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10]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1)] 낮은 마음 (롬12:14-1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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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0]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1)] 낮은 마음 (롬12:14-1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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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2:14)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롬 12: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 12:16)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녹취록>
 

1. 거룩한 산 제물

우리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까지 살펴본 말씀은 성도들이 영적 산 제물이 되어서 거룩한 예배,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합니다. 산 제물이 되는 것은 전체적으로 우리 자신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 제물에서 제물은 연기를 피우면서 죽여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절이 '거룩한 산 제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살아 있는 죽은 제물을 드리라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죽은 것을 갖다 드리지 말고 살아 있는 것을 즉, 우리 살아 있는 몸을 드리라는 말입니다. 회개하고 기도하고 마음을 정하게 하여 살아 있는 것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구별을 정말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먼지 하나 묻어도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 드려지지는 않았습니다. 구별해서 드려야 거룩인데 구별해서 내가 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르반' 하면서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만 하고 뒤로는 자기 곳간을 채웁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서기관과 제사장의 모습이었습니다. 칼빈은 로마서 11장 33절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로 다루면서 기독교 철학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 하나님께 드려질 때 거룩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라고 합니다. 나를 구별해서 살아 있는 것, 썩은 것 더러운 것 죽은 것이 아닌, 회개하여 정한 산 것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보혜사 성령이 있으므로 그 성령의 역사로 진리로 새롭게 되고 회개할 수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우리는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회개합니다. 회개의 즐거움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가지고 주장하고 자기 고집을 피우면 안됩니다. 잘못된 것은 빨리 돌이킬 줄 알아야 합니다. 왜요, 우리 안에는 주님, 보혜사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회개의 영을 주시고 하나님 앞에 간구할 수 있고 성령이 내 안에서 탄식하므로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다시금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시므로 우리는 그의 명령과 이끄심을 받습니다. 

2. 그리스도 되신 예수로 인한 성도의 삼중직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기 때문에 그 예수님이 우리를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서 왕, 제사장, 선지자로 살아갑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삼중직(三重職)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의 왕직은 베푸는 것입니다. 왕은 다스림, 군림이 아닌 베풀고 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세상에서 머리입니다. 그래서 짓밟고 군림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일의 재상인 비스마르크가 믿음이 좋았지만, 이 부분을 잘 몰랐습니다. 왕은 군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독일이 강해졌지만, 현대 미국, 러시아 등이 사용하는 대다수의 기술들이 그 때 나왔지만, 그 결과물로 히틀러가 나왔습니다. 왕은 베풀어야 합니다. 잘 베푸는 것이 왕직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왕직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보혜사 성령이 내게 임하여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므로 지정한 왕, 유일한 왕,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먼저 왕으로 베풀어 주시므로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베풀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보면 베풀기는 커녕 받아 누리기도 벅차지만, 그래서 우리 성도가 베푸는 자리에 설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루라도 주는자의 자리에서 사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아닐런지요? 

또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합니다. 제사장 직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 제물 드리고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제사장 직분을 지금 예배 드림으로써 감당합니다. 이것이 제사장 직분입니다. 내가 지금 예배드림으로 가정의 평화, 국가의 평화가 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해서 기도하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 드리는 것도 그렇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 꼭 하십시오. 잘하는 기도는 없습니다. 그냥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하는 것은 있습니다. 안하면 안됩니다. 기도의 줄이 끊어지면 안됩니다. 기도로 내 심령을 토설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사장 직분입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양자의 영을 허락하여서 우리가 구하면 아들이 친히 이루시게 하시는 복을 우리가 누립니다. 

