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02]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61)]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심 (롬11:1-4)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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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2]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61)]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심 (롬11:1-4)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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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롬 11:2)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롬 11:3)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롬 11:4)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녹취록>



1.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셨다고, 지난 주 까지 말씀을 보았지만, 하나님은 또한 자기에게 묻고, 찾지 아니한 자들을 찾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역하니, 그렇게 사랑했던 그 백성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방인들을 택하여 세우시고, 새로운 백성을 조성하시고 만국에서 그의 백성을 모으셨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는 질문에 본문 1절은 아니라고 말합니다.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통한 언약의 후손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도 아브라함의 씨에서 났고 베냐민 지파라고, 곧 자신도 유대인인데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버리셨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2절 역시 하나님이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신다고 합니다. 한번 택하신 백성은 비록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돌보십니다. 버리지 않으십니다. 없는 듯 하고 무너진 듯, 사라진 듯 하지만 다시금 일으켜 세우시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의 해를 선포하고 연약한 자에게 강함을 소외된 자에게 빛을 주시고, 많은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셔 구원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는 말씀은 세례 요한이 길을 예비하고 예수님이 이제 이 말씀을 이루시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심으로 회개하면 천국이 자기 것이 되는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신 그 분이 바로 죄를 사하시는 분입니다. 회개가 무엇인가요, 죄를 뉘우치고 내어놓으면 사함을 받아야 되는데, 그 죄 사하는 권세가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고치면서 병을 낫게 하실 뿐 아니라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두 가지 큰 일을 하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셨고 사람을 제자로 세우고 자기 일을 맡기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은 구원에 이르는 그 생명의 역사를 이루신 것이요, 사람을 세우시는 것은 이제 복음의 종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상급을 받는 그 자리에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시고 그 백성을 자기의 일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에게만 맡기는 고유한 일이 있습니다. 형제에게만 맡기는 일도 있습니다. 아무리 자녀를 못 믿어도 옆집의 학생보다는 자녀를 믿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비밀도 있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면 자녀로 살리시는 것이기 때문에 자녀로서 합당한 일을 아비로서 맡기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한 일입니다.

2. 영원한 생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것

온 인류가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형벌 가운데 거하여서 어둠에서 신음하고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이 물질적으로 현상적으로 내리지 않지만 누구나 죄 가운데 있으면 다 그 열 가지 재앙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박을 맞고 어둠과 피에 거하고 이와 개구리와 파리가 들끓는 것입니다. 이 재앙은 거듭나지 못한 모든 사람이 겪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물리적으로 그러지 않을지라도 영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의 상태입니다. 태양을 떠나면 얼어 죽듯이 말입니다. 지구가 2도가 올라가면 큰 일이 난다고 합니다. 태양으로부터 조금만 멀어져도 우리는 그저 빙하기를 맞게 됩니다. 모든 생명이 멸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확한 이 위치에 지구를 두셨기에 사시사철을 가지고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태양의 빛이 지구에 8분만에 도착합니다. 엄청나게 먼 거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거리가 조금만 더 멀거나 가까워져도 큰 재앙이 닥칩니다. 죽음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태양을 떠날 때 얼어 죽는다면, 하나님을 떠난다면 무정한 사람, 사랑 받지 못하는 백성이 되어 온갖 재앙을 겪고,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말만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막연히 생각하지만, 두려워하기만 하는 것이 거듭나지 못한 백성의 모습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이 온전하지 않습니다. 만물에게 영장권을 주었지만, 인류는 기껏 수고해도 짐승이 다 먹어버리고 가뭄이 가져가 버립니다. 허리가 굽도록 일을 해도 가시덩굴이 납니다. 비참한 상태에 놓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상태, 죄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먼저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진정 무엇을 위해 사는지, 그것을 예수님을 만나면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된 사마리아 여인, 니고데모, 삭개오와 같이 말입니다. 

인생은 그저 부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매주 새벽마다 이태원 이 거리를 오지만 초췌한 모습으로 택시를 잡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대체로 이 지역이 유흥하고 방황하고 끝없는 쾌락을 쫓고자 하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즐거움은커녕 허탈함만 남습니다. 밤이 계속될 것 같아도 태양이 뜨면 새로운 날을 준비해야 하는데 허탈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을 다시금 도입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 도입했는데 그 생명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다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가까이함으로 말미암아 두더쥐와 같이 멀어진 눈을 하나님의 영적인 눈을 보아 영안을 뜨게 되고 몸이 깨끗하게 되는 것이 생명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입니다.

