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20]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68)] 산 제물 (롬12:1-2)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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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0]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68)] 산 제물 (롬12:1-2)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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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합당한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녹취록>
1.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 영적 예배(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림)
방금 찬송드린 것처럼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라, 그것이 영적 예배니라’는 본문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뭔지 구별하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 몸을 영적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 곧 영적 예배로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제 우리는 로마서 12장 말씀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9장에서 11장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전체적으로 1장에서 약 3장 혹은 4장까지는 우리의 생명을 믿음으로 살리신, 이방인, 세상사람들은 말씀을 들어도 구별하지 못하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은 새 생명을 얻는다는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롬 1:16-17; 3:24)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언약을 전하고 있습니다. 해당 장 전체가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믿으므로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 여기셨다(창 15:6)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5장부터 8장은 이제 생명을 얻은 백성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화 과정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5장부터는 이제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요 의의 종이며,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8장에서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으므로,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장부터 11장은 무조건적 자비, 사랑으로 선택한 은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12장부터 16장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살아갈 것인지, 세상에서 살아갈 것인지 말입니다. 교회에서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이 바로 은사고, 세상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국가와 성도의 삶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6장에서는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았던 칭찬 받는 믿음의 일꾼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은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 원칙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의 몸을 제물로 드리라는 것, 그것이 영적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유나 지식이 아닌 몸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5절은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여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는데, 여기서 ‘자신’이 바로 그 ‘몸’입니다. 우리 자신 혹은 몸을 드리라는 것을 해석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와 닿습니다. 누구든지 이 말씀을 새길 수 있습니다. 각자가 노래할 수 있습니다. 땀을 많이 흘리거나 시간을 많이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어도 몸을 드렸냐는 물음을 받으면 대답하기 망설여질 것입니다. 이 ‘몸’은 나의 중심이라고 볼 수도 있고 연약하고 약하지만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2.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것의 의미
이 교회가 6년 되었는데 처음에는 전도 다니고 하면서 제 땀과 노력과 지혜와 설교와 가르침으로 우리 교회를 잘 목양하고 섬길 수 있을 것이라는 자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도지를 인쇄하여 나누어주고 다니면서 어느 순간 바짝 얼어 붙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혜와 땀과 주중의 기도 등으로 열심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과연 '네 자신을 드렸느냐'고 하나님이 이 이태원역 지하철 1번 출구에서 물으시리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참 목회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아직 나는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람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니 초대교회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오해했습니다. 악의적으로나 혹은 좋은 의도로라도 오해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인신제사를 드리고 사람의 피와 살을 먹는 이교집단으로 취급했습니다. 최근에 제가 양지에서 같이 목사님들과 어떤 주제에 대해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 돌아올 때, 이전에 우리 교회에 출석하던 김재모 목사님을 만나서 얘기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러시아를 다녀왔는데 그곳에는 기독교가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꺼내면 잡혀간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를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약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제물이라고 하면 속죄제, 속건제, 감사제, 화목제, 번제 등 용도별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니 살을 불에 태우는 냄새를 풍기면서 드리라고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 제물의 성격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죄를 속죄(속죄제)하고 허물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속건제) 우리 자신을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감사하고(감사제) 그리고 그의 음성을 듣고 더불어 마시고 나를 아뢰며 하나님과 화목하고(화목제) 그 가운데 자라가고 열매를 맺는 것이 있으며,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는 의미를 우리가 산 제물이라는 말을 접할 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자신을 제물로 드림: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살며 그의 품성을 닮은 삶을 사는 것
신약은 구약의 물질적 완성이 아닌, 구속사적 완성입니다. 이제 우리가 새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리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예수님이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예수님의 성품과 심장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 가는 삶을 사는 바로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하여 제물로 드렸으므로 그 은혜와 의를 누리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누리는 것이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잘 누리는 것이 자녀됨의 본분입니다. 좋은 공기를 마시고 좋은 향기를 취하고 좋은 것을 배우고 좋은 것을 먹었으면 아름다운 것을 내야 합니다. 흠모할 만한 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빛이 들어오면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산 제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육체를 분신해서 불교처럼 향을 피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자신을 주셔서 우리가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으므로 우리 자신을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예배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4. 영적 예배: 삶이 예배
