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24]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17)] 하나님의 의 (롬3:19-22)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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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4]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17)] 하나님의 의 (롬3:19-22)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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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3: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롬 3: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녹취록>




1.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주님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길이고 진리인 것입니다. 주님께 와서 길을 물었더니 저기 길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생명이십니다. 주님께 와서 생명을 찾았더니 저기 생명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이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생명의 떡, 갈하지 않는 음료라고 하셨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생명의 떡이요 갈하지 않는 음료요 우리의 방패, 산성, 도피처, 삶 전부가 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한 단어로 말하라면 본문 말씀에 나오는 바로 '의義'입니다. 

본문 21절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의'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시네(δικαιοσύνη[dikaiosynē])라고 합니다. 디카이오스는 의로운이란 의미이고 그 명사형입니다. 어릴 때 학교 갈 때 길이 두 갈래 있었습니다. 한 길은 지름길이고 한 길은 돌아가는 길인데 꼭 어머니가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건너가면 좋은데 거기에는 괴팍한 친구가 살고 묘를 지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왜 빠른 길로 가라고 하지 돌아서 가라고 했을까? 어떻게 보면 돌아가는 것 같고 늦어보이지만 그곳에는 묘가 아니라 꽃이 있고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의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이 모든 것을 모은 개념이 바로 의입니다. 

구약에서는 '공의', 신약에서는 '의'로 나오는 이 개념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서두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모든 것을 모으면 의'라고 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의를 정의해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내(境內)에 들고 하나님의 전에 거하고 하나님의 집에 머물고 하나님의 품 속에 있는 것이 모두 다 의입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것들을 가리켜 의라고 할 수 있지만,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가르쳐주고 먹여주는 것이 의라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뽑기를 좋아했습니다. 뽑기 장사를 하면서 하루 종일 그것만 팔고 또 먹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왜 제 어머니가 저하네 그것을 못하게 하셨을까요? 어머니 경내, 품속에 드는 것, 어머니의 뜰에 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버지의 뜰, 경내, 궁정에 드는 것이 의라고 했습니다. 고기로 말하면 물이요 새로 말하면 숲이요 인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품에 거하는 것이 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 계시는 의는 생각해 볼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결코 정의내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이 의롭다고 성경은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인데 앗수르가, 바벨론이 한때 의로웠다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못해도 혹은 이방인들이 아무리 잘해도, 끝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의롭다고 여기십니다. 마치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의롭다고 여기듯 말입니다.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품에 거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품에 있을 때 우리가 의롭다라고 여김을 받을 뿐입니다. 왜 '여김을 받을 뿐'일까요? 그것은 아무리 내 자질이 좋아도 하나님을 떠나면 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무엇을 얻어보려 하는 것은 이방 귀신도 합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능력을 얻어보려고 이방 술사들도 그렇게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릇된 것입니다. 의로운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 드리고 주중에 고백하고 기도하는 것이 의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 의로운 모습입니다. 물고기가 물에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것이 의입니다. 그래서 의는 내 자질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것이요 의인은 그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필히 여호와의 품 속에서 영원히 삽니다. 그래서 의인은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 -- 아무도 이 시편을 가지고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것이 의입니다. 여호와께서 인정해주시는 것이 의인의 길이고 인정해주시지 않는 것은 악인의 길입니다. 우리에게 힘든 일이 닥치고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차를 몰고 이곳에 온 것도 결단입니다. 때마다 차선을 고르고 신호등을 기다려 온 것이 인생의 결단입니다. 그 결단을 내릴 때 의인의 길은 바로 여호와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의인의 길을 보아야 할까요? 여호와와 함께 있으므로 그의 빛을 비추고 그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많은 경우 의인을 증인으로도 말합니다. 바로 비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의인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의인들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향기, 빛, 어떠하심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의인입니다. 결코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구약 백성들을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시고 의인의 길에 세우시고 그것을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데 이 의인의 길을 특별히 시편에서는 율법을 좇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품에 거하여 하나님의 향기를 드러내고 빛을 드러내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그것은 바로 율법입니다.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향기 같은 것은 없습니다. 바로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배어있는 사람, 그 사람이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이 배어있고 주야로 그것을 읊조리고 표현하고 행실로 고백하여 그것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향기요, 빛이요,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3장 2절부터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 그것은 '율법을 맡았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 경내 가운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본문 19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 입을 막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피동성(被動性), 수동성(受動性)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의 태도는 잠잠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의 태도는 잠잠함입니다. 은혜가 클수록 잠잠한 것입니다. 모든 입을 막는 것입니다. 모든 입을 막는 다는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하시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뜻과 어떤 자질을 전혀 내세울 것 없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율법입니다.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의미는 우리의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움과 법을 인정하고 우리의 입을 닫으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우리의 입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내 주장을 한 것입니다. 내 의견을 제시하고 그것을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는 그렇게 안될 것 같으니까 마귀 사탄이 뱀을 보내 유혹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알 것은 율법은 이미 은혜의 백성에게 주신 것이요, 그 백성이 자기 공로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을 비추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셨으니 나에게 자질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고상한 법을 주셨으니 우리가 가장 고상하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장 고상한 하나님의 법을 맡았으니 나는 할 수 없다"라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만 구하고 시키는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를 때 세 가지 즉, 자의적 판단, 불평, 그리고 절망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물고기가 물 아래서 꼬리를 치며 다니듯 생동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내 뜻대로 하여 자의적인 판단이 들어오면 필히 잠시 소견대로 행하며 이것이 인생의 자유라고 할 것 같아도 곧 불평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불평은 필히 절망으로 이끕니다. 땅이 갈라져 우리를 삼켜서 절망이 아니라 불평이 절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19절에서 이미 본 것처럼, "온 세상으로 모든 입을 막고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입니다. 여기서 심판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심판은 좋은 것입니다. 심판은 헤아리는 것입니다. 종일 열심히 일했는데, 그것을 헤아림 받는 것은 기쁨입니다.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빨리 보이고 싶습니다. 농부가 열심히 일하여 수확했다면 주인에게 포도송이를 빨리 보이고 싶을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일꾼은 말입니다. 그러나 속이고 일도 안한 사람들은 마지막 추수 때가 되면 두려울 것입니다. 내놓을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 비유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심판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헤아리심은 얼마나 즐거운 것이었을가요? 

