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30]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52)] 오직 긍휼히 여기심으로 (롬9:14-18)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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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30]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52)] 오직 긍휼히 여기심으로 (롬9:14-18)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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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9: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sg.gif 신32:4
(롬 9:15)모세에게 이르시되 ㅁ)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sg.gif 시115:3
(롬 9: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ㅂ)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sg.gif 출9:16, 잠16:4, 출9:16
(롬 9: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sg.gif 출4:21, 요12:40
 

 


<녹취록>



1. 고난 가운데 소망이 있음: 소망의 원천은 긍휼히 여기심
 
사도 베드로가 소아시아에 편지를 두 번 쓰는데 그것이 베드로 전서와 후서입니다. 임박한 환란이 있을 것임을 미리 바라보고 그것을 위로하고 어떻게 그 고난을 이길 것인지, 그 고난의 의미와 뜻을 알려주고자 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베드로 전서와 후서는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 자신도 힘들거나 삶의 역경 가운데, 결정을 내려야 하는 전화기에 본 성경 책의 말씀을 자주 보게 됩니다. 뭔가 고난에 대한 말씀이 많지만 그곳에서는 소망이 있는데, 그 원천은 바로 긍휼히 여기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compassion 입니다. 라틴어로 compassio 입니다. Passion을 함께 한다는 것인데, passion은 곧 고난입니다. 그래서 체휼한다는 말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몸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픈 것을 함께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리 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로 우리가 택하심을 받은 것, 곧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 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계시, 구원하실 때 자신의 기뻐하심, 원하심, 뜻하심으로 하십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모든 만물을 지으셨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간절함, 긍휼히 여기심이 들어갑니다. 창조와 계시에는 긍휼히 여기심이라는 말을 쓰지 않지만 구원은 긍휼히 여기심으로 하십니다. 뜻하고 원하셔서 구원하시는데 불쌍히 여기셔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 불쌍히 여기나요? 타락한 인류가 비참한 상태, 전적 무능과 부패에 있으므로 그렇습니다. 인류가 그렇게 비참하게 된 것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를 보는 아비의 마음일 것입니다. 쉬지 못하여 삐쩍 마른 그가 집에 와서 자는 모습을 볼 때, 그를 위하여 소를 잡고 잔치를 베푸는 그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일 것입니다. 부족한 종도 고등학교까지 시골에 다니면서 부모님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연세 드신 어머니께서 제 다리와 팔을 그렇게 주물러 주셨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체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우리의 형편, 조건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2. 의로우신 하나님: 택한 자를 무조건 긍휼히 여기셔서 무조건 은혜를 베푸심

여러분, 얼마나 한 주 간 힘드셨습니까. 얼마나 외로우셨고 힘드셨습니까. 그 때 그 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우리가 살다 보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순간도, 감옥에 갇히는 것 같은 순간도 있습니다. 감옥보다 더한 곳에 갇히기도 합니다. 적이 우리를 에워싸지 않아도 말입니다. 생계와 생업 중에 그런 일이 계속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봐도 간혹 측은하게 여겨집니다. 자기연민이라는 말처럼 말입니다. 얼마나 나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없으면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나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우리보다 더 깊이 헤아려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우리를 만들기 전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가운데 우리를 택하여 자녀 삼아 주시고 권세를 주셔서 고상하게 살아가게 하신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14절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일부만 선택하냐고 물으며 하나님의 불의함을 이야기합니다. 이에 대해 가장 쉬운 답은 이것입니다. — 하나님이 무조건 벌을 베푼다면 그것은 불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은혜를 베풀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기된 인류는 자기 죄로 인해 진노에 빠집니다. 반면 택한 자는 무조건 긍휼히 여기셔서 무조건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짓밟고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질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그를 통해 기쁨을 얻고자 하심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기쁨의 조건을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셔서 그를 통하여 기쁨을 얻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타락한 인류가 아닌 이 땅에 보낸 하나님의 독생자가 세례를 받을 때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례는 죄인이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 서서 우리의 죄와 죽음을 가져가시는 자리에 설 때 하나님이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쁨의 근원이 우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우리를 자기 몸과 같이 체휼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조건을 찾는 것이 아니라 친히 아들을 보내셔서 그 아들을 기쁨의 근원으로 삼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시는, 그리하여 그가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시는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무조건 택함은 아무 근거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은혜가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기쁨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기쁨의 조건도 요소도 없습니다. 그 아들, 죄가 없으시고 죄의 마음도 없으시고 허물도 없으신 그 아들을 보내셔서 그 아들을 기쁨의 근원으로 삼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롯을 택하셨고 기생 라합을 택하셨습니다. 

