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07]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53)] 긍휼의 그릇 (롬9:19-2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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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7]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53)] 긍휼의 그릇 (롬9:19-2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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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녹취록>
1. 조건 없는 선택으로 자녀 삼아주심
주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긴다는 말씀을 지난 주에 보았습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에는 아무 질서가 없습니다. 조건도 이유도 근본도 시작도 없습니다. 그저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거지에게 길가는 사람이 불쌍히 여겨 동전 한 닢을 줘도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며 받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서 우리를 그 자녀로 삼으십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그 폭은 자녀 삼아주시는 데에까지입니다. 그저 동전 한 닢 주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동행하거나 물 한잔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를 삼아 준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사시사철 보호해주시며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무엇을 정해놓고 거기까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다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를 보면 네 가지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슬람, 유대인, 아르메니아, 그리고 기독교인 지역입니다. 기독교는 성지 개념이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예루살렘에 세계 4대 성지가 다 모여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기드론 시내가 있고 그 너머에 주를 위해 죽은 기독교인들의 묘지가 있고 예루살렘 십자가 가까운 곳에는 이방인들의 죽은 터가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그늘이 미치는데도 그쪽에 이슬람의 성지가 있고 유대인의 성지가 있는 것입니다. 아르메니아 교인들은 칼게톤 신경을 받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볼 때 동방에 점과 같이 존재하는 한국에서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만 생각해도 눈물이 나고 감사합니다. 물리적인 그늘이 아닌 은혜의 그늘을 입어서 십자가의 그늘 아래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입니다. 아무리 헤아려봐도 우리에게 조건이 없습니다. 조건 없는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무조건적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 무조건적 선택은 일 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 삼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신들이 사람을 불러 부리는 그런 선택이 아닙니다.
2. 십자가는 긍휼의 터
이처럼 우리에게 아무 조건이 없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고 우리가 부르기 전에 이미 우리 속에 감찰하시고 권면하시는 은혜를 받았는데, 이 긍휼의 터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이제는 지성소입니다. 성소 중의 성소입니다. 그곳이 시은좌, 은혜를 베푸는 자리입니다. 구약 성전 안에 있던 지성소, 시은좌가 이제 십자가로 된 것입니다. 단번에 영원히 자기 자신을 드리심으로 그 육체가 휘장이 되어서 휘장이 찢겨져 우리가 그 육체를 새로운 살 길로 삼게 된 것입니다. —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20)
새롭다는 말은 새 언약입니다. 이방인이 없습니다. 누구라도 믿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찢겨진 육체가 만세반석이 깨지는 길이 된 것입니다. 만세 반석이 어떻게 열립니까? 천년, 만년의 바위가 어찌 열립니까?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구원의 그 길을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제 6시로부터 제 9시까지 모든 어두움을 다 주님이 끌어 모으셨습니다. 죄의 모양, 형상, 의식, 고통, 책임, 멍에, 굴레 모두 끌어 모으셔서 그 몸으로 그 어두움을 친히 물리치신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예수님이 버림받는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 자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불쌍히 여김을 받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받게 하려고 그러지 못하는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이 외치는 소리는 주님만이 하십니다. 우리의 자리에서 버림 받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철저히 버림을 당한 것, 아버지의 버림을 받는 영적인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왜 아들을 버릴까요? 그것은 아들이 죽음과 저주의 자리에 나아감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3. 인간의 지혜와 변명이 쓸모없음
우리 주님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아무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주님은 강도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의 근원이 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에서 다 가져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에게 어떤 변명도 없습니다. 우리 입이 닫힙니다. '제가 이래서 못 믿겠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 가면 입이 닫힙니다. 변명은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인데,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다 없어지고 맙니다. 다 곁길로 가고 제각기 행했으므로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입을 다물 뿐입니다. 어떤 지혜도 그 앞에는 없습니다. 십자가가 지혜입니다. 십자가 앞에 가면 내 지혜와 변명이 없어집니다. 가진 것이 없어집니다. 내가 금이야 옥이야 붙들고 만지고 다듬어서 광을 낸 그것이 십자가 앞에 가면 다 없어집니다. 왜요, 십자가는 철저히 주님께서 모든 것을 가져가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홍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조금 하고 이루면 내가 한 줄 알지만 바다를 가르는데 어떤 말을 할 수 있나요? 십자가 앞에서도 그렇습니다. 변명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 우리가 가진 것이 십자가 앞에서는 없습니다.
