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24]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6)] 생명에 이르는 오직 한 길 (롬1:17)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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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4]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6)] 생명에 이르는 오직 한 길 (롬1:17)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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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녹취록>
오늘 본문은 종교개혁을 있게 한 말씀입니다. 이 한 절의 말씀에 생명의 길이 있고 우리가 마땅히 나아가야 될 의가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 이것은 바로 구원의 대명제입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복음이 전하고 증거한다는 뜻도 되고 복음이 역사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의미도 됩니다. 세상의 책은 전할 뿐이지만, 복음은 전할 뿐만 아니라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이길래 이런 역사를 일으키나요?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후반부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데 믿음에 어떤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A로 B에 이른다고 말하지 A로 A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아무 말도 안한 것과 같습니다. 왜 성경은 이렇게 전할까요? 믿음에는 앞도 뒤도 없습니다. 믿음 이전에 준비된 공로도 없습니다. 그저 믿음으로 시작되고 또 믿음으로 믿음에 이릅니다. 그래서 믿음은 무조건적입니다. 그리하여 본문이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니 오직 믿음 밖에 없습니다. 앞으로도 뒤로도 믿음 밖에 없으니 오직 믿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구약의 하박국서에 나옵니다. --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하박국이 '왜 악한 민족은 흥왕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을 당하는지' 질문을 하자 하나님이 그에 대한 답으로 주신 말씀 중 등장합니다. 하박국서에는 '오직'이라는 술어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이 말이 첨가됐습니다. 하박국이 이 말씀을 받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주여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이것이 바로 무조건적 은혜이고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상과 죄목을 그냥 두고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철저하게 죄에 반응하고 응징하십니다. 하나님이 몰라서, 헤아리지 아니하셔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진노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지 않게끔 우리가 해야 하는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오로지 바라는 것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그 말씀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다 이루시고 누구든 그 말씀을 기억하고, 구약의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새겼다면, 이제는 십자가의 도를 새기고 그 말씀을 새기는 것인데, 그 방법은 다름 아닌 "믿는 것"입니다. 그가 행하신 것, 계신 것, 나를 위해 지금도 살아계심을 믿는 것, 그것이 기억하는 것이고 기억하는 것이 새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노 중에라도 긍흉를 잊지 마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미 완성태, 완료형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30) 이제 우리는 그의 의를 받아 누리는데 무엇보다 그 의를 받아 누림에 있어서 믿음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주께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잊어버릴 것은 안잊어버리고 기억할 것은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다 잊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가슴에 안고 산다면 우리는 그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냥 터져 죽어버릴 것입니다. 옛 말에 다정도 병이라고 했습니다. 정이 많은 것도 병이라는 말입니다. 너무 기억하고 새로새록 떠올리는 것도 병이라는 것입니다. 다정은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은 기억 때문입니다. 기억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지 말아야 될 것을 오래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공황증, 강박관념이고, 아이들의 자폐일 수도 있습니다. 자폐의 원인을 아무도 모르지만, 선천적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이에게, 부모들은 알 수 없는 그릇된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망각해 주십니다. 망각이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실 때 옛날의 죄와 허물은 기억하지 않고 잊어 주십니다. 전지전능하고 모든 것을 아시고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파악하고 헤아리시는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것은 기억하시는데 그리하여 상급을 주시는데, 나쁜 것은 기억하지 않고 용서해주시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나쁜 것을 기억안하니 좋은 것도 기억 안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것은 잊어버리되 좋은 것은 철저히 기억해주셔서 우리에게 상급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중심을 아시고 머리카락이라도 헤아리시는 주님이 주님이 우리를 모으신 것은 그릇된 것은 잊으시고 좋은 것을 기억해주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예배로 모으신 것입니다. 진정 사랑하는 부부는 이런 것입니다. 자식들도 못 덮을 것을 부부는 덮어줍니다. 좋은 것을 오래 기억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잠깐 기억하고 나쁜 것을 주야로 기억하면 그것이 부부 사이에 문제가 됩니다. 이처럼 덮어주고 잊어주는 것이 바로 은혜 중에 은혜가 됩니다. 모두 잊어버리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잊으시는 대신에 한 가지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저 다 베풀어주시되 한 가지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의 은혜를 기억하고 헤아리고 대대에 계승시키고 자식들에게 읽어주고 자식들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기록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매여 있으면 안됩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은 좋은 것도 병입니다. 어릴 때 아름다운 기억도 그것이 지나치면 병입니다. 