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19]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13)] 무할례자의 할례 (롬2:25-29)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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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9]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13)] 무할례자의 할례 (롬2:25-29) 문병호 목사


(롬 2:25)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롬 2:26)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롬 2:27)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롬 2: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롬 2: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녹취록>



우리가 섬기고 믿고 예배드리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야에 다 담을 수도 없고 손으로 미처 만질 수도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한량이 없는데 그 은혜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릴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사랑이시고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는 많은 경우 하나님을 보려고 하고 만지려고 할 때, 육성과 같이 들으려고 할 때 의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 보이지 아니하시느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나 자신을 드러내셔서 우리에게 보게 하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구약시대 때는 현현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신약시대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 때도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무지개,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의 물을 통해 자신의 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지 않아도 또 무지개를 보지 않아도 하나님을 정확히 고백하고 인정한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인정하고 보이지 않으나 보는 것 같이 믿게 하시려고 보이는 것을 주셨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갈 때 낙심했습니다. 에서에 쫓기고 먼 길을 가는데, 그 길은 야곱에게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에서와 달리 야곱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사는 품 속의 아이였습니다. 오늘과 같이 음식을 저장할 수도 없으니, 겨우 하루, 이틀 먹을 것을 가져 갔을 것입니다. 그는 돌 밖에 없는 광야에 처하게 되었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낙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미래의 일에 대해 별을 보며 불안해하고 돌로 베개를 삼아 누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사닥다리를 내려 주시고 벧엘의 하나님으로 야곱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얍복강에서 기도할 때 얼굴을 보여 주셨습니다. 브니엘, 파님엘, 즉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표현합니다. 시를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음악을 작곡하기도 하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물화를 그려도 그것은 표현이지 자체는 아닙니다. 사실화에도 표현이 있습니다. 화가마다 빛을 보는 모양이 다양합니다. 우리는 표현에 익숙하도록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지금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보이지 않지만 모여서 드립니다. 예배 그 자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는 것으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배에 힘쓰라고 합니다. 굳이 모여서 찬송을 드리고 기도와 예배를 드릴 필요가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정하신 교통이 방식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표현하시기를 즐겨하시고 우리의 표현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은혜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지으시고 역사상 우리에게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구약에 280번 이상, 신약에는 1번 새 언약을 체결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언약이 신약의 단회 언약,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보자와 당사자가 되시는 언약을 예표하였고, 그것이 실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언약에 대해 표징을 주셨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 17:10-11). 표징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끔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혹 손가락을 걸고 그것도 모자라 반지도 교환하는 것을 표징이라고 합니다. 반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드러내는데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으로 표징을 삼지 않았습니다. 나무, 돌, 달, 해가 아닌 육체의 살을 베어서, 태어난 지 팔일 만에 가정에 거하는 모든 남아에게 할례를 거하게 한 것입니다. 몸에서 가장 중요한 생식기의 살을 베어내어 그것으로 언약의 표징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이제 신약시대에는 표징으로 성례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두 가지 표징만 있습니다. 바로 세례와 성찬입니다. 세례는 거듭남의 표징이고 성찬은 거듭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의 표징입니다. 

잘 아실 것은, 하나님은 주실 은혜를 먼저 표징으로 줍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아브라함과 사라를 열국의 아비와 어미로 삼은 그 때, 즉 아직 이삭을 주지 않으신 그 때, 먼저 할례의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약속하시고 먼저 표징을 주십니다. 우리는 왜 안보여주시냐고 하지만 하나님은 먼저 보여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먼저 보여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할례를 먼저 약속하시고 이삭과 야곱의 씨앗을 주셨습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자기 자신을, 살을 떡으로 피를 음료로, 주시는 십자가로 잡혀가시는 그 밤에 우리 주님은 표징으로서 성찬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표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시대 때 할례인 것입니다. 

