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25]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60)] 순종하며 누리는 백성 (롬10:18-21) 문병호 목사
조회수 165
[20170625]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60)] 순종하며 누리는 백성 (롬10:18-21)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클릭하셔서 다운로드 하시면 됩니다.)
(롬 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롬 10: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롬 10: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롬 10: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녹취록>
1. 인간의 창조 목적: 말씀을 감동하여 말씀을 듣게 하는 것
지난 주 '보내심을 받지 않으면 전파하는 자가 없고 전파하는 자의 전파함이 없으면 들음이 없고 믿음이 없으면 주를 부름이 없고 주를 부름이 없으면 구원이 없다’는 구원의 도에 대해 배웠습니다. 전파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아름다운 발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내가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전하는 것입니다. 귀가 열리고 말하는 것이 분명히 될 때 하는 것이지, 소명을 받아 전하는 것이지 그저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보내심이 있어도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있어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감동하여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류를 지으셔서 우리 인류와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의 말씀을 듣고 우리도 말하고 듣는 것, 그것이 신령한 대화입니다. 믿음의 일꾼들은 다 이 신령한 대화에 깨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듯이 보았다고 성경이 기록합니다. 다윗 등 모든 다른 인물도 여호와께 '듣고 여쭸다'고 합니다. 듣지 않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선진, 일꾼, 초대교회 사도들이 모두 말씀을 듣고 전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의 통로가 열려 있고 방법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믿음의 일꾼들입니다.
2. 하나님과 인간의 신령한 대화: 예배와 기도
하나님은 인류와 인격적인 대화를 하기 원하셔서 인류에게 지, 정, 의를 주셔서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그 기능을 하는 영혼을 주시고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 육체를 주셨습니다. 지식을 주셨으므로 각양의 것을 구분하고 동물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감정이 있었으므로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산 실과의 과일의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담이 처음 하와를 만났을 때 한 고백,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것은 최초의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서, 감정이 있었으므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감정의 동물로 인간을 지은 것입니다. 유발이 수금과 퉁소를 만들었는데 이 악기가 있기 전에 먼저 노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노래하는 존재로서 인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유 의지를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할 뿐 아니라 다스리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을 인식하고 느끼고 즐거워하고 그 뜻에 순종하게 할 수 있는 지, 정, 의를 주셨습니다. 광의의 개념으로 이것이 모두 하나님과 사람의 신령한 대화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 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대화가 오늘 예배와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대화가 바로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신령한 대화입니다. 그리고 그 대화의 절정이 찬양입니다. 내 마음에 고요히 흐르는 영적 찬미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인류가 하나님과 온전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부부 간의 대화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보기 안좋기 때문에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부모의 품을 떠나 한 가정을 이루는 결혼의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부부 간의 대화가 얼마나 친밀했던지 벌거벗었으나 서로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의 대화가 여호와를 높이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가운데 있으므로 부끄럽고 수치스럽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남녀가 벌거벗을 때는 수치스럽습니다. 부부 간의 대화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높이고 찬미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을 이루신 목적입니다. 우리 가정의 대화가 하나님을 높이는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교회를 귀하게 여기는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감사한 것은 어려움이 있을수록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습관이 생긴 것입니다. 덜 좌지우지 우왕좌왕하고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게 하는 습관이 생김에 감사드립니다. 어렵고 힘든 것 같은데 더 하나님 앞에서 뚜렷해지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조금씩 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가정에 모든 것이 원만해 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대화가 가정으로 확산될 때 입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교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대화는 좋지 않습니다. 특히 가정에서 목회자를 험담하거나 하는 것은 결코 좋지 않습니다. 특히 자녀들 보는 가운데서 말입니다. 이런 가정의 대화를 틈타서 사탄이 들어온 것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을 만지지도 하는 것으로 거짓말하고 왜곡했습니다. 이 유혹에 빠져 아담도 하와도 거짓말하고 가인도 아벨도 거짓말하고 원망하고 나무 뒤로 숨고 변명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거짓과 유혹과 변명과 원망의 말이 들어오고 그 말로 서로 협잡해서 여호와를 대적하기 위한 바벨탑을 쌓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대화가 타락하니 바벨탑에서 모여 한 언어 가운데 서로 협잡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3. 죄: 대화의 단절
