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14]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19)] 오직 믿음의 법으로 (롬3:27-31)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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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4]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19)] 오직 믿음의 법으로 (롬3:27-31)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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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3: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 3: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롬 3: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롬 3: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녹취록>




1.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그 지식 가운데 확신하며 사는 듯 하지만 지식도 우리를 많이 속입니다. 저는 어릴 때 연개소문이 나쁜 사람인 것으로 알고 배웠습니다. 의자왕을 죽이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이 연개소문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언제인가 유학을 다녀오니 텔레비전에서 연개소문을 주제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광개토왕 다음 가는 인물로 묘사한 것을 보면서 어릴 적 배운 것, 생각했던 것이 틀린 것인가 생각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중국에 몇 번 다녀왔지만, 당시 갈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지금 중국은 정말 잘못된 나라'였습니다. 즉, 장개석이 세운 나라, 즉 지금의 대만이 융성해서 언젠가 중국 땅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중국에 가보니 장개석과 주변인들은 부패덩어리요 군부로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오히려 마오쩌둥이 좋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일련의 경험을 통해 제가 어릴 때 배운 지식들이 다 틀린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천문학 분야의 지식도 그렇습니다. 어릴 때 외운 태양계의 행성을 말할 때 어느사이에 명왕성을 제외한 8개로 말합니다. 모든 지식이 우리에게 영구적인 것 같아도 그것마저도 뒤바뀝니다. 스티븐 호킹도 특이점이니 블랙홀이니 화이트홀이니 빅뱅이니 얘기를 할 때 다 검증되어 완전히 맞는 줄 알았는데 정작 그 본인의 입술을 통해 그 이론들이 잘못됐음을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것을 참 지식으로 삼아야 하나요. 

우리는 지식의 법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지식의 법은 우리의 지식입니다. 우리가 탐구하고 우리가 발견, 발명하고 우리가 가서 살펴보고 현미경적으로 망원경적으로 탐구하여 결론에 이르는 그런 지식입니다.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사실이 분명한 질서 같아도 이것 역시 사람들의 공리, 수학적 정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 이미 20세기 초 철학, 양자물리학 분야 등에서 숱하게 제시된 바 있습니다. 

본문 27절은 우리가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의 법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행위와 믿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행위와 믿음을 대조할 때 행위는 공로입니다. 믿음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이 베푸신 무조건적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을 달리 표현하여 믿음의 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유일한 방식이 믿게 하는 것입니다. 믿지도 않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는 않습니다. 믿게 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믿음도 은혜의 선물인데 그 믿음 가운데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은혜는 항상 함께 있습니다. 둘 중 하나가 빠져 홀로 서는 일이 없습니다. 믿음은 은혜를 떠먹는 숟가락입니다. 숟가락 자체에 영양분이 있지는 않지만, 이것이 아니고서는 맛있는 음식을 떠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행위와 믿음을 대조할 때 행위는 공로이고 믿음은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렇게 협의로 주석하지만 좀더 넓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을 하나님의 계시로 본다면, 믿음을 계시의 법,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하나님께 속한 지식의 법으로 본다면 27절의 '행위'는 이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성의 법이 아니라 계시의 법으로 알려 주십니다. 이성은 우리가 스스로 탐구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27절 말씀은 두 측면에서 일단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계시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공로가 아닌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고자 합니다. 바로 '복의 개념'입니다. 우리가 사는 가치의 개념으로 본문 27절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옳다 하는 바'가 아니라, '하나님이 옳다 하는 바'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본문 27절의 가치적인 측면 곧 복의 측면입니다. 복은 '하나님이 옳다고 여겨주는 것에 속한 것' 입니다. 그게 우리에게 유일한 윤리가 되어야 합니다. 지상의 윤리는 사람을 살리고 만인을 이롭게 하는 공리, 그것을 복으로 여깁니다. 이와 같이 철학자들이 도출한 결론과 달리 성경은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것을 복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복입니다. 

2. 

