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21]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55)] 믿음에서 난 의 (롬9:30-3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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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1]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55)] 믿음에서 난 의 (롬9:30-3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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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녹취록>
1. 백성이 아닌 자를 백성으로 부르심
지난 주까지 본 말씀은 특별히 로마서 9장부터는 무조건적인 은혜로 설명되는 선택의 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조건입니다. 티끌 만큼이라도 우리 쪽에 조건이 없습니다.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음의 가정에 났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이 창세 전에 택하셨기 때문에, 진노의 그릇이 아닌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30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조건이 없으므로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것을 놓고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갈라진 바다 사이를 열심히 걸었다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겠습니까. 여리고가 무너진 것을 놓고 여리고를 열심히 돌았기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적인 은혜, 오직 은헤, 오직 긍휼 뿐입니다. 그저 불쌍히 여기심 밖에 없으므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잠잠히 여호와를 감사하고 송축하고 앙망하고 그의 행사를 기뻐하고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알 수 없는 은혜, 구원, 선택의 비밀 앞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장 25절에는 그러므로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으로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긍휼을 받지 못할, 사랑 받지 못할 자를 긍휼 받고 사랑 받을 자로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8장 30절은 ‘그가 우리를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그리고 영화롭게 하시는 그것이 모두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2절은 ‘아들을 주신 이가 모든 것을 함께 주시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우리 측에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고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주셔서 우리를 의롭다 하고 거룩하다 하고 영화롭다 하시므로 '우리가 이 일에 대해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이방인의 구원은 믿음으로 난 의로 인함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은밀한 예정은 어떤 명분과 인과관계도 그 앞에 세울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믿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교회에 나오게 된 조건을 말할 수 없습니다. 선택에 내 능력을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었던 백성이고 우리의 죄와 허물이 이미 사망에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명분도 어떤 인과관계도, 내 능력도 변명도 없습니다.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죄가 많아도 하나님의 선택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공로가 많다고 자랑해도 하나님의 택하지 아니하심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리 이 땅에서 착한 일을 많이 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한 것은 어떤 조건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어떠해서 사랑하셨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에서에 대해 반대로 말해도 안됩니다. 에서의 직업이 어떠해서 하나님이 미워했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그저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셨다고 말할 뿐입니다. 우리는 무조건적 사랑을 받았습니다. 의도, 구원도, 천국도, 영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백성입니다. 이런 것들을 잘 알아서 연구해서 교회에 가면 이것들을 얻겠다라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의, 생명, 언약, 거룩, 영생에 대해 무지한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다 이방인들입니다. 본문 30절은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라고 합니다. 이 의는 '오직 믿음에서 난 의'라고 본문 32절이 말씀합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것은 믿음으로 난 의로 인함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3. 믿음에는 공로가 없다
믿음이 무엇인가요? 믿음은 실체가 아닙니다. 믿음 없이 구원에 이를 수 없지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숟가락 없이 밥을 먹을 수 없지만 숟가락으로 배가 부른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공로는 아닙니다. 현미경이 없이 세포를 볼 수 없지만, 현미경이 세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볼 수 없고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믿음이 하나님을 있게 하고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어릴 때 징검다리가 겨울에 놓여 있으면 담이 큰 아이들은 그것을 뛰어 넘어다닙니다. 소심한 친구들은 그러나 그렇지 못합니다. 달리기도 잘하는 이런 아이들은 그 징검다리를 잘 건넙니다. 그런데 주저하는 아이는 건너다가 물에 빠지기도 합니다. 징검다리는 빨리 건너야 하거든요. 그러면 왜 어떤 아이들은 징검다리를 빨리 건너고 어떤 아이들은 그렇지 않나요. 징검다리를 빨리 건너는 아이가 징검다리를 놓았기 때문에요? 아닙니다. 믿음은 징검다리를 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우리에게 어떤 공로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난 의'라는 말은 믿음이 의를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의를 의답게 했다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와 유리를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은 모조품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를 구별하고 취한다고 해서 다이아몬드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믿음 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의를 받는 것은 믿기 때문인데, 하지만 믿음이 의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이 믿음조차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공로라고 하는 사람들은 내 믿음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심리학자가 하는 말입니다. 내가 된다고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기암시, 마음을 움직여 물질을 움직이는 염력이나 독심술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공로가 있다고 합니다. '잘되는 나'라는 책이 한때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많이 팔렸습니다. 그 내용이 뭡니까. 눈을 응시하고 사물을 바라보면서 된다고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교에서 하는 말입니다. 일체유심조라는 불교의 교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된다고 해서 된다면 내 마음에 공로가 있습니다. 개울에 섬돌이 놓여 있을 때 건너는 것은 섬돌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에는 어떤 공로도 없습니다.
