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03]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3)] 믿음의 기도의 열매 (롬1:8-1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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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3]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3)] 믿음의 기도의 열매 (롬1:8-1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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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녹취록>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 가는 길 위에서 주님을 만나고 사흘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많은 곳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아덴 등 가는 곳마다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 그가 교회 개척지에서 돌아와 로마에 가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보는 로마서는 고린도에서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분쟁 등 문제가 없지 않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서 예루살렘을 돕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자신이 직접 개척한 것이 아니지만 로마에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가 있어 믿음의 소문이 난 것을 듣고 아주 기뻐했습니다. 주의 종들은 개척한 자가 누구인지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가 흥왕하는 것을 것을 기뻐합니다. '우리교회'라기보다 '하나님의 교회', '주의 교회', '세계 교회', '보편적, 우주적 교회'의 흥왕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지 영혼 이전에 교회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교회가 생명 이전에 있다고 여겨 교회에 우선권을 주고 교회에 따라 생명의 결정을 논하지만 우리에게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 몸이 되는, 그 한 분에게 접붙임을 받고 지체가 된 자들이 교회를 형성하는 본질로 믿습니다. 사람의 수, 방의 수, 건물의 크기로 교회가 헤아려지지 않습니다. 누가 개척했는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흥왕한 교회가 어느 시대 쇠퇴하는 모습도 보이고, 작고 미비한 교회도 새롭게 흥왕시키시고 살리시는 모습을 봅니다. 당대 로마는 세계의 중심지였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처럼 모든 세계 민족이 한 도시에 집중되고 모든 길이 그곳으로 통하던 때가 많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국 이 로마에서 순교를 당하지만 그 일을 먼저 마음 속에 바라는 것으로 열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롬1:8) 우리는 많은 일을 판단하면서 시작하지만 그 판단은 결코 청신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감사로 시작합니다. 감사가 청신호요 판단은 적신호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바라게 하시는데 그것이 감사입니다. 감사가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바랄 수가 없습니다. 내가 판단해서 바라는 것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다 이루신다는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감사가 넘칩니다. 또한, 감사하는 마음은 성도 간에 서로 통하는 가장 귀한 마음입니다. 믿음은 도구요 감사하는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배가 고파서 길을 가는데 누가 빵을 줍니다. 그러면 감사의 마음이 듭니다. 이 마음이 성도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서로가 서로 통하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 감사하는 마음,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 있었고 이 마음이 서신을 통해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전달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믿어서 구원에 이르고 순종하지만(롬1:5 -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사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믿어서 순종에 이른다'는 것 보다는 '믿음의 순종으로'라고 해석되는 것이 합당합니다. 즉, (主: 믿음이 어떤 행위조건이 되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도 순종해서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순종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떡을 주니까 받아 먹는 것, 그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은 믿음을 보이기 위한 어떤 헌신 혹은 행위를 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벨은 반대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는 '믿음의 순종'입니다. '믿는 것이 곧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믿음에는 감사가 있습니다. 믿음에는 감사가 넘치고 그 감사가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공동체를 하나되게 묶어 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힘든 일과 어려움이 있어도 감사와 믿음으로 힘을 얻습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셨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종이 있으므로 성도들이 필히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감사로 제사드리는 자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무엇으로 제사드리냐? 구약에는 각종 제사와 제물이 있고 절차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다른 제물과 제사법이 아닌 감사로 제사를 드립니다. 이 시대에 제사가 바로 예배일진대, 헌금 혹은 재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모든 의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는 감사하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더 이상 우리 편에서 공로는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져가고 준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는 그리스도의 의로 됐습니다. 예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의 마음이며 그것이 바로 아벨의 제사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는 마음입니다. 그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자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감사는 비가시적이지만, 감사에는 힘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지혜를 얻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지혜가 사라지고 흑암에 갇힙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은 탁 트입니다. 그래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제가 자주 말씀을 드리는 것처럼 모든 제사, 예배, 헌신과 하나님 앞에 나아감의 기본은 감사입니다. 또한 역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를 원하십니다. 이 감사가 떨어질 때 우리는 판단합니다. 감사로 판단을 넘어섭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감사가 우리에게 충만할 때 지혜와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일 가운데서 능력을 얻게 됩니다. 감사가 소망이 됩니다.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우리에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신 것, 그것을 미리 감사하는 자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의 궁정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고급스럽고 격이 있는 삶을 살려면 감사하십시오. 아무리 많이 가지고 높아도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은 천해보입니다. 어디를 가도 까탈스럽고 불평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음식을 내어오는 사람에게 성질을 부립니다. 왕후의 반찬을 먹어도 불평하면 천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시105:1) 본문 8절에서 사도 바울이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을 감사한다'고 할 때 그것은 믿음이 거저 주신 선물이고 그것이 전해진 것에 감사한다는 의미입니다.
