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31]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18)] 값없이 의롭다 하심 (롬3:23-2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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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31]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18)] 값없이 의롭다 하심 (롬3:23-2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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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3: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녹취록>



1. 

지금 세계 개신교는 내년에 있을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하는 일에 여러 가지로 분주합니다.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슬로건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입니다. 이에 대한 말씀을 루터가 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붙임으로 종교개혁의 불길이 번져갔습니다.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구원이 온전했으까?'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로마 카톨릭은 구원의 도를 올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죄가 속량받고 용서받기 위해서는 대가가 요구된다는 것이 로마 카톨릭의 사상이었으므로 결코 과부의 두 렙돈으로 혹은 38년된 병자, 혈루병 걸린 병자는 주께 가 닿을 수 없는 것으로,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로 중세 교회는 우리 성도들을 억압했습니다. 종교개혁은 다름 아닌, 누구나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고 그의 아들을 믿기만 하면 그의 아들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 만인이 제사장이고 만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종교개혁의 대정신이었습니다. 본문 로마서 3장 23절부터 26절은, 지난 시간과 더불어서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이 서언에 해당한다면, 그것을 풀어 설명한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하게 회자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의(義)'라는 개념이었을 것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의'라는 것은 '올바름'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과 행실의 자세, 태도와 관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면, 일단 '하나님이 의롭다'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의가 특히 율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고 그들은 주야로 이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것을 삶의 제 1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의는 '인간에게 요구된다'는 측면에서 우리 인류는 이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것이 본문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를 이룬다는 측면에서 볼 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그 의를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그 자리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를 결코 이룰 수 없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불의하여 그저 그 값인 사망에 머물게만 되었느냐라는 물음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이 다시금 주목한 말씀입니다. 지난 주 마지막 본문 로마서 3장 22절은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고 했습니다.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본래 하나님의 의는 본문 23절에 말하는 것처럼 '이르러야' 됩니다. 우리가 그에게 '미쳐야' 되고 '이르러야' 되고 '가 닿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그 의를 '우리에게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난 주 본문의 마지막 절인 22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모든 자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것입니다. 우리가 가 닿아서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열심이,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적인 은혜요 전적인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초에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님의 의에 이르도록 지었습니다. 순종했으면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종, 죄로 말미암아 아무도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하나님 편에서, 그 의를 거두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우리에게 미치게 하시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미치게 됩니다. 본문 23절을 유심히 보면 의가 '요구되는 것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바뀜을 알 수 있습니다. '요구된 것'의 가장 상세한 기록이 율법인데 이제는 (우리가 그것에 가 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영광에 가 닿을 수 없게 된 우리에게 그 영광이 오히려 오시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2-14). 즉, 독생자가 오시는데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미치는데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미치는 방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24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증언합니다. (롬 3:24). 꽤 길지만 이것이 전체 한 계명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속량은 속한다는 말입니다. 대신 우리의 죄값을 치루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요구되어지는 것인데 이제 이것이 '의롭다 하심'으로 바뀝니다. 



2.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의롭게 살도록 요구(그러나 불가능)했던 것이 이제는 '의롭다 하심'으로 바뀌어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이것을 모르고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도적으로 하나님께 가 닿으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실 것이라는, 즉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하여 의를 이루는 신인협력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아무도 이룰 수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자에게 미치는 의입니다. 지난 주 설교 본문인 로마서 3장 22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본문 24절이 22절을 해석,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그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우리에게 미치는 의를 의미합니다.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대교리요, 칼빈이 '모든 구원의 진리가 되는 중심 축'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지었습니다. 세상의 신화처럼 악신(惡神)과 선신(善神)이 있지 않습니다. 선하고 자비로운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그가 모든 것을 선하게 지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 인류를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셔서 영광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이르는 것은 새 창조가 아닌 창조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바대로 온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베푸신 것을 누리고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지난 번 나눈 바와 같이 우리는 일단 누리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리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쟁취해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바입니다. 기차는 앞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영생의 길로 갑니다. 그러나 그것에 역행한 것입니다. 기차가 빙 둘러 반대로 가려고 하니 궤도를 벗어나 죽게 된 것이 인류의 모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모든 만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 -- 하늘의 또 다른 말로 보면 됩니다 -- 이 지으신 영광을 드러내는데 그 가운데 인류가 최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3. 

