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01]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 핑계치 못함 (롬1:18-2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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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1]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7)] 핑계치 못함 (롬1:18-2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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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4)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녹취록>



복음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복음은 그저 기록된 문자가 아니라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7절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가 나옵니다. 복음에는 먼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아무 공로 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지만 먼저 하나님은 의를 드러내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사랑 이전에 의, 공의, 진리 이십니다. 우리는 부모라고 하면 먼저 사랑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부모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 부모는 의롭다', 부모의 진리, 공의, 의로움에 대해 먼저 말한다는 것을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부모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자랑함도 귀하지만, 우리 부모는 올바르고 그릇됨이 적다는 것이 사실 더 큰 자랑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사랑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의로움을 잘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높은 산에서 떨어질 때 세상은 그저 피해갈 뿐이지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떨어지는 자녀들을 보면 함께 죽을 줄 알면서도 같이 뒹굽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길이 아닌 것은 막아서고 그릇된 것은 옳게 인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부모들이 얼마나 올바르고 얼마나 우리를 의롭게 가르치는지를 먼저 이 가정의 달에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의가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비뚤어진 사랑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아서 길도 진리도 없습니다. 그저 손만 잡아주면 되는 줄 알고 따라가다보면 모두 함께 나락으로, 물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먼저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그 공의를 이루시려고 아들을 땅에 보내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의를 다 이루시고 이제 그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헤아릴 때 더 감사한 것은 그가 사랑하시되 우리를 올곧게 키우시려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을 달라거나 흥하게 해달라는 것 보다 먼저 나를 온전하게, 거룩하게 하고 그 가운데서 복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온당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올바르게 자라가기만 하면, 특별한 일이 없으면 봄날의 나무가 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 우리도 하나님께서 올곧게 키우십니다. 죄짓지 않고 허탄한 일에 마음 쓰지만 않으면 꽃과 열매를 맺습니다. 나무에만 물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이 새겨 놓으신 길이 있습니다. 그 길대로만 가면 꽃과 열매를 맺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고생을 합니까. 그러나 우리 인생을 잘 헤아려 보시면, 남을 더 사랑하지 못한 것으로 인한 마음고생은 적습니다. 괜히 남을 괴롭히지 못해서, 남이 나에게 한만큼 되갚아주지 못해 억울하고 마음쓰는 경우가 얼마나 더 많습니까. 

예수님을 보내셔서 모든 의를 이루시면서 대속의 원리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바로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우리를 잘 키우면서 사랑하십니다. 간혹은 매질도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를 올바르게 자라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은헤와 사랑을 헤아리기 전에 우리의 죄와 허물을 헤아려봐야 합니다. 우리가 독수리 날개짓하듯 비상하고 뛰어가야 하지만 죄를 안고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죄는 마치 큰 고리가 수레에 걸려있어 아무리 밀고 끌어도 나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이런 의를 모든 사람들에게 심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본성적으로 이 의를 새겨 주셨습니다. 이것을 일반은총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주시는 은총입니다. 교회 다니지 않아도 도덕적 양심이 있고 선악간의 분별력이 있습니다. 제가 낙도 선교에 가서 놀란 것이 그것입니다. 경찰이 없으니 마구 살 줄 알았는데, 오지임에도 불구하고 법 없이도 더 잘 삽니다.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도 더 잘삽니다. 하나님이 선한 분별력과 도덕적 양심을 새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지난주 로마서 1장 17절까지가 인사말, 구원의 대원리를 말했다면 1장 18절부터 2장 전반부까지는 일반은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주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새겨져있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스스로 계시는 절대자, 지존자이십니다.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십니다. 아무도 스스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담을 수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에게 맞추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맞추어 주셔서 하나님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주셔서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으로 인간의 심령 가운데 새겨주시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믿는가의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여주셨다고 말합니다. 전도서 3장 11절은이것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햇습니다 --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도 전부 영원을 사모합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영원불멸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찾다보면 지음을 받은 것은 모두 유한하므로 결국 지음을 받지 않은 것을 동경합니다.  