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13]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67)] 오직 하나님께 영광 (롬11:33-3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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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3]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67)] 오직 하나님께 영광 (롬11:33-3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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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1: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또는 부요와 지혜와 지식이여
(롬 11: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롬 11:35)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롬 11: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녹취록>

1. 오직 하나님께 영광

본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라고 했습니다. --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라 또는 부요와 지혜와 지식이요 누가 그의 마음을 알았으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롬 11:33-34) '모사'라는 말은 어떤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의 마음대로 잘 행하는 사람입니다. 참모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누가 그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가 뜻하는 것을 행하겠느냐하니 본문은 그럴 수 없다고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로마서 9-11장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상에서의 선택은 그 사람 됨됨이를 보고 자기 홍보를 하는 차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무지 무엇으로 우리를 선택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9-11장, 바로 선택의 장의 이 마지막 부분에 누가 그의 모사가 되고 누가 그의 마음을 헤아려 알고 그를 판단하고 그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 부요함을 알겠느냐고 합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기치로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6-17)는 것,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목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이 말씀이 될 것입니다. 즉, 칼빈이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고 그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고 하는 것이 언약신학, 하나님 주권 신학, 종교개혁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인간이 무엇으로 구원받았는지에 관심이 있었다면 칼빈은 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본질이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선택하여 쓰심으로  영광 받으심

저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저는 속이 좁고 마음이 약해서 제 속에 돌이 쌓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만나서 풀지도 못하고 혼자 앓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깨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왜 택하셨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무엇을 보고 택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요, 아무 것도 보고 택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도 보면 다 헤아려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있고 또 그늘이 있습니다. 무조건 그늘이 나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요새는 그늘이 있어야 합니다. 동향, 남향 집은 더운데, 예전에 보면 뒷편으로 돌아가면 처마가 떨어지는 그곳이 그렇게 시원합니다. 그래서 소월의 시를 보면 '뒷문 밖에는 갈립의 노래'라고 합니다. 그 그늘은 참 시원합니다. 저도 한참 그것을 잊고 살았는데 장인어른이 태어나신 함평의 영천리라는 곳에 가보니 그 집 뒤에 시원한 그곳이 있었습니다. 빛이 좋기도 하지만 그늘이 우리 인생에 참 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빛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갱도에 매몰되어 빛이 없어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것이 생명줄입니다. 그러나 썩어 누워 있는 생선에게는 빛이 악취를 풍기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조건 좋다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생명의 길이 되기도 하고 나를 썩게 만들기도 합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쓰면 너무 귀하지만, 못쓰면 그것보다 인생을 망치는 것이 없습니다. 돈이 많아 죄짓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럴 바에는 돈이 없는 것이 낫습니다. 같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들려야 온전해집니다. 그늘도 너무 귀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그 광야에 가보면 생명의 그늘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늘은 살리는 그늘입니다. 언젠가 갯벌에서 조개를 잡아본 적이 있습니다. 요사이 같은 여름이었는데, 그 그늘은 얼마나 귀한 것이었던지요. 우리가 사용하기에 따라 겨울의 그늘은 춥고 힘들지만 열사의 그늘은 귀한 것입니다. 요나의 박 넝쿨의 그늘은 제가 광야에 가보니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저도 많이 세상을 산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단계를 거쳐가면서 자녀를 키우면서 느끼는 것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절대적이지 않고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쓰시느냐가 중요합니다. 나의 자질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부라도 들어 증인 삼으시는 하나님의 사용하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많이 배운 자들이 주를 따르려 하니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으나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으신 것입니다. 택함도 쓰심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입니다. 절대적인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에어컨 바람이 아무리 시원하다고 해도 어릴 때 제가 기억하는 부엌의 어머니가 머리에 쓰신 수건에 드리운 그늘이 더 시원한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 항상 더울 때면 어머니의 그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 머리수건과 그 품보다 더 시원한 곳이 없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쓰시느냐가 중요합니다.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루었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은 우리의 절대치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그것을 헤아려 주시느냐가 중요합니다. 