감사는 본능적인 것이 아닙니다. 본문 8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는 감사만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고 생명을 주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이루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모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예비되고 준비된 것을 기도와 간구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에는 감사가 앞섭니다. 없는 것을 취한다면 안절부절못하나, 이미 다 주신 것을 기도하게 하시므로 기도와 간구의 본질은 감사입니다. 그럼 의미에서 모든 기도는 다 서원기도입니다. 서원기도는 이미 된 줄 믿고 미리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무슨 제물 혹은 헌금을 준비해서 서원기도가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이미 예비되었고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주의 나라를 위해 나아가고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간절함은 감사함 없이는 가질 수 없습니다. 다 이루었고, 생명의 떡과 갈하지 않는 음료가 있는데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볼 때 간절함으로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지 아니하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는 자는 구원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므로, 다 이룬 그것이 있으므로,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간절함이 바로 감사함과 소망과 확신에서 생깁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해서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로마 사람들이지만 사도 바울이 보기에 그들은 실상 죽은 자요, 떡과 음료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죽어가고 목말라가고 허덕이는 그들에게 간절함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가기 전에 로마 교회에 믿음을 주셨습니다. 본격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미 많은 핍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로마 교회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그 믿음의 소문이 사도 바울에게 심령으로 전해졌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믿음의 소문이 전해졌다는 것은 믿음이 역사가 일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1:3) 믿음은 필히 말씀을 믿는 것이고 믿음의 소문이 전해진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흥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소문이 날 때 말씀의 소문이 나야 합니다. 어느 교회가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는데 말씀의 흥왕됨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은 제1요소가 하나님의 말씀, 지식입니다. 믿음의 소문이 퍼짐음 복음이 퍼지는 것입니다. 그의 아들의 복음입니다. 부흥의 역사는 복음의 역사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부흥이 일어나 교회가 커진 후, 어느 순간 복음은 사라지고 교회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부흥 후에 두렵고 떨림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외침이 후진적으로 보이고 세련되어 보이지 않아도 복음의 핵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부흥된 이후 그리스도는 없이 교회만 남은 것이 아닌지요. 교회의 소문은 퍼지는데 정작 복음은 퍼지지 않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물로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받은 자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감사함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1:9) 예수 그리스도는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주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요 복음의 빛으로 사용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르심에 따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지"를 항상 담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등 그의 서신서들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의 이런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인, 야만인을 위해서 죽으셨음을, 지혜자 뿐만 아니라 야만인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음을 사도 바울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공유되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것임과 동시에 택함받은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해질 때 교회가 온전해집니다.
이 봄에 꽃이 얼마나 만개했습니까? 외국에서 생활해봤지만, 스코틀랜드, 미시간에 있어 봤지만, 정감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땅이 아름답습니다. 진달래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살구꽃, 벚꽃, 목련꽃, 진달래꽃이 지천으로 피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는 지천으로 널려 있는 진달래보다 더 크게 번지고 확산되야 합니다. 그 보혈이 바로 교회가 하나되는 핵심입니다.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했다]"(롬1:9)고 한 것이 그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다메섹 가는 길 위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지를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은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예수님)를 죽이려고 하는 자도 알게 하시려고 만국의 구세주로 예수님이 오셨음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라고 했습니다. '항상'은 마음을 항상 놓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심중에 항상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함'은 그 생각과 마음을 토설한 것입니다. 마음에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너희를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마음 속으로만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믿음으로 그것을 내놓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물론 소리로 부르짖음도 있지만 요지는 이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감사를 우리를 통해 받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는 그러므로 형식이 없습니다. 노래 역시 예전에는 우리나라의 전통 방식에 따라 어떻게 부를지를 정했지만 요즘은 모든 방식으로 다 부르지 않습니까. 기도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두 요소는 있습니다. 진실해야 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시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진실하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간절하게 '주여, 정말 원하나이다'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사람들에 대해서 말했다고 말합니다. '항상 기도에 쉬지않고 너희를 말하며'라고 했습니다. '말한 것'은 그들을 계속해서 기억하면서 중얼거렸음을 말합니다.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한나가 계속 입으로 중얼거린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에서 새로운 시대의 기름붓는 종인 사무엘이 났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한나의 중얼거림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서 한나에게 술에 취한 것이냐고 물었지만 말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항상 쉬지 않고 '너희를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한번 던져보고 아니면 그만인 것은 안됩니다. '주여 원하나이다.' 벤치에서, 달빛 아래에서 그래야 하니다. 격식을 갖추고 두세시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끌어 가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간절히 항상 그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금방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우리 자녀들을 위한 기도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그의 뜻에 합하게 자라게 해 달라고 항상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말하고 항상 고합니다. 주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를 이끄시며 그의 행사는 오묘합니다. 다만 한가지, 주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통해 영광받기"를 원하십니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십시오. 본문 10절과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원하였고 간절히 보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가 간절히 보기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첫번째로 로마에 교회가 있음을 감사했고, 그들의 소문이 퍼져감을 감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들에게 나아갈 길을 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로마서는 그 기도의 말씀입니다. 로마에 가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가기 전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로마로 이끄십니다. 예루살렘에서 결박된 채로 가는데 배의 풍랑에서 구원하고 뱀에게 물린 것도 치료하시면서 극적으로 로마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대해 기도하십니까?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알고 소망하고 기도합니까? 감사합니까? 우리가 구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크게 이루시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항상 작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작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훨씬 크시고 다 준비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병정의 호위를 받고 들어갑니다. 로마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일 수도 있었으나 로마 병정들이 그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로마 병정의 보호를 받고 로마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의 복음 전파를 통해 많은 로마 관리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더 큰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그를 이끄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12절, 13절입니다 --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한 것은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서 성도가 하나가 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개별적이지 않습니다. 함께 있습니다. 한 주님입니다. 교회의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하나가 됩니다. 성찬, 입교, 유아세례를 "함께" 거행합니다.
