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5]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6)] 그리스도로 옷 입고 (롬13:11-14)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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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5]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6)] 그리스도로 옷 입고 (롬13:11-14)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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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3: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롬 13: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롬 13: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녹취록>



1.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지금 사는 시대를 잘 분별하고 지금이 어느 때인가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경 말씀은 언제든지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동일하게 역사합니다. 본문 11절의 이 시기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구원을 이루신 후 보혜사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신 새로운 시대를 일컫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들은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바리새파, 율법사, 제사장들, 역대 가장 흉악한 헤롯 왕, 그리고 로마 제국 등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마는 시민들에게는 신사적이었지만, 피 식민지 주민들을 매우 가혹하게 대우했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모든 흑암과 악의 세력에 어려움을 당하시고 가장 잔혹한 인간들에게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세상의 정욕과, 권세욕, 타락한 제사장들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제사장이 타락했다는 것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요시야 왕 때 보면 성전에서 매춘을 하고 돈놀이를 했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오신 시대에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가운데 오셔서 어둠을 모두 모아 깨뜨리시고 주님의 시대를 열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시기입니다. 

본문은 ‘밤이 깊고 낮이 가깝다’고 합니다. 밤이 깊다는 것은 죄가 깊다는 것입니다. 밤과 낮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밤은 새로운 것을 준비하고 쉬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12절에서 지칭하는 밤은 죄가 깊다는 의미입니다.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고 도무지 의와 선의 능력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시대입니다. 죄를 짓고 남을 속이고 해쳐야 잘사는 것 같은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바쁘기는 바쁜데 죄 짓기에 바쁜 시대입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속일까 하는 가르침이 있는 시대입니다. 남을 속이고 해쳐서라도 이윤을 남기는 잘못된 경제법칙을 가르치고 그것에 사람들이 심취한 시대입니다. 순리가 없고 역리만 남은 시대입니다. 밤새 젊은이들이 어떻게 착하고 선하게 살아갈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속이고 겉치장을 해서 남에게 잘 보이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비본질적인 것이 중심이 되는 시대입니다. 

2. 낮: 그리스도의 은혜의 빛이 비추는 때

그러나 본문 말씀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는 데서 낮은 우리에게 소망을 말해줍니다. 낮은 그리스도, 빛, 치료, 위안, 평강의 시대입니다. 밤새 신음하다가도 의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입니다.(말 4:2) 그래서 벌써 새벽이 밝아온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됐다는 것은 은혜의 빛이 비추니 내가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어나서 연장을 들고 새벽부터 밭으로 향하는 깰 때가 아닙니다.은혜가 임하고 성령이 임하니 잠자던 자가 일어나는 그 시대인 것입니다. 낮에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납니다. 선한 것이 자라는 빛의 시대입니다. 

제가 지난 주에 자전거를 한 대 샀습니다. 저만 사서 죄송합니다만,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전거가 하도 삐걱거리고 낡아서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낮에 자전거를 타니 너무 잘 나갑니다. 자전거가 아니라 오토바이 같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안 하길래 밤에 한 번 더 나갔습니다. 그런데 눈도 어둡고 해서 불안했습니다. 사실상 빛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밤이 지나고 낮이 왔다고 할 때 그것은 심판이나 혹은 감추인 것을 드러내서 혼낸다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빛이 비춘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반듯하게 길을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말라기서에서 '의의 광선이 비춘다’고 표현한 그것입니다. —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2; 9-10) 이것이 바로 구원의 날이요 은혜 받을만한 때입니다. 

3. 주님이 이미 다 이루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때, 그것을 누리는 것이 성도의 본분

우리는 지금 이 때 사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일해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공기나 빛이나 달이나 남산이나 북한산이나 모두 그렇습니다. 가장 고차원적인 것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사는 것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은혜와 구원과 신약의 시대입니다. 중세 카톨릭 시대를 살지 않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제가 9세기, 10세기 중세의 교회에 태어났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또한 전쟁 통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일제 치하에서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마음껏 믿을 수 있고 찬양할 수 있는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이 감사합니다. 양재천 문화예술공원에도 가니 그곳에도 기도할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기도해도 누가 잡아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다가 깨야 되는데 좀 더 자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은혜의 빛이 내 마음에 조명되니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하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다 이루신 그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종교개혁을 일으키셔서 온전한 말씀과 신앙의 구원을 받는 시대를 살고 있고, 그 중에서도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마음껏 찬양할 수 있는 이 시대를 살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냐는 말입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합니다. 빈곤한 자 같으나 남을 부요롭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 신약시대입니다. —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4:13; 15:7) 주님은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주신다고 합니다. 이제는 깰 때가 되었습니다. 누릴 때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라’는 명령이 있으면 우선 누리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일을 하는 것은 공로주의입니다. 낮에 깬다는 것은 빛을 누리는 것입니다. 은혜가 넘치면 낮이 좋아집니다. 일년을 살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밤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젊을 때는 밤이 길어지는 것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조용하게 내가 뭔가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낮에 하나님이 깨서 일하시는 것이 이제는 좋습니다. 