그리스도인의 삶을 로마서 12장에서 16장까지 말하고 있다면, 그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몇 주 후는 은사가 나옵니다. 교회의 은사입니다. 여러 은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은사나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자로서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그에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천사가 돕는, 향과 찬송이 가득한 그 예배를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 원칙이자 대 헌장입니다. 그래서 삶이 예배라는 것이 바로 우리 개혁신학이고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신학과 삶이 하나가 되는 그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에 양심이 있고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허망해지고 미련해지고 우둔해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에 돌린다고 로마서 1장 21절-23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비슷한 것을 누립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논에서 밭에서 지금 곡식이 잘 자랍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이 베풀어 주십니다. 정말 그렇게 하시기 싫어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아 미련해지고 우준해져서 썩을 우상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5.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 기쁨, 목적: 예배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에 도취되고 미혹되어 끝간데 없이 쏠려 들어가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배보다 더 마음을 쏟는 것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삶이 충만해야 합니다. 예배가 즐겁고 기다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들어야 합니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이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고 그에게 감사하고 영광돌리기 위한 것임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갖추고도 예배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망하고 우준하고 미련한 것입니다. 내 사상이 분명하고 이론이 정치하고 재물이 많고 명예가 높아도 예배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련하고 허망하고 죽은 자입니다. 작은 것 콩 반쪽을 가져도 여호와께 감사하고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고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6. 믿음으로 예배 앞에 차별이 없음
여러분 얼마나 예배를 기다리고 사모하십니까? 은혜가 없는 예배가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준비된 말씀을 기도 가운데 찬송 가운데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드리는 예배가 어찌 은혜가 없겠습니까? 영적으로 바짝 당겨 앉으시기 바랍니다. 신학교에서도 항상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은혜가 넘칩니다. 아무리 좋은 황금도 먼 데서 보면 황금인지 구별이 안됩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볼 때 빛나고 귀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예배 앞에 차별이 없습니다.(롬 3:22) 무엇보다 초대 교회는 예배 앞에 차별이 없다는 사실에 성도들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잘 사는 사람은 팔고 못 사는 사람은 함께 먹으면서, 서로 유무상통하면서 그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중심은 예배였습니다. 예배에는 불평등이 없습니다. 예배는 다 한 영혼의 예배입니다. 내가 모나고 부족해도 예배의 순간 하나님이 바꾸셔서 받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 찬송드릴 때, 기도드릴 때 평등합니다. 믿음으로 베풀어주시는 의이니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도는 한가지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롬 3:30)
7. 즐거워하는 것이 가치관
여러분, 무엇이 즐겁습니까? 내가 즐거워하는 것이 내 인생관, 가치관입니다. 무엇이 즐겁습니까? 예배가 즐겁다면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보다 더 즐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진 것입니다. 세상에서 힘들고 억눌리고 어렵더라도 예배가 있으니 내가 견디고 다시 회복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그것을 바라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예배를 내 마음에 중심을 두는 것입니다.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 세 절기의 핵심은 그 가운데 있는 제사입니다. 왜 매 절기 때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셨을까요? 일년에 세번은 항상 모여서 절기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세계의 이스라엘인들은 예루살렘을 모국으로 생각하는 것이요, 지금까지 흩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자녀들이 흩어져 생활하지만 주일날 가장 정성을들여 모이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그것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곳입니다. 넥타이, 옷을 하나 사도 예배 때 부터 입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형식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의 중심을 그렇게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먼저 사람에게 보이기보다 먼저 사람에게 보이는 예배 중심의 삶,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의 정신인 것입니다. 눈먼 것, 저는 것, 쓰다 남은 것, 이미 반질반질하게 된 것이 아닌 새로운 것, 초태생, 새로난 것, 첫 물,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8. 예배는 누리는 것: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베드로전서 1장 8절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이것은 내가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비가 내리면 비를 맞는 것입니다. 비를 당겨서 맞을 수 없습니다. 예배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자주 말씀드립니다. 잘 누리는 자가 가장 은혜롭고 도덕적이며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감사할 때 가장 부지런하고 규칙적이 됩니다. 가장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배가 들락날락거리고 불규칙적이면 내 생활의 규칙이 생기지 않습니다. 예배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10년 간 예배 빠진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주의 종, 주의 성도 입니다. 예배 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있으면 맥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온전해야 주초와 같아서 그 위에 우리가 조금 덜 노력해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의 예배가 온전하면 주중에 10분의 1만 일해도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나는 것입니다. 주일 중심으로 세상에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전 중심으로 세상의 삶이 이끌어지는 것이지 세상의 삶의 끄트머리에 예배를 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9. 예배 안에 모든 은혜가 다 들어있음
그것이 본문 1절에서, 택함 받은 주의 종들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이제 그리스도의 삶을 이야기할 때 우리에게 처음 말하는 바입니다. 저는 요새, 많이 부족하지만, 예배가 참 좋습니다. 신학교 예배도 많이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 전하는 자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사모한다는 것은 설교자를 사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설교자를 바라보면 이미 예배에 대한 마음이 예배의 은혜가 떠나게 됩니다. 차 타고 가다가 드려지는 어느 예배의 교회가 좋은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전해지고 하나님의 안수 받은 주의 종이 전하는 말씀, 성경을 자박 자박 읽고 내려와도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적용, 유창한 이론 없어도 그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떨어지는 이 빗방울에 수분, 양분 다 들어서 만물이 소생하듯, 예배 안에 그런 은혜가 다 있는 것입니다.
