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22]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7)] 서고 넘어짐이 주인에게 있으니 (롬14:1-4)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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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2]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7)] 서고 넘어짐이 주인에게 있으니 (롬14:1-4)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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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4:1)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롬 14:2)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롬 14:3)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롬 14:4)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녹취록>



1. 하나님의 맞추어 주심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시고 계시지 않은 곳이 없는 편재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자존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시면 인류 중에 아무도 그를 담을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맞추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창세 때 시간과 공간을 지으셨습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놓여 있습니다. 공간에서 움직이고 시간에 따라 흘러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너머에, 이전에, 그것을 초월하여 계십니다. 시간과 공간을 모두 주장하시므로 하나님을 담을 말과 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고 기껏해야 과학자들이 말하는 3차원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시간, 공간, 인과관계의 질서 가운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인간에게 맞추어진 것, 특히 언어로서 맞추어진 것이 성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장 잘 맞추어서 보내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보고 영접하고 음성을 들으면 하나님을 보고 영접하고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요한일서(요일 1:1)에 그를 ‘보고 자세히 만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맞추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지극히 맞추어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그에 맞게 신학적인 교리나 고상한 용어 없이 맞추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에게는 그가 배운자요 지도자이므로 깊은 거듭남의 지식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 역시 온전한 깨달음이 있었다고 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맞추어 주셨을 때 더 큰 은혜를 입고 반응한 자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주님은 아주 적절하게 맞추어 주셨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는 그저 믿음이 좋다고 칭찬하여 그를 교만하게 한 것이 아니라 그에 따라 맞추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 부자 청년은 말씀을 지켜 스스로 생각하기에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따르고자 했을 때 그에게 오히려 한 가지가 부족하니 집에 가서 소유를 다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중심의 교만함을 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께 ‘자신을 떠나시라’고 할 때 오히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부자 청년이 제자가 되기에 더 나은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받아 주신 것입니다. 

본문 1절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고 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믿음이 없는 자에게 믿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갈 때 믿음이 생긴 것이지 믿음이 있어서 주님을 당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볼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오히려 받아주시고 안아 주시고 지극히 낮은 곳에 가십니다. 세리와 창기를 만나셨습니다. 천국에 못갈 부정한 사람들,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각종 환자, 38년 앉은뱅이 된 자, 열두 해 혈루병 걸린 여자를 찾아가서 맞추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맞추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맞추어 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어릴 때 부모님은 자녀가 많아도 시장에서 맞추어 물건을 사오십니다. 모두 생각해서 맞추어 사오십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맞추어서 자라는 것 같아도 실상은 부모가 자식에게 맞추어 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맞추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2. 믿음이 연약한 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고 부활 승천하시고 오순절 성령이 내려와서 이제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국경, 인종, 지역의 경계가 허물어졌습니다. 오순절 성령 사건 이후 각국의 언어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선포되어 이방에게 구원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제 교회 안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즉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상당히 낯선 풍경입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아직 유대인들을 구약의 형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절기와 정결례, 제사법 등 각종 형식을 버리지 못한 상태입니다. 오직 예수를 통한 구원이라는 말씀(창 15:6; 합 2:4)에도 불구하고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음식, 예식, 의복에 대한 법에 아직 매여 있었습니다. 반면 이방인들은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하며 모든 형식을 파괴하려 했습니다. 규율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초대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 중 믿음이 연약한 자는 특히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형식에 사로잡혀 아직도 음식을 가리는 행동을 하는 유대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복음의 역사가 있으니 유대인들을 잘못했다고 배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아직 구약의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고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아직까지 형식을 버리지 못하고 유대인들이 있으면 유대인의 형식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본문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알면서 일부러 말씀을 어기고 다른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과거의 자신의 삶의 익숙한 것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을 연약한 사람으로 부른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왔지만, 옛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연약한 사람입니다. 옛 습관을 고치는 것이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 칼빈, 사도 바울이 회심하니 사흘 만에 변하더라는 것을 알지만, 행실이 갑자기 온전해지지 않습니다. 카드 바꾸듯 그렇게 우리의 심령의 변화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분적, 법정적으로 거듭나도 연약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연약함입니다. 과거의 육체에 속한 버릇대로 살아가는 것이 연약한 자입니다. 

