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5]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9)] 판단은 주께서 (롬14:10-12)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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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5]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9)] 판단은 주께서 (롬14:10-12)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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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4:10)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롬 14:11)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롬 14:12)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녹취록>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우리는 살면서 어떤 날은 더 귀하고 어떤 날은 덜하고 음식이 뭐가 중하고 부정하고 나누지만 지난 주, 그리고 이번 주 살펴보는 말씀은 주님이 받으신 것을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함 가운데 이방인을 받으시고 완전한 믿음 가운데 있지 않더라도 날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셔서 그릇진 것 허물된 것을 고치고 싸매 주셔서 우리를 받으셨음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먹고 살고 죽는데, 주를 위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니,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윤리가 아닌  잃어버린 소자, 잃어버린 양 한마리 찾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중 나은 자가 누구인지 찾아 그 중에 더 나은 자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신 것을 더욱, 아흔 아홉마리 양보다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이므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됨을 지난 주 9절 말씀으로 보았습니다. 죽은 것은 죄에 대해 죽은 것이요 산 것은 죄의 삯인 사망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주님은 죽었다가 살아 나신 산 자와 죽은 자의 주님이시므로 죄악 가운데 있는 자, 부족한 자를 다시 살리고 다시금 하나님의 품에 안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받으신 것입니다. 그저 기뻐하셔서 말입니다. 우리 부모가 그저 기뻐하여 아이들을 입히고 먹이듯 우리 주님도 그저 기뻐하셔서 그저 받아 주신 것입니다. 

2.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이 없음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어떤 판단으로 나아가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무엇을 헤아려서 하나님 앞에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찌 형제를 비판하고 업신여기냐고 그러므로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부 다 용서 받았으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살아있는 것이지 내가 남보다 낫고 공로가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이성을 받았으므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가치 판단하여 행합니다. 또한 의지를 주셨으므로 이성으로는 선악과 정사와 시비를 가리고 의지로 그것을 실행합니다. 이 이성과 의지는 그 자체로 나쁘다 할 것이 없습니다. 잘 드는 칼은 누구에게 들리느냐에 따라 용도가 달라집니다. 어머니의 손에 들리면 맛있는 음식이 나오지만 악인의 손에 들리면 사람을 해칩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이성과 의지를 주셔서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하게 했는데 그것을 어디에 쓰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비다. 그 판단력을 범죄에 사용하면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고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선한 곳에 쓰면 세상의 어떤 짐승이 할 수 없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지식을 좇아 행할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이 모질면 얼마나 힘든 것인가요. 주로 영화에 나오는 악인들의 공통점이 끝까지 괴롭히는 것입니다. 바로 선한 의지가 있는 것처럼 악한 의지가 있습니다. 우리 인류가 하나님이 선하게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죄가 모든 인류에게 다 퍼져서 죄 가운데 태어나고 사망에 속하게 됩니다. 전적으로 부패하게 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어울려 살고 고급스러운 삶을 산다고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해 버렸습니다. 

3.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께 아무도 점 하나라도 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큰 물에 물감이 한 방울 떨어지면 여전히 그 물이 맑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왜요?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받을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능력도 볼품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한 때 잘 사는 듯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잎사귀는 가을도 아름답지만, 우리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봐주시지 않으면 그저 오그라들고 찌그러들어서 볼품이 없습니다. 진물이 나고 썩은내를 풍기는 것입니다. 19세기, 20세기 과학만능주의, 이성주의, 계몽주의, 인본주의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배와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독일이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19세기 말 독일의 니첼이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천년 왕국을 이루시는데 그곳이 독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신학이 세계적으로 퍼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인가요? 괴테, 모짜르트, 베토벤의 나라가 히틀러의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자행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인본주의가 되었을 때 사람에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고상함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이 그것에 빠져 취한 이상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야만성을 보여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뭐라고 했습니까? 독일도 다 예수를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를 죽인 유대인을 죽여야 된다고 하는 것이 그의 논법이었습니다. 

사람은 똑똑하면 불안합니다. 죄를 짓습니다. 바로 주님이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만족에 빠져서 여러 이름을 붙입니다. 유심주의는 인간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조입니다. 낭만주의는 인간의 정서에 대한 기대가 표출된 것입니다. 윤리주의는 인간의 윤리가 뛰어나다는 생각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이 모든 것이 인간의 교만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엇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판단에 맡기면 서로 죽이는 일이 일어날 뿐입니다. 

