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10]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15)] 하나님의 미쁘심 (롬3:3-8)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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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0]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15)] 하나님의 미쁘심 (롬3:3-8)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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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3:3)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롬 3:4)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 3: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롬 3:6)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롬 3:7)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롬 3:8)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녹취록>


1. 



우리가 계속 로마서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1절과 2절을 보면서 유대인의 특권과 뛰어남이 하나님의 말씀 맡은 것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이번에 이스라엘을 다녀오면서 배운 것은 이스라엘에 남은 것, 순수한 것은 아무 것도 없되 옹직 한 가지, 말씀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벽도 성전도 혈통도 지파도 의식도 다 없어졌습니다. 남은 것은 말씀 뿐입니다. 이 말씀을 맡은 것이 유대인의 특권이고 할례의 유익입니다. 할례의 유익은 살을 베는 외형, 외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 맡은 것을 기념함에 있습니다. 우리 가정은 말씀이 기초가 되고 말씀의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 가정에 들어가는 표가 할례입니다. 신약으로 말하면 세례입니다. 이 언약의 말씀을 믿는 자는 구원에 이릅니다. 말씀은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약속 있는 말씀이고, 구약은 옛 약속, 신약은 새 약속 입니다. 구약은 옛 언약, 신약은 새 언약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은 약속의 말씀, 언약의 말씀을 맡은 것이고 그것을 믿어야 그 말씀의 능력 가운데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떤 자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구약이라고 하여 행위로 구원에 이르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인데, 이곳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아브라함부터 이사야까지 모두 구약의 백성입니다.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은 믿어서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믿음이 능력이 있습니다.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구약 백성들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3절을 보면 말씀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손에 들린 말씀만 받았다고 자랑했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 말씀이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그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인데, 구약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 맡음을 자랑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았습니다. 바르지 않은 신관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말씀을 맡았다고 자랑하니 말씀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지키기 쉬울 만한 의식은 만들고 그렇지 못한 것은 폐하여 멋대로 자랑한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맡았으되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제가 이번에 밟고 온 성전의 터가 있는데, 성경의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때 기록을 보면 그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의 터에서 그들이 이방 우상을 세워놓고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음란한 창부와 창기를 불러 음란한 행위를 하고 우상에게 바치기 위해 자식들을 불태워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맡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이라는, 참으로 백성답게 살아갈 고상한 옷을 입혀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맡은 것은 약속을 맡은 것이고 약속은 믿어야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구약 백성들이 그 약속을 믿었을 때 그것은 그들을 영생의 길로 인도했지만 그렇지 않고 현세에 보이는 것, 즉 명예와 재물과 학식과 건강과 자기의 병기와 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결코 언약을 이루지 않았습니다. 



2. 



우리 신앙인들은 절대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예와 아니오가 뚜렷해야 합니다.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미지근한 것은 없습니다. 있거나 없거나 입니다. 오직 한 분만이 계신 것입니다. 그분만이 나의 구세주 이십니다. 그의 은혜로 구원받고 영생을 누리는 것이지 가다 말고 어중간한 것은 없습니다. 바로 구약 백성들이 믿음을 가졌을 때는 절대주의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여 말씀하소서, 하나님이여 우리를 먹이소서, 하나님이여 우리를 온전케 하소서, 낫게 하소서' 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는 절대주의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을 잃어버렸을 때는 상대주의에 빠졌습니다. 여호와도 한 신이고 밀곰도 몰록도 바알도 한 신입니다. 다신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하는 성경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패역한 가운데서도 오늘 3절 후반부는 그들이 믿음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영 죽이시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롬 3:3). 이것은 아주 중요한 복음의 약속입니다. 심지어 믿지 않는 듯이 보이는 백성도 작정한 백성은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고 선택이 있고 그 후에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작정하고 선택하고 믿음을 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선택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적음을 보고 내가 과연 구원을 받았는가 생각하며 하나님의 선택을 의심합니다. 그것은 우문이고 어불성설입니다.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셨으므로 믿음을 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작정보다 앞서지 않고 선택보다 앞서지 않습니다. 최초에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정만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의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가 되어 우리가 이 땅에 오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3. 