지구라트 등 고대의 유적을 보면 인간은 누구나 높아 쌓아보고자 하는 염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교만한 언어를 하나님이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언어, 이스라엘 인 중 하나인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히브리 언어를 주시고 그것을 가지고 구약을 기록하는, 거룩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예배를 드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히브리어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구약의 일꾼들을 여러 모로 설명할 수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이고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빽빽한 구름, 여호와의 임재, 이것이 모두 다 대화입니다. 구름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긴밀한 하나님과의 교통을 빽빽한 구름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왕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바로 대리통치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깨지니 사사기가 되는 것입니다. 각자의 소견대로 행하게 된 것입니다. 소견대로라고 함은 듣지 않는 것, 대화가 단절된 것입니다. 대화가 단절되니 각자 좋은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제사나 절기나 언약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대화를 위한 것입니다. 상번제는 매일 드리는 제사인데 매일마다, 또 절기를 지켜 절기때마다 끊임없이 여호와와 대화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지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가 들어오니 성전에서 온전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산당을 세워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단절하고 창기들과 더불어 놀고 이방 신상을 세우고 그 성전 밑에서 아이들을 불살라 죽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여호와와의 대화 단절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되면 이방의 버릇이 나타납니다. 음란해지고 주렁주렁 달게 되고 외식하고 외식주의에 빠집니다. 우리 교회에 어떤 것도 붙이고 형상을 세우지 않지만 말씀의 소통의 있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온갖 것들을 세우고 달게 됩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었음
본문은 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선포되었으나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땅끝까지 그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도 그들이 듣지 않은 것입니다. (시 19:1-4) 잘 알아야 할 것은, 여호와의 말씀은 모든 민족, 국가에게 미쳤다는 것입니다. 일반계시를 통해 모든 민족에게 선포됩니다. 은혜가 없어서 구원받지 못한것이지 계시가 미치지 못했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반계시로도 떨어졌습니다. 낮이 낮에게 밤이 밤에게 말했습니다. 언어도 없고 말하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와 말씀이 온 땅에 통하고 세상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눈부신 영광의 극장, 피조물을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로마서 1장 20절은 능력과 신성이 만물에 분명히 알려져서 핑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양심을 주셨다고 합니다. 일차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을 알 만한 지식, 양심을 주신 것입니다. 종교의 씨앗을 주시고 그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언어로 기록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롬 3:2)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모든 지식 가운데 언어로도 히브리어를 주셔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했다는 것입니다. --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7-8)
5.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던 나라에 자신을 나타내심
이럼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베푸시고 말씀을 들리우게 하셨는데 그들이 듣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들으므로 이스라엘이 큰 나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도할 때마다 들어주시고 율례와 규례와 법도를 베푸신다고 합니다. 나라가 크다고, 백성이 많다고 큰 나라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새기고 듣고 그대로 기도해서 들어주시는 나라가 큰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시고 다른 백성을 취하겠다고 하십니다. 본문 19절입니다. 백성 아닌 자, 히브리인 아닌 자들, 말씀도 없고 여호와를 모르는 미련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서 이스라엘 인들이 시기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백성 아닌 백성, 곧 이방인들을 세우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신 32:21)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아닌 것으로 여호와의 질투를 일으켰습니다. 허무한 것으로 진노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니 여호와께서 그의 것 아닌 것으로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말씀을 듣지 않았을 때 나도 백성이 아닌 백성을 택해서 너희들로 시기가 나게 하고 분노가 나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소통의 백성을 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세우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 22절입니다. 이사야 65장 1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1) 모든 구약 성경을 히브리어로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에게 묻지도 찾지도 않으니 하나님도 하나님의 백성 아닌 백성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들이 물을 때 응답하고 찾을 때 나타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말씀이 헬라어, 즉 그리스어로 기록됩니다.