3. 예배 드리는 것, 배우는 것 자체가 성도의 궁극적인 목적

지난 주 후회하심이 없으심이라고 말씀을 봤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김원진 전도사님의 삶을 볼 때는 참 아깝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영광을 받으시고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배움의 제 1 목적은 하나님을 잘 알아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 드려 영광 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목수의 제 1 목적은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궁극적 목적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고 그의 말씀을 듣는 궁극적 목적은 그것으로 가르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배우는 것, 듣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광을 가장 많이 이야기한 사도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이사야도 요한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가장 영광을 많이 이야기하신 분은 베드로 사도입니다. 그는 베드로 전후서를 통하여 영광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데 그 당시 소아시아의 형편은 네로의 핍박이 임박한 상태였습니다. 그 때 영광을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에 영광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벧전 5:1; 4; 10). 주로 영광은 배가 부르고 여유가 있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할 때 세상도 칭찬하고 잘 될 때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병이 나서, 환란이 지나가서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서를 보면 환란을 앞두고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부끄러운 자리에 섰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세 번 물음을 받고 주님이 끌어가는 대로 끌려가고 급기야 거꾸려 매달려 죽은 것이 그의 인생입니다. 

4. 영광은 헤아리는 자의 것: 아버지가 명하신 일을 함

과연 우리 인생의 영광이 무엇인가요?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헤아리는 자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드리는 자의 것이 아닙니다. 헤아리는 자의 것, 하나님의 것입니다.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은 최소한 아니라는 것입니다. 빛이 되지 못해 빛을 비추듯, 영광의 조건이 되지 못하고 그의 영광을 비출 뿐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무조건 선택하신 것입니다. 나의 조건이 영광의 기원이 된다면 그것은 부족한 영광이고 흠 있는 영광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정말 종이 그렇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택해 주시고 그러니 하나님이 전적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4-5). 

예수님이 이 땅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 것은 단 한 가지 아버지가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룬 것입니다. 여러 가지 우리가 말할 수 있지만, 한가지만 말씀 드린다면 이 땅에서 최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그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도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빛을 받아 반사하여 비추는 것처럼 나로부터 영광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광이 임하여 그것을 내가 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이사야에게, 부족하고 부정한 그들에게 영광이 임했습니다. 

5. 하나님께서 자리를 비워 우리를 영광에 참여하게 하심

영광을 한 단어로 한다면 '완전함'입니다. 더도 덜도 없는 완전함이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우리 쪽에 속한 단어가 아닙니다. 우리는 참여할 뿐입니다. 완전한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립니까?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그 자리를 비워주셔서 우리에게 그 자리에 나눠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이 부족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광 받으심이 은혜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 살았는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영광에 참여시켜주신 것과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변화산의 빛나는 주님과 동석시켜주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변화산의 모습을 항상 떠올리고 살았습니다. 내가 변화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지식 조차도 가질 수 없습니다.(롬 8:33). 우리는 다 여호와를 아는데 다만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알 수 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그 때 그 때 아이가 먹여주면 먹는대로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삽니다. 아이가 이해해서 어떻게 먹습니까? 이해해서 먹으면 사탕만 먹지요.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입니다. 이해할 수 없으나 그의 양식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을 다 알지 못합니다. 이러이러한 하나님을 잘 파악하므로 이것과 저것을 취사선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6.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심

지식은 실재에 따르는 것입니다. 지식이 실재를 끌고 가지 못합니다. 근대 철학은 아는 것이 존재라고 합니다. 지식이 실재를 끌고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실재가 지식을 끌고 갑니다. 구원을 받은 내 존재가 지식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내 존재가 변화되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신학을 공부할 수 없습니다. 유교는 불교는 그리할지 몰라도 기독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학문은 그가 먼저 우리를 변화시켜서 그의 영광이 임함으로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우리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나사로를 미리 살리지 않고 죽은 후 늦게 오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기 위함입니다. 우리 주님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에 맞추어 기도하고 병자를 낫게 하셨습니다. 나면서부터 눈먼 실로암의 소경에 대해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자 함을, 즉 하나님의 영광의 관점에서 그를 생각하신 것입니다.(요 9:3). 모든 것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갑니다. 오늘 이 본문이 종교개혁의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공로 없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 결론이 무엇이 되어야 하나요?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로 인하고 그에게로 돌아간다는 이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종교개혁의 ‘이신칭의'에 지나치게 방점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루터란의 신학이 왜 사변적인데 머무느냐, 그것은 36절의 본문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음 장 12장 1절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삶이 변하고 내가 구원 받아 영광의 도구가 되는, 삶이 예배가 되는 이 정신이 개혁주의,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올해 10월이면 종교개혁 500주년인데, 어느 곳에서도 이 말씀을 인용하는 것을 많이 못봤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가장 즐겁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나의 상실이고 뭔가 뺏기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교회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 직분자들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니 인생의 제 1 목적으로 삼는 것은 잘못됐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저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을 하면 된다고 하는 그런 분파가 있습니다. 영광과 기쁨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의 삶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즐겁다고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즐겁습니다. 