또한 연약한 자는 미래에 대해 의심하는 자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미래를 의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싫증을 내어 화덕이 있는 애굽의 고기 먹던 것을 그리워하였습니다. 종살이를 하더라도 가끔 먹는 고기를 그리워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광야에 있으면서 애굽 생각을 하는 자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가나안에 드는 사람은 과거의 것을 단절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이제 그가 내 주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족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합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아멘하고(요 19:30) 과거로부터 단절해야 하는데 지식적, 행위적, 의지적으로 과거의 것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연약한 자들을 배척하지 말라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3. 참된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의와 공로로 정결해짐

이제는 우리가 고기를 피째 먹어도 됩니다. 구약 시대 때는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잘 아실 것은 구약의 의식이나 재판은 그 자체는 폐지 되었지만, 뜻은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고기를 피채 먹지 말라는 것은 형식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 살인을 낳아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완성됩니다. 회를 먹어도 되고 육회도 먹어도 됩니다. 그것이 성경에 위배된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성정을 해치고 잔인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금해야 합니다. 특별한 기준은 없습니다. 기준을 만들면 형식주의가 됩니다. 주님이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뜻은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한 말씀도 뜻 없이 폐지된 것이 없습니다. 모든 절기, 제사법, 재판법을 다 이루셨습니다. 정결례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정결례를 좇지 않아도 됩니다. 제사장을 찾듯 목사님을 찾을 필요가 없고 아기를 낳고 정결예식을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결함은 너무 중요합니다. 정결한 마음으로 예배에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열두 해 혈루병 환자를 부정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는 부정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에게 물과 불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정결한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깨끗해야 합니다. 구약보다 더 깨끗해야 합니다. 구약은 몇가지를 들어서 형식으로 금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주장해서, 그것으로 형식을 지배해서 구약보다 더 깨끗해야 합니다. 막 취하고 먹고 더러운 것을 하면서도 내 영혼이 평안하다고 하는 것이 신약시대가 아닙니다. 형식은 폐지되었으나 예수님이 이루신 모든 뜻은 더욱 정결해진 것입니다. 

그것에 이르지 못하는 자를 연약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면 모든 것이 거룩해집니다.(딤전 4:4-5) 우리가 먹는 것 마시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이 더러운 것을 만들어내는 공장입니다. 인간의 손을 거치면 생수가 하수가 되고 오수가 됩니다. 이제는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별이 폐지되었습니다. 형식을 가지고 자랑해서 안됩니다. 교회가 형식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형식을 자랑하는 사람이 교회의 일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연약한 사람이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형식을 자랑하는 사람은 형식에 넘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그의 의만을 자랑하며, 그가 나를 위해 죽으신 값없으며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우리를 살리고 생활을 거룩하게 하시는, 살리시고(칭의) 살게 하시는(성화)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것은 그래도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조차 하지 마십시오. 다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거나 새김질을 하지 않는 짐승을 먹지 말라고 한 뜻을 되새기면 됩니다. 그런 짐승들은 대부분 육식동물이 많습니다. 그런 짐승을 통해 죽이는 것을 배우지 말라는 의미로 바라보면 됩니다. 

이처럼 구약의 의식법은 모두 폐지되었으나 뜻은 완성된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문자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을 주신 뜻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느러미가 없거나 비늘이 없는 생선도 맛있게 먹으십시오. 다만, 그렇게 명하셨던 뜻을 생각하십시오. 절대적으로 되고 안되는 음식은 없습니다. 그런 형식주의를 벗어나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믿음을 가지고 구약의 것을 지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게 좋은게 아닙니다. 예와 아니오가 분명할 때 믿음이 깊어집니다. 아닌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 너머를 보아야 합니다. 신령한 육체요 신령한 물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고전 10:3-4; 요 6:35) 신령한 음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다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양식과 음료입니다. 누가 교회 다니는데 무화과가 성경에 많이 나오니 곶감 대신 무화과를 먹는다고 하면, 그것이 형식주의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누가 뭐래도 곶감이 무화과보다 맛있습니다. 당시 지역과 기후에 맞게 주신 것 뿐이지 그것이 더 거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바로 우리는 아디아포라(adiaphora, 그리스어: ἀδιάφορα, 무관심한 것)라고 합니다. 구원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므로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4. 예배와 양심과 말씀에 따른 기도