개인적으로 요새 책을 읽다 보면 참 어렵습니다. 입력할 때는 어느 정도 떨어진 컴퓨터로 하고 읽을 때는 바로 앞의 것을 읽으니 참 힘듭니다. 그래서 순간 어느 순간 눈이 나빠서 글을 못 쓰고 못 읽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청력이 보낼 조금 약한데, 상세한 소리를 잘 신경쓰지 못하는 편입니다. 엊그제 제가 산에 갔는데, 드디어 매미가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어린 아이처럼 매미를 잡아보려고 찾아봤습니다. 매미를 잡으려면 간단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잡을 수 있다'라고 생각해야 잡을 수 있습니다. 소리 나는 곳으로 따라가 보니 매미가 거기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청력이 충분함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이 눈으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고, 항상 그렇게 나눕니다. 그저 놀자, 눕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은 새 창조가 아닌 창조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지음받은 바대로 하나님께 이르는 것이 영광 올리는 것입니다.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영롱하게 우리의 눈을 지으셨습니까. 우리 눈이 얼마나 귀한 것을 보고 우리 귀가 어떻게 소리를 찾아 들어갑니까. 사실상 하나님이 우리를 영광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연인으로 우리를 지으셔서 그 가운데 완성에 이르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셨는데 인간이 그것을 거역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않고 공로를 내세울 때 필히 하나님을 거역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눈으로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듣고자 할 때 더러운 것을 보고 듣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중세 로마 카톨릭은 이것을 알지 못해 우를 범했습니다. 내가 내 의로 무엇인가를 덧붙이려고 할 때 죄가 되고 더러운 것이 되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미 다 주신 것을 활용하고 누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꽃은 씨에 이미 다 그 유전자로 인하여 완성된 형상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외에 다른 것을 덧붙여야 구원에 이르겠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중세의 암흑기 입니다. 우리의 공로를 내세울 때 필히 둘 중 하나, 교만 혹은 절망에 이르게 될 뿐입니다. 조금 잘되면 교만하고 조금 못되면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자들은 교만과 절망의 극단에 속하지 않습니다. 심중에 잠잠히 여호와를 감사하고 기뻐함이 넘칩니다. 매미를 잡으면 뭐하고 잡지 않으면 뭐합니까.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잡는 것에서 기쁨을 누리려 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꽃을 꺾어서 내 화병에 꽂아야만 희열을 누리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가 있는데 그것은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 잔이 넘친다'라고 한 것은 본래 인류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될 고백이었습니다. 인류는 아무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제 허무한 데 굴복하고 말았고 스스로 완성할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의 길은 꺾여버렸습니다. 온전치 못합니다. 잘 살아봐야 세상 사람들은 '공수래 공수거'라고 하여 인생의 헛됨을 논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을 받음으로 말미암습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속량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자리에서 먼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완성을 위하여 예수님의 손을 잡아야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죄를 속함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량받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의 속량, 하나님의 은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 이것이 종교개혁의 대정신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의 속량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속했습니다. 그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길은 그 자리에 서는 것이요 진리는 찾아내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바른 자리에 세우시고 찾아내게 하시고 그리고 생명의 열매를 갖게 하십니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는 말씀은 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찾으면 찾을 것'이라는 말씀은 진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하면 주실 것'은 생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두드리면 열리고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의 속량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4. 

