 귀합니다. 어떤 것을 받고 안받고 하는 은사가 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존재드립니다. 소유된 백성,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빛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 빛이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그 빛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그리스도와 사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자신의 모습을 봐도 껍데기도 아닌 것 같습니다. 펄럭거리는 것이 종이 한 장 만큼도 안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믿음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성령과 영생을 선물로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셨습니다. 

6. 사랑의 빚: 사랑 받고 있다는 고백

사랑을 윤리적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신분적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자녀 삼아 주시는 신분, 인격, 내 존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는 것의 필연적인  표가 사랑입니다. 그래서 내가 조금 못하다고 해서 사랑받지 않고 있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또 내가 조금 못나다고 남을 사랑할 수 없다고 보지도 마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귀면서 그가 빛이시니 빛의 역할도, 그리스도가 향기이니 향기의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수도, 그의 맛을 낼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존재입니다. 사랑은 신분적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기 전에 먼저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고백이 없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사랑 받고 있었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8절입니다. 빚이 있으면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빚이 없습니다. 그런데 빚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고백입니다. 무조건 값 없이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그것이 너무 즐겁고 감사해서 춤추지 않을 수 없어서 춤추는 것, 그것이 빚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하고 여호와의 성호를 부르고 감사하는 것이 사랑의 빚입니다. 순교를 왜 합니까? 감사하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빚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그것을 땅 끝까지 선포하는 것이 바로 고백이고 사랑의 빚이고 순교입니다. 로마카톨릭이나 경건주의, 윤리주의에서 말하듯 "성도들이 어떤 사랑을 받았는데 그 빚을 갚아야 하지 않겠냐"는 식의 관점은 안됩니다. 그런 차원에서의 빚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더러운 하수나 오수를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수와 오수를 받아서 더러운 냄새를 내는 용기가 되면 얼마나 서글프겠습니까? 

그러나 예수의 향기와 빛과 사랑이 내 안에 들어오고, 그래서 사랑의 향기를 내는 것이 어떻게 내 노동이고 수고입니까? 그것은 즐거움입니다. 그것이 바로 빚입니다. 그저 예수님을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소유로는 안됩니다. 내 존재를 봐야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이 기뻐야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소유를 보면 갈팡질팡 일관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존재, 나는 사랑 받는 자녀, 하나님이 낳은 자로 알 때 항상 기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누가 자기 아들을 줘서 다른 아들을 살리겠습니까? 친척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7. 사랑하는 것: 고백과 정결

사랑하려거든 첫째로 윤리가 아닌 고백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고백이 넘치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남을 사랑하려면 자신이 깨끗해야 합니다. 본문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악은 내 안에 들어있는 더러운 것을 말합니다. 이웃에게 내 안에 들어있는 악한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악입니다. 내 안의 시기와 질투를 쏘는 것이 악입니다. 그것이 증오이고 미움입니다. 사랑은 나를 깨끗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가진 것이 많고 능력이 있으나 도덕적으로 불결한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21세기 정치라고 해도, 정치와 도덕, 윤리가 구분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해도, 그런 면에서, 미국 대통령을 싫어합니다. 아주 국격을 떨어드리고 세계의 격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면 전처가 자서전을 쓰는데 트럼프가 얼마나 돈만 가지고 도덕적으로 문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비난하거나 돌을 던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과거가 잘못됐는데, 대통령으로서 그것을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멕시코에 장벽을 쌓는 순간 신앙적으로 망하리라 생각합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사랑을 베푸는 나라였습니다. 우리나라에,아프리카에 세계에 사랑을 베푸는 나라일 때 미국이 발전했습니다. 왜 그렇게 베풀었을까요?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국가가 수립되었으므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며 내가 먼저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전한다는 그것이 워싱턴, 제퍼슨이 헌법을 만든 사상입니다. 박애와 자애의 정신입니다. 유럽의 법은 어떻게 보면 자유가 강조되었지만, 미국의 법은 사랑이 강조된 것입니다. 배를 타고 쫓겨나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배를 몰다가 메사츄세츠에 당도하니 풍요로운 땅이었고, 겨울을 나고 추수 감사절을 지내면서 감사가 그 나라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멕시코인들이 잘못한다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필요하면 들어오라고 해서 임금을 낮춰놓고 추수할 때는 나가라고 하는 그런 정책을 미국이 씁니다. 성경은 지나가는 짐승에게도 먹을 것을 남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이삭을 남겨 놓아서 지나가는 나그네가 먹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룻이 있는 것입니다. 룻이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를 만납니다. 함께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조금 못하다고 해서 몇조를 들여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높은 장벽을 쌓아 멕시코와 선을 긋는 것은 인류의 퇴보라고 봅니다. 자신을 깨끗이 하고 겸손히 내가 받았다고 하는 긍휼의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9장 말씀입니다. 우리는 진노의 그릇이 아닌 긍휼의 그릇입니다. 긍휼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깨끗이 그릇을 비우고 하나님이 채워주시므로 우리가 사랑받는 자녀인데, 그것을 나눈다고 나라가 망할까요? 짐승의 길도 안 막는데 사람이 지나는 길을 막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8. 사랑하는 것: 주님의 말씀에 순종