4. 의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 판단과 심판이 아닌 용서와 사랑

마약 환자가 있다면 그것을 고치는 것은 의사고 판단하는 것은 검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의사로 오셨습니다. 의사가 병을 진단하는 것을 판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의사의 자리보다 검사의 자리에 섭니다. 의사는 마약 환자라도 고칩니다. 병원에서는 마약복용자가 범죄자라도 고쳐줍니다. 검사는 수갑을 채워 잡아 넣을 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판단하는 검사가 아닌 치료하는 의사로 오셨습니다. 몸이 성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판단하러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받으실 수 없는 가운데서도 받아 주시려고 아들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과 적을 나누고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아무도 적이 아닙니다. 자기를 조롱하고 침을 뱉고 십자가에 매다는 그들조차도 주님은 축복했습니다. 저들이 자신들의 죄를 알지 못하니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나누는 데 익숙합니다. 지역, 민족, 연령, 성별, 지식을 나눕니다. 그러나 주님은 용광로 같이 안아 모든 것을 용해시키셨습니다. 이방 수로기네 여인도 백부장도, 모든 부정한 환자, 병자, 죽은 자들조차도 다 끌어 안아서 녹여 주셨습니다. 

저는 영화를 많이 보지 않지만, 공조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도 다른 점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같은 점이 더 많지 않을까요? 동질감이 더 많습니다. 이질감은 10분도 안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 가지 다른 것을 끄집어 내서 돌을 들어 치려고 합니다. 그런 것이 바로 인간의 판단입니다. 주님은 막힌 담을 허물러 오셨습니다. 서로 상처내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이 잘난 것, 못난 것 없이 거기서 거기인데 서로 나누기를 좋아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판단보다는 서로 하나로 묶으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의 품은 용광로와 같고 목자의 품과 같습니다. 목자의 품은 모든 양을 다 안는 것입니다. 똥이 묻은 양 등 각양각색의 양이 있지만 우리 주님은 그 양을 안아 주시는 것입니다. 요나도 인생인지라 다른 곳은 다 가도 니느웨는 못간다고 합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자존심을 가장 상하게 한 것이 앗수르입니다. 남자는 다 죽이고 여자들은 혼음을 시켜 혈통을 더럽힌 자들입니다. 그리고 앗수르 백성들을 이스라엘 땅에 옮겨 정착시켰습니다. 땅을 더럽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혈통과 땅이 전부인데 그것을 더럽혀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요나는 다른 곳은 가도 니느웨는 안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박넝쿨 하나도 하나님이 돌보심을 보이며 결국 그곳에 가게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율법사를, 바리새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강도를 택하셨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낙원에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지만, 부활하셔서 오순절 때 유황불이 아닌 보혜사 성령을 내리셨습니다. 로마 병정 이스라엘 백성 모두 유황불을 내려 죽이실 것 같은데 고난을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그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판단하지 않고 용서하신 것입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사랑의 교훈을 받은 베드로는 욥바에서 환상을 봅니다. 보자기에 온갖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정하다 하신 것을 사람이 부정하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지난 주 13절에서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받으실 수 없는 가운데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의 죄를 싫어하지만 그 니느웨를 다시금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구원하십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자들이 백번 죽어 마땅하지만 그들에게도 선한 것, 성령을 주십니다.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고 공중의 새도 입히시고 먹이시거늘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가 선한 것을 인간에게 주시는데 선인이 아닌 악인에게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죄인입니까? 

5. 인간의 중심: 연약함과 자기부인

그런데 어찌 우리가 형제를 비판하고 판단합니까? 하나님이 받으시거늘 어찌 우리가 비판하고 업신여깁니까? 판단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을 택하십니다. 전부 형을 택할 줄 알았지만, 시장에 내놓지도 않은 막내, 양치던 다윗을 택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중심은 연약함, 자기 부인을 의미합니다. 나는 없고 하나님만 있는 것이 중심입니다. 중심은 내가 잘한다, 잘 지켰다고 하여 시장에 내려가 기름부음 받아 보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종들이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로 안 죽고 살아 있다고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먹이려고 판단합니까? 아니면 그들의 것을 빼앗으려고 판단합니까? 남을 높이려고 판단합니까? 낮추려고 판단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판단력이 과연 우리에게 어떻게 사용되고 있습니까? 사랑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까? 조금 더 헤아려서 가난한 사람 저는 사람 먹이고 낫게하고 추위에 떠는 사람 입히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라도 더 취하여 내가 먹고 누리려고 판단하고 있습니까? 성도의 삶은 감사가 떠나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양을 볼 때마다 마음이 즐겁습니다. 이글거리는 수천억도의 열을 내서 우리에게 비추이니 얼마나 즐겁습니까? 사실 우리의 감사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보다 더 큽니다. 그 감사가 떠나면 제일 처음 불평이 옵니다. 불평은 판단과 함께 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죄를 이야기할 때 가장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판단입니다. 판단에 죄가 온다는 것은 감사가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자꾸 판단하게 되면 내 감사가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신학교 들어오기 전에 주의 종 시켜주는 것이 그저 감사했습니다. 앉으면 그저 울었습니다. 그럴 때는 판단이 없습니다. 전부 감사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와서도 룸메이트들 섬기고 그저 그렇게 살았습니다. 감사가 떠나면 절대주의가 상대주의로 바뀝니다. 하나님과 나의 절대적인 질서가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는 그것이 판단이 들어오면 상대주의가 됩니다. 나도 좀 있고 하나님은 조금 도와주시고, 나보다 없는 사람 못한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또한, 불평과 판단이 들어오면 거짓과 교만이 들어옵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전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내 죄는 덮어놓고 남을 판단하니 거짓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웃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잘 압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데, 바람만 불면 선이 아닌 악을 먼저 여전히 생각하는 버릇이 남아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감사가 떠나면 불평이 판단이, 그리고 거짓이 교만이 들어옵니다. 거짓의 아비가 사탄입니다. 거짓이 들어오면 패망의 선봉인 교만이 들어옵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다 교만한 사람이고 거짓됩니다. 자기를 바로 알고 진실한 사람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남에게 돌을 들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치라고 했는데, 한 사람도 돌을 들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6. 판단자가 아닌 율법의 준행자