그래서 그게 뭔지 모르겠다고 포기하고 겨우 죽을 때 생각하는 것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입니다. 예전에 난리가 났던 성철이라는 중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마지막 말은 '사탄이, 악령이 나를 이끌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그토록 도를 닦고 연구했지만,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여주시고 드러내신다고 오늘 19절에 말씀했는데, 사람들은 그것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알만한 것을 보여주셔서 의식합니다. 번개, 천둥만 쳐도 숨고 뭔가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렇지만,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어떠함이고 한계입니다. 우리는 우리 존재 자체를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끔 텔레비전에서 장기자랑을 보면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끊임없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근원이 되는 여호와를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하나님이 계신 것을, 하나님을 알 만한 지식을 인류에게 주셨을 뿐 아니라 창세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들이 천지만물 가운데 드러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하나님이심, 신성을 증거한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꽃을 보고 있으면 "꽃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어느 인간이 꽃을 만들 수 있습니까. 그래서 만물에 창세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면서 그것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고백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아무 것도 없는데서 꽃의 빨갛고 노란 빛이 나옵니까. 하지만, 그 능력이 꽃에 있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보면 능력이 꽃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여 꽃을 섬깁니다. 다 부서지고 무너지는데 바위는 그대로 있으니 바위를 섬깁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바위, 산, 꽃, 시절을 좇아 내리는 비, 열매, 천지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보여 알려졌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본문을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만물에 있다'고 해석하면 안됩니다. 만물에 그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반계시라고 합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여호와를 찬양한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이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드러내주어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꽃을 생각합니다. 오죽하면 만신전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모든 자연만물을 섬겼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들은 복음을 아직 알지도 못했는데 왜 지옥에 가야 하냐고 항변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핑계하지 못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 20절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밝히 드러나고 우리 자신을 봤을 때도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우리 속에 있으므로 핑계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9) 하지만, 잘 아실 것은 모든 사람에게 준 이런 지식이 인간의 죄로 인해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치 못하고 오히려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데 바쁩니다. 믿는 성도, 우리에게도 이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보면 가장 영적인 유혹입니다. 순간적으로 돈, 명예 등이 좋아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하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모든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기회로 삼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시는 많은 복과 명예와 지혜와 이룬 업적 자체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 일 때문에 기뻐하기도 절망하기도 합니다. 일에 따라 일희일비하고 잘 안되면 자신을 포기하는데 까지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행14:16) 사도 바울이 1차 선교 당시 루스드라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절은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말씀합니다.(행14:17)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의 구약시대 백성들을 그냥 방임된 것 같아도 자기를 증거하지 않으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난 20년, 30년의 삶을 통해 잘 살게 된다고 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만이 아님을 스스로 잘 압니다.  소득이 몇 배 늘어났다고 해서 감사도 같이 늘어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떤 조건에 따라서 감사해야하는데, 항상 조건에 따라 정비례하는 감사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이 가진 자가 더 감사하지 않습니다.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그렇습니다. 왕후장상의 찬을 차려놓아도 불평하면서 숟가락을 들면 무슨 맛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싱그러운 봄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있고, 가을 결실기의 선선함이 있고, 저장하여 대지를 쉬게 하는 겨울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 감사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여름은 덥다고 불평하고 겨울은 춥다고 불평합니다. 여름에 덥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겨울에 춥다고 불평합니다. 더위와 추위 때문이 아닙니다. 불평은 습관입니다. '비를 내려주시고 결실기에 음식과 기쁨으로 만족케 하셨는데도, 너희 루스드라 사람들아 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 설교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끊임없이 더 가지는 것으로, 가진 돈으로 세상과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을 가졌더라도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감사의 출발은 부모에 대한 감사입니다. 