4. 거치는 바위 예수 그리스도: 다 이루신 의
오직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그 믿음으로 우리는 의를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 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의입니다. 본문 32, 33절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부딪힐 돌’,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진리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거치는 바위가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제물, 공로로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오직 그를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하니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시온 성전이 아닌 시온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성전에서 제사와 제물을 드리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32절에는 부딪칠 돌에 부딪쳤다고 표현됩니다.
의식주의는 무서운 것입니다. 의식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아무 공로 없이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른다는 그 도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창기와 부정한 여인들, 율법에 따르면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는 자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나를 보는 자가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5. 은혜(믿음)와 율법
뭔가 더 열심히 율법을 지키자고 하면 핍박할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힘든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대로 살기가 힘듭니다. 은혜대로 살려고 할 때 율법대로 산다고 하는 자가 대적합니다. 은혜대로 사는 것이 쉽고 율법을 쫓아 살기가 어려울 것 같지만 반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의의 법을 따라갔습니다. 이 때 의는 '자기 의' 입니다. 의식과 형식입니다. 때 돼서 제사드리고 금식하고 온갖 흉내를 내고 소리를 내는 것이 전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 의식입니다. 시장에서 괜히 기도를 하고 중얼거립니다. 옷술을 들어 내가 율법을 잘 지킨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합니다. 의식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큰 적입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의 의식을 따르고 동방정교의 의식을 따르고 우상숭배하던 자들과 종교개혁 하는 자들이 부딪친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릅니다. 잘 누리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아멘’하고 감사하고 내 것은 없다고 하고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자가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는 것입니다.
6. 이방인에게 베푸신 믿음으로 난 의
우리는 다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은 나라 밖의 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방인은 첫째로 성전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전 안에는 이스라엘 사람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면 이방인이 들어갈 수 있는 마지막 장소를 의미합니다.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예배와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두번째로, 율법 바깥에 있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없는 자,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입니다. 세번째로 약속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을 가지고 있는 언약의 후손인데 이방인들은 약속이 없습니다. 예배 드릴 수 없고 말씀 들을 수 없고 약속이 없는 자가 바로 우리였습니다. 그저 이 땅에 와서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물 위에 뜬 부초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전혀 생명 없이 회오하고 절망하고 회의하고 의심하고 한탄할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찌들리고 소망 없는 백성이 바로 이방인입니다. 무엇 하나 뿌리내릴 곳이 없고 이 세상은 철저히 썩어 있어서 의지할 곳 하나 없습니다.
그 이방인에게 이제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의를 주시는데 그 의는 행위, 공로, 의식의 의가 아닌, 믿음으로 난 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아말렉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칼을 들고 잔인한 아말렉과 같은 야만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다 메소포타미아 강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다 피부가 다른, 셈 족속에 속하지 못하는 함이었습니다. 우리는 헬라요 로마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핍박하던 사울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굳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아도 심정적으로 핍박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순교의 피가 뿌린 나라입니다. 우리는 다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자들의 후손입니다. 몇 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믿는 조상도 있지만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조상입니다. 교회에 화염병을 던지고 핍박을 하던 인도네시아,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의 목을 가족들 보는 가운데 자르던 터키인들이 우리였습니다. 요새 탈레반이나 IS나,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런 사람들이 있을까 하지만, 우리가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말렉이요, 바벨론이요, 스데반에게 돌을 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방인들을 바로 믿음으로 난 의, 믿음에서 난 의로 구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부족한 종도 교회를 향하여 비난하고 핍박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는 커녕 여호와를 믿는 친구들을 비난했습니다. 끝없이 작은 책 한권 읽고 토론하자고 해서 끝없이 부정하는 자리에 섰습니다. 굳이 사울과 같이 잡으려고 나서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는 다 두면 예수 그리스도가 걸리는 돌이 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방인인 우리를 기생 라합을 구원하듯 구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우연히 정탐꾼들을 영접해서 붉은 줄을 내리므로 여리고가 다 멸망할 때 그와 그 가족만이 살아 남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기생 라합이 내린 붉은 줄 조차도 내린 적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한 적이 없습니다. 기생 라합이 창 너머로 내린 붉은 줄이 기생 라합의 가족을 살렸듯, 십자가의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붉은 줄이 이제는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만 붙잡고 있으면 죽음이 유월되는 지나가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도 마태복음 1장에 이름이 기생 라합과 같이 올라가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7. 본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이스라엘의 구약 백성들은 율법으로 구원을 얻었을까요? 그들이 바로 그것을 착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히브리 백성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물을 건너왔습니다. 히브리인이 바로 그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고 나왔을 때 창세기 15장 6절은 아브라함이 믿으니 하나님이 이를 의로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선민이 시작된 아브라함, 구약의 백성의 시작이 믿음임을 이스라엘 백성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에 이르는 새로운 도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본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불평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은 전쟁도 지고 고난당하고 가뭄에 허덕이게 하면서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은 승승장구하게 하시냐고 말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하박국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 때 하박국이 두 번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이 두 번 다하신 것을 듣고 답을 얻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것 너머에 믿음이 있습니다. 감람나무 소출이 없고 외양간 우리에 송아지와 양이 없어도 여호와를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고 합니다. 어떻게요? 믿음으로 입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구약 사람들도 제대로 하나님을 믿었다면 율법의 공로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음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것이 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앗수르, 바벨론이 쳐들어오면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그 신앙을 버리고 탈무드니 미쉬나니 하면서 온갖 법을 만들어 장로의 유전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그들의 의식을 믿은 것입니다.