3. 남은 자를 두시고 일꾼을 세우심

그리고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제자들, 그의 일꾼을 세운 것입니다. 세울 수 없는 가운데서도 전적인 은혜를 베푸셔서 일꾼을 세우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시대에, 말라기 이후 묵시도 계시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없는 시대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길을 예비하고 예수님이 생명을 살리사 그들에게 할 일을 주셨습니다.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구약시대 때 선지자, 제사장, 왕이 아닌 제자를 세우고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도 제자로 세우셨습니다. 요한, 야고보, 베드로는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동안 졸고 있었지만, 그들도 끝내 순교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버린 사람들도 우리 주님이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일꾼 삼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두십니다. 다 사라지는 것 같아도 홀씨가 남아서 사방 지천으로 들꽃이 피듯 말입니다. 없어진 것과 같은 때 오히려 더 홀씨가 멀리 퍼집니다. 짐승에게 먹히면 더 멀리 가서 퍼집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많은 꽃이 피어 있는데, 미국에서 침목 재료에 하나 딸려온 게 개망초입니다. 그 한 홀씨가 들어와서 들에 번성하여 피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홀씨를 남겨두시고 그로 말미암아 도 번성하게 하고 그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은 사람을 도구로 삼으셔서 영광을 받으시고 자신의 일을 이루시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우리 믿는 사람들을 미련하다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왜 미련하냐,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쫓아다니니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슨 힘과 권능이 있느냐, 자기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자를 쫓아다니니 참 미련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주 쯤 되면 바람도 불게 하고 비도 내리게 해야 할 텐데, 그 예수는 누구냐는 말입니다. 심문 당하고 모욕당하고 십자가에서 다 쏟고 강도와 같이 죽어간 예수를 믿으니 참 미련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미련함은 그것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만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그것을 전하고 있으니 더욱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그 미련함을 보인 극단적인 인물이 바로 바울입니다. 유대인들이 봤을 때 그는 정말, 순수한 혈통도 제대로 된 학자도 없는 그 시대에 찾기 힘든 인재였습니다. 그나마 없는 인재를 헤롯 대왕이 다 죽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셨을 때 영아를 다 죽였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을 홀씨로 살려 놓으신 것입니다. 모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홀씨로 남겨 두어 출애굽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은 자' 사상입니다. 

그 당시 왕에게 사람 죽이는 것이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본문의 시대적 배경에서 당시 청년 사울은 대단히 뛰어난 자였습니다. 특히 그가 베냐민 지파인 것을 강조하는데, 베냐민 지파는 구약의 사울이 속했던 지파입니다. 이 지파는 똑똑한 사람이 많을 뿐 아니라 혈통의 순수성을 그나마 보존하고 있던 지파였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앗수르 시대 강제 통혼 정책 등을 통해 순수한 혈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자기 의로 말하자면 바울 사도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청년 사울에게 물은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여도 되는지 율법의 해석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옷을 던져 벗음으로 죽이라는 표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울이 바로 그리스도의 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자 고상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빌 3:8) 하나님은 남은 자를 두셔서 복음의 진보를 이루시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룹니다. 우리 기독교는 절대 넓은 문, 넓은 길로 가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하나님의 길이 아닙니다. 세상은 악이 관영하고 죄의 지배 가운데 있으므로 세상의 다수는 죄를 좇습니다. 어디에 가서 별나게 행동하란 말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분별하라는 말입니다. 어디를 갈지 무엇을 할꼬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도 요즘 그렇습니다. 눈을 뜨고 생각하면 이런데 눈을 감고 생각하면 저렇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면 즉시 나의 생각과 다른 마음을 주십니다. 넓은 길이 온전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어느 구석에서 준비한 일꾼들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는 구례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자를 예비하여 사용하셨습니다. 구례네는 시골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갈증을 해소한 자는 로마 병정입니다. 제자들이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병정을 준비하셔서 예수님의 갈한 목을 채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제일 먼저 죽으셨을 때 바리새인도, 유대인도, 제자도 아닌 이방 백부장이었습니다. --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백부장은 전장에서 공을 세운, 많은 사람을 죽여야 올라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거칠고 무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입을 열어 예수님에 대해 고백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미리 바라보고 축복한 자가 있습니다. 향유 옥합을 깨뜨린, 죄가 있는 여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것을 신학자, 제자들이 믿고 기념한 것이 아닙니다. 그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말을 씻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일 년치 돈에 해당하는 값이 나가는 향유를 깼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준비한 사람은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부자의 묘실을 빌려 주었습니다. 

저도 주의 일을 하고 일꾼을 세움을 받았지만, 이럴 때, 저럴 때 누가 있을까 할 때 하나님이 다 예비해 두신 것을 봅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아시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한 번 보여줬으나 관심이 없었던 영원한 생명의 길에 대해 어느 날 생명의 말씀사 전무님이 전화를 하시더니 책으로 출판하는 것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현했습니다. 또 어느 날은 야간 강의를 하는 곳에서 만화로 쉽게 교리를 설명하는 책을 쓰자고 제의를 해주셨습니다. 아가페 실무자였습니다. 이번에는 또 설교집이 그런 생각이 나서 말씀을 드리니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제가 기독론 책도 어떻게 냈습니까? 조바심이 있었으나 갑자기 예상치 않게 생명의 말씀사에서 전화가 와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시장조사를 하니 신학적 깊이가 있는 책을 내지 않는다는 독자들의 의견이 있다고 하면서, 교리에 관한 책을 내는데 조언을 달라고 요청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제가 이런 책을 썼는데 검토해보시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구석에서 부족한 종이 나 혼자 이런 부족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분명히 동역자를 주십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살면서 이런 습관이 생깁니다. 저희 신학교의 전도사님들이 교회에 지원한다고 추천해달라고 할 때 보면 간혹 안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씀 드립니다. 이미 하나님이 이 길로 이끌어 주셨으니 최선의 길로 이끄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4.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동역자를 주심