할례는 가정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 가정은 신약시대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가정 안에 할례를 거행해야 하나님이 택한 아브라함의 가정의 구성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아야만 안식일을 온전히 거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교회가 가정의 개념, 가정이 안식일과 언약의 단위로서 존재했습니다. 그 가정의 자녀가 되는 시작은 난 지 8일 째에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살을 베는 것으로 표징을 삼아 주셨습니다.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여호와를 만나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아내 십보라 그리고 자식들과 함께 애굽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그 때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서 그를 죽이려고 하셨다는 말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십보라가 차돌을 하나 땅에서 주워 깨뜨리고 그것으로 그들의 첫아들 게로손의 포피를 벱니다. 즉, 할례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죽음을 피하게 되는데 십보라는 이에 대해 모세를 '피남편'이라고 부릅니다. 십보라가 모세를 피남편이라 부른 것은 그들  부부 가운데 낳은 아이를 할례를 행하지 않고서는 거룩한 일을 행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모세가 소명을 받아 애굽으로 들어가는데 할례를 받지 않고서는 큰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보아야 할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묘한 하나님의 경륜이 담겨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을 지나 여리고로 들어갈 때 길갈에서 할례를 거행합니다. 애굽으로 들어갈 때도, 십보라에 의해 할례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십보라가 모세를 피남편으로 지칭한 것입니다.) 즉, 할례를 거행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후 홍해와 광야의 모든 일을 지나 가나안의 첫 성으로 들어갈 때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할례는 힘이나 군대를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부정하는 것이요 내 살을 베는 것입니다. 아마도 모세는 육체적으로 건강했을 것입니다. 출애굽 하기 전에 이집트 사람을 밀치자 그가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궁정에서 쌓은 지식 역시 풍부했을 것입니다. 이제 자신감을 가지고 다시 애굽으로 향하는 길을 갈 때,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하신 것입니다. 여리고를 정복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표징을 구약에서는 할례로 삼은 것입니다. 생명은 피에 있는데 피를 흘려 할례를 행하는 것은 곧 전인격에 행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할례가 그리스도의 세례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할례를 행하지 않습니다. 의학적 이유로 할 수는 있어도 더 이상 성경적, 신학적 의미를 갖지는 않습니다. 신약시대의 할례는 영적으로 살을 베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가 아니라 세례입니다. 세례가 할례를 다 이룬 것입니다. 그것이 성례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표현하기를 원하십니다. 왜 교회에 가야하냐고 묻는 신앙인들이 있는데 그것은 고상한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비밀을 알아야 깊은 신앙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중심, 힘, 생명이 되어야 신앙의 비밀을 아는 사람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성도간에 일상을 나누고, 때때로 각자가 겪는 어려움을 볼 때 서로 도와 살아가는 것,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 바로 그것이 큰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교회를 통하여 모이기에 힘쓰고 예배드리는 것을 원하십니다. 진정한 할례의 의미는 살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입니다. 표면은 바깥이고 이면은 속입니다.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입니다. 진정한 할례는 이제 육신에 칼을 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폐부, 죄덩어리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 잘라냄이 없이 어찌 새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죄사함이 없이는 구원의 은혜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죄를 사함받지 않고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명의라도 종기를 낫게 하지는 않습니다. 종기는 잘라버릴 뿐입니다. 예전에 우리 장인이 암에 걸렸을 때 의사가 대장의 상당부분을 잘라냈다고 합니다. 그것이 명의입니다. 할례는 그것입니다. 종기는 잘라내고 새 살을 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살점을 떼고 피를 흘리신 은혜입니다. 

부족한 종은 다음주 화요일부터 그 다음주 금요일까지 예루살렘에 다녀옵니다. 우리 교회를 섬긴 후 이렇게 오랫동안 떠나는 것이 처음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학생들을 인솔해서 두 번째로 가는 여정입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셔서 저희 집사람도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토지, 땅 역시 전부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섬겨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 가서 땅만 밟고 오면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와야 합니다. 그 땅의, 그 살과 피의 실체를 만나야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땅을 밟고 다니신 하나님의 아들이 중요합니다. 그 땅이 아닌 그 땅에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합니다. 그 피로 땅이 갈라지고 죽은 자들이 살아난 은혜가 중요합니다. 그저 가서 땅이나 보고 오는 것은 광야에 세례 요한이 아닌 옷 잘입은 사람을 보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번에 9박 10일 어떻게 다녀올지 걱정이 많이 됐습니다. 그러나 가서 많이 기도하고 오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강요 마지막 판을 번역하자고 계획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오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독교 강요 마지막 판은 분량이 많으므로 번역할 것을 생각할 때 시간과 건강에 대한 걱정이 먼저 되었는데 그런 생각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저 기도해야 할 뿐인데 말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땅을 거룩하다고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체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내면적, 영적 유대인이 유대인입니다. 그것을 오늘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할례를 받으면 뭐합니까. 행실이 올바르지 않으면 할례가 소용이 없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오히려 할례를 받지 않고 말씀대로 잘 좇아 산다면 그 사람이 오히려 할례받은 사람을 꾸짖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상당히 강한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님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육적인 살을 베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살을 베어서 우리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거듭나, 영적인 새 살이 날마다 돋고 있습니다. 우리는 파릇파릇한 식물, 나무와 같습니다. 즐거워하십시오. 성도는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어야 하비다. '안된다'는 말을 많이 하지 마십시오. 저도 신학교에서 섬긴 날을 돌아보니 하나님은 되게 하십니다. 비록 저는 '안된다'고 생각할 때가 많지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되게' 하십니다. 