미쁘심은 '신실하심'으로도 번역합니다. 미쁘심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입니다. 한 번 정하신 뜻을 끝내 이루십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와 우르에서 불러 내시고 땅과 후손과 복('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하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하심')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언약의 세 약속입니다. 입니다. 그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은 끝내 이루시는 것입니다. 다 죽을 것 같아도, 7년 흉년이 들어 말라 죽고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200만, 250만이 되게 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들이십니다. 여리고 성, 아이 성을 모두 무너뜨리고 그렇게 하십니다. 기드온 골짜기의 거민들도 모두 무너뜨렸습니다. 노쇠한 갈렙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이루십니다. 없어질 것 같아도 말입니다. 12지파 후손들이 없어진 것 같고 애굽의 구석에서 노예살이를 하는 것같아도 오히려 보호하시고 번성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입성해서 하나님이, 전쟁에 능하신 분이 얻게 하십니다. 가는 곳마다 우물이 나게 하시고 복을 받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신실 할 수 없습니다. 첫째로는 우리의 뜻이 온전하지 않습니다. 오늘 4절은 사람이 모두 거짓되다고 말합니다 --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시 116:11). 모든 사람은 다 거짓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 거짓말쟁이입니다.  변개치 않을 수 없습니다. 바꿉니다. 자식에게 한 약속도 부모가 끝내는 바꿀 때가 있습니다. 신실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시면 어떤 일이 있어도 변개치 않습니다. 끝내 이루십니다. 친히 이루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는 부패해서 거짓됩니다. 죄로 말미암아 부패와 무능이 들어왔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해졌습니다. 사람의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많은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그것을 붙듭니까? 부패해서 사람은 다 거짓되고, 설혹 약속이 변개치 않는다고 해도 무능해서 신실할 수 없습니다. 전에도 나눴습니다만, 세월호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딸에게 아들에게 보호하고 지켜준다고 약속했지만, 그 세월호가 가라앉을 때 과연 부모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저 하염없이 바라볼 뿐입니다. 이 문명시대에 모든 것이 가능한듯 한데 배 하나 가라앉는 것도 못 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의 무능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신실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내 약속이 진실되도 무능하므로 그것을 지킬 수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는 창세 전에 영원까지 모든 것을 아시고 작정하셔서 변함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므로 창세 전, 영원 전에 작정하신 그것이 변함이 없으시고 전능하시므로 이루십니다. 높고 위대한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좌절하고 의심하고 불안해합니까?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의 뜻에 대해 자꾸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일이 있고 연약함이 있으면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종으로 잡혀갈 때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뜻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인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큰 일은 알 수 없습니다. 큰 일은 하나님께 여호와께 속한 것이므로, 여호와의 심중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의 이성으로는 속히 판단되지 않습니다. 그 때 우리는 많이 좌절하고 의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게 약속하신 것을 자신의 뜻과 경륜 가운데 교묘한 방법으로 이루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미쁘심 입니다. 

4.

저는 미쁘심을 자주 '우리가 그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충실하시다'라고 규정해 봅니다. 낮의 해도 밤의 달도 우리를 상하지 못합니다. 여호와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의 세포 하나까지도 다 헤아리십니다. 내가 나를 만질 수 없을 때 여호와는 나를 만져주십니다. 나는 잠들어 혼미해 로뎀나무 밑에서 죽자고 엘리야처럼 낙담하고 절망해도 여호와는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으시며 우리의 세포조차 만져 주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는 그렇지 못하지만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충실하시다는 것이 미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여러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나를 지으시고 오장육부를 조성하시며 나의 영원, 시작과 끝이 되시는 그 분이 나의 보호자시요 방패, 산성이십니다. 내 걸음을 주장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더라도 보호해주십니다. 이방의 그물에 걸리지 않게 하십니다. 악인의 꾀에 넘어가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므로 무엇이 있어도 내 세포 신경 하나라도 하나님이 다 만져 주시고 간섭하시고 헤아리십니다. 그것이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의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요셉이 구렁텅이에 빠지고 형들에 의해 미디안의 상인에 팔려갔을 때 요셉은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높은 곳까지 세우십니다. 그것으로 족할 법 한데 아무 죄도 없이 보디발의 아내의 음해를 받고 더 어려운 감옥에 갇힙니다. 이제는 정말 끝이다 싶었는데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서 왕 밑에 일인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큰 뜻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차를 몰고 교회에 올 때 차선은 그어져 있지만, 하나님의 크게 이루시는 뜻은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나면서부터 맹인된 자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다른 사람들은 그 맹인을 고칠 생각은 안하고 그가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하십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맹인의 눈멈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그것이 환란이든, 역경이든, 곤고이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이 하나님이 하셨음을 선포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 일을 두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셨다. 저의 목사 된 것, 신학 박사, 교수된 것 역시 정말 에누리 없이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가식이 아닙니다. 혼자 심중에 떠오를 때마다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할 수가 없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번에 책을 쓴것 역시 책장에 꽂힌 그것을 볼 때 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본문 4절과 같이 우리는 다 거짓되고 믿음이 약하고 의심이 생깁니다. 다윗이 가장 곤고한 때에 쓴 시입니다 --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사람은 이 판단 저 판단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끝내 이기십니다. 하나님은 한 번 정하신 뜻을 결코 폐기치 않습니다. 그 뜻을 이루시는데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진짜 신앙인은 '내 믿음없음 조차도 하나님의 작정이 이기신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믿음이 없으니 큰일났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믿음없음 조차도 넘어서는 하나님의 작정이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시편의 말씀입니다. 다윗은 밧새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얼마나 심령이 곤고했겠습니까. 그 때 다윗이 자기 믿음을 찾을 수 있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작정과 뜻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찾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이루소서, 하나님이 이기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믿음 조차도 넘어섭니다. 