4. 깰 때: (1) 믿음으로 이성의 잠을 깸

깰 때가 되었다는 것은 첫째 믿음으로 이성의 잠을 깨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우리를 깨우십니다.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믿음이 없이는 잠자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사는 사람은 아직 자고 있는 것입니다. 봄날 온갖 파충류가 깨어나는 것이 계절의 온기라면 성도가 깨어나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믿음의 은혜입니다. 깨어나면 홍해도 갈리듯 보이고 요단강도 설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의 그늘만 만져도 나으리라는 것이 보입니다. 깨어나면 부스러기만 먹어도 나을 것이라는 수로보니게네의 여인과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물동이만 보이던 사람이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메시아를 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낮의 삶은 바로 믿음으로 이성의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책 많이 보고 세상의 지식 많이 늘리십시오. 그러나 그것으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어야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요,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져야 진정 보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학회에 결정할 일이 있어서 저도 어제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 다른 결론을 주시고 같은 결론이라도 다른 마음가짐, 다른 관점을 주십니다. 기도해보면 내가 아무리 오랫동안 생각했다 해도 다릅니다. 분명히 달라집니다. 그것이 바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5. 깰 때: (2)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깨어남

두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깨어나야 합니다. 본문 14절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그 옷은 12절의 '빛의 갑옷’입니다. 예수님이 빛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입는 것이 빛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영을 받아야 깨어나는 것입니다.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4, 9) 우리가 여기에서 보는 전등은 참 빛이 아닙니다. 참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생명을 주는 빛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빛만이 생명을 줍니다. 세상 만물은 광선으로 자라지만 사람은 예수의 빛으로 자랍니다. 그래서 예수의 빛이 사람들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한 것처럼, 다메섹 가는 길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빛이 비춥니다. 그 빛이 얼마나 강한지 눈이 멀어 버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면 빛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스데반이 돌을 맞아 죽으면서도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안이 열려 빛으로 보고 영접한 것입니다. 제가 자주 말하듯 우리 성도님들 안에는 빛이 차야 합니다.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를 감싸야 합니다. 그 빛으로 온갖 정욕도 어두운 것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 빛이 우리 안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추는 것 같다고 합니다. —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계 1:16) 또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잘 알 것은 우리가 스스로 빛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빛으로 들어오니 비추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적 은혜입니다. 그것이 바로 빛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빛이 비추이는 것이 아니라, 빛의 갑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 빛은 우리의 신분, 존재,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빛이 임하면 빛의 자녀, 그렇지 않으면 어둠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6. 깰 때: (3) 어둠의 빛을 벗어버리고 빛의 자녀로 살아감

세 번째로, 그래서 어둠의 빛을 벗어버리고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은 죄에 속한 일입니다. 식물이나 곤충에 대해 주광성, 혐광성 등을 얘기합니다. 인간도 주광성입니다. 자연의 빛이라 할지라도 많은 것이 좋습니다. 창세기에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빛이 좋았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창세기는 하나님께 영광이로되 사람 중심의 창조입니다. 모든 만물은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생육하고 충만하고 다스립니다.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은 사람에게 그랬다는 말입니다. 창조과학에서 이런 것을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이런 것을 읽어야 합니다. 창세기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시기 원하셨고, 빛이 사람에게 유익하니 그 빛을 보기 좋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장 4절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어둠에 속한 것은 멀리 하십시오. 식당도 지하보다는 지상에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어둠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어둠의 일은 공로주의, 나의 자질을 따집니다. 내가 가진 재물로 따집니다. 물론 우리가 계획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심중에 궁리하여 되는 일이 없습니다. 어둠의 일은, 어둠이 나쁘다기 보다, 내 자질과 공로, 이성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의 것으로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니 자살도 하고 하는 것이 어둠의 일입니다. 마귀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하나님 없이 인간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덴동산에서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내가 하고 못하는 일로 어둠 가운데서 신음하고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죄를 지었다 해도 용서받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어둠 가운데 떨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의 갑옷을 입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아닌 그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이제는 우리가 빛입니다. 빛의 자녀처럼 행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근심시키지 않으면 빛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빛을 더러운 것, 어두운 곳으로 싸매지 않으면 빛이 발산 됩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른은 자꾸 싸맵니다. 빛을 가만히 두면 비추이는데, 우리는 그저 누리면 되는데 말입니다. 그 빛이 사도 바울에게 들어오니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려던 자가 말씀 전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빛의 자녀는 다른 것이 아닌 회개부터 하는 것입니다. 깨끗이 닦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빛이 이미 임했습니다. 빛 되신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이 요한복음이요,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잡히시던 밤에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빛을 받아 우리가 자녀 된 것이요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빛이 소생하여 생명력을 갖습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 식물이 햇빛을 못 보면 쭉정이는 똑같이 자랍니다. 그러나 가을에 탈곡하면 열매가 없습니다. 여름의 빛의 강도에 따라 수확의 결실이 달라집니다. 여름에 해가 강하지 않으면 가을에 왕겨만 왕성하지 쌀 푸대의 쌀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열매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너무 내 자질과 형편 가지고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것 가지고 도마 위에 올려서 이리저리 궁리하지 마십시오. 빛의 자녀는 내게 임한 빛을 마음껏 발산하도록 죄짓지 않고 나를 잘 가꾸는 것입니다. 

