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03]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0)] 거짓이 없는 사랑 (롬12:9-1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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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3]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0)] 거짓이 없는 사랑 (롬12:9-1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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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2:9)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롬 12: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롬 12: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 12: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롬 12: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녹취록>



1. 진리 가운데 사랑하게 하심

로마서 12장부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이미 나누었습니다. 특히 1절과 2절에서는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3절과 6절에서 영적 예배로 드리는 것은 믿음의 분량, 분수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영적 산 제물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에 있어 믿음의 분량, 분수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본문 9절과 10절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덕목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오늘 9절에서 13절은 성도가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하나님 사랑이며 하나님 사랑의 방식은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은 이웃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자는 이웃을 미워할 일이 없고, 역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은 무질서한 사랑이 아닙니다. 감정대로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을 때는 따뜻하게 자세를 갖추지만, 베풀 때는 조금 느슨하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베풀 때 더욱 질서가 있고 따듯해야 합니다. 칼빈은 사랑의 시작은 의라고 했습니다. 이 의는 진리, 말씀, 하나님의 뜻 등 입니다. 사랑을 할 때는 먼저 의를 추구하면서 하라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끌고 가는 것은 둘 다 죽음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질서가 있고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때 그 공의를 보여 주셨습니다. 즉 그저 사랑한다 말씀하고 뜻한대로 그저 이루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값, 진리를 좇아 사랑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의적 속죄, 대속의 제물로 삼으셔서 모든 의를 이루시고 그 아들의 순종에 아멘하는 자를 이제 구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고전 1:20) 하나님은 우리를 그저 사랑하시되 아멘을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모두 하셨다는 고백과 인정을 받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가운데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공로는 아닙니다. 공로는 없지만 무질서하게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 공로가 없지만 부모는 자녀에게 무질서하게 베풀지 않습니다. 

2. 사랑하여 상속자 삼으시되 정결케 하심: 성령을 주심

자녀가 무엇을 해서 책과 학용품을 사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엄정한 질서를 가르치는 가운데 사랑을 베풉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그저 죄인인 채로 놔두면서 진흙에 둔 채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건지고 구하시라고 간구할 때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질서와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녀 삼으시고 기업 맡기시는, 상속자 삼으시므로 그것에 걸맞는 일을 원하십니다.(롬 8:17) 그러므로 그저 자녀 삼아 주셨다고 무질서하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상속자로, 백성으로 온전케 되게 하시기 위해 자녀의 영, 양자의 영 바로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바로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꽃이 아름답고 하늘의 별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최고 아름다운 것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맑은 샘을 찾아 근원을 찾아 높은 곳을 오르지만 아무리 찾아도 우리 안의 심령에 흐르는 샘물이 가장 밝고 고귀하고 정결하고 밝고 아름답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 성령으로 인해 우리가 밝고 맑고 빛나게 사는 것입니다. 향기가 들어오니 향을 내는 것이고 빛이 들어오니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처럼 진리 가운데 사랑입니다. 

3. 진리 가운데 사랑하심: 대가를 치르는 사랑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

본문 9절은 하나님의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짓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니 어떻게든 그 사람을 가까이 해보려고 하는 것은 2가지 점에서 잘못되었습니다. 첫째로, 노력과 희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거짓이 없다는 것은 사랑은 수고하는 가운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거짓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땀이 흐르고 피가 흐르고 보이지 않는 수고가 있다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그래야 거짓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을 내 옆에 두겠다고 하면서 내가 헌신하고 희생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 사랑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온전히 진실하게 상대편에게 전하지 않고 나를 가식되게 꾸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또한 거짓된 것입니다. 사랑은 다 순수하다고 하지만, 그런 사랑을 찾기가 어렵다고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과연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 그 진실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대가를 치르는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가 없는 사랑은 위험합니다. 오히려 사랑의 이름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 진리가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독생자의 영광을 보니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것입니다.(요 1:14-17) 진리가 있고 은혜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진리 없는 은혜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술집에 두신 채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사랑합니다. 우리에게 공로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질서 가운데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를 참여케 하심

하나님의 사랑만이 온전한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은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 끝이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끝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1) 우리가 지금은 희미하게 보는 듯 하나, 빛 되신 우리 하나님, 우리 주님을 그 때는 마주보고 온전히 영광에 참여하는데 이것을 신학에서 영화(榮化, 영광스럽게 됨)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리의 사랑이므로 빛과 영광이 있습니다. 활짝 핀 봄날의 꽃처럼, 아주 눈부신 여름의 식물, 가을 들판의 곡식과 같이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사랑은 아름답게, 영화롭게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최고의 사랑은 지금 나를 안아주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쌀을 씹어 죽같이 만들어 아이에게 주는 그런 어머니의 사랑이 가장 귀한 사랑입니다. 땀과 피가 있는 사랑입니다. 젖이 나지 않으면 봄날 쑥이라도 캐어 먹어서 변비에 걸리더라도 아이에게 젖을 먹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자기 몸은 부서지든 막히든 상관치 않고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자기 몸을 다 짜서 내 주는 것이 바로 진실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의 극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기 자신을 주시고 아들을 주신 그 사랑입니다. 속여서 거짓 사랑이 아닌, 수고하지 않으려는 사랑, 그저 받기만 하려는 사랑, 사랑의 이름으로 자기만 즐거워하려는 사랑은 모두 거짓 사랑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고 결혼을 할 때 상대방을 위한다는 생각을 해야지 내가 결혼으로 유익을 누리겠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5. 은혜를 전제하는 진리