4. 택함 받은 자에게 택함의 조건이 없음

여러분, 택함 받은 사람이 온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원하시고 함께 다니신 그 기생과 창기와 세리와 죄인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왜요, 그들을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시고 그리하여 그가 하나님의 기쁨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은 그 긍휼을 내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 10:1-4) 그러나 택함 받지 못한 바로의 백성에게는 물 벽을 무너뜨리셔서 수장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조건 불쌍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불쌍히 여김을 받으시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시지 못한다고 해서 나에게 기쁨의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로서는 기쁨의 요소가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셔서,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 때문에 아무 이유 없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할 때 교만하지 마십시오. 무조건 불쌍히 여겨서 그러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5. 동행은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주시는 은혜를 받는 것 

기뻐함이라는 말은 에녹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에녹이 나옵니다.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기록합니다. --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에녹은 죽임을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그가 무엇을 했나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다고 하는데, 동행을 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나요? 타락한 인류는 나무 뒤로 숨을 뿐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찾아와서 가죽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바로 동행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하고 도망치고 숨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괜찮다고 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행입니다. 우리가 어깨를 내밀고 가슴을 펴고 내가 여기 있사오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해 주시는 것입니다. 

6. 인간에게는 기쁨의 요소, 긍휼의 근거가 없음

놀라운 것입니다. 나에게 기쁨의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불쌍히 여기는 가운데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되면 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하여 헌신할 때 그것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불쌍히 여길 때 그에게서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를 기쁘게 해서 기뻐하는 것은 오히려 쉬이 사라집니다. 그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바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하신 본문 15절입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의 말씀입니다.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출애굽기 해당 장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내려올 때 아론과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시점입니다. 그 때 모세가 이 백성을 구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소서, 이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과 십계명을 베풀고 모세에게 빽빽한 여호와의 임재를 보이시는데 모세의 입이고 형인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어찌 하나님이 이것을 용서하십니까. 그러나 이곳에서 모세는 큰 종임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은총을 입었거든, 백성을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그 때 본문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겠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건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시지 않습니다. 무조건적 은혜와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그럴 때 기쁩니다. 

7.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쁨의 근원이 되심

자녀들이 말을 잘 들어서 그래서 부모가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상에도 있는 기쁨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하든 못하든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의 말씀처럼 무조건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그가 우리를 낳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본문 16절 --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내가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고 하지 않아도 불쌍히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닙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 그 자체가 공로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과거를 회개하며 일한다고 그것을 공로로 여겨 불쌍히 여김도 아닙니다. 달음박질 뜀박질이 아닙니다. 그저 불쌍히,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이 흘리시니 그 눈물입니다. 주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 눈물을 흘리시면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쁨의 근원이 되지 못하니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기쁨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기 자신을 주셨습니다.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이 때 예수님이 읽으신 말씀이 이사야서 61장 1절입니다. --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8. 아들로 기쁨의 근원이 되어 우리가 이에 참여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심

