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17]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5)] 보고 들은 바를 전함 (롬1:1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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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7]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5)] 보고 들은 바를 전함 (롬1:1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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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녹취록>

사도 바울은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가고자' 했었다는 것을 지난 주간에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롬1:15) "할 수 있는대로"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하고 조건이 마련되면 가겠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왜 그렇게 로마에 가고 싶어했을까요? 그 이유는 오늘의 본문에 나옵니다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즉,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것을 로마인, 헬라인, 유대인들에게 전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을 전하다'는 것은 동사형으로 되어 있는 동시에 명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원어로는 '유한겔리온'으로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는 의미입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말도 있듯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무엇인가를 전해받기를 원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라톤이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42.195킬로미터를 달리다가 죽은 군인을 기념하기 위한 것임은 이것의 좋은 예입니다. 요즘같이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전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면서도 쉽지 않은 개념이었습니다. 본문은 이처럼 어려운 상황 가운데 복된 소식을 '전한다'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생명의 구명줄을 얼마나 기다리겠습니까? 또 어두운 데 갇힌 사람은 얼마나 빛의 소식을 기다리겠습니까? 무엇보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하러 간다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이 세태는 복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선교를 부끄러워하고 주를 위해 살고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하지만 오늘 16절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누구라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랑할 수 없는 것을 전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그 전하는 것이 목숨을 내놓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자랑하고 소망을 굳게 잡고 있으면 그것이 여호와의 집이라고 합니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3:6) 다른 것은 다 흔들리고 넘어지지만 여호와의 집은 굳건하여 자랑을 끝까지 붙들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말씀을 하러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말씀으로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셨습니다. 마치 말씀으로 우리를 지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으로 온전케 하시고 올바른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전하되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셨습니다.(마4:23) 아마 주님이 행보하신 길을 다 쫓아가면 수천만리가 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은 여기저기, 정말 야곱만 돌베개를 배고 다닌 것이 아니라, 주님이야말로 머리 둘 곳이 없이 바쁘게 돌아다니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갈릴리 곳곳에 두루 다니시고 각색 병을 고치셨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은 그렇게 환영받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을 배척하고 죽이려 드는 곳입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마4:24) 친히 말씀이고 영원하신 주님이 이 땅에 말씀을 하러 오셨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육신 가운데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육신 가운데 그를 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보고 듣고 만진 것이라고 번역해도 틀리지 않습니다.(요일1:1) 이 생명이 나타난바 되었습니다.(요일1:2) 그러므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다고 합니다. 생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이고 말씀이 생명의 빛이고(요1:4) 말씀이신 생명이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보고 만지고 들으면 생명을 보고 만지고 듣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이 땅에 오셨으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요1:14) 사람들은 다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구약에서 바라고 예배하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독생자의 영광을 보고, 그를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봤습니다. 그 영광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입니다. 이것 말고 다른 먼곳에서 주님을 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얼굴과 형체가 아닌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 영광을 보매 하나님 아버지의 성령의 성자의 영광인데, 그것을 보니 우리 마음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 은혜를 알고 진리 가운데 은혜를 인정하면 그것이 독생자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그 가운데 은혜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 독생자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무엇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시겠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맛있는 과일이 있는데 그 과일의 껍질을 벗겨서 과육을 먹을 때 그것이 바로 은혜와 진리입니다.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진리니까 이제 비진리에 속한 우리를 온전하게 합니다. 비진리는 죽음이고 절망이고 낭떨어지입니다. 올바른 길로 가야 생명의 길로 갑니다. 비진리의 길로 가면 죽음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니 생명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살 때 잘못된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심판과 마귀 사탄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시온의 대로, 생명의 길이 열립니다. 저는 꿈을 자주 꾸는데요, 가장 힘든 꿈은 길을 몰라 헤매이는 꿈입니다. 