우리는 주일 성수를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인가? 주일 성수는 의식이나 형식이 아닙니다. 이는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음식과 형식에 대해,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세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예배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술을 조금 마셔도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예배를 드리는 자이기 때문에 안되는 것입니다. 예배에 방해가 되거나 거역하거나 가로막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배에 문제가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술을 먹고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마음이 혼미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생명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어김없는 진리입니다. 형식이 아닙니다. 이것에 방해되는 일은 안해야 합니다. 

두번째, 양심에 따라 생각해야 합니다. —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롬 13:5) 하나님이 우리 안에 양심을 주십니다. 그 양심에 따라 행하면 됩니다. 코람데오입니다. 나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특히 신약시대에 음식이나 이런 것들에는 정함과 그렇지 않은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양심 상 거리낌이 있다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도 먹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갓 나온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는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말씀과 기도로 정하여지므로 점집에서 나온 떡이라도 먹을 수 있습니다. 내 양심에 거리끼거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룩하고 선한 천명의 증인, 거듭난 양심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방금 읽은 말씀대로 (롬 13:5) 진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양심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말씀에 따른 기도입니다. 여러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어디까지 할수 있고 없는지 말입니다. 본문의 '연약한 사람’은 이 세 가지가 습관이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를 정리하면, 첫째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첫번째 기억이 교회에 간 것이 되어야 합니다. 철저히 주일 성수 해야 합니다. 자녀 교육 다른 것 필요 없습니다. 예배 잘 드리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면 됩니다. 두번째는 내 안에 호소하시고 은밀한 가운데서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코람데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법을 이야기하고 판단하면서 양심에 화인 맞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 나를 칭찬해도 내 양심에 따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말씀에 따른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5. 교회의 질서

본문은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믿음 약한 자는 강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무엇이든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먹을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한 사람들조차도 연약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약한 자들도 강한 자들을 비판하지 말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았는데 우리가 그들을 받지 못한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규모대로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엄정함이 있습니다. 구약에 왜 성전을 식양대로 지으라고 재료와 크기와 모양을 알려주셨을까요? 그 형식은 폐지되었으나 의식의 뜻은 완성되었습니다. 질서대로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형식을 그대로 가져올 필요는 없지만, 예배의 질서는 엄정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규례를 준 것은 그들이 애굽의 풍습을 좇을까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그들 너머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진리 가운데 자유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약한 자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매여 살지도  않습니다. 형식은 없으나 뜻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만큼 질서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가 온전히 역사하는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저 운동장이 아닙니다. 열린 예배를 드린다고 하나님과 어깨동무하는 마음으로 서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름이 만홀히 여김받지 않으시고 경외 받기를 기뻐하십니다. —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8-9) 우리가 먹거나 먹지 않는 것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6. 구원 받은 자의 자유로 질서 가운데 말씀 붙들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의식의 완성

우리는 구원을 받아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실족시키는 자리에 서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으므로 자유함이 있습니다. 형식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 자유 가운데 품위가 있는 것이요 성도의 격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의식의 완성입니다. 의식주의는 아니지만, 무질서도 아닙니다. 절기나 월삭이나 먹고 마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골 2:16) 우리의 몸이신 그리스도께서 휘장을 찢고 생명의 길이 되셨습니다.(히 10:20) 예수 그리스도를 양식과 음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것을 우리가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교회에서 질서 가운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 형제는 주님이 그를 위하여 죽은 자입니다. —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8:12)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본문은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를 실족케 하면 고기를 먹지 않고, 헬라인이나 유대인에게나 맞추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맞추어 주시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맞추어 주셨습니다. 흠없고 죄없는 그가 흠있고 죄인인 우리와 더불어 마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형제들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서로 서로 맞추어 줄 때, 내가 낫더라도 연약한 자에게 맞출 때 나 역시 연약할 때 누군가에게 소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신앙이 자랄수록 독단적이지 않고 오히려 맞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저도 서로 맞추고 맞추어주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