본문 25절은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우리를 세우셨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된 것입이다. 그것은 우리의 죄가 사함받고 용서받아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화목'이라는 것은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로 영원히 품 속에 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품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의 제물로 주시고 그의 은혜로 값없이 속량하심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셨는데 그 의를 요구하심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 부분을 곰곰히 생각해봐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가시같이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가 슬쩍 바로 25절, 26절에서 '의로우심'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의'가 '의로우심'으로 바뀝니다. 여기에서 묘한 전환을 봅니다.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셨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의를 먼저 요구하셨다면 (우리에게서) 그것을 (찾아보아) 심판하거나 누리셔야 할텐데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데,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로써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데, 그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바로 '아들의 속량 가운데 값없이 은혜로서 우리를 의롭다 하심', 바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인 것입니다. 

저는 밤에 기도하면서 그 생각을 해 봤습니다. 의를 요구하신 것은 의로우심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사랑입니다. 아들을 속량의 제물로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우리는 안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의로우심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로우심, 올바르심은 아들을 주셔서 우리를 그 값으로 사신 것, 즉 무름 입니다. 우리를 물러 주신 것입니다. 되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의는 한가지 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심을 드러내셔서 우리를 그 사랑 가운데 의롭다 하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믿음 뿐입니다. 믿음 외에는 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저는 어릴 때 매미를 한 번도 잡지 못했습니다. 곤충채집을 해도 기껏해야 쉬운 여치, 사마귀였는데 친구들은 다양한 매미를 채집해 왔습니다. 벌써 제가 잡은 곤충과 격이 다릅니다. 그런데 커서 매미를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매미잡는 법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묘한 종교개혁의 대(大)사상 대(大)교리가 들어있는데,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신 분이 이제는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그것입니다. 그 자신의 의로우심은 뭐냐, 바로 아들의 속량입니다.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셔서 무름의 값으로 지불하셔서 누구든지 그것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 여겨주신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것 외에는 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이 의 밖에 없습니다. 전문적인 말로 하면 대리적 속죄의 의, 대리적 무름의 의입니다. 이것 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해 놓으시고는 아들을 보내셔서 다 이루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는 사랑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약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신약백성들에게 그것은 이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세속에는 선신, 악신, 심판의 신과 자비의 신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신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의를 드러내시는데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심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은 곧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사랑입니다. 아들의 속량 가운데, 길이 참으심 가운데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여기심 받게 한 것입니다. 그 의가 우리에게 미쳤으니 그것으로 우리가 영생의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5.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자주 나눴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맞습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깁니까. 하나님의 담기심, 하나님께 맡기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전적인 의뢰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믿음이 특히 이 때에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들의 공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이 네 개념이 오늘 본문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말한 구원의 네 가지 요소입니다. 구원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래 참으신 가운데서 그 인자하심, 의로우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공로가 우리의 구원의 재료입니다. 아들을 피로서 화목제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지난 주 본문 로마서 3장 22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번 주 본문 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로서 그러지 못했는데 우리는 이제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며 영광에 가 닿을 자 없습니다. 오직 믿음 전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종'이라기보다 '아멘'입니다. 그 모든 '순종'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아멘'함으로 그의 순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나를 위한 고난이요 그리스도의 징계가 나를 위한 화평이요 그리스도의 채찍맞음이 나의 병 나음이요 그리스도의 외로움이 나의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혜요 그리스도의 가난하게 되심이 나를 부요케하려 하심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문을 두드리셔야 합니다. 찾아야 합니다. 구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 가운데서만 생명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아멘'의 방법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남김 없이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예수 그리스도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고 버림 받으신 것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실 때 하나님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그러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은 이분법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의'이고 하나님의 의가 '사랑'입니다. 구약에서는 헤세드, 신약에서는 아가페입니다. 두 가지가 있지 않습니다. 구속주의 사랑은 창조주의 사랑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많이 기도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십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지으신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 "이 때"에, 지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저는 한 때 이것에 부대낌을 느꼈습니다. 굳이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셔야 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시되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아들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우리가 많이 기도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사랑과 의로우심을 드러내시는 기회를 얻으시기 위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깨어서 기도하시고 하나님 앞에 잠잠히 기도하시고 이를 즐거워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