7. 성도의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됨

어제 제가 오랫만에 산에 갔는데 길에 개미들이 얼마나 왔다갔다 하는지 비가 오려는지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런데 보통 개미와 달리 색이 빨갛고 수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 개미도 이탈하는 것이 없이 수만마리가 정확히 그 길로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무로 찔러 교란시켜볼까 하다가 말았습니다. 개미도 이런데 우리 성도도 질서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고 즐거움이다, 이것이 바로 질서입니다.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되는 것이 나에게 즐거움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되는 것이 내 영혼의 기쁨이 된다고 생각하십시오. 두 번 세 번 생각하는 것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딱 한 번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가장 귀하고 내 생애 최고의 목적이다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 교회는 소수가 모이고 여러 일로 오고 떠나기도 하지만, 더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예배가 중요함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예배가 중요합니다. 정말 뚜렷하게 의식이 됩니다.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합니다. 한 번 모여서 하나님께 드리는 이 예배가 중요합니다. 만 명이든 열명이든 한 예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영광을 받으소서, 모든 것 내려놓고 하나님 영광을 받으소서. 약해야 합니다. 미련해야 지혜로운 일 할 수 있고 약해야 강한 일 할 수 있습니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고 미련한 자를 들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고 없는 것을 들어 있는 것을 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주의 영광이 아니면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큰 사업을 해서 이문을 남긴다 해도, 그것이 나쁘지 않지만, 그것에 온전함이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대기업을 보면 그들의 인생이 흠모할만 합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없어서 다투면 조금 이해가 된다고 해도 넘쳐서 다투는 것에 어떤 온전함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것은 경건의 비밀, 교회의 비밀, 믿음의 비밀, 성도의 비밀, 말씀의 비밀처럼 비밀의 영역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입니다. 이 비밀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8. 말씀을 듣고 믿고 하나님이 하실 것으로 아멘함

하박국 선지자가 왜 의인에게 핍박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떠오르는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2장 2절입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묵시는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듣고 새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로 하면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2장 4절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박국에게 주신 답입니다. 다른 답 찾지 마십시오. 답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고백하는 지식으로 가지라는 것입니다. 급할 때 읽지 못하니 마음에 새기고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3장 19절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는도다’. 

주님이 하십니다. 내가 능력, 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에 장인이 1962년부터 평생 설교하신 것을 보고 있습니다. 먼지를 닦으면서 연도를 보니 은혜가 됩니다.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50년을 설교하셨으니 산상수훈만 서너차례, 요한계시록도 몇차례 강해하셨습니다. 말씀이 힘든 것이 아닙니다. 너무 수학 공부하듯 하지 마시고 편하게 들으십시오. 그저 설교를 듣고 보십시오. 두번째는 믿으십시오. 그렇게 될지어다 하고 '아멘'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말씀을 받고 믿거든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다른 답은 없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깨달음 이런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고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송아지와 사슴이 그럴 때 살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입니다. --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9. 너는 내 것이라

베드로는 영광의 사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난 가운데 영광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내 약한 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내가 강해져야 하나님이 사용하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기질이 약하다고 하여 그 기질을 강하게 다듬자고 하지도 마십시오. 눈물 흘리고 내 속에 돌이 쌓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 모든 것이 생생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세에 인내로 영혼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어떤 사본에, '터를 견고하게'가 없음.” (벧전5: 9-10).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해도 연약해도 하나님이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바울, 모세도 모두 그런 자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도 돌아갑니다. 이것은 골로새서 1장 16절과 같은 맥락입니다. --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여기에서 '인한다'는 것은 모든 조건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헤아리신다는 것입니다. --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 55:8-9). 오늘 말씀에 누가 그의 마음을 알고 판단을 헤아리겠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은 우리보다 높습니다. 

칼빈은 기독교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생각하듯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매인 종과 같이 모든 것 퍼주고 목사들에게 종살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라고 인쳐주시고 자녀의 복을 주시고 다스려 주신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할 때 '너는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역사할 줄 믿습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나는 내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라'고 말해 주십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영광의 도구입니다. 이로 즐거워하고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 속하여서 그 가운데 부요함을 누리고 즐거움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환란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영광에 나아가는 길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처럼 이로 인해 기뻐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