7. 하나님의 전신갑주 — 그리스도의 빛의 갑옷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17)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말합니다.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바지가 흘러내립니다. 진리부터 배워야 합니다. 수천만 원짜리 바지를 입어도 진리가 없으면 흘러내려 사람들이 조롱합니다. 의의 흉배를 붙여야 합니다. 흉배는 창이 들어올 때 가슴을 막아주는 것입니다. 의라는 것은 바로 피가 흐르는 심장의 맥박과 같습니다. 의로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의입니다. 우리가 병원에 가서 육체의 피의 혈압도 재야 하지만, 의의 지수도 재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여 사는가 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는 신분을 말합니다. 새로운 신분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투구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방패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환란의 화살이 날아오다가 피해갑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다른 곳으로 가던 화살도 내게 날아옵니다. 믿음 없이 이성대로 궁리하고 근심하면 도망가던 재앙이 나에게 닥칩니다. 하만처럼 말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는 것은 믿음으로 악한 화살을 막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예비한 신발을 신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에 서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성령의 검을 들라는 것은, 유일하게 공격하는 것으로서, 말씀을 읽을 때 우리가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영토가 커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신갑주, 그리스의 빛의 갑옷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옷입니다. 

8. 잘 누리는 것이 최고의 열매 맺는 것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은혜의 때입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움직이면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다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그에게 물관과 체관이 미쳐 자라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기를 아는 것입니다. 이 시기는 구원받고 은혜 받고 누리는 시기입니다. 내가 스스로 잘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잘 누리는 것이 최고의 열매 맺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직 기독교만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숟가락만 드는 힘 정도만 내면 됩니다. 음식은 주님이 다 차려 주십니다. 잘 누리는 것이 주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13절은 낮에서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거나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고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방탕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방탕이라고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은 중심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흔들리는 것입니다. 술 한 잔 마시는 것이 어떠냐고 할 수 있지만, 성령의 역사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술 한 잔은 괜찮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성주의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빛이 내 안에 임했으니 그 빛이 발하게끔 해야 합니다. 그 빛이 비추게끔 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핍박이 있고 불이익이 있더라도 단호히 곧게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낮에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쭉정이가 아닌 알곡입니다. 하나님이 죽이지야 않으시겠지 라고 생각하며 조금 해도 될 거라고 생각하고 행하면 쭉정이가 됩니다. 하나님이 밀어내지 않으시지만, 즐거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음란과 호색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세상의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예배 드리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신 것을 세상 것으로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배 대신에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라는 것은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으면 판단이 들어옵니다. 판단이 모든 죄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에 방탕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요, 술 취하는 말라는 것은 중심에 하나님을 두라는 것이요, 음란, 호색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말라는 것이고,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라는 것은 감사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을 전체 성경 맥락에서 본 것입니다. 

본문 12절은 우리의 구원이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께서 곧 오신다고 믿었으므로 시기적으로 곧 오신다는 의미인가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의 구원이 가까웠다는 것은 아직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하늘의 백성이라는 의식으로 이 삶을 산다는 것, 종말의식을 의미합니다. 이 땅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 말씀의 의미입니다. 시기적으로뿐 아니라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생각으로 주님께 다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라야 순교라도 할 수 있습니다. 잘 누리는 사람이 최고 윤리적이고 부지런합니다. 자기가 한다는 사람은 고꾸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고 하는 사람은 산이라도 움직입니다. 그런 사람이 가장 착한 사람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 주의 자녀들에게 있기를 축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