이런 내용으로 본문 27절을 다시 생각해보면, 첫째로는 이성이 아닌 계시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탐구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지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두번째는 우리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내가 땀흘리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이 여름의 때 얼마나 애를 쓰고 땀을 흘립니까. 농부에게 여름이 따로 있습니까? 제가 어릴 때 한낮에 잡초를 뽑고 일하는 농부의 모습을 본 것이 기억납니다. 그런 것을 보면 농부의 여름의 땀으로 말미암아 가을의 열매가 있는 듯 하지만 가을의 열매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우리가 뭘했나 싶습니다. 요새 수박을, 사과를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 것은 없습니다. 땀을 흘렸지만, 오히려 땀을 흘린 자에게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쓸 줄 아는 사람은 '내가 다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만이 열매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열매를 맺히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번째,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진리입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이 옳다 하는 바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옳다 하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 그래서 자랑할 데가 없다는 것이 본문 27절의 말씀입니다. 내 지식도 공로도 판단도 내가 옳다 하는 바가 있어서 하나님이 그리 해 보라고 시킨 것이 아닙니다. 옳음을 가르쳐주신 이가 하나님입니다. 인생과 진리를 깊이 탐구하는 사람은 근원을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지식의 근원, 도덕의 근원, 모든 열매를 맺게 하는 공로의 근원도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 자랑할 데가 없다고 말합니다. 자랑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일단 좋을 수 있지요. 그러나 이윽고 불안합니다. 한 때 그런 경향이 있었을지 몰라도 저는 지금 염세주의도 회의주의도 아닙니다. 이 여름을 나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아주 더울 때 낮잠을 자고 머리가 지끈거려 일어나도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이제 그 습관은 든 것 같습니다. 짜증난다고 짜증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봅니다. 많은 일사의 햇빛 가운데서도 작은 미풍을 감사합니다. 선풍기를 꺼야 신선한 바람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풍기를 끄면 밤에 정말 시원합니다. 왜 그럴까요. 선풍기가 셀수록 신선한 자연의 공기가 나가니 인위적인 공기로 더 더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랑하십시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으로 자랑하십시오. 여호와께서 나에게 이런 일을 행하였다고 자랑하십시오. 이것은 자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를 자랑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3.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우리는 다 죽은 자 입니다. --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 주님도 방금 본 요한복음의 말씀에서 '죽은 자들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 입니다. 뭘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에서 선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삼손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죽은 사자에게서는 꿀이라도 생기지만, 인간이 죽으면 꿀은 커녕 악취만 납니다. 이렇게 죽었던 우리가 무슨 자랑을 합니까. 향기, 맛,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절대 믿음의 법 외에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법으로 '허물로 죽은 가운데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게 하심"을 얻었습니다.(엡 2:5-6).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 생명이 없이는 우리는 다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죽은 자에게 법이 필요하나요? 질서가 필요하나요? 살아 있어야 질서가 있습니다. 질서는 살아 있다는 표입니다. 죽은 자들에게 무슨 율법이 역사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언약의 법이고 언약의 법은 하나님이 전적인 은혜로 살려주신 사람에게만 역사합니다. 율법은 믿지도 예배치도 않는 자들에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십계명도 역사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은혜로 살아나야 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법이 있고 본문 28절,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고 아는 것입니다. 본 절은 성경 전체 중 구원의 진리를 가장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많은 경우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을 종교개혁의 구절로 보지만, 사실 이신칭의의 교리가 가장 명확히 나오는 구절을 로마서 3장 23절, 넓게는 19-31절, 좁게는 23-31절, 더 좁게는 27-31절,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믿음의 법, 언약이 있어야, 무조건적 은혜를 믿어야 비로소 율법이 우리 안에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언약의 법이고 율법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폐할 수 없다고 갈라디아서 기자가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고급스러움은 '법으로부터 은혜로' 나가지 않고 '은혜로부터 법으로, 감사로부터 행실'로 나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적 감사입니다. 이것이 성도님들의 고상함입니다. 먼저 은혜, 감사, 영광드리는 예배로 살 때, 열매가 맺히는 삶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뭘 하나 받으면, 내가 뭐 하나 했다고 감사하는 것은 품격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격입니다. 성도들의 고상한 품위는 잘 입은 옷, 산해진미가 아닙니다. 먼저 감사하고 전적인 은혜 가운데 즐거워하면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믿음의 법이 먼저 있고 율법의 행위가 따라옵니다. 이 때 우리에게 두려움이 없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 모두 허무주의에 빠집니다. 교회에 30년, 40년 다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을 떠날 때 어쩌면 침상에서 몸부림칠지도 모릅니다. 이 하나님의 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우리의 행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진정한 감사의 고백이 즉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아니하면, 믿음이 없이는 율법의 행위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언약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율법만 들고 열심히 지켰다고 해도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의미 없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언약의 백성으로 오직 믿음입니다. 내 인격도 행실도 오직 의롭다 하시는 이가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짐을 알고 그런 마음과 생각의 습관이 들었을 때 이 여름의 더위도 감사함으로 은혜를 헤아리면서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덥다고 해도 불평이 안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조금 게을러진 것 같기도 합니다. 전에는 이 더운데 뭘하겠냐 하면서 불평이 나왔는데, 이제는 더운 것은 같으나 감사가 나옵니다. 