성도에게는 이러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물론 잘 못하는 것도 있지만 예배 드리고 말씀 안에 살려고 노력하고 99가지 잘못해도 1가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노력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요? 우리는 은혜 가운데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 자체에 대해서 무엇보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받을 때 입을 막아야 합니다. 말씀을 내 공로, 내 주의, 주장과 자의적 판단으로 받으면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잠잠히 입을 닫으면 홍해라도 건너고 여리고도 무너뜨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게 된 것은 율법을 받았는데 불평과 판단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진리와 말씀의 영이 우리 안에 있어서 부지불식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성경은 진리의 영을 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우리가 그런 영을 다 받았습니다. 주님이 생각나게 합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생각나게 합니다. 그 때 입을 막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에게 실패로 나타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입을 막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고 주신 은혜와 복이 넘쳤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수행하지 못했을 때 인간의 무능함이 드러나고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육체가 하나도 없고', 죄를 깨닫게 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본래적 기능은 하나님의 품 속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 그 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죄로 말미암아 율법의 예외적인 기능, 우연한 기능이 더 앞서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부터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타락한 인류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었을 때 먼저 얼굴을 가리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하게 되는 저주 상태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류의 한계요 조건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법이 내 앞에 서면 누구나 저주를 느낍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20절, 인류의 한계입니다.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오늘 말씀은 서론적인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절에 복음의 핵심 말씀들이 나옵니다. 우리가 주로 로마서 1:16을 복음의 핵심 말씀이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3장이 더 중요한 복음의 선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장은 율법이 무엇인지 말하고 이후 불순종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선한 것이 저주의 도구가 되어버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이 가장 적나라하게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그 율법이 너무나 선하고 의롭고 경건하고 신령한데 그것이 이제 우리 앞에서 죄를 들쳐내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율법을 받은 사람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받지 말아야 하나요? 여기에 동시적인 은혜가 있습니다. 신약시대 율법을 받은 백성은 율법 외에 한 의를 동시에 주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율법을 주시고 한 의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면서 율법 외에 또 다른 의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잠시라도 죄를 깨닫고 죽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죄를 깨닫는 순간,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 또 다른 의가 있는데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믿는 의로써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은혜'라고 얘기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복음을 깨닫는 자는 동시에 은혜가 역사합니다. 달리 말하면 은혜, 복음이 없이 율법을 깨달을 자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율법을 맡은 자가 여전히 복됩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 우리가 훨씬 복됩니다. 왜요? 율법을 맡으면 그것에 약속된 복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의 의로 죄를 깨닫게 되면 그와 동시에 의롭게 됩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죄를 모르면 그대로 죽고 죄를 깨달으면 동시에 살아납니다. 성도가 죄를 깨달으면서도 살아나지 않고 죽음 가운데 계속 거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뭔가 문제가 있다고 깨닫는 순간 길이 열립니다. 죄를 깨닫는 순간 복음이 역사합니다. 놀라운 복음의 은혜입니다. 죄 깨달음과 구원, 의를 주는 것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4. 