세번째로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사랑은 악을 행치 않고 율법의 완성이라고 본문 9, 10절은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마 22:37-47) 마음과 뜻과 정성과 생명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칼빈은 율법 해석의 세 가지 원칙을 말했습니다. 첫째로, 율법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분의 뜻에 맞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른 사람을 먹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두번째로, 율법을 적극작으로,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간음하지 말라는 것을 이웃의 가정을 지키라는 것으로, 가정에 먹을 것이 없으면 도와주라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세번째로, 하나님 사랑의 1-4 계명과 이웃 사랑의 5-10 계명을 조화롭게 해석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 해석의 공통점은 사랑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저 하지 말라는 것만 했다고 해서 율법을 다 지킨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적극적인, 영적인 해석도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조화롭게 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이를 가지고 본문 10절을 바라보면 됩니다. 율법의 대 원칙은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짐은 가볍고 그 멍에는 쉽습니다. 쉼을 얻으려면 주님의 멍에를 매고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은 무겁지 않습니다.(요일 5:3)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로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이 무겁다고 느껴지면 아멘 하십시오. 은혜가 무겁게 역사할 시간이 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찌르거든 아멘 하십시오. 은혜가 역사할 시간이 된 것입니다. 내가 그 말씀을 지킬 은혜를 베풀어주실 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은 가벼운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쉼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나는 할 수 없으니 은혜로 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내 마음에 쉼이 있습니다. 그 외에는 다 거짓 평강입니다. 불안합니다. 넘어질까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평강과 쉼이 뭐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베드로처럼 '주님의 말씀이 여기 계시니 내가 어디로 가오리까' 하면서 말씀대로 종은 부족하나 종은 할 수 없으나 명령하신 분이 그것을 내 안에서 이룰 줄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언약의 복입니다. 말씀에 맺혀 있는 복입니다. 말씀에 맺혀 있는 복은 내가 윤리적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 종은 할 수 없다고 가슴을 치고 하나님은 친히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꿀송이보다 달고 계명이 쉽고 하나님의 말슴이 즐거운 거싱ㅂ니다. 이것을 모르고 성경을 읽으면 절반은 떼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즐거운 성경, 기분 나쁜 성경이 있다고, 답답한 성경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읽는 것입니다. 찌르면 찌를수록 즐거워야 합니다. 평소에 말씀의 찔림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은혜가 약하다는 증거입니다. 

저도 간혹 이럴 때가 있습니다. 선물을 받으면 박스를 뜯는데 불평합니다. 왜 이렇게 포장을 꼭 맸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선물이고 뭐고 아무것도 갖다주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사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나무를 꽂아 놓으면 향이 넘치듯 사랑의 은사가 내게 임하니 우리가 즐거워하면서 발산하는 것이 사랑의 빚, 은혜의 빚, 사모할만한 빚 입니다. 그것이 본문 8절이고 이것 외에는 빚이 없습니다. 그러니 사실 빚이 없는 것이고, 전적 은혜입니다. 감사와 기쁨 밖에 없습니다. 가장 감사하는 사람이 사랑의 빚 갚는 사람입니다. 감사가 최고로 넘치면 순교라도 합니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결단코 순교하지 못합니다. 폴리캅과 같이 평생 나를 한 번도 배반치 아니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감사하면서 순교하는 것입니다. 사랑도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기에 힘쓰십시오. 그것이 즐거운 것입니다. 이 계절에, 풍성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의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