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21]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20)] 아브라함과 다윗의 증거 (롬4:1-8)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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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1]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20)] 아브라함과 다윗의 증거 (롬4:1-8)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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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4: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롬 4: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롬 4: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롬 4: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롬 4: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녹취록>

1. 

우리는 복음, 구원의 핵심,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원리에 대해 계속 배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그 핵심이 3장부터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인한 사망에서 다시 살아나는데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 의롭다 여기심을 받아서 다시 살아납니다. 다시 살아난 것은 옛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평소 보이는 것으로 살고 습관으로 헤아려집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는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예컨대 칠흑같은 밤에 깊은 산 속에 길을 잃은 것과 같은 지경에 있다고 한다면, 그 때에는 믿음의 세계가 열려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의 세계가 열립니다. 저는 김원진 전도사님께 그 침상 머리맡에 성경 구절을 써서 중환자실에 갖다 주었습니다. 밤새 혼자 있으면서 답답함과 어려움이 클텐데 말씀을 보며 힘을 얻으라고 히브리서 11장 1절, 2절을 써서 줬습니다.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믿음의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우리의 정함, 영적 판단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운명을 논하고 복과 저주를 논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믿음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걸출한 신앙의 두 인물을 만납니다. 이들은 다른 것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길이 생길 정도로 하나님만 따라다니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족장 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세겜, 헤브론, 브엘세바, 애굽까지 내려갔다 올라오는 길이 있고, 야곱과 이삭이 다닌 길들도 있는데 그 길을 족장 길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믿음의 조상을 족장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에 가면 족장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 길을 알고 간 것이 아니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말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여정은 그렇습니다. 이번 여름 제가 이스라엘 다녀와서 귀국하는 날 김원진 전도사님 소식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마음이 심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책도 안잡혀서 히브리 문법책을 두 권과 단어집을, 그리고 금요기도사경회에 아가페 출판사 사장님이 갖다 놓으신 무디 성경지도책를 읽었습니다. 성경지도책을 다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성경지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길은 바로 아브라함이 순종하면서 갔던 길,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들어간 길, 그리고 주님이 가신 길, 사도 바울의 3차 선교여행 길입니다. 우리 주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은 차치하더라도 아브라함의 길과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길, 그리고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 길의 공통점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성령이 지시하는대로 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무슨 예상과 일정을 잡아 간 것이 아닙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내일 일정이 전혀 없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이 이끄는대로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차 선교여행 때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지방으로 가서 전대미문의 큰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2차 전도여행도 같은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성령이 환상에 나타나 마게도니야 지방으로 가라고 해서 유럽 지방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지방으로 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지시함을 쫓아 가는 것입니다. 

2. 

우리 믿음의 종들도 성령의 지시함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합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믿음으로 증거를 삼았습니다. 믿음으로 증거를 삼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안에 믿어지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증거는 확신하는 재료입니다. 믿어지는 바로 증거를 삼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보여주거나 들려줘서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바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바로 행하고 목숨이라도 내거는 것입니다. 순교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다윗이나 모두 그렇습니다. 다윗은, 특별히 이스라엘을 가보면 알지만, 도망다닌 곳이 여정이 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오늘 본문에 행위가 아니었음을 말하려고 등장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계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할 때, 이 두 사람의 이름이 거론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역사적 인물을 말할 때 그것은 그들의 행적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다윗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믿음 때문에 거론되는 것입니다. 달리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는 이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가르침을 이야기합니다. 이신칭의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신득구(以信得求)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은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말은 구원을 받는 자에게는 어떤 공로도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없어서는 안되지만 믿음 자체가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시원하게 하는 물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두레박이라는 말입니다. 시골에 가면 우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하수를 건져내기 위해서는 두레박을 던져야 합니다. 믿음은 두레박과 같은 것입니다. 두레박이 믿음이라면 그 안에 있는 물은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예수님의 공로, 그의 피와 살입니다. 그것을 먹어야 우리가 힘을 얻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공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두레박을 던졌는데 우물물이 없어서 두레박이 깨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공로가 있고 행위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빈 우물에 두레박을 던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없이 내 믿음만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빈 우물에 두레박을 던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되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그 의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3장 22절, 24절 등에서 지난 시간을 거쳐 배운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특히 24절이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그 공로가 우물의 물이고 빵이고 떡입니다. 이 공로를 우리에게 거저 주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첫째로 그리스도의 공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살이고 피이고 떡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한 쪽에 은혜가 있고 다른 쪽에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있고,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개가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한 것입니다. 

3. 

