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9]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81)] 믿음을 따라 (롬14:19-23) 문병호 목사

조회수 148


[20171119]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81)] 믿음을 따라 (롬14:19-23)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클릭하여 다운로드 하시면 됩니다.)




(롬 14:19)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롬 14:20)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롬 14:21)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롬 14:22)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롬 14:23)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녹취록>



1. 성도의 삶의 본질은 감사

오늘은 해마다 한 번씩 주님께 감사하며 드리는 추수 감사주일입니다. 우리가 감사한 것 밖에 없습니다. 예배도 기도도 성도의 삶도 그 본질은 감사입니다. 화목제, 소괴제, 속건제, 전제, 번제, 여러 종류가 있지만 모두 본질은 감사입니다. 우리가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 등을 드리지만 본질은 감사입니다. 이 가을 이곳 예배당 앞에 진열한 과일을 보면 형형색색 각각의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농부의 수고가 값집니다. 땀을 흘리지 않으면 가을의 수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부가 한 것은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흙에서 빨간 속을 가진 수박이 나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신학대학원에 모과 나무가 있습니다. 저도 그 나무에서 모과를 하나 따 왔습니다. 모과나무 주변에 보면 노란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모과는 노랗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색도 바꾸고 향도 나게 하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2. 살아남도 살아감도 전적인 은혜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서 무능하고 오염되었습니다. 겨우 더불어 사는 정도나 하지 구원의 의에 있어서는 완전히 무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주 오염되어 생각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악합니다. 밤새 선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을 도모하며 끙끙 앓습니다. 선을 위해 밤새 고민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싫다 하지 아니하시고 무조건 은혜를 베푸셔서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에게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롬 8:30) 그리고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롬 8:32) 그래서 우리가 “살아남"도 “살아감"도 은혜입니다. 새 생명을 주시고 새 생활을 주셨습니다. 거듭나 새 생명의 세례를 받고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떡과 음료로 삼아 사는 것이 새 생활입니다. 오늘 유아세례와 성찬식을 거행하는데 세례는 살아남의 표요, 성찬은 살아감의 표입니다. 그래서 생명도 생활도 전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전적인 은혜입니다. 전적인 은혜이니 우리는 무조건 감사합니다. 내 공로가 하나도 없고 자질이 없고 행한 일이 없으니 무조건 은혜이고 전적인 은혜입니다. 전적으로 감사하고 무조건적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범사가 은혜이니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곳까지 우리를 굴러오게 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입니다. 에벤에셀은 '돌을 굴린다'는 뜻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얼마 전 지진도 있었는데,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지 않으면 우리가 이곳까지 올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

성도의 삶이 믿음의 선물로 시작된다면 그것이 임한 제 1 표가 감사입니다. 불평의 입술이 감사의 입술로, 시기의 마음이 헌신의 마음으로 바뀝니다. 내가 했다라는 교만과 자기 자랑이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과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감사 없는 믿음은 위험하고 열매 맺지 못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시기하는 것은 감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야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죄를 판단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자기가 옳다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죄가 없는 분이 죄인의 자리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리 마시라고 했으나 예수님은 '우리가 이렇게 하여 의를 이룸이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에 감사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이 죽으심으로 모든 백성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아들이 세례를 받으시니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하늘에서 음성으로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기뻐하는 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면 됩니다. 세상을 기뻐하지 말고 말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하나님께 감사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우리 인류가 닿을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고급스러운 상태입니다. 아무리 비단을 걸치고 진수성찬을 먹더라도 불평하는 사람은 격이 떨어지는 사람입니다. 온갖 것으로 돈을 들여 자기를 치장해도 마음에 감사가 없고 입술에 불평이 있으면 저급한 사람입니다. 세상만물을 보십시오. 이 가을에 우리가 감사하는 나무가 열매 맺는 것을 배웁니다. 봄날에 싹이 나고 움이 트고 가을에 열매가 맺고 결실하는 모든 것을 보면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예외 없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가을에 다 열매를 맺습니다. 나무가 스스로 자리를 옮기고 무엇인가를 하지 않습니다. 심겨진 곳에 잘 자리잡고만 있으면 하나님이 열매 맺게 하십니다. 열매는 감사의 모습입니다. 특별한 일 없으면 성도는 열매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특별한 일을 하라기보다 그릇을 먼저 닦으라고 합니다. 