나쁜 것을 많이 기억하는 것도 병이지만 과거의 좋은 일에 매여 헤어나지 못하고 현재의 모든 일을 그것에 비교한다면 그것도 병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실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즐겁고 새 힘이 언제나 솟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일은 현재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의가 지금 우리의 삶에 역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일을 기억하는 것이 현재의 능력이 됩니다. 사사기를 보면 이방민족이 침입해오면 하나님께서 이를 이길 장수, 사사를 세웁니다. 기드온, 드보라, 입다, 삼손 등 말입니다. 그런데 매 경우 공통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이전에 구원해주신 사실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미디안의 침입을 전쟁도 안하고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오래 기억하지 못하고 곧 잊어버립니다. 사사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기억할 것은 기억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을 것만 자꾸 기억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치 삼손이 드보라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안겨있을 곳에 안겨있지 않고 안겨있지 않아야 할 곳에 안겨 있다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잃어버리고 무능해지고 눈을 뽑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시대에 '소견대로 행했다'는 말을 그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감사할 것,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않고 오히려 잊을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한 것으로 말입니다. 내가 편하면 은혜를 크게 베푼 부모라도 잊어버립니다. 또 내 마음에 깊이 잠기면 잊어야 할 것을 끝까지 기억해서 보복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서 잊을 것은 잊고 잊지 말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은 모두 지나치면 병입니다. 저 역시 음악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병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해야지 몰두하면 병입니다. 꼭 게임만 병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것이 너무 몰두하면 병입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몰두할 대상은 하나님 혹은 그가 주신 것 뿐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것은 끝없이 믿음으로 살아도 과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복음은 바로 기억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기억하고 되새기면 하나님이 그 안에서 우리를 온전하고 형통하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십계명을 매주 새깁니다. 거기에도 이런 기억의 원리가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0:2) 이것을 매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냈음을 매일 기억하고 십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라고 명령 하시는 것입니다. '명령하는 분이 너를 건져낸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명령하시는 분이 이미 우리를 건져내신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명하심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억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애굽 땅에서 너를 건져낸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방편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대로 살면 윤택하고 아름답고 이 땅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고 하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게 됨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2)
오늘의 본문(롬1:1-17)까지가 로마서의 서론 부분입니다. 특히 17절은 찬송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전하면서 특별히 기념, 기억, 송축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다 이룬 것을 기억하는 것인데, 단순히 세속적인 기억이 아닙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눅22:19) -- 기념과 기억은 다릅니다. 세상의 기억은 과거의 일만 반추하고 쓰라리면 놀라서 병이 되고 너무 아름다우면 신세 한탄하는 데 사용되지만, 기념은 그 때 나에게 좋았던 것이 지금도 좋은 것, 역사하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이스라엘 하나님이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다" -- 이것이 기념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행하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살과 피를 다 주신 주님이 지금 나의 양식이고 지금 나의 신령한 음료라는 것입니다. 어떤 과거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43:5)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 위해 내 허물을 도말하십니다. 내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도말하고 죄를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43:18-19) 과거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싶거든 그 과거를 하나님께 속한 것으으로 여기십시오.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저의 부모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고 돌아가셨다면 그것이 저에게 병이었을 것입니다. 제 수첩에 20년도 더 된 제 결혼식 때 찍은 사진이 있는데 거기에 부모님 두 분이 다소곳이 앉아 계십니다. 그 사진을 찍을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내가 왜 그렇게 효도하지 못했을까라는 회오가 듭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아직도 부모 생각이 납니다. 좋은 데 가면 아직도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없는 사정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돈을 모아 왜 그런데 모시고 가지 못햇을까 하는 회오가 듭니다. 그러나 일견 그런 회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병적으로 저에게 머물지 않는 것은 부모님이 구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새벽예배를 다니다 돌아가셨으므로, 그 가운데 과거가 제게 아름다운 것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캣츠라는 뮤지컬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노래가 '메모리(기억)'입니다. 고양이 분장을 한 배우가 부르는데, 기억이 무엇인지 참 슬퍼보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 안에서 추억을 쌓는 것입니다. 함께 예배 드리고 함께 찬양드리고 함께 주의 이름으로 봉사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부부의 추억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탤런트 부부가 많은 기부를 합니다. 