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 베풀어주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한 줄기 바람 없어도 이미 시원합니다. 요나가 박넝쿨이 있어서 시원하고 없어서 덥고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백성이므로 이미 시원한데 거기에 하나님이 그것을 인치려고 바람을 주신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믿는 백성에게 바람도 안주시냐고 하면서 불평하면 조건의 고리로 들어갑니다. 바람이 불면 춤추고 감사하다가 바람이 그치면 불평덩어리로 짜증을 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오직 믿음의 법으로 하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약이나 신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29, 3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의 하나님이냐, 아닙니다. 이방인의 하나님도 됩니다. 이 말은 이방인이 유대인처럼 살아야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늦게된 자의 비밀입니다. 유대인이 먼저이고 이방인이 나중인데 구원의 질서는 이방인에게서 먼저 성취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30절입니다. 이방인이 할례를 받아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도 믿어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의롭다 하실 분은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선포입니다. 할례가 아닌 믿음으로, 무할례자 곧 이방인의 믿음으로 유대인도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은 이방인이 나타나기 위해 준비한, 예표한 백성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좋아하면 안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표로 사용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신약시대에 이방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원을 감사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아직까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32절은 본문의 결론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율법을 폐지하냐 하니,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27, 28절 까지만 읽고 31절을 안읽습니다. 그래서 율법폐지로 생각합니다. 율법은 믿음의 법으로 성취됩니다. 성취는 폐지가 아닌 완성입니다. 31절은 그것을 '율법을 세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은혜로 하나님이 옳다고 여겨주시고 선하게 보시는 그 선함으로 다시 말해, 우리에게 주신 그 지식과 은혜와 선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함이 아닙니다. 간혹 우리 성도들은 그래도 끝내 자신의 성격이 나온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은혜를 못 받아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 성격 너머의 것이 나와야 진짜입니다. 성격이 좋든 나쁘든 둘 다 그 너머, 하나님이 주신 선함이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역사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주님이 보좌 우편에서 간구하십니다. 그래서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 사랑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 5:6). 율법이 믿음인데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5. 

우리 십자가지기교회의 모든 성도와 부족한 종이 이런 자리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저도 이 땅에 살아 있을 동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 더 닮고 싶습니다. 조금 더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싶습니다. 그러나 정말 모났습니다. 이번 주 밥을 먹다가 마리아에게 이것 좀 먹으라고 하니까 '강요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도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서 진짜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미역국 말아놓은 제 밥과 과일을 제 방 책상에 가져가서 먹었습니다. 마리아가 저를 뭐라고 생각할까요. 아빠가, 설교하는 목사라는 분이, 음식 먹는데 강요하지 말라고 한 마디 했다고 밥과 과일을 들고 방으로 가니 말입니다. 정말 내 안에 선함이 없지만 포기하면 안됩니다. 성도의 담대함이 따로 없습니다. 무엇이든 구하면 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살리신 분이 내 성품 못고쳐줄까요. 우리는 선해져야 합니다. 선해야 됩니다. 저는 요즘 착한 사람들이 좋습니다.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보아도 자수성가한 돈 많은 사람보다 착하게 사는 사람이 좋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야 하지 않을까요. 누가 봐도 저 사람 그리스도인이라, 착한 사람이라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옛날보다 많이 착해졌습니다. 믿음의 법으로 온전해집니다. 

히브리서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자고 합니다. --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히10:23). 믿음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믿음의 법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첫째는 영생, 천국, 부활의 소망이요, 둘째는 거룩해지는 내 삶의 소망, 세번째는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승리가 우리를 통해 일어나는 소망입니다. 우리 주위가 가정이 사회가 국가가 변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믿는 도리의 소망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의미있는 우직임을 할 수 있고 향기를 내고 맛을 냅니다. 여러 복잡한 것이 없습니다. '믿음에 의해서 믿음을 통하여' 입니다. 

이 본문에 대한 칼빈 주석을 보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유대인들은 믿음에 의해서(by grace) 구원을 얻었다면 이방인들은 믿음을 통하여(through faith)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신약시대는 사실 '믿음을 통해/말미암아(through faith) 은혜에 의해(by grace)' 입니다. 믿음이 공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도 믿음에 의해(by faith)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칼빈은 구약시대에는 믿음에 의해서(by grace)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이해해보면 될 것입니다. 믿음에 의해(by faith)는 집안에 있는 작은 돌입니다. 집안의 마당에서 놀다보니 돌이 있어서 그 돌을 갖고 공기놀이도 하면서 놀았습니다. 집안의 돌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믿음을 통해(through faith) 입니다. 담 너머로 들어온 돌입니다. 큰 신학적 해석이 아닐지는 몰라도 제 나름대로는 은혜가 되는 관점이었습니다. 이제는 은혜가 우리에게 담 넘어 들어온 것입니다. 본래 외인이요 이방인이요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있던 우리에게 이제 은혜가 툭 들어온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면 온전함이 있고 우리의 행실에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내 착함을 내것으로 여기고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열등감도 교만함도 떨어질까 두려움도 없습니다. 박태환 선수가 뭘 잘못했길래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야 합니까. 메달 하나 없던 수영 종목에서 금메달을 많이 땄지만, 아무도 그를 그렇게 봐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금메달 받았어도 다음 경기에서 예선 통과를 못하면 고개들고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알면 그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바깥의 바람은 내 엉덩이를 들썩이게 할지 몰라도 내 마음은 춤추게 하지 못합니다.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선풍기 바람은 엉덩이는 들썩이게 할지 몰라도 내 심령을 즐겁게 하지는 못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주시는 심령의 즐거움, 감사, 기쁨으로 인해 우리가 춤을 춥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