10.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
믿음의 백성들은 바로 이 예배를 즐거워하는 자들입니다. 로마서 5장 1장 2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사람이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대요리 문답의 제 1 조는 인생의 제 1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즐거움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영적 예배를 드릴때 우리가 가장 즐거운 것입니다.
예배는 사회 참여를 하는 결의를 다지는 결의가 아닙니다. 예배는 수단이 아닌 목적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우리 삶의 모든 에너지와 모든 선한 소망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소망하고 기대하십시오. 예배 가운데 나를 온전하게 회복시킬 하나님, 예배 가운데 이른 비, 늦은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 예배 가운데 우리의 소명을 뚜렷하게 알려 주시는 하나님, 예배 가운데 우리를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무엇보다 성도는 예배를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를 즐겁게 하고 그것으로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진정한 즐거움, 세상이 줄 수 없는 그것을 성도들은 누려야 합니다. 표현할 수 없는 그 즐거움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세속적인 조건을 쫓아서 즐거운 것이 아닌데 그 중심에 예배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일, '송영',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이 즐거운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건을 따져 내 손에 들린 소유를 좇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요 우리는 우리 몸이 예배자인 것입니다. 이 본질적인 즐거움이 있으므로 항상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끊을 수 없는 것이며, 그 간절함이 있으므로 초대교회 카타콤에서 로마 군인에게 잡혀 죽을 것을 알면서도 함께 모여 예배드린 것입니다. 혼자 집에서 드리면 되는데 왜 모여서 예배드리나요? 그것은 예배의 기쁨이 없으면 우리의 삶의 기쁨이 없으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예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예배를 사모합니다. 다니엘이 문을 열어놓고 예루살렘을 사모하면서 기도하듯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서 예배 한 번 드리려고 바벨론에서 그렇게 기도했듯, 그 기도가, 그 예배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모으시는 것으로서 예배
우리 인생 일정의 제 1 조목은 예배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예수 안에서 왕노릇 하려면 (롬 5:17) 예배가 온전해야 합니다. 예배가 온전해야 권위가 생기고 예배가 온전해야 하나님과의 소통이 온전하므로 세상의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 드리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예배는 누리는 것이며 그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을 가져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모으시는 것입니다. 그 예배가 우리에게 감사가 되고 하나님 앞에 소망이 됩니다. 예배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혹은 예배가 즐겁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됨의 제일 중요한 표지입니다. 저는 십자가지기교회에 대해 자주 말합니다. 여러분께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 않지만, 이 교회에 대해 기도할 때, 세브란스 병원 연세대학 병원의 그 큰 간판을 볼 때 처럼, 십자가지기라는 이 개념이 세상에 밝히 드러나는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혹은 지교회 자랑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것과 예배의 귀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터툴리안이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는데, 우리 교회에는 헌신이, 기도가 있습니다.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1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배
본문 2절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구별하라고 했습니다. 그저 사람들의 마음을 맞추고 편리를 추구하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이 온전하다고 인정하시는 예배, 하나님이 선하다고 봐주시는 예배를 우리가 드려야 합니다. 그 예배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불편하지만 로마 시대 카타콤처럼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저희 교회에 핍박이 많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핍박이 없었습니다. 누가 불평을 하거나 투서를 하거나 찾아와서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절대적인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을 제대로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새벽에 모여 함께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참 애통한 일이지만, 어쨌든 우리 교회가 이 일도 더욱 힘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65주간 말씀 볼 것을 나누어 놓았지만 책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도 한번 또 만들어서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매일 매일 말씀을 나누는 그런 것을 추진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13. 거룩: 구별하여 ‘드려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거룩한 백성 삼으셨기 때문에 거룩한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거룩하다는 말을 구별되는 의미로만 해석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고르반' 되어야 합니다. '드려졌다'고 해야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이라는 단어 자체에 이미 제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드려지지 않은 것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깨끗하고 준비가 잘 되었어도 하나님 것이라고 나를 드리지 않으면 아직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것은 나를 분별하고 구별해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번제와 같은 것입니다.