4. 십자가 앞에서: 불쌍히 여겨 달라는 간구의 기도
주님이 모두 가져갔다는 그것 한 가지만 보이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는 탄식과 눈물만이 있습니다. 주님이 달리시던 십자가를 먼 곳에서 바라보던, 3년 동안 주님을 쫓아온 그 여인들처럼 말입니다.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한 가지,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뿐입니다. 나의 불쌍한 모습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간구만이 십자가 앞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는 기도로만 서는 것입니다. 나를 비우는 것으로만 서는 것입니다. 나의 것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 서지 못합니다. 내 지혜, 변명, 소유를 가지고 서지 못합니다. --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8) 이 말씀은 '천하고 멸시 받고 없는 것'들이 '있는 것’으로 됨을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가면 있는 게 없어집니다. 자랑, 교만, 학식, 소유, 의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나에게 없는 것, 내가 천하다고 여기는 것, 없다고 여기는 것,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그 자리에서 선 내 모습을 주님이 보아 주십니다.
5. 나의 없음으로 긍휼히 여기심
본문은 토기장이에게 진흙 한 덩이를 가지고 귀히 쓸 것과 천히 쓸 것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 가운데 예레미야 선지자를 생각합니다. 그는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밤새 눈물의 근원이 되고자 원했습니다. (렘 9:1) 자기가 욺으로 예루살렘이 울기를 원했습니다. 자기의 기쁨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통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는 모두 눈물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눈물의 근원이 되고 슬퍼하고 애통하며 웁니다. 그 때 물 댄 동산같이 기름지게 됩니다. (렘 31:12) 이 서울, 이태원이 기름지게 되는 것은 선지자의 눈물이 근원이 되어 불쌍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기도가 있을 때입니다. 나의 불쌍히 여겨달라는 마음과 그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에게 눈물이 나옵니다. 그 때 우리가 눈물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눈물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긍휼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긍휼은 내가 가진 것이 없어야 가능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풍족하면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심은 나의 없음으로 인합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는, 예레미야와 같은 그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밤새 기도하여 핍박 받고 미련한 자라 불림을 받고, 지는 자리에 서야, 그 모습으로 살아야 긍휼히 여김을 받아 눈물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다 누리고 어찌 눈물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까? 믿는 자들이 눈물의 근원이 되어야 이 땅이 기름질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의 눈물 샘이 마르면 이 도시가 박토가 되는 것입니다.
6. 주님이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심
주님이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셨습니다. 진노의 그릇이 아닌 긍휼의 그릇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릇은 무엇인가요? 내가 그릇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릇은 두 가지 색깔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로 그릇은 비워야 합니다. 채워진 그릇은 쓸모가 없습니다. 두 번째, 그릇은 채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채우지 않습니다. 우리가 긍휼의 그릇이라고 하면, 우리는 비워진 그릇인데, 거기에 하나님의 긍휼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다 채워져 있으면 무슨 긍휼이 그 그릇에 채워집니까? 꽉 찬 그릇에 무엇을 채우겠습니까? 우리를 스스로 그릇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거기에 긍휼을 다 채우십니다. 진노의 그릇은 타는 불이 담깁니다. 우리가 본래 진노의 그릇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진노의 그릇이었습니다. 유황불과 같이 불이 내려 타버려야 하는 존재인데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문벌 좋은 자, 지혜로운 자, 강한 자가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고전 1:26-28) 하나님 앞에는 지혜도 문벌도 강함도 없습니다. 그릇은 스스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세워짐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고전 4:7) 그릇입니다. 그릇은 그곳에 강정도 과일도 담습니다. 비워 있어야 합니다. 다 찬 그릇은 저리 가져갈 뿐입니다. 주인이 쓰는 그릇은 빈 그릇입니다. --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1) 고린도 교회는 서로 잘난 것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머리가 좋으니 파가 나뉘고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이 한 말입니다. 누가 스스로 자랑하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나에게 아무 자랑거리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7. 그릇에 담기는 것이 중요함 — 그리스도가 보화
오늘 말씀은 특별히 진흙 한 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금그릇도 은그릇도 목그릇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특별히 진흙 한 덩이로 세우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릇은 중요한 것이 그 재질보다는 무엇을 담느냐입니다. 무엇이 담기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릴 때 저희 집 앞에 시장이 있었고 그곳에 옹기집이 있었습니다. 옹기는 진흙으로 그릇을 만다는 것입니다. 장을 담는 장단지도 있습니다. 장단지는 크기가 커서 그것에 빠지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특히 똥장군이라는 그릇이 있었습니다. 국어사전에도 나오는데, 장군은 똥을 퍼서 나르는 용기를 말합니다. 주로 나무로 만들지만 옹기로도 만듭니다. 같은 질그릇인데 어떤 것은 음식을 담아 귀히 쓰고 어떤 것은 천히 쓰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분을 담아서 밭에 뿌리면 배추 등 작물이 훨씬 잘 큽니다. 중요한 것은 재질이 아니라 무엇을 담느냐입니다.