본문 11절은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을 내게 꿇고 자백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판단하고 업신여길 때 끝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지 판단하는 자가 아닙니다. —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1-12) 바로 하나님이 입법자고 재판관이십니다. 우리는 준행자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리에 서면 됩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판단합니까? 우리에게는 판단할 거리도, 그런 온전함도 없습니다. 능히 구원하기도 멸하기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판단하시면 됩니다. 니느웨도 강도도 구할 수 있는, 예수님을 죽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혜사 성령을 내려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유황불을 내려도 시원치 않을 백성들에게 보혜사 성령를 내려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만은 자기 장대를 높이 들어 자신이 옳고 모르드개를 달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자기 판단의 장대입니다. 결국 하만 자신이 그 장대에 걸렸습니다. 

여러분, 판단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준행자지 입법자가 아닙니다. 판단하려거든 차라리 주무십시오. 판단은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내 장대에 내가 걸리는 것입니다. 하만의 장대에 말입니다. 하만은 임금이 주는 옷을 입고 자기가 행차를 해서 모르드개를 장대에 달 줄 알았지만, 하나님은 반대로 하셨습니다. 판단하지 않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다. —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롬 14:11) 이 말씀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7.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 자기부인의 고백과 채우시는 하나님

주 앞에서 낮추면 주님이 우리를 높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약속은 즉시 이루어 주십니다. 은밀히 행하면 은밀히 갚으시고 말석에 앉으면 상석에 앉히십니다. 예의 같아도 꼭 그렇게 하십시오. 주 안에서 낮추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전의식, 코람데오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는 상대적입니다. 그럴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태양을 보면 태양을 비추듯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가 우리에게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후 4:6) 사람 바라보고 끙끙 앓지 말라는 것입니다. 밤에 누워서 사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누워서 성경 떠올리고 하나님 생각하니 밤이 즐겁습니다. 사람 생각하고 자면 큰일납니다. 죄짓습니다. 살인하게 됩니다. 누워서 야곱, 사무엘,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 생각하십시오. 사람 생각하면 같이 죽으나 하나님 생각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주십니다. 사람 바라보면 불평, 판단, 시기질투, 교만이 들어옵니다. 하나님 바라보면 자기부인, 절대은총, 오직 하나님께 붙들린바 되는 빛의 자녀, 향기가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힘들게 안하십니다. 우리를 높이십니다. (약 4:9-10) 

본문 12절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 우리 일을 직고하리라고 합니다. 무엇이 복된 것입니까? 재물입니까 명예입니까? 무엇이 아름답습니까? 들의 풀꽃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면 극단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아무리 고급스러운 옷을 입어도 불평한다면 즐거움이 없습니다. 하나님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조금이라도 나눠서 주려고 하고 판단하지 않는 것이 복된 삶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판단하신 적이 없습니다. 큰 용광로 같이 거라사의 광인도 안아 주시고 열두해 혈루병 환자, 세리, 창기, 다 안아 주셨습니다. 심판관, 입법자, 재판관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즐거워함은 율법 앞에서 부족하다고 가슴을 치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 달콤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은 달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친히 이루실 때 달콤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시고 친히 이루십니다.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나는 할 수 없다고 가슴을 치고 나갈 때 하나님이 놀랍게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 생각을 오래하지 마십시오. 정치인들이 하는 일입니다. 주님을 주야로 묵상하십시오. 믿는 성도는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사람 문제가 해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