믿음 가운데 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믿음으로 행하고 바라볼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우리 젊은이들 공부하는 것도 믿음으로 찬송으로 행하십시오.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이 이 지상에 온 가장 아름다운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한 것입니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더 뛰어난 사람이 언제라도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렇게 보면 금새 없어질 일을 행하는 것 혹은 사상누각과 다름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여호와 안에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일을 했을 때 그것은 우리 안에 영원히 아름다운 것으로 남습니다.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기억하고 기억할 것을 잊는 이 세태에 더욱 그렇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는 오늘의 말씀이 종교개혁을 촉발한 것은 그것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는 진리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교회, 목사, 사제에 매여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할 때에만 의미가 있고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을 로마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헬라어로 '유한겔리온'입니다. 이 단어에서 '유'는 '조화, 아름답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평강, 샘솟는, 즐거운 달콤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유한겔리온'은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기쁘고 즐겁고 즙이 나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다 이루신 예수님의 의를 우리 것으로 삼아주셔서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에 이르는데, 단회적이거나 과거형이 아니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이것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즐거운 것입니다. 즐거운 소식이 복음입니다. 종교개혁도 즐겁게 일어났습니다. 얽어매는 것이 아닙니다. 중세교회가 성도를 형식과 계급으로 얽어맨 것과, 교회를 섬기게 한 것과 반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터이지 섬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것은 조건 없이 주시는 믿음입니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하나님의 의는 이 복음에만 제시되어 있고 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답하고 있습니다 -- 믿음으로 믿습니다. 아프리카 아이들은 어릴 때 부터 어떻게 메뚜기를 잡고 약초를 구별할까요? 교본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잡다 보니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책으로 배운 언어는 외국어입니다. 하다 보니까 되었다는 것이 모국어입니다. 믿으십시오. 믿어서 믿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어떨 때는 툭 치는 것처럼 인도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바람도 그것에 밀려 움직이니 그것이 있는 줄 알고 인정하는데, 왜 성령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성령에 이끌려 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기둥, 구름기둥에 이끌려 간 것처럼 믿으십시오. 믿으라는 마음이 들거든 믿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저 스스로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입장이지만, 믿음에 대해서는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예수여' 하면서 발을 내딛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열두해 혈루병 환자가 여호와께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계산으로 법칙으로 되지 않습니다. 계산은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계산하면 인본주의요 믿으면 신본주의입니다. 기도하면서 계산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면서 맡기고 의뢰해야 하빈다. 신본주의로 가야 합니다. 오히려 기도하면서 인본주의로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로부터 찾는 공로가 없습니다. 오직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 믿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께서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가장 큰 표입니다. 있는 것을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지지난 주에 운전면허증을 잃어버려서 재발급받기 위해 많은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원욱이에게 잠시 비려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있는데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우리는 다 믿음이 있습니다. 신분증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없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믿음으로 사십시오. 믿음으로 믿음에 이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에는 우리의 공로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죄를 사하시는 무조건적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에게 공로가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들어 있는 것을 폐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원리입니다. 중세에는 있는 것으로 공로로 더 이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공로주의, 자질주의입니다. 기독교로 말하면 암흑기입니다. 기독교의 암흑은 내 것을 가지고 조금 더 주시는 하나님, 내가 조건이 된다는 기도를 드리니 하나님께서 이제 그것을 가지고 뭔가를 이루게 하신다는 것, 그런 사상, 가르침입니다. 종교개혁은 없는 것을 들어서 있는 것을 폐하게 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로 지혜있는 자를, 가난한 자로 부유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있습니다. 겨자씨 만큼이라도 사용하면 산을 옮기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믿기만 하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안에 산을 움직일만한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사용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복된 소식, '유한겔리온' 입니다. 조화롭고 평화롭고 달콤하고 즐거운 소식입니다. 이런 복된 소식이 우리 모든 성도에게 있음을 감사하며, 그러기를 축언합니다.
[20160424]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6)] 생명에 이르는 오직 한 길 (롬1:17)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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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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