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29]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8)] 주의 것이로다 (롬14:5-9)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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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9]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8)] 주의 것이로다 (롬14:5-9)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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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4:5)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롬 14:6)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롬 14: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 14: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녹취록>

1. 내가 나의 것이 아니요 주의 것이라

성도는 이 땅의 삶을 살아가되 이제는 내가 나의 것이  아니요 주의 것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속한 것이 주님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편 2편 7절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하며, 이사야서 43장 1절은 ‘내가 너를 구속하고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것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선포합니다. 시편 기자와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하듯 말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이번 주로 기념됩니다. 이전에 설교한 것과 같이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했다면 그것의 완성은 로마서 11장 36절을 빌어 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 — 본문은 우리가 주를 위하여 먹기도 하고 주를 위하여 먹지 않기도 하며, 주를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주를 위하여 죽기도 위한다고 하여 ‘주를 위하여’를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이 주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완성인 것입니다. 오직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은 이제 자기를 부인하고 내가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여 매사에 주를 인정하고 섬기고 고백하고 그 향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새로운 신분

'너는 내 것이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너는 내 것이니 내가 보호하겠다는 것이 일차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말씀입니다. 바로 자녀삼아 주시고 영생을 주시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두번째로는 우리 쪽의 의무를 말합니다. 이제 내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좇아 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 중 두번째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8절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성도의 의무 혹은 당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7절은, 특별히 이렇게 사는 것이 우리가 주의 것이기 때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신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위하여 살고 죽는 사람, 신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 거듭난 소속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소와 시민권이 하나님의 집이요 천국의 시민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도 죽는 사람도 없다'는 7절은 신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거듭난 사람은 옛 주소를 버리고 새 주소를 가지는 것이요 옛 나라를 떠나 새 나라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교회에 속하여 영원한 천국에 거하게 되는 것, 자녀되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그러므로 8절은 우리가 주를 위하여 죽고 사는 것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8절에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과 온전한 지식

우리가 주의 뜻을 좇아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온전한 지식입니다. 지식 없이는 확신이 없고 확신이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을 수 없습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을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규정합니다. 그런 자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알아야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 알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온전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아는대로 믿게 되고 배운대로 보고 듣게 됩니다. 그래서 지식이 없으면 망하게 됩니다.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4:6; 6:3) 호세야가 살던 때는 음란한 시대였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여호와를 아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4.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사는 것은 그를 아는 지식이 온전할 때 가능합니다. 신약시대에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아들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요 1:14-17)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를 알면 알되 은혜롭게 압니다. 이 지식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전 8:7) 구약에 힘써 하나님을 알자고 할 때 신약에 그 길을 예수 그리스도로 보이신 것입니다. —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3:1; 12:2) 

이제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지명하여 우리를 낳으시고 우리를 그의 아들로 부르셨습니다. 이 시대에 그래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아는 것 없이 힘쓰는 것은 오히려 목적지로부터 더 멀어지게 합니다. 미국에 갔을 때 첫째가 열이 많이 나서 병원에 가니 옷을 벗겨서 식히게 했습니다. 약도 안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불을 덮어 땀을 빼게 하는데 말입니다. 지식이 다르니 전혀 대응법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보니 열을 낮추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열을 낮춘다는 사실 자체는 동일하긴 했습니다. 어쨌거나 열을 내리게 해야 하는데 지식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 지식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과학적 지식이 아닙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지식입니다. 알면 기쁘고 열매가 맺히는 진리입니다.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그 지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입니다. 마치 교회에서 지식과 말씀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굳이 그것을 알아야 하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리석은 것입니다.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아는 것이 기름지게 되는 복의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5. 구약의 완성, 예수 그리스도