교회가 하나되고 함께 기도하는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저도 교회 생활을 돌이켜보면 그때 원만하고 말씀듣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 큰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내 삶을 규모있게 하고 이끌어갑니다. 세상 일의 어려움과 각박함에 놓여 있을 때 교회에서 원만하고 말씀 들으면서 그 일이 하나하나 풀려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너희와 내가 하나가 되어 피차 안위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13절 후반부의 말씀에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이방인 가운데서도, 서로간에도 열매를 맺습니다. 교회의 생활은 이 세상의 삶에서 10%, 30% 아닙니다. 교회 생활이 삶 전체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고관대작이든 얼마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자이든 상관없습니다. 교회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잘 섬기고 평생 거기 거해야 훌륭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높이 됐다고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은 교회의 비밀을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대단하게 쓰임받는 사람도 말씀 앞에 조아리고 공회의 질서를 존중하는 것이 교회의 비밀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롬1:11) 만나서 신령한 은사를 나누고 맛보고 열매를 맺고 피차 안위함을 누립니다. 사도 바울의 간절함이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했던 목적입니다.
기도의 능력은 첫째로 이웃을 변화시킵니다. 이웃을 위한 기도를 먼저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단위의 기도가 먼저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를, 교회를, 주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짐을, 그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거꾸로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기차가 뒤에서부터 달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은사를 함께 나누는 것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우리의 뜻을 간구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내가, 나의 뜻이 온전해집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그는 강퍅하며 스데반을 죽일만큼 성취지향적이고 야망에 넘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이 변했습니다. 자신이 개척하지 않은 교회의 귀함을 얘기하는 것에 그 변화의 절정이 있습니다. 교회가 흥왕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정말 귀합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교회'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마땅한 마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우리를 윤택하고 즐겁게 하며 그때 비로소 우리의 일이 시작됩니다. 우리 안에 마음의 질서와 균형이 잡히고 그것으로 우리 일을 해야 합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할 때 질투, 시기가 없어집니다. 그것이 내 지경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를 드릴 때 내 마음의 지경이 넓어집니다. 결국 마음의 지경이 넓어져야 합니다. 다투고 시기질투만 해서 무슨 큰 일을 합니까. 져야 합니다. 그래야 큰 사람이 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한 가지,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 때 내 사업도, 내 일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질서가 잡히고 하나님이 크게 줘도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은 주십니다. 그러나 준비된 자에게 영광을 받기 위해 주십니다. 무엇인가를 주어서 그것으로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가리우면 그것을 주시겠습니까? 세번째는 그 기도 가운데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십니다. 본문처럼,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순교의 길, 하나님의 영광의 올려드리는 길이 열렸습니다.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도 신학교에서 새롭게 경건훈련원장이라는 보직을 맡았는데, 학교 있을 때는 괜찮은데 집에 오면 그렇게 시험에 듭니다. 많은 일들을 맡다보니 말입니다. 그래서 '많이 기도해야겠다, 이게 어려운 일이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진실되게, 간절하게, 중얼거리듯이 기도하십시오. 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고 심중의 간구를 여호와께 올리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호와는 다 들으십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제 기도 중 안들으시는 것이 없습니다.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응답이다 혹은 응답이 아니다라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많은 경우 하나님은 너무 심대하고 대단하게 응답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응답하시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작은 것은 즉각 응답이 보이지만, 밥 달라면 나라를 주시기 때문에 응답하지 않는 것이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부르짖고 속사람, 속마음을 가지고 항상 쉬지않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너무 구체적으로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 '종을 온전케 하소서', '생업을 보호하소서', '가정을 보호하소서'. 기도합시다. 하나님이 그러면 다 이루십니다. 다 이루시는 하나님의 이런 은혜가 모든 성도들에게 있기를 축언합니다.
[20160403]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3)] 믿음의 기도의 열매 (롬1:8-1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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