어려서부터 길을 잘 못찾아서 그런지 몰라도 계속 길을 잃어버려서 괴로운데 그 가운데 길을 알려주는 일이 있으면 너무 기쁩니다. 며칠 전에 면허증을 갱신하기 위해 갔는데, 노인 한 분이 길을 몰라 헤매이는 것 같아 가르쳐드리니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 자주 있는 일입니다. 지난 토요일에도 장모님의 산소에 가는 중에 길을 잃어버려 멀리 돌아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진리를 알려 주십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서 그 진리를 가르쳐 줄 만한 스승을 찾아다니고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날카로운 화살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길에는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가득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생수의 과실의 열매가 끊임없이 열리듯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길에 서면 끊임없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말씀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예수님을 만나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그 영광 가운데 우리에게 길을 알려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두 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어디로 갈지와 은혜 가운데 그 길을 인도해주시는 분,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세상의 온갖 헛된 것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산에 갔는데 말끔하게 생긴 젊은이가, 꼭 교회에 다녀야 할 것 같은 사람이 돌을 보고 나무를 보고 무엇인가 비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을 알려 주시고 그 길을 안내해 주시고 끝까지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진리를 알려 주시고 그 생명길에서 동무가 되어 주시고 마지막 열매인 영생의 열매까지 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보니 내가 날아다니고 하나님을 보니 곳간에 황금이 넘치고 하는 것들이 무슨 쓸데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니 길을 알고 진리를 알고 생명이 내 안에 역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그것을 생생히 보여주고 들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1:3) -- '보고 들은 것'을 전한다고 합니다. 보고 들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생명을 보고 생명을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빛이고 생명이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진리로 임하신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면 작은 씨앗이라도 겨자나무처럼 큰 그늘을 만드는 나무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길과 진리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합니까. 내 능력의 절대치와 상관없이 길을 깨닫는 사람이 더 빨리 갑니다. 내가 늦게 달리는 사람이라도 길을 바로 안다면 목적지에 훨씬 빨리 도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생각을 안합니다. 내가 빨리 달린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서 길을 알면 나는 무능하고 느려도 다른 사람보다 백배나 빨리 갑니다. 살아보면 그렇습니다. 허탄하고 쓸데없는 곳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까? 주님을 만나서 참되고 올바르고 진리된 것을 향해가면 그것이 더 빨리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행하신 것이 하나도 그릇된 것이 없고 말씀한 것을 행하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주님 안에 있으면 은혜와 진리가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쳤는데 산상보훈의 가르침을 받고 유대인들이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마7:29) 우리 성도님들은 권세 있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면 길이 열리고 보입니다. 위로부터 우리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시행착오를 하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부딪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것을 들으니 서기관들의 것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이래도 저래도 좋다고 합니다. 결론만 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과정을, 시작을 가르치십니다. 세상은 결론만 가지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처음이자 끝이 되시므로 과정을 가르치십니다. 주님은 죽기까지 권세를 보이셨습니다. 다 이루셨다고 하고 죽으셨습니다. 이 말은 말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죽음을 가져가시는 죽음을 죽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참으로 말씀하신대로 다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능력에 동참해야 합니다. 복음에 이 능력이 있습니다. 본문 16절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죽은 언어가 아닙니다. 생명과 능력의 언어이며 빛입니다. 그 복음의 말씀을 받으면 받는 우리에게 힘이 솟습니다. 이 복음을 받으면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있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 그러므로 복음에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 말씀을 믿으면 바로 능력이 나타납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그렇습니다.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역사로 우리에게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입니다 -- "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1:2)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까?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서 신음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덤비는 마귀의 궤계는 정말 많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접하고 기쁜 소식을 전할 때, 주님은 빛으로서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고 우리 속에서 살고 구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이것을 자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보면 가자 귀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은 나에게 밥을 지어주시는 어머니인데 친구를 자랑하고 어머니를 부끄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이 돌이켜보면 많이 후회가 됩니다.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어릴 때 어머니가 옷을 짜서 입혀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속옷인줄로만 알았는데 겉옷이라고, 입고 다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때 사진을 보면 그 옷을 입고 있는데 알록달록하고 정말 보기가 조금 그렇습니다. 그것을 겉옷으로 입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옷보다 더 좋은 옷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짜준 옷이 얼마나 귀합니까. 