마지막으로 선지자의 직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분별하고 선포하고 가르치고 전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항상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도의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유학 가서도 전도의 노력을 많이 해봤지만,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우리가 책자를 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 정말 감사합니다. 분량이 많지 않아 10분이면 다 읽지만 크게 감사합니다. 어제는 출간된 이 책을 보면서 한국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이면 좋을 요절 하나를 안 넣은 것 같아서 밤새 뒤척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이처럼 책을 쓰는 것이 저의 전도법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정현 교회 목사님이 요르단에 파송한 선교사가 있는데 7년 간 한 번도 복음을 전한 적이 없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복음은 전하지 못하고 기도만 계속 하는데 그래도 계속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실 때 저도 이 책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합니다. 이 책을 통해 한 생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우리는 모두 선지자의 직분이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삼중직을 허락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왕직을 주셔서 베풀 수 있는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연약하다, 없다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셔서 남에게 베풀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절대 크리스천은 받는 자리에만 서려고 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주는 자리에 서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시고 애통하십시오. 그리고 제사장직을 주셨습니다. 내가 기도하면 엘리야와 같이 비가 내릴 수도 하늘에서 불이 내릴 수도 다니엘과 세 친구와 같이 느부갓네살도 굴복시킬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점점 한반도도 핵무장 지역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면 곧 아시아 전체가 핵무장이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우리가 살지만, 우리에게 이를 해결할 기술이, 계획이 있지 않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핵무기라도 녹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로서 말씀을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우리는 이러한 삼중 직분에 빚진 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빚진 자로서 본문 14절,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말씀을 봐야 합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할 때, 우리가 삼중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명령하신 것입니다.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혹하고 불가능한 이로 여겨질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다른사람을 박해해 본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죽였기 때문에 평생 스데반을 죽인 빚을 진 것입니다. 그리고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를 믿는 자들의 씨를 말리려고 했으므로 평생 그 빚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박해하는 자가 나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동시에 박해하는 자도 하나님이 사랑하면 그와 같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박해하는 사람을 우리가 먼저 포기하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유순하게 어릴 때부터 신앙 안에 자라서 그걸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처럼 모진 행로를 거쳐온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즐겁고 기쁜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저주하지 말라는 것은 박해하는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주는 다른 것이 아닌, 단절입니다. 상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못박는 자들을 향해 그들이 그들의 죄를 몰라서 그렇다고 하면서 축복했습니다. 아이가 다가오면 아이를 축복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 때 베푸시면서도 축복하고 성찬 때 축복했습니다. 주님은 계속 축복했습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죄를 짓지 말라고, 윤리가 아닌 축복으로 대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너를 바라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죄짓지 말고 살라고 한 것입니다. 아마 간음한 여인은 상습적으로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 여인이 어떻게, 무슨 힘으로 다시 일어납니까? 그러나 주님은 다시는 죄 짓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말해주신 것입니다. 축복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 축복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축복했습니다. 사람들의 축복은 커녕 사람들이 자신을 천시하니 눈을 피해 뙤약볕 때 물을 길러 간 그런 여인도 축복하셨습니다.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4. 사람과 씨름하지 말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

핍박이라는 것은 창과 화살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핍박 가운데 성도에게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하박국이 어찌 그러하냐고 하지만, 이방 민족의 핍박 속에서 복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핍박을 받은 때가 언제일까요? 느부갓네살 때일까요? 바로 때일까요? 가장 핍박이 심한 때는 예수님이 오신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이 흐려지는 핍박의 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하고 직장의 동료가 나를 힘들게 하고 내가 애매한 욕을 얻을 때 즉시 그 핍박을 그 사람과의 관계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풀어 가십시오. 어떤 일이든 우리 성도님들은 그 일은 일이고 하나님과 관계에서 그 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씨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밤에 누워서 사람 얼굴 떠올리지 말라고 이전에 말씀드렸습니다. 밤에 누워 하나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밤에 누워 이사람, 저사람 원망하고 미워하면 그것은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그럴 때는 자지 말고 일어나서 기도하십시오. 예배 드리기 전에 다 화해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교회 오기 사람 보기 무섭거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오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핍박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비만 맞으면 되지 어떤 구름이 있는지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우리는 신경쓰면 됩니다. 인생은 떠가는 구름과 같습니다. 직장 동료도 다 헤어지게 마련입니다. 일 하나 하나에 사람의 과점을 가지고 보면 평생 내가 사람의 종이 되어 삽니다. 나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다 풀리는 것입니다. 

축복은 헬라어로 율로게이 입니다. 좋은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좋은 말에 강조점을 두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 좋은 소식에 방점을 찍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것이 바로 축복한다는 말입니다.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고 오리 가자면 십리 가는 것이 축복하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길을 동행하는 것이 최고의 봉사입니다. 우리 말에도 길동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어둠도 있고 강도도 많습니다. 오리 가자고 할 때 십리 가는 것은 예수님이 부탁한다고 생각해며 대할 때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한가지를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가 보내신 예수의 마음으로 축복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핍박하는 자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축복할 때 하나님의 자녀됨이 가장 잘 드러납니다. 상대편도 똑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스스로 의인입니다. 너무 내 위주로 보지 말고 참아야 합니다. 그 참음의 최고봉이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일흔번 씩 일곱번 참는 것보다 더 높은 경지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수동적이지만, 축복은 능동적, 적극적인 경지입니다. 쉽지 않습니다마는, 그렇게 해 버리십시오. 나를 핍박하더라도 그저 음식을 줘버리십시오. 그저 주십시오. 요나가 니느웨를 축복했습니다. 어떻게 했나요? 박 넝쿨의 그늘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나는 내가 대단해서 니느웨를 축복하고 복음을 전하는 줄 알았다가, 박넝쿨 하나 없으니 시들해지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자신도 니느웨도 같다는 것을 깨달아서 한 것입니다.