본문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렀지만, 아직 두 가지 구습에 매여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는 먹는 것 또 하나는 날을 지키는 것입니다. 음식법과 절기법/제사법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 오순절, 칠칠절 등의 절기와 월삭, 정결례 등의 의식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 말씀은 지난 주에 이어 날을 중히 여기는 사람도 주를 위하여 그러하다면 받아 들이라고 합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자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아직까지 의시과 형식이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날을 중히 여기지만, 그 사람들도 주를 위하여 있다면 놔두고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식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완성이 예수님입니다. 맥추절, 초실절, 오순절, 부활을 기념하는 그 날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십니다. 수장절, 초막절, 영원한 장막에서 거하되 그곳에서 남편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제사를 십자가에서 모두 다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걸린 거제, 이를 갈고 몸을 떠는 고통 가운데 드려지는 요제, 살을 빻아서 드리는 소제, 부어서 드리는 전제, 자기 자신을 다 드리는 번제의 모든 제사를 십자가에서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언약도 절기도 제사도 다 이루셨습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출 24:3-7)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소리내어 외칩니다. 그리고 모세가 소로 번제를 드려 그 화목제물의 피를 뿌리며 언약의 피로 선포합니다. 구약시대 때 율법을 받아 왔을 때 그것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소를 잡아 번제를 드리면서 피를 뿌리면서 언약의 피라고 외친 바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제사, 의식이 본질이 아니고 피가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당시는 아직 예수님의 피가 아니지만, 소의 피이지만, 이제 오실 그리스도는 우양의 피가 아닌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는 그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율법과 언약의 피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주야로 묵상했습니다. 들어갈 때 나올 때 일어설 때 앉을 때 율법을 기억했습니다. 생각할 때도 움직일 때도 법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구약시대의 의식과 말씀은 모두 언약의 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삶의 중심은 피제사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일주일 내내 제사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번 이스라엘에 가서 제가 보고 온 것도 그것입니다. 그런데 율법과 말씀, 이 언약의 피가 그리스도로 고스란히 다 이루어집니다. 그가 이제는 이 땅에 오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제 구약의 말씀과 피가 예수 그리스도에서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는 우양의 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6. 약한 자를 용납하는 것 — 마음으로 주를 위하여 산다면

그런데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 받고도 의식을 생각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용납하라고 합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 마음으로 주를 위하여 산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먹는 자라고 함은 믿음이 강한 자입니다. 구원이 음식에 있지 않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주를 위한다면 연약함이 있든 강함이 있든 다 받아들이되, 중요한 것은 본문 6절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셔서 그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라면 믿음의 강약을 떠나 교회에서 받아들이고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벌써 이방인들은 구약과 의식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었고, 또 한편으로 유대인들은 여전히 구약의 구습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시대에 구약의 율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7. 그리스도로 완성된 구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움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구약을 통해 의식이 아닌 뜻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짐승을 잡아 오거나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저 온누리 교회에서 해마다 그것을 합니다. 신약시대의 뜻으로 한다는 것을 물론 알지만 달갑지 않습니다. 왜 그런 것을 지금 하나요, 모이면 말씀 듣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먹더라도 먹지 않더라도 주를 위하여 하면 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주를 위하여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할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이 땅에 주셨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으므로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롬 8:32) 우리가 주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만이 주를 위하여 삽니다. 부족하고 약할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산다면 성도로서 다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고전 6:13) 음식이 없이 살 수 없으나 음식이 중한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몸이 있다는 것입니다.