이 말씀이 이제 예수님께 임했다고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본 말씀은 1인칭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화자를 예수님이 자신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이후 2-3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2-3) 재 대신 화관을 씌워주신다고 했습니다. 기쁨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한다고 하십니다. 기쁨의 기름은 성령의 기름입니다. 찬송의 옷은 아주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사야는 글을 아주 잘 쓰는 사람입니다. 찬송의 옷으로 입혀주셨다고 표현합니다. 의의 나무는 여호와께서 심으신 영광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의의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나사렛 회당에서 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이 기이히 여긴 것입니다. 이 말씀의 화자를 자신으로 삼으셨으니 말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10:13) 하나님이 나누어주신 분량대로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은 대로 그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베풀어주신 그 분량대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려고 아들을 보내셔서 그 아들이 기쁨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우리가 그 기쁨에 참여하게 하시고 그 기쁨과 희락을 누리게 하시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롬 9:17)

9. 우리의 살아있는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있음

이제 가정의 달입니다. 우리 가정에 제 1 가훈이 이것입니다. "우리의 살아있는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 이 험난한 세상에 우리 자녀의 다리에 힘을 주셔서 옳은 곳으로 선한 곳으로 뛰어가게 하실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합니다. 자식에게도 부모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지 않는 자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긍휼로는 안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서, 내가 자녀를 불쌍히 여겨서 책임질 수 없습니다. 또 다시 우리가 세월호를 떠올립니다. 부모가 자식을 건져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자녀를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특히 이 시대에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더욱 필요합니다. 이 한반도에 모든 무기들이 먹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습니다.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소아시아에 네로의 박해가 임박할 때 주님의 긍휼이 필요하듯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우리 가정을 국가를 교회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할 뿐입니다. 어느 시대든 여호와의 긍휼을 구하고 가슴을 치는 그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이 건져주지 않았습니다. 미스바의 기도가 그렇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곧 나라가 없어질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하만이 궤계를 통해 이스라엘 종족을 멸망시키려 할 때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엘리야도 다윗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쫓겨 다녔습니다. 엘리야도 다윗도 기도했습니다. '여쭈어  가로되'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10. 여호와께 불쌍히 보이는 것으로 기뻐함

열심히 움직이는 내 발과 손이 불쌍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가 없이는 결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부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야 우리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고후 6:8b-10) 

어떻게 보면 이 말씀에서 항상 기뻐하는 자는 지금 근심하는 자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는 아무 것도 없는 자입니다. 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그 사람이 지금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그 때만이 은혜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할 때 실상은 아무것도 안 가진 자입니다. 내가 스스로 기쁘다고 할 때 실상은 기쁨이 없는 자입니다. 애통하는 자, 핍박을 당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무명한 것 같을 때 유명한 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할 때 부요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으로도 앗아갈 수 없는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여호와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면 세상 무엇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전쟁도 가난도 흉년도 근심도 고난도 끝이 납니다. 여호와의 불쌍히 여기심이 우리의 제 1 가치입니다. 그것 없이 스스로 선 줄 생각하면 안됩니다. 애통을 즐거워하십시오. 슬퍼하며 우는 것을 우리의 기쁨 됨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라는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불쌍하고 아무 것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울며 눈물로 씨를 뿌리는 그 때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 성도님들, 여호와께 불쌍히 보이십시오. 내 모습이 여호와 앞에 불쌍히 보이거든 그것으로 기뻐하십시오. 과연 그렇게 보일지 생각하십시오. 여호와는 내가 그 앞에 불쌍히 보인다는 인식을 하기 전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여호와가 우리 가정을 불쌍히 여기셔야 합니다. 다 이기고 지는 것 없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것 같으나, 무명한 것 같으나, 징계를 받는 것 같으나, 죄가 많은 것 같은, 그런 사람이 오히려 더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립니다. 뭔가 내가 잘못한 것이 있고 비난을 받는 것 같아도 그것이 복될 수 있습니다. 내가 비판할 때가 아니라 간음을 행한 여인처럼 비판 받을 때 복될 수 있습니다. 가정의 달에 우리의 기도가 '불쌍히 여기셔서 긍휼히 여기소서'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우리 가정의 산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