5. 

전적 은혜, 무조건적 은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입버릇처럼 내뱉는 우리는 과연 누구입니까? 우리의 공로가 어디 있습니까? 아무도 눈먼 자를 낫게 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 저럴까?'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시려고 눈멈을 주셨다고 합니다. 기약이 이르러 이룰(이룬)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이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기약에 이르러 붙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1)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딤전 2:4-6).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중보자,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데, 기약이 이르러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기약이 이르러 그 일을 이루셔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 이상 우리는 왈가왈부할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왜 이렇게 된 것인지 말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그의 일하심을 드러내시려고 기약이 이르러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이루시려고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하나님은 충실하시고 전능하십니다. 한 번 뜻을 가지시면 결코 어기지 아니하십니다. 다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한다면, 꼭 한가지는 그들에게서 느꼈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상에 하나님이 배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예'가 되십니다. 우리의 '예'는 오직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예'가 되셔서 갈릴리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연약한 자, 병든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회당에서, 그리고 곳곳에서 선포하시고 연약한 것과 병든 것을 고치셨다고 말합니다(마 4:23). 예수님의 가장 큰 일 세 가지가 복음 선포하심과 복음 가르치심과 병자를 낫게하신 것입니다. 이 복음의 말씀은 '예'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선포되는 말씀은 '예'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예'가 되신 것입니다. '너에게 그늘이 되고, 너를 안위하고, 너를 지키노라. 너에게 생명이 되노라'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이 말씀이 '예'가 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8-20).  

주께서 십자가에서 상함은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인함 입니다.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습니다. '예'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그늘에 거하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낫게 하시려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가는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런즉 우리가 '아멘'하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각색 병을 낫게 하는 그리스도의 의가 채찍 맞음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너의 질병과 눈멈이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행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환란의 경함' 곧 '가벼움'이라고 했습니다. 채찍을 맞고 감옥에 갇히고 온갖 위험을 당했으나 '환란의 가벼운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김원진 전도사님이 크게 쓰시는 하나님의 종이 될 줄 믿습니다. 그 일을 이루시려고 환란의 경한 것을 주신 줄 믿습니다. 남상수 목사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야고보서의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게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5). 주님께서 김원진 전도사님을 온전히, 성하게 하시리라 기도합니다. 환부는 싹 도려내고 치료와 의의 광선으로 태워주사 나머지 부분은 그저 성하게 해 주시고, 못된 것만 잘라 내시도록 기도합니다. 환란과 곤고 없이 하나님의 큰 일을 한 종이 없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전도사님을 잘 준비시키시고 이러한 일을 통하여서 연단시키셔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고 큰 종으로 생명을 살리고 스러져가는 이 땅에 복음을 새롭게 선포하고 기경하여 진리의 파수꾼이 될 것을 믿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겸손하되 우뚝 서서 크게 사용되는 그런 하나님의 종으로 빚으시려고 미쁘신 하나님이 이 일을 기약대로 주신 줄을 믿습니다. 우리는 우연으로 생각하여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지 몰라도, 칼빈이 말했듯 빗방울 하나 떨어지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하신 것처럼 구름떼같이 쓸려 다니는 새 한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정한 뜻에 따라 그렇게 됩니다. 어찌 종의 질병이 하나님의 뜻 없이 있겠습니까? 믿음 없는 마음 다 버리고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내 믿음으로 공로삼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가 된다는 말씀을 믿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아멘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은혜가 우리교회와 전도사님 가정 위에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