14. 주일 예배가 삶의 중심이 되는 지상에서의 삶 — 예배의 삶
우리의 인생은 한번 뿐이며 누구에게나 정하여진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후로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어진 삶을 살 때 무엇보다 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주일 예배가 삶의 중심이 되는 이런 삶을 이 땅에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중 6일도 예배입니다.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순간 순간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15. 예배의 질서
혹자는 예배를 너무 사회적으로 해석해서 모여서 드리는 것이 아닌, 사회에서 같이 활동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안 것입니다. 초대교회 카타콤에서 모인 것을 보면 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규모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질서 있고 규모 있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무슨 열린예배라고 하여 스크린에 영상을 틀어 놓고 예배드리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지금 이곳에 임재하셔서 드려지는 장소적 개념과 시간적 개념과 순서적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장소를 멀리해서 지성전이니 뭐니 하면서, 여의도 제 1 성전이니 뭐니 해서 하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유비쿼터스니 뭐니 해서 통신기술을 이용해서 동시다발적으로 예배를 드리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사이버 공간이 발달해도 예배는 지금 이곳에, 시간과 장소에 정해진 순서대로 드려야 합니다. 광고도 예배의 일부입니다. 송영하고 사도신경하고 교독하고 기도하고 말씀 전하고 헌금하고 광고하고 축도하는 것이 모두 예배입니다. 축도 후 폐회 찬송까지가 전부 예배 순서에 들어갑니다.
또한, 오늘날 예배보다 설교를 많이 방송하는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교에서 설교방송이 아닌 예배방송으로 드리게 합니다. 모든 순서를 다 방송해서 학생들이 교훈을 얻도록 합니다. 설교만 자꾸 따로 방송하니 설교가 예배인 것처럼, 예배를 어느 목사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시종을 주님께 주장하도록 올려드리면서 왜 사람이 주장하도록 하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직접 주장하십니다. 목회자는 수종들 뿐이지 그가 주인이 아닌 것입니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성삼위 하나님이 예배의 주인이십니다.
16. 예배가 기쁨이고 은혜이고 소망
우리 십자가지기들은 예배는 즐겁고 예배는 은혜롭고 예배는 소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는 다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관과 같습니다. 이 귀한 것을 우리가 어찌 멀리하겠습니까? 어느 맛있는 멧돼지가 나타나서 그것을 잡아서 먹는다고 새벽에 죽음을 무릅쓰고 모이겠습니까? 어느 황금이 발견돼서 돈을 벌기 위해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모든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예배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모였습니다.
예배 드리지 않고 주일에 비행기 타고 차 타고 하지 마십시오. 어쨌든 그런 일이 피해가도록 기도하십시오. 저도 그럴 때가 있는데 하나님이 그 길을 열어 주십니다. 예배 때 시험치지 않도록 큰 일 생기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모든 것의 처음과 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그것을 본문 2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서'라고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마십시오. 온갖 정욕과 물욕으로 점철된, 한 단어로 말하면 '역리의 시대'인 이 시대를 본받지 마십시오. 순리가 아닌 역리로 돌아가는 이 시대입니다. 순리로 이야기하면 텔레비전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역리의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 합니다. 착하면 잘살고, 정직하고 애통하고 핍박을 받으면 복된다는 것이 기독교인의 순리입니다. 욕할줄 알아야, 거짓말할줄 알아야, 타협해야 잘산다고 하는 것은 역리입니다.
우리 교회에 애통함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애통함이 많은 것을 빌미 삼아서 본질적인 것을 잃어버리시면 안됩니다. 예배 드리기에 힘쓰십시오. 제가 처음 개척하고 예배드릴 때 감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전 예배와 오후 예배 숫자가 거의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설교 때에도 그렇게 얘기하고는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돌아보면서 오전 예배는 물론이고 오후 예배도 잘 드리고, 아이들이 힘들게 하더라도 어릴 때부터 그것을 축복으로 삼자고 했습니다. 부모가 우리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 애들을 데려오면 주님이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합니다. 예배당에 데려오면 아이들이 어떻게 시끄럽게 하든 머리에 안고 축복하십니다. 부모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저도 성도님들도 더욱 예배에 힘쓰면서 예배가 감사하고 기쁜 일임을 더 잘 알기를 원합니다. 물론 이단 예배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정한 순서와 장소와 교회와 목회자를 세워서 말씀을 드리는 예배는 다 은혜가 있다는 아멘이 있기를 바랍니다.
[20170820]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68)] 산 제물 (롬12:1-2)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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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