자랑스럽게 어디에라도 입고 갈 것 같습니다. 이처럼, 이 복음은 생명의 복음인데 우리는 그 귀한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친구들하고 놀면서 이 친구, 저 친구 좋다고는 하지만, 배고프면 그 친구가 밥을 줍니까? 등록금을 내줍니까? 그 친구가 나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부모는 그렇게 하시는 분인데 부끄러워합니다. 이해합니다. 어릴 때는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어머니가 되어 보면 압니다.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이 시대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시대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라는 책을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본 적이 있습니다. 20년 전에 그런 책이 있었다면 이 시대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복음만큼 고상하고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철학은 세련되고 복음은 저급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야말로 가장 논리적이고 고급스럽습니다. 제가 구원받았다는 가장 큰 확신은 성경말씀의 어김없는 질서를 볼 때 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한 글자도 어긋남이 없는 것을 볼 때입니다. 세상 학문은 알면 알수록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신학은 알면 알수록 끝이 있고 확실합니다. 처음과 끝을 아니 말입니다. 세상 학문은 알면 알수록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 명료합니다. 그가 처음이고 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확실히 알고 믿고 확신하는 바에 거한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행4:20) 그들은 보고 들은 것을 전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본 것입니다. 우리는 다 복음을 봤습니다. 우리는 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욥이 오랫동안 그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고 이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결론적으로 한 말입니다. '여태껏 귀로 듣기만 했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들은 말씀을 보게 됩니다. 보고 들은 바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1:3) 복음은 단지 듣는 것이 아니라 목도하는 것, 보는 것입니다. "거기 너 있었느냐 그 때에." 복음은 십자가 아래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복음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이런 보여주심을 하나님이 깨닫게 하십니다 -- '내가 십자가지기교회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희를 은혜 가운데 인치노라, 내가 너희를 붙드노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5:20) --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각을 주셔서 참된 것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다 이런 영적 지각을 갖고 있습니다. 고밀도, 고감도의 영적 안테나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밀한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모세가 여호와를 대면하여 보았다면 우리는 훨씬 더 여호와를 마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만납니다. 기도하면, 그가 우리에게 지각을 주셨으므로 깨닫게 하십니다. 내 이성이 앞서서 절망하지 마십시오. 이런 경우에 무슨 구원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도 복음은 우리에게 그럴 때 다가옵니다. 아무도 나를 수렁에서 건져주지 못하고 많은 남편이 있었지만 아무도 생수가 될 수 없고 그저 저 우물물을 떠먹고 부끄럽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 그 수치 가운데 사는 여인에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는 부끄러움을 던지고 물동이를 던지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때 생명의 구원을 얻게 됩니다. 부끄러운 것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오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딱딱하고 거친 음료를 마신다고 해서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대문이 작고 삶의 터전이 누추하다고 해서, 부모님이 가진 것이 적다고 해서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내 속으로부터 나가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가졌습니다.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생명을 주시는 복된 소식이고, 믿는 자에게 값없이 구원을 주십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3:17) 복음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거져 주신 가운데 우리에게 능력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은 그를 보고 만지고 친히 내 안에 영접해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일체의 부정적인 것은 내려놓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기십시오. 용서하십시오. 참으십시오.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참으십시오. 확신하십시오. 지금은 같아 보여도 봄이 되면 생명이 있는 올바른 나무에는 꽃이 핍니다. 인내하는 자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결코 악이 끝내 이기게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어렵고 힘들어도 참으십시오. 허물을 덮어주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확신해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능력을 보이십니다.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모세에게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열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름과 반석에 물이 나게 하심으로 보이셨습니다. 광야에 어떻게 만나와 메추라기가 떨어집니까. 그런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롬9:17) -- 이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을 사도 바울이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보다 더 큰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에게나 능력이요 지혜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능력은 우리와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 능력을 가진자답게 자랑하십시오. 참으면 됩니다. 겸손하면 됩니다. 결코 나서서 못이깁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참아야 됩니다. 많이 참아서 안될 것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꽃을 피울 것인지 생각하십시오. 우리에게는 생명의 역사가 있으므로 때가 차면 우리의 몽우리를 터뜨려 꽃을 피우게 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얘기했습니다. 유대인에게 먼저 전해졌고 헬라인에게 전해지고 우리에게도 이제 전해졌습니다. 이러한 능력을 누리시고 능력있는 사람답게, 자녀답게 행하십시오. 자녀로서 여유를 가지시고 자녀로서 담대함을 가지시고 기다리시고 온전한 하나님의 자랑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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