할례에는 항상 하나님의 법이 따릅니다. 택함받은 가정 안에 들어가는 것이 구약의 할례, 신약의 세례라면, 이제는 따라야 하는 그 가정의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구약은 예표이고 완성은 지금 이 시대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통해 새 영을 준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의미가 아닌, 굳은 마음을 제하고 새 마음과 새 영을 주고 새로운 율례 가운데 거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할례, 곧 세례를 베푸사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사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여호와를 인정하게 하기 위함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드러워야 합니다. 시멘트와 같이 굳어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피부는 아기처럼 부드럽게 하려고 하면서 마음은 70대처럼 굳어지면 안됩니다. 간혹 등산가들을 보면 얼굴이 쭈글쭈글 합니다. 하지만 말하는 것을 보면 마음만은 젊습니다. 우리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피부는 보들보들한데 마음은 아주 굳어져 늙어 있으면 안됩니다. 마음이 십대 같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의도적으로 굳은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살 수 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연약한 자, 애통하는 자, 마음이 부드러운 자와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조금 지는 것 같고 손해보는 것 같고, 덜 된것 같고 늦는 것 같아도 그럴 때 하나님이 옆에 붙어 주십니다. 새 영을 가지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따져서 취할 수 있을 때 양보하라 그 말입니다. 알면서도 져 주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터이고 그 때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어쨌든 하나님이 계시는 터를 확장해야 합니다. 내 터가 아니라 말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닙니다.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입니다.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남편이라고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남편이라고 부릅니다. 새 언약을 주시고 그것을 우리의 마음에 주셨습니다. 할례는 의문에 있지 않고 영에 있습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 3:6). 이제 우리에게 좁은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사는 세례입니다.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거듭난 사람은 이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가 표현하는 것입니다. 내일 우리 교회는 부족한 종이 책을 쓴 것에 대해 출간기념회를 합니다. 제가 이 교회를 섬기지 않았으면 하니님께서 그 책을 쓰게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치사가 아닙니다. 새벽이나 금요일이나 주일에 열심히 설교를 작성한 것이 그 책에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 책을 보면 처음에는 어려워보여도 은혜롭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는 이 교회를 섬기면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시간을 뻿긴다', '두 가지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어도 WCC(World Church Council, 세계교회협의회)반대책, 기독교 강요 초판 번역, 기독교 강요 30주제,칼빈신학, 그리고 기독론까지 모두 이 십자가지기교회를 섬기면서 썼습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이면적 유대인, 이면적 할례입니다. 내 살을 도려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이 우리 속에 돋아야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절대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언제 했냐 싶게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많이 한 것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견디게 하시고 열심도 있게 하셔서 책도 쓰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책을 들면 지금도 하나님이 먼저 하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제가 했다고 하면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책을 들어 한 페이지 들여다보면 내가 어떻게 이것을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예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표, 세례와 성찬을 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무지개도 만나도 메추라기도 사닥다리도 이른비와 늦은비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제 하나님 앞에 그것을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새 살이 돋고 있습니다. 세상의 경화된 시멘트같은 마음을 담지 마십시오. 시멘트에는 풀이 나지 않습니다. 말라말랑해서 누구라도 떼어내고 아무렇게나 던질 것 같은 그 옥토에 싹이 납니다. 그것이 우리 살입니다. 단단한 각질, 그것은 어디 갖다놔도 그대로 있을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부패해서 죽고 없어질 뿐입니다. 그러나 물렁물렁한 흙은 쉽게 떼어져도 결코 소멸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다 하나님이 그런 것을 주셨습니다. 이면적 유대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와 살로 된 것입니다. 이 일을 즐거워하면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인도함 받음으로 풍성한 열매 맺는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