우리 믿음의 두레박은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작용합니다. 달리 말하면, 믿음의 두레박은 세상에 던지면 다 깨집니다. 예수님께 두레박을 던져야 합니다. 수가성(城)의 사마리아 여인이 두레박을 던져서 우물을 길어 먹었는데 그 우물은 먹으면 다시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니 예수님에게 두레박을 던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샘에서 길어 먹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갖 신령한 것의 원천, 샘입니다. 주님의 샘에서 납니다. 그래서 '즐거이 여호와의 울타리에 머물자'고 시편에서 말했다면 우리는 이제 '즐거이 그리스도의 품 속에 머물자'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는 이 고백 하나만 가지고 천국에 가면 됩니다. 새로운 공로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밖에 없습니다. 교회에도 공로가 없습니다. 교회가 특별하게 있지 않습니다.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그 안내자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믿음은 도무지 공로로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롬 4:2).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그가 다 이루신 것은 곧 그리스도의 나심, 사심,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 즉 예수님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의 우물이 되신 것처럼 우리의 우물이 되신 것입니다. 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의를 아브라함이 가졌고 다윗이 가졌다고 오늘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지만, 하지만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십자가를 자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 대해 히브리서 3장 6절은 '자랑하는 자가 그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6). 예수님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집, 곧 하나님 나라의 기업입니다. 이에 반하여 본문 4절은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롬 4:4)라고 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그 삯을 보수로 여깁니다. 은혜가 아닙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하고 희생했으니 열매를 따먹는다고 말하고 구원이 나의 행위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결코 은혜를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고 모두 하나님이 하셨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아직 해가 떠 있을 때는 내가 길을 찾고 뭔가 한 것 같습니다. 보이니까요. 그러나 칠흑같은 어둠이 오면 아무 것도 보이지도 만져지지지도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게 됩니다. 우리는 자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삯이 아닌, 전적으로 거저 받은 은혜를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롬 4:5)고 했습니다. 상당히 상세하게 말합니다. 이런 구절이 로마서 4장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4. 

학교에서 새 학기를 준비하는 개강 수련회가 있습니다. 수련회 제목으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들의 복'으로 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길고, 정서에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난 학기 제목은 '성령의 불' 등과 비슷한 종류였습니다. 그래서 무엇으로 정할까 하다가 마태복음 11장 5절 말씀인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로 정하자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화산에서 변형되었을 때 하늘로부터 난 소리입니다. 본문 6절은 '일한 것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본문 2절을 보아야 합니다. 2절은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이라고 합니다. 행위는 '의롭다 함' 곧, '의로움' 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의롭다 여기심'입니다. 행위의 세계는 '의롭다'는 판단입니다. 우리는 행위의 세계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다 죽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서는 '의롭다 여기심'을 받습니다. 행위는 '판단'의 세계, 믿음은 '여기심'의 세계입니다. 곧 전가입니다. 우리는 '여기심'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어두운 칠흑같은 밤에 발을 뗍니다. 아무 것도 우리는 모릅니다. 지금 제가 병원에 가서 기도하면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이제 종이 어떻게 구할 줄 알 수 없으니 그저 주님께서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전적인 믿음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구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고 기도를 하게 됩니다. 전에는 제 마음 속에 이것 저것 구해야 할 것들로 구체적인 기도를 했지만, 이제는 알 바를모릅니다. 주님이 다 고쳐주시고 세포 하나라도 회복시켜달라고 밖에 기도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저 아브라함, 사도 바울과 같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나가지만 주님이 우리 발자국을 온전한 것으로 여겨 주시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가 지금 기도를 많이 해야 할 때입니다. 부담이 아닙니다. 저도 학교에서 지난 주 학생들을 면접하면서 쉬는 시간마다 기도했습니다. 저에게 큰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김원진 전도사님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제도 병문안을 가니 교회를 걱정합니다. 이번 주에도 주일에 교회에 가지 못하겠다고 교회 걱정을 합니다. 배를 만지면서 기도했습니다. 배를 만지면서 기도해주니 좋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지금이야말로 우리 십자가지기교회에 하나님이 칠흑과 같은 어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 아브라함, 다윗에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가라고 하신 것처럼 동일하게 역사해 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행위로는 나갈 수 없습니다. 의롭다 여기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 일한 것이 없지만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들의 복'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 11:8-9). 

5. 

갈 바를 알면 내 고집이고 주관입니다. 갈 바를 모르며 탄식하고 기도할 때 믿음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 공부하러 가는 고승호 목사님도 들으십시오. 내가 알고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손을 얹고 기도할 뿐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가, 베드로가 기도할 때 각종 병든 자와 죽은 자도 살아났습니다. 종이 기도하면 역사가 나타날 줄 알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약속한 땅이 있습니다. 어려움 없이 주의 종이 된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실 것은 그가 힘든 일을 스스로 겪고 이김이 아니라,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므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것이 어렵고 힘들어 보이지만 환난 날에 나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 것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3). 루터는 이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행위를 강조하니까 로마서와 야고보서가 말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 말씀을 읽지 못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의로 여기셔서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고 아들을 바치는 데에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출발은 믿음입니다. 우리도 다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호를 받아야 합니다. 어제 밤에 김원진 전도사님이 일반 병동으로 옮겼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밤에 얼마나 외롭습니까. 그래서 제가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2절과 요한복음 3장 35절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함께 써서 줬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모두 이러한 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시편 32편에서 노래한 것이 본문 7절과 8절에 나옵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7-8). 죄를 인정하지 않고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여기시지 않습니다. 죄로 인정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특별히 시편 32편 6절은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기도 많이 하십시오. 결코 그 암세포가 넘어서지 못하도록, 사그라지도록 기도하십시오. 결코 넘어서지 못합니다. 기도하십시오.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면 기쁨이 있고 선함이 있고 시원함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이 일로 슬퍼하거나 낙담하거나 하지 마십시오. 중한 병이 맞지만 못고칠 병이 아닙니다. 저도 가서 김전도사님에게 빨리 일어나서 수업도 듣고 교회도 섬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믿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