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윗의 비파가 금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영혼의 음악을 담으니 비파야 수금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은으로 만들어졌습니까? 그것은 그냥 목부의 지팡이일 뿐입니다. 무엇을 담느냐,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있는 말씀을 담으니 지팡이가 권능이 있습니다. 무엇을 담느냐, 우리 주님이 준마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않으셨습니다.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오셨습니다. 누가 올라 타시느냐가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담느냐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신 곳이 바로 말구유입니다. 말구유가 고전적이고 낭만적으로 느껴지나요? 말구유는 더러운 곳입니다. 물론 주인이 깨끗이 청소하면 괜찮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무슨 소리를, 약속 있는 권능의 말씀을 담느냐가 중요합니다. 말구유가 주님을 담는 통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귀히 쓰는 그릇도 천히 쓰는 그릇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에 무엇이 담기느냐입니다. 같은 토기로 만들었지만, 어떤 토기로 쓰느냐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질그릇이 흙으로 만든 그릇인데 그것에 보화를 담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보화입니다. 우리는 다 질그릇 같은데 그 안에 그리스도를 담은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인종도 신분도 나라도 없습니다. 그래서 평등, 박애, 자애를 이야기합니다. 국경도 없습니다. 저는 다른 것은 모르나 그래서 트럼프를 싫어합니다. 워싱턴, 제퍼슨 이후로 미국에서 이어져 내려온 기독교 정신을 가장 박해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도 정치하게 하는 법을 만든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사람이 넘어오지 않게 장막을 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미국이 아닌 3류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이 그래도 하나님이 지금까지 보호해 주셔서 불쌍한 나라를 돕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아프리카를 구호하고 멕시코 사람들을 받아 주었기 때문에 복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짐승의 길도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찌 사람의 길을 막습니까? 그것이 미국이 아닙니다. 멕시코 인들을 미국 사람들이 다 사용해 온 것입니다.
8. 성도는 긍휼의 그릇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기독교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불쌍히 여겨주신 것인지, 그 은혜와 감사로 살아야지 그것이 없으면 아닙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밑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계시니 그를 믿고 산다는 것이 없어지면 안됩니다. 기독교인들은 너무 정치적인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긍휼과 불쌍히 여기는 것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그 외에는 생각할 것 없습니다. 가난하면 먹여주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주고 외로운 자는 동행하고 아픈 자에게는 문안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는 어부요, 첫 번째로 낙원에 들어감을 받은 자는 십자가의 강도요, 부활을 첫 증인은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여기에 구원의, 긍휼의 원리가 있습니다. 흉악한 죄를 지은 강도가 첫 번째 낙원에 있으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호와의 불쌍히 여기심이 우리 가정의 산 소망이라고 지난 주에도 나눴습니다. 우리는 모두 긍휼의 그릇입니다. 비우고 불쌍히 여겨주심을 구하십시오. 나를 비우지 않고 내 지혜, 신분, 재력, 학식으로 나서니 하나님이 채워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는 긍휼히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9. 빈 그릇에 신령하고 의롭고 거룩한 것으로 채우심
큰 일은 큰 데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큰 일은 애통하는 데에서 일어납니다. 기도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기적은 오병이어, 소자가 가져온 볼품없는 것에서 일어납니다. 기적은 만삭되지 못한 나와 같은 자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에게서 일어납니다. 긍휼의 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릇은 비워야 됩니다. 차 있는 그릇은 저리 가져가라고 합니다. 비어 있는 그릇을 찾습니다. 비우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을 그릇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비울 때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신령하고 의롭고 거룩한, 영원히 마르지 않는 것, 하늘에 속한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남는다고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더 비우시기를 바랍니다. 비울 때 기적이, 채움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주여 나를 비워주소서 하고 기도하십시오. 종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종이 한 장의 폭도 안됩니다. 그러니 채워달라고 간구합니다. 눈물의 근원이 되어야 물 댄 동산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집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눈물의 근원이 되어야 집안이 물 댄 동산 같이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 두 가지가 본문을 보면서 많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기쁨이 아닌 눈물의 근원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결국 그것이 기쁨이 되겠지만 말입니다. 눈물은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내 속의 것을 다 끄집어 비워내는 것입니다. 마지막 것까지 다 비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가정, 사회, 국가가 물 댄 동산 같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20170507]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53)] 긍휼의 그릇 (롬9:19-2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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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