하나님의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보면 졸업식 때 어머니에게 학사모를 씌워주고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는 숫기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시골에서 서울 안암산 골짜기까지 오셨는데, 당시 데모로 인해 정부에서 정상적인 졸업식을 못하게 해서 산 밑에서 했는데, 비 오는 그 졸업식 때 어머니께 학사모라도 씌워드리지 못했습니다. 내가 열심을 가지고 공부해서, 잘 살아서 자수성가 하듯 혼자 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부모님이 기도하고 있는 것 없는 것으로 자식을 먹이고 채워서 하셨습니다. 그것이 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랑에는 진리가 따르고 역으로 참 진리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는 그저 날카로운 사변이나 이론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 헬라어로 알레떼이아는 은혜를 전제하는 진리입니다. 은혜가 없는 진리는 참 진리가 아닙니다. --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우리는 지식을 가지되 사랑의 지식을 가지고, 또 사랑하되 또한 진리 가운데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 읽은 헤르만 헤세의 시(나르찌스)와 사랑(골드문트)이라는 작품에 보면 나르찌스는 지성을 대변합니다. 그런데 나르찌스는 하나님을 그저 냉랭한 지식으로 알고 좇는 것을 표현됩니다. 물론 저자가 잘못 그린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냉랭한 지성으로 좇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저자는 나르찌스를 이성적인 인간으로 그립니다. 반면, 골드문트는 이성보다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인간 두 유형의 사람을 대조하면서 저자는 소설을 씁니다. 소설 데미안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헤르만 헤세가 참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흉내만 낸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지와 사랑의 평행성이 아닌 지와 사랑입니다. 그야말로 지식이 있는 사랑이고 사랑이 있는 지식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것이 영광

여러분, 거창하게 사랑하고 거창하게 베풀 생각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조금이라도 사랑하면 그것이 영광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가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작은 사랑이라도 우리가 베풀 수 있다면 그 자리가 영광의 자리입니다. 가장 빛나는 자리이고 가장 멋있고 아름다운 자리입니다. --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사랑하지 않는다면 많은 것을 가지고 트럭에 한 가득 싣고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작은 것을 가져도 만일 우리가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게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여서 온전히 이루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말입니다. 

7. 형제 사랑

본문 10절에도 형제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형제는 피를 나눈 형제입니다. 우리가 사랑에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아가페, 스토르게, 에로스 입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 스토르게는 형제 간의 사랑, 에로스는 남녀 간의 사랑입니다. 본문 10절의 '형제 간의 사랑'은 스토르게입니다. 바로 교회 안에서 한 혈육으로 피를 나눕니다. 우리가 피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 한 생명이 된 것입니다. 형제 간에 사랑하라는 본문 말씀은 특히 성도들 간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성도들이 서로 잘 사랑할 것 같은데 쉽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담이 있고 시기가 있습니다. 교회는 형제 자매이므로 세대 갈등도 더 큽니다. 세상에는 세대의 층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모든 연령이 형제, 자매이니 오히려 더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본문의 형제 사랑은 부모를 사랑하는 개념이 출발입니다. 부모와 연장자를 사랑하고 그리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어느 곳보다 예를 잘 갖춰야 합니다. 그것을 특별히 형제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고 합니다. 우애는 동등한 세대, 지위에 있는 사람 사이의 친밀한 사랑입니다. 또한, 연장자들은 배나 존경하라고 합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는 효도하고 연장자에게 잘하고 형제 간에 우애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갖춰도 효도하지 않으면 소용 없습니다. 절대 어른 모르는 사람, 효도하지 않는 사람은 쓰면 안됩니다. 세상에서도 좋은 일을 못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십계명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할 때 잘 믿는 부모만 공경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공경해야 합니다. 스토르게의 사랑이 더 커지면 부모 사랑, 형제 사랑이 됩니다. 다 포함하는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삼위 일체 사랑으로 우리가 할 수 없고 비출 뿐입니다. 우리는 신적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토르게의 영역입니다. 주 안에서 우애하고 공경하고 형제, 자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말석이 상석인 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어디든지 가면 말석부터 찾으십시오. 구석부터 찾아 앉으십시오. 낮아짐이 높아짐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대로 화목을 추구하십시오. 