4.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올리고 사람에게 칭송 받음

본문 22절은 '네게 있는 믿음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고 합니다. 판단하고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올리고 그것으로 사람들에게서도 칭송을 받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사람들에게 저주받은 무리였습니다. 예수님이 저주받은 죽음을 죽었는데 그를 좇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이 죽여도 찬송하고 때려도 웃으니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저주하는 무리가 두려워하는 무리가 된 것입니다. 핍박을 해도 감사하고 감옥에 들어가도 찬송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지나니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고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아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이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두려운 사람에서 칭송을 받는 사람으로 변하고 믿는 사람의 수가 날마다 더하게 된 것입니다. 칭송을 받는 것은 학식, 명예, 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사랑하고 유무상통하고 모이고 떡을 떼고 말씀을 전하기에 힘쓰니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칭송을 받은 것입니다. 한국교회도 칭송을 받으면 전도가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 칭찬을 받되 하나님을 찬미하며 그래야 합니다. 사람에게 칭찬을 받되 하나님께 칭찬을 받지 못하면 그것은 독입니다.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는 일로써 사람에게 칭찬을 받게 되면 그것은 나를 죽이는 독입니다. 철학자 칸트는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이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될 때 그것이 절대선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절대선이 하나님을 찬미하며 이웃에게 칭송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이웃에게 칭송 받을 때 신앙적 절대선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칭찬 받는 것을 제일 목적으로 두면 비참한 삶이 됩니다. 예수께서 떡을 떼어 축사한 것이 하나님께 찬미한 것입니다. 제자들도 찬미하며 성찬 후 감람산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 찬미가 있어야 합니다. 설거지 할 때, 공부할 때 찬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서 칭찬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서 칭찬받았습니다. 그러나 저주로 귀결됐습니다. 사울 왕은 사람들의 말을 좇았습니다. 사무엘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법칙을 깨고 사람의 말을 따라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했는데 좋은 것은 남기고 진멸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가 거역하는 것을 슬퍼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울을 세우신 것을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며 예배하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주일에 교회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주중에는 표가 나지 않는 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혈기로 세상 판단으로 따져서 일하면 안됩니다. 기도하면 바뀌지 않을 것 같아도 바뀝니다. 본문 18절은 황금률,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끝내 하나님께서 높이 들고 머리 삼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운데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을 하나님 앞에 옳다 하는 방식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입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다 있습니다. 믿음 없이 지금 이 자리에 아무도 오지 못하고 한 번 주신 믿음은 가져가시지 않습니다. 믿음 있음을 믿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믿음은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엡 2:8) 그러므로 믿음 없다 하면 배은망덕한 것입니다. 자기가 얻은 것을 없다고 하면 겸손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그 선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없다고 하면 배은망덕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는 것은 믿음을 이성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5. 주신 것을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림

바로 이어지는 본문은 자기가 옳다 하는 자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눈을 감은 상태가 눈 뜬 상태를 지배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심령이 육체의 심령을 지배해야 합니다. 눈 뜬 마음으로 살면 안됩니다. 눈 감은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여 주여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내게 있는 믿음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믿음을 판단해서 가로 막으면 안됩니다. 믿음 주신 것을 스스로 행하면 됩니다.샘의 본질은 두레박도 아니요 둥그렇게 쌓은 벽도 아닙니다. 샘의 본질은 우러나오는 물입니다. 우러나오는 물이 치고 올라오는 것이지 사람이 파서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 솟아나는 샘 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겨자씨 만큼이라도 집으면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겨자씨 만큼이라도 믿음의 맥을 건들면 능력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스스로 믿음이 있다 없다 하는 수준도 넘어가야 합니다. 고백적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 있으므을 믿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믿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믿음의 역사 가 있고 그 가운데 소망의 인내 사랑의 수고가 생깁니다. 부족한 종도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기도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아무 것도 없을 때 창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저에게 ‘내가 믿음을 주지 않았느냐'는 마음을 주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와 같이 제 마음의 지경이 넓어지고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에게 큰 믿음을 주셨습니다. 어디서 빌려오는 것이 아니라 주신 믿음을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시지 않은 것을 찾으시지 않습니다. 성경에 주시지 않고 찾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고후 1:20) 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것을 우리가 받아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것이 성도의 삶, 감사의 삶입니다. 내가 '예'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순종하고 행하신 그것을 받아 아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멘의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의가 다 내것이 됩니다. 살아남도 살아감도 다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이 하신다는 고백

해마다 겨울이 되면 죽은 것 같아도 봄이 되면 싹이 납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칼빈은 식은 화로에도 재 밑에 온기가 있는 것 같이 우리 믿음이 그렇다고 했습니다. 내게 있는 믿음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정죄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이 육체적인 삶을 지배해야 합니다. 욥의 아내는 욥을 비판합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한 욥입니다. 같은 성령의 지시를 받았는데, 제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사도 바울은 성령의 환상 가운데 감동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환란과 핍박이 있는 것을 몇차례 성령이 알려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오히려 그곳에 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도 같은 환상을 봤는데 가지 말라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내가 옳다 하는 바로 정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육체로 사는 것이 정죄받는 것입니다. 세상은 믿음이 육체를 이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가족조차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내게 있는 믿음을 스스로 가지고 있고 자기의 옳다하는 바로 스스로 정죄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저는 성경에 팔복에 더하여 제 9복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됩니다. 울면서 법궤를 매고 가는 소처럼 말입니다. 성도의 삶은 시원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고 떨림과 선한 근심, 뭔가 억눌리고 당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감사하는 마음이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하신다’가 있습니다. 내가 한다고 그러면 죽습니다. 병원에 가서 내가 하려고 하면 죽습니다. 의사에게 맡겨야 삽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내가 한다고 하면 죽습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도 하나님이 한다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고 환자입니다. 환자에게 의사가 있듯 죄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7. 화평과 덕을 세우는 일

본문 19절 말씀은 음식이 아니요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잘 새겨야 합니다. 화평은 샬롬인데 샬롬은 하나님은 하나님 자리에 피조물은 피조물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제 자리에 있으면 열매 맺습니다. 그리고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고 함은 꺼져가는 불도 끄지 않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가지고 따지지 마십시오. 세상 명예 가지고 따지지도 마십시오. 십자가지기교회는 절대 그러면 안됩니다. 

8. 겨자씨 만한 믿음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 안에 꽉 차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씨가 들어 있습니다. 겨자씨 만큼만 사용하면 확 터집니다. 이 믿음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열매 맺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