본문 후반부에 엘리야에 대한 말이 나옵니다. 사방이 바알을 섬길 때, 바알 선지자 450명, 앗세라 선지자 400명이 있을 때 주를 섬기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갈멜산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다고 외칩니다.(왕상 18:20) 또한, ‘그들이 주의 선지자를 죽이고 제단을 헐어 버릴 때 나 홀로 남았다’고 합니다.(왕상  19:14) 두 번이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엘리야는 참 고달펐습니다. 동쪽 끝까지, 서쪽 끝까지, 남쪽 끝까지 도망쳤습니다. 동역자 없이 혼자 다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7,000  명을 남겨 두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동역자를 주십니다. 작게는 교회 안에 은사가 서로 교통합니다. 우리 교회도 아주 조화롭게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 크게는 한국교회가 세계교회가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분명히 일꾼이 있습니다. 내가 참 부족할 때 깜짝 놀랄만한 생각을 하는 일꾼들이 있습니다. 부족한 종은 한국교회에 교리를 가르쳐보자는 꿈이 있습니다. 성경교리정해아카데미도 그렇게 해서 자리를 빌려 두 차례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십시오. 평택의 어느 한 교회에서 오시는 분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고 제 책을 배포하면서 90분씩 여섯 번 가르쳐 달라고 요청을 하셨습니다. 기독신문에도 광고가 나왔다고 합니다. 저희가 할 때는 광고할 돈 조차 없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일꾼을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요새 목사님들 어떻다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보다 더 깊이 생각하는 분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분들이 있어서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를 위해, 남을 위해 남을 구제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뜻이 있으면 자녀들을 도와 주십니다. 제가 옛날 북한 선교회에 가서 이야기 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나 마음이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을 주실 때, 그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마음을 주실 때 그것을 쉽게 여기지 마십시오. 내가 어떻게 이것을 하겠냐고 여기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안 주시는 마음을 갈렙에게 주십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동역자들을 붙여 주십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약하고 미련하고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남은 자를 두십니다. 다윗과 골리앗 중 누가 강합니까? 당연히 골리앗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남겨 두십니다. 에서와 야곱 중 에서가 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남겨 두십니다. 약한 듯 하지만 하나님이 남겨 두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남겨 두십니다. 그리고 미련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남겨 두십니다. 세상에서 뒤쳐지고 그 질서와 기준으로는 도무지 따라잡지 못할 것 같아도 하나님은 그의 일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사실 주의 백성들은 나그네의 삶이므로 이 땅에서 없는 것 같이 사는 것입니다. 고향도 없는 것 같이 삽니다. 우리에게 다 고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고향이 있습니까? 천국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5. 예수님이 버림 받으심으로 우리가 버림 받지 않음

오늘 로마서 본문은 중요한 진리를 알려 줍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엘리야를 통해 그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우리를 위해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버림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버리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붙드셨으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이 결단코 버리지 않습니다. 없는 듯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민들레 홀씨 하나가 지천에 꽃을 피우듯 주의 백성도 남은 자를 두셔서 하나님이 자라게, 온전하게 하십니다. 외롭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서십시오. 

저는 북한을 그렇게 봅니다. 하나님이 평양 대 부흥을 이룬 곳입니다. 21세기에 손꼽히는 역사에 남을 부흥의 원산지가 평양입니다.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분명히 북한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북한에 1870년 토마스 선교사를 통해 한국 복음의 원초지를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인천, 제물포로 선교사가 들어옵니다. 특이하게도 성경이 토마스 선교사를 통해 먼저 들어오고 이후 1890년도에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이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 교회는 남은 자의 교회입니다. 모든 교회가 그렇듯 강단의 말씀을 가지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자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붙들고 가는 자처럼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저는 참 감사드립니다. 제가 무슨 뛰어난 것이 있습니까? 그러나 같이 기도해 주십시오.

갑자기 제게 소망이 생겼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설교한 것, 한 설교에 한 번은 교리가 나오는데, 창세기, 시편, 잠언, 전도서, 요한복음, 히브리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강해가 모두 책으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을 누가 하냐, 우리가 직접 해보려고도 했지만, 인쇄할 사람을 남겨 두시고 읽을 사람을 남겨 두셨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우리 교회를 이곳에 왜 세우셨겠습니까? 처음에 가정예배처럼 하더라도 말씀은 회당에서 전하자, 그래서 헬라인도 믿고 귀부인도 믿은 것처럼 그 역사를 이루자고 했습니다. 주의 역사를 위하여 선한 욕심을 내십시오.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겨자씨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십니다. 누구는 씨를 뿌리고 누구는 물을 줍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각자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라게 하십니다. 그런 역사가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김원진 전도사님, 하나님이 남은 자로 택하셨는데, 병중에 더 남은 자로 세우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