6. 잠잠함과 기도와 말씀과 찬양으로 여호와와 소통
요새 소통이다 불통이라는 말이 많이 회자됩니다. 우리가 사람 사이에서도 소통은 중요합니다. 잘 소통되면 왠만한 일은 해결됩니다. 너무 악화되기 전에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통되지 않으면 극단적으로 가게 되고 큰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 날 텔레비전을 보면 토크쇼니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영국도 가보니 토크쇼는 아니어도 대화를 즐기는 문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많은데 진정한 소통은 없습니다. 진정성이 없고 보여주기를 위한 것인데 궁극적인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말하기가 두렵습니다. 말을 하면 든든해야 하는데 댓글이니 뭐니 해서 스승이 제자 만나기고 힘든 세상입니다. 대화가 없는 시대, 대화를 기대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만나기가 겁납니다. 소원하던 것도 만나면 풀려야 하는데 소통이 잘 안됩니다. 사실상 하나님 앞에 침묵도 소통의 침묵이 되어야지 단절의 침묵이 되면 안됩니다. 소통을 위한 침묵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절을 위한 침묵은 안됩니다. 홍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잠잠하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잠잠할 때 가장 은밀한 소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외치는 것도 잠잠한 것도 모두 소통의 일환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대화하고 담화하는 것이 많지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소통은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여호와에게서 숨게 됩니다. 높아진 담을 주님이 오셔서 허무시고 다시금 보혜사 성령, 속삭이고 대언하고 중보하고 위로하는 영을 받아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 가운데 위로받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소망으로 삼았고 그것을 우리가 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최후의 가능성으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내가 단절하고 아무도 내 말 듣는 자가 없고 내가 스스로 문을 닫는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소통이 중요한데 하나님과 소통할 때 그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기술은 그를 이해해주고 그의 바램을 이해해주고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것으로서 소통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기다리노니’ 하시면서 먼저 문을 두드리십니다. —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롬 10:21)
하나님이 손을 벌리셨다는 것은 많은 경우 복수하시기 위함이지만 이곳에서는 소통하기 위함입니다. 예레미야 7장과 11장을 보면, 여호와는 우리를 부지런히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으니 유다가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며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표현하고 지식으로 인식하고 정서적으로 느끼고 의지적으로 순종하는 백성으로 세움 받았습니다. 여호와와 소통하십시오. 기도와 말씀과 찬양으로 하십시오. 소통의 공간을 늘려 가십시오. 직장에도 집에도 성경 꽂아 놓고 소통하십시오. 찬송 틀어 놓으시고 설교 틀어 놓으십시오. 말씀 들으면서 소통하는 영역과 시간을 늘이십시오. 꽃이 피는 것도 소통이요, 물고기가 몸을 뒤틀면서 힘차게 움직이는 것도 자연의 소통입니다. 우리 인생은 여호와와 소통해야 힘이 있습니다. 말씀 듣고 기도하고 고백하고 찬송할 때 힘이 있습니다.
주일만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삶이 소통이고 예배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복받은 사람입니다. 가르친 것을 고백하고 고백한 것을 또 가르치니 얼마나 복받은 사람입니까. 그렇게 하여 여호와의 빽빽한 임재 가운데 있을 때 담대함이 있고 이김도 있고 하나님 섬길 뿐 아니라 세상의 일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말씀과 예배의 소통의 분위기가 만연해야 합니다. 가정의 소통, 화목도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새 하늘 새 땅에 가면 완전한 소통을 할 텐데 이 땅에서 소통의 맛을 미리 보는 모든 성도들되기를 축언합니다.
[20170625]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60)] 순종하며 누리는 백성 (롬10:18-21)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클릭하셔서 다운로드 하시면 됩니다.)
<녹취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