5.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함

두번째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말 뿐 아니라 몸 전체로 함께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체휼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의 처지를 완전히 공감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판에 박힌 것이 아니라 저 너머에서 그저 우리를 하나님의 입장에서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인간이 되어 온갖 핍박을 당하시고 굶주리시고 상한 가운데 긍휼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시대를 책망하면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슬퍼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 없이 형식적이라는 것입니다. 시대가 그만큼 잔혹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옛날보다는 많이 삭막해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랫동안 같이 슬퍼하거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 함께 기뻐하지 못함은 시기심이요, 슬픔을 나누지 못함은 우리 마음이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나누었지만, 저는 어릴 때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자주 봤습니다. 저 동네에 누가 돌아가셨다고 그렇게 우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보였습니다. 저도 슬펐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너무 옛날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함께 울고 기뻐한다는 영어 단어를 보니 남을 기쁘게 한다는 뜻이 있음을 봤습니다. 또한 공손과 정중이라는 뜻도 있었는데, 이를 통해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곧 공손과 정중임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반대말은 불평인데, 남을 고발하는 것으로 뜻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굴 만났는데 매일 불평한다면 그것은 말하고 있는 상대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불평은 내가 힘들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는 것입니다. 불평의 반대는 함께 좋은 말을 하면서 남을 높이는 것입니다. 나쁜 소식을 빨리 전하기보다 기쁜 소식, 즐거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다윗에게 압살롬이 죽은 소식을 전한 자들이 처형당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쁜 소식은 결코 좋은 소식이 못됩니다. 즐거운 소식이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는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해야 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시니 최고의 덕목이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하신 것입니다. 

6. 마음을 같이 함

세번째로 본문 16절입니다. —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6) 마음을 같이 하라는 말은 교만하지도 비굴하지도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경제 형편, 사회 지위는 다를 수 있어도 마음은 같이해야 합니다. 가진 사람에 대해 스스로 마음이 비굴해지고 반대로 자신이 가진 것이 많다고 교만해지면 안됩니다. 같은 수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할 때 주님의 마음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형편에 따라 마음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면 그런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어디 가나 잘 어울리고 똑같은 것입니다. 형편에 따라 낙망하고 교만하여 들쑥 날쑥 한 것이 아닙니다. 부한 자를 만나도 빈한 자를 만나도 친구가 되어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 기독교의 인성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세상 지혜입니다. 스스로 지혜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 1:24; 30)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나의 지혜가 아닌 예수님의 지혜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성령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 2:4)

7. 결어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삼중직을 다 수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십자가지기성도님들이 세상을 향해 크게 베푸는 왕의 자리에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기도하면 왕의 심령을 주실 것입니다. 베푸는 자리에서 살게 하실 것입니다. 두번째로 국가와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제사장의 심령을 가지십시오. 십자가지기 성도들은 하루라도 은밀히 기도하지 않는 날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들도 공부방에서 스스로 기도하고 자게끔 해야 합니다. 결코 그렇게 되면 탈선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은 절망하고 멀리 가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기도해야 잠잔다고 생각하게 하십시오. 우리는 다 제사장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영적으로 무뎌도 그 아비가 몰랐습니다.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아비는 목이 꺽여 죽었습니다. 세번째는 선지자의 직분입니다. 우리 십자가지기들 모두 큰 일 할 것입니다. 우리보다 큰 교회, 재정 풍부한 교회 많지만, 기독교의 진리라고 성경 요절을 정리하여 총회에서 전국 목사, 장로 1,600명에게 배포하고 신학생들에게 전하는 교회는 우리 교회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일로 기도하시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빠르면 내일 늦으면 3년 후에라도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내일 저희 학교 1학년 전교생들에게 '신학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게 됩니다. 그 때 이 책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어제 밤에 기도하면서 그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이 토마스 선교사의 성경처럼 사용되게 되어 달라고 하면서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장은 사용되지 않는 것 같아도 어느 순간 이 책이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데에 사용될 것입니다. 우리 김원진 전도사, 죽기 1주일 전에 이 책 원고를 읽고 보내준 검토와 의견이 제 컴퓨터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역사, 교리사, 기독교사 입니다. 죽어가는 전도사가 이 책을 읽고 (검토 의견을 남기고), 이렇게 작은 교회가 주님을 위해 그 책을 출판한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구석에서 작은 것이라도 들어 사용하십니다. 주님이 화려한 궁전이 아닌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닌 바로 이런 일을 통해 주님이 일하십니다. 이슬람 사원이 있고 여호와의 증인이 있는 지금 이곳에서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큰 일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자녀들 모두 크게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주저하지 마시고 말씀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높은 마음이 아닌 같은 마음을 갖고, 핍박하는 자에게 축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