8. 주를 위하여 죽고 삶

이제는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날도 주를 위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바로 주일입니다. 먹는 것도 주를 위하여 해야 합니다. (골 1:16; 롬 11:36) 그것이 바로 주일입니다. 예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 부활의 날입니다. 그리하여 사나 죽으나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로 섬기는 날이 바로 주일입니다. 참 안식은 토요일이 아니라 주일인 것입니다. 토요일은 구약의 안식일이요 그림자입니다. 그 성취와 완성이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각 두 가지가 아닙니다. 주를 위하여 살려면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두 가지를 따로 써보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고 사는 것을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나는 주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주님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주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는 어느 하나라도 나를 인정하면 안됩니다. 내가 주어가 되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나를 부인하고 내가 죽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해 사는 것은 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정확하게 나뉘어집니다. 중립이 없습니다. 미지근한 것은 더 싫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인정하면 주님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인정하려거든 나를 부인하면 됩니다. 내 아집과 고집, 나를 인정하는 쓴 뿌리가 있으므로 여호와가 인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나를 자랑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부석거리면 내 자랑, 조금만 움직이면 내 자랑입니다. 농부가 한 것이 없습니다. 애를 많이 쓰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부가 하는 일이 없습니다. 가평에 가 보니 잣이 유명해도 딸 때만 애먹고 하나님이 다 열매 맺게 하십니다. 내가 했다고 자랑하면 안됩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도 전부 감사합니다. 전부 움직이고 쓸고 닦습니다. 자기 자랑을 하면 주님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내 자랑이 없어야 합니다. 아예 자랑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은밀히 행하면 은밀히 갚고 은밀히 구하면 은밀히 들으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하셔서 오신 말씀은 모두 정확히 지켜 주십니다. 은밀히 행하면 수천배로 갚아 주십니다. 자랑하는 순간 떨어집니다. 

또한,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좋은 친구, 위인이 많지만, 주님을 우리는 닮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닮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를 위해 죽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가 죽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도 그리하여야 합니다. 죽지 않고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죽지 않고 사는 것은 조화입니다. 생화는 죽어야 삽니다. 살아 있는 것은 죽어야 삽니다. 썩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가 왜 있나요? 썩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죽음과 삶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래서 죽은자의 주가 되시고 부활하심으로 산 자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주여 주여 하면서 나를 부인할 때도, 나를 영화롭게 하셔서 면류관을 씌워 주실 때도, 흑암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행할 때에도 주님은 내 주님이시요 임마누엘이요 친구이십니다. 땅에 떨어져 썩을 때도, 봄에 움을 틔울 때에도 주님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롬 6:5) 

9. 주님의 부활에 연합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해묵은 죄에 속한 것을 버림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우는 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는 자는 하나님이 눈물을 닦아 주시고 온전하게,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요 우리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시고 가장 먼저 위로해주시는 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면 감사와 즐거움이 있습니다. 죽지 않고 사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소금이 들어오니 맛을 내고 빛이 들어오니 빛을 발하고 향이 들어오니 향을 내는 것이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죽지 않고 빛이 타지 않고 향이 소멸되지 않고 맛과 빛과 향을 낼 수 없습니다. 죽어야 살고 살 때 죽는 것이 바로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타고난 것은 다 죽은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하나도 바꾸지 않을 것은 없습니다. 전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가지가 베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돌 감람나무 거짓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거기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아야 합니다. 먼저 잘려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접을 붙이면 극상품,  참 감람나무 참 포도나무가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시절을 좇아 과일을 맺는 가지가 됩니다. 주님은 자신을 먼저 자르셨습니다. 접붙임은 원래 있던 가지가 잘려야 가능합니다. 그 자리에 우리가 접붙임 받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눈이 멀어져야 새 눈을 뜹니다. 사흘 동안 눈이 멀어야 영안이 열립니다. 주님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신다고 베드로처럼 자기를 부인해야 주님의 일을 합니다.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자기를 인정하던 베드로가 반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인정합니다. 진짜 우리가 할 말은 주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남편이 없다고 할 때 사마리아 여인에게 메시아 주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끊고 버려야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도 입술이 부정하다 할 때 숯으로 입술을 지져서 선지자로 서게 하십니다. 부정한 입술로 메시야가 오는 것을 예언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할 때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할 때 에스더도 살고 나라도 살았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다 할 때 나라가 가정이 직장이 삽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요 이제는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주님의 것으로 지명하여 부르시고 자녀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살고 부활의 맛을 보고 있습니다. 다만 해묵은 죄에 속한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달리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내 자랑은 세상 자랑입니다.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더 잘 속이고 거짓말하는 것은 하나님 은혜가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의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자녀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시절을 좇아 과일을 맺는 자녀로 인쳐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