8.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

우리는 더 따져야 잘 산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화목해야 잘 산다고 생각하십시오. 화해하고 용서하고 참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판단하더라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판단을 하십시오. 오래 참으십시오.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답은 이미 다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형제 사랑,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는 이 사랑이 이 땅에도 많이 필요합니다. 옛날에는 이 스토르게의 개념이 사회까지 확장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어렵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지 아이들이 하는 것에 관여하는 성향이 아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섬찟 합니다. 그래서 안합니다. 양재천을 다니다 보면 아이들이 있는데 자주 넘어집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넘어져서 달래다 보면 어느새 조심스럽습니다. --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2-33) 고린도 교회는 부유했고 가난한 교회를 많이 도왔습니다. 그러나 싸움을 많이 했습니다. 그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방인, 유대인 따지지 말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자신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9. 진리 가운데 부지런함

본문 11절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으로 주를 섬기라'고 합니다. 구제를 하고 진리 가운데 서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 '주를 섬기라'는 말씀은 칼빈의 주석에 보면 '시간을 섬기라'고 번역되어 있기도 합니다. 주를 섬기는 것을 시간을 섬기라고 번역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사랑에는 진리가 있고, 이 진리 가운데 열심을 내고 부지런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표를 잘못 설정하면 아무리 달려도 오히려 멀어집니다. 그리고 목표를 향해 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 없이는 성경책도 한 장 못 넘깁니다. 책을 쓰면서 시간이 얼마나 무서운지 많이 깨닫게 됩니다. 어느 정도 저의 방향과 열심이 있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니 그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땅에서 60년, 70년 살게 하실 때 우리에게 시간이 부족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방향을 정해 나아가면 끝내 이룹니다. 결코 시간이 짧지 않습니다. 1년, 2년, 3년 방향을 잡고 나아가다 보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0.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란을 참으며 기도에 힘씀

본문 12절은 이 시간을 가지고 우리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란을 참으며 기도에 힘쓰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같이 일어납니다. 소망이 있으면 즐겁습니다. 농부는 가을의 소망을 가지고 봄날에 씨를 뿌립니다. 낙망하지 않고 열심을 다합니다.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소망 없이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과거를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과거를 보고 극단적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은 말입니다. 미래를 향하여 즐거워하는 사람이 건전한 사람입니다. 과거에 대해 회고주의적이거나 얽매이는 것은 병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것을 정신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고착이 바로 이것입니다. 정신병이 따로 없습니다. 어릴 때 기억을 잊지 못하고 과거에 매인 것입니다. 성경은 쟁기를 든 자가 뒤를 돌아보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합니다. 쟁기는 소가 앞으로 끌고 갑니다. 아무리 유능한 농부도 뒤를 돌아보면 삐둘어지는 것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차의 핸들을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네비게이션을 잘 맞추어 놓고 목적지에 갈 소망을 가지고 조금 천천히 가는 것 같아도 그것이 빨리 가는 것입니다. 방향을 대충 해놓고 밟아도 빨리 가는 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모든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도 시간은 충분합니다. 어떻게 목표를 정하고 열심을 다하느냐, 진리와 열심입니다. 진리와 부지런함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고 11절도 말합니다. 이 두 가지가 있으면 잘 삽니다. 사람이 진실하고 부지런하면 굶어 죽지 않습니다. 둘 중 하나가 없어도 안됩니다. 그것이 개미입니다. 길을 세워 놓고 열심히 다니니 집도 짓고 큰 것도 옮기는 것입니다. 개미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를 아실 것입니다. --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느 8:10) 그가 처음에는 슬퍼합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벽까지 무너진 것을 듣습니다. 그는 성벽을 지으러 간 것입니다. 그런데 전반부에 보면 그가 슬퍼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것을 왕이 보고 왜 그러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을 하고 왕이 보내줍니다. 그런데 후반부에 보면 그가 즐거워한다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느 12:43) 

11. 나의 나된 것으로 기뻐함

여러분, 성도가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항상이니 조건을 가지고 기뻐하지 말고 나의 나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기쁜 것이 뭔가요? 성경이 길을 가르칩니다. 내 자신이 기뻐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 있는 동안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명예와 부로는 기뻐할 수 없습니다. 어제 마리아와 식탁에서 대화를 했습니다. 대학을 가도 기쁘지 않을 것 같다고 마리아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게 맞다고 말했습니다. 박사 논문을 받고도 기쁨이 2주를 가지 않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일희일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때 그때 일희일비하면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면 됩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한다고 하면 내가 무엇인가 조금 더 하는 것 같은데,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저기압이니 기분이 안좋다느니 등의 말을 합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면 왠만큼 머리 아프고 몸살 감기 등이 없습니다. 이 기쁨이 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전체적으로 진리 가운데 사랑하고,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라는 말씀입니다. 부지런함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13절은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고 손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손은 나그네입니다. 요새는 나그네 대접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숙박시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나그네 대접이 최고급의 인품입니다. 아예 어떤 집은 나그네를 위한 방을 마련해 두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할 때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 보는, 길가는 사람을 보더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할 때는 힘써서 도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런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은혜라는 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