8. 구약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
이런 잘못된 신앙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이것을 타파하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시고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지 못한다”고 이 땅에 오셔서 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말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요, 이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의를 우리 것으로 삼는 도구가 됩니다. 이 믿음은 현미경이요 숟가락입니다. 이 믿음의 숟가락이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 밥을 퍼 먹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공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믿었습니다. 붉은 줄, 유월절 어린양, 초막절, 초실절, 장막절,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바라고 믿은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믿은 것입니다. 모든 구약의 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빻아서 십자가에서 소제로 드리고 물과 피를 부어 전제로 드렸습니다. 나무에 걸려 거제로 드린 바 되시고 몸을 떨고 이를 떨면서 요제로 드린 바 되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번제로 드린 바 되신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것, 제사도 절기도 언약도 모두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잘 아셔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은 자들의 신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난 의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9. 은혜가 믿음을 이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내 믿음을 이야기하기보다 은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은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내 믿음에 따라 의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현미경을 고배율로 관찰해도 세포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숟가락으로 퍼도 밥은 밥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은혜를 바꾼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은혜는 이미 다 놓여진 징검다리 돌과 같습니다. 그것을 누리는 것이 문제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부족해서 이 시대에 새로운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이야기 같아도 먼저 다 이룬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 충분히 넘치도록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내 믿음으로 달리기 하듯 신앙생활 하지 마십시오. 은혜는 도망치고 믿음은 따라가서 잡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호와를 인정하고 내 마음에 시인하고 고백하면 그 여호와의 은혜가 우리의 믿음을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은혜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다 이루신 의가 우리의 믿음을 이끌어 갑니다. 태양을 바라보게 하는 것은 태양의 빛입니다. 밤에 우리가 아무리 연구해도 태양을 볼 수 없습니다. 태양을 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이미 떠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누리는 것은 이미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찾아가서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을 바라보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이끌기 때문인 것처럼 은혜를 누리는 것은 은혜가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밤새 내가 연구해서 내가 노력해서 몸부림친다고 해서 태양이 빨리 뜨지 않습니다. 의의 광선이 생명의 빛이 우리를 이끌기 때문에 잠자던 우리가 깨어나서 그 빛으로 나아갑니다. 그 움직임이 믿음입니다.
은혜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부족한 종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은혜 밖에 없습니다. 그 때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있어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해가 낮에 뜬다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빛이 없다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해가 없으면 밝음이 없다는 것은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인간이 밤새 할 수 있는 것은 해가 뜨는 것을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오직 은혜의 법입니다. ‘오직 믿음의 법' (롬 3:27) 은혜로 끌려가는 것이 믿음의 법입니다. 저는 기생 라합이 의지적으로 붉은 줄을 창 밖으로 내걸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그를 창세 전에 택하셔서 은혜 가운데 그 마음을 변하게 하시고 여리고성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던 마음을 줌으로 그 줄을 내린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은혜를 얘기하면 다 찬송할 것 같지요? 희한합니다. 은혜를 이야기하면 오히려 돌로 치려고 합니다. 본문 33절 말씀입니다. —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이사야 28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희한합니다. 아무 것도 안해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 업신여깁니다. 아무 것도 안해도 구원하겠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의식과 형식이 죽인 것입니다. 은혜에 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선을 교회에서 행할 때, 아무 것도 안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 때 왜 핍박이 옵니까?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잘못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종교개혁자들이 뭘 잘못했습니까?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왜 죽입니까? 세상은 참으로 야박한 인과관계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적 은혜를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은혜의 질서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직 은혜의 법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믿음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은혜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해가 떠야 움직이지 내가 해를 부를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해가 일초라도 빨리 뜹니까. 은혜가 휘영청 우리 방 안에 가정에 넘쳐야 우리가 안일어나려고 해도 일어나집니다. 그래서 그 해를 누리고 즐깁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은혜가 믿음에 앞선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종교개혁의 특별히 개혁신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알미니안과 루터조차도 믿음이 은혜를 끌고 온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은혜가 믿음을 이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개혁신학입니다. 설교 때 개혁신학 등의 말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만,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으로 특별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그곳입니다. 우리가 오직 은혜, 전적인 은혜로 믿는 것입니다.
[20170521]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55)] 믿음에서 난 의 (롬9:30-3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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