그러므로 죄사함에 대한 의식 없이 하나님의 백성됨은 업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귀합니다. 저도 이전에 여러 번 읽어봐도 어색하다고 느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네개 절은 긴박성을 드러냅니다. 죄로 말미암아 저주가 되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율법이 우리의 구원의 길이 됩니다. 죄를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동참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죄를 깨닫지도 못합니다. 달리 말하면 죄를 죄로 아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쓰라린 밤의 눈물이 기숙할지라도 새벽에는 기쁨이 몰아칩니다. 죄로 말미암아 아주 고통과 탄식과 자책이 있어도, 속히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것처럼 청소하기 위해서는 먼지가 나야 합니다. 죄를 사함받으려면 죄로 말미암아 심령의 그러한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로다" --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주님께서 전해주신 복음입니다. 

여러분, 어려움이 있고 힘든 일이 있지만 가장 큰 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입니다. 모든 동물과 짐승은 환경에 따라 살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주관에 따라 삽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자기 자신을 더욱 선하게 끌고가지만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도 있는 유일한 존재 역시 인간입니다. 인간만이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들 때 -- 어찌 인생에 순경만 있습니까, 역경이 있습니다 --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욱 빨리 갑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휘몰아치는 바람, 역경이 은혜입니다.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유라굴로 광풍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기도로 일어나는 바람입니다. 사도 바울을 로마로 입성시키고 그곳에 권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폭풍으로 말미암아 사도의 권세를 드러내고 길을 이루십니다.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 의는 믿음이라고 본문 22절은 말합니다.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입니다. 이것이 이신칭의입니다. 

5.

여러분, 주님의 품에 거하십시오. 주님과 그의 말씀을 떠나지 마시고 사모하십시오. 그것이 순간 순간 나를 찌르고 나와 어울리지 않고 수준에 맞지 않아 보여도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약속을 주십니다. 명령하시는 분이 친히 우리를 그 수준으로 끌고 올라가실 것이므로 우리가 연약하고 내 기질, 성품, 성향과 삶의 다양한 양태가 부족하고 모자라 보여도 오히려 납작 엎드려 입을 막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 세워 주십니다. 

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복음 가운데 역사합니다. 그것이 신약 시대입니다. 율법의 약속이 성취되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질서를 드러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향기요 맛이요 말씀이요 법입니다. 코를 자극하는 향기, 들리는 소리, 맛이 아니라, 말씀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냅니다. 의입니다. 하나님의 길, 진리, 생명입니다. 그것을 구약 시대 때에는 율법으로 주셨는데 아직까지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직접적으로 역사하지 않았으므로 기다려야 했습니다. 물론 그 의가 작용하여 구약 백성도 의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에게는 그 찌름이 곧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 외에 또 다른 의라는 것은 그러므로 율법이 저리가고 복음이 들어온 것, 즉 율법 폐지가 아닌 성취입니다. 율법을 즐거워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 율법이고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지금 나는 여기서 따로 살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 간다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서 향기요 빛이요 소금이요 편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살게 해 주신 것입니다. 

못나고 부족한 종도 하나님이 붙들어 사용하십니다. 천하에 저같이 못나고 못된 사람이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염세적이고 부정적이고 모든 것을 불평하는 자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부족한 종을 그대로 두지 않고 말씀을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내 가운데 오셨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빛도 어두움도 없습니다.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 139:12). 죄가 은혜입니다. 어둠이 빛입니다. 주님 안에 가면 흑암과 빛이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손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누구를 향해 눈을 듭니까? 여호와의 성산을 향해, 주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에게는 흑암과 빛이 동일합니다. 도토리 키재기 하듯 절망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낙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다 흑암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는 다 짙은 흑암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십니다. 순간 죄를 깨닫게 하시고 동시에 회개와 믿음과 칭의와 자녀삼으심과 부르심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시고 하나님 앞에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갖다 놓으십시오. 내가 나를 보려고 하면 절망 아니면 교만입니다. 권태 아니면 분주함입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쇼펜하우어의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시면 부족한 것도 들어 사용하시고 미련함도 지혜로 연약함도 강함으로 삼으십니다. 치유의 광선으로 치료하십니다. 방사선으로만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빛으로 태우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흑암과 빛이 하나이고 아픔과 나음이 하나이고 죄와 은혜가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