열매와 곡식보다 더 근본적인 감사는, 직업과 명예보다 더 중요한 감사는 나에게 부모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나에게 주셨다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주 가난한 이전 시대의 부모는 공경하고 효도했는데, 왜 충분히 먹이고 입히고 잘 살게한 이 시대에 자식들이 부모를 멀리하고 내팽개칩니까. 천석꾼, 만석꾼 자녀가 항상 효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콩 한쪽을 나누고 작은 이불을 덮고 자도 효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핑계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자기합리화하는 우리의 이 마음은 죄성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도와주셔야 우리가 감사하겠습니까? 바위를 깨서 물이 나오고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나오고 낮에는 시원한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따뜻한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바다를 가르시고 성이 있으면 돌기만 해도 무너뜨리시는데 왜 우리에게 감사가 없습니까? 여러분, 두 배 가지려고 하지 마시고 두 배 감사하려고 하십시오. 그것이 인생의 의미입니다. 감사하고 오손도손 내 자녀를 감사하고 내 아내를, 내 남편을 감사하고 부모를 감사하고 내 건강을 감사하는 것, 이것이 부자입니다. 한국에서 최고 잘 사는 사람들이 우리 바로 뒷동네에 삽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재산이 수백 억, 수조 원이 되어도 맨날 형제끼리 맹희니 건희니 재산을 놓고 싸웁니다. 이병철 씨가 무슨 가문의 영광이 있습니까. 현대 가문도 자식들이 자살합니다. 무슨 명예가 있습니까. 절뚝거려도 지게에 안고 어머니, 어머니 하면서 먼 곳은 못다녀도 꽃이 피면 꽃 보여주는 것, 그런 자식이 효자가 아닙니까. 어릴 때 우리 동네에 말 먹이는 집이 그런 것을 봤습니다. 그 후손들이 다 잘됐습니다. 부모를 잘 섬기더니 말입니다. 저처럼 서울에 와서 법대 다니고 박사이고 하면 뭐합니까. 효도하지 않으면 뭐합니까. 부모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근본은 부모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약속 있는 첫째 계명이 그것입니다 --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2)라고 했습니다. 오래 살고 잘 살려거든 부모에게 효도부터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불의와 불경건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여기에 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는 살아있는 부모를 먼저 공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21절에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그의 선하심과 자비하심, 온전하심, 의로우심을 찬양하지도, 감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감사가 인간의 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배우고 재산이 많아도 감사하지 못하면 격이 없습니다. 풀빵을 하나 사먹으면서도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잇는 사람, 그 사람이 격조있는 사람입니다. 청소하고 이런 사람들이 귀한 분입니다. 그들에게 고개 숙여서 인사하십시오. 저 멀리 있어도 찾아가서 인사하십시오. 대통령이 있으면 멀리 보이더라도 가서 인사할 것입니다. 대통령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줍니까. 성경적입니다 --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삼상8:11-17) 우리가 살아갈 때 청소하는 그런 분들이 정말 우리는 도와주는 분들입니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감사도 근본적인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부모에 대한 감사입니다. 우리 개신교,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불효하는 종교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가장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합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약속 있는 첫째 계명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유일한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물론 다른 종교는 없지만, 인정해준다고 하면 말입니다. 이것을 봐도 얼마나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귀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저는 어제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정말 이것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에누리 없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큰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오면 정말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알았는데 역시나 어제 보자마자 흠부터 찾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불과 제가 며칠 전만 해도 얼마 전만 해도 과연 책이 나올 수 있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책을 나오게 하셨을까라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출간된 받아 읽는 순간 감사는 떠나가고 또 그 많은 욕심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됩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옳은 것은 것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옳고,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니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옳으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래야 언약의 복의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로 반대로 생각합니다. 내가 옳은 것을 생각하고 있고 그러니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 옳아보여도 실제로 많이 그릇됩니다. 우준한 것을 많이 생각합니다 --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5) 하지만 우리는 은연 중에 하나님이 잘못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하고, 대충 욕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련해 보여도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지혜있습니다. 말씀대로 당하고 허물을 덮어주고 사는 것이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의 강함보다 강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90%는 기도제목 잡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기도제목을 찾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오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 제목 잡아놓고 하나님께 들어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무엇이 옳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에 가두면 그것이 다 우상입니다. 하나님께 맡길 때 대로가 열립니다. 하나님을 내 안에 가둘 때 그것은 죽은 것이요 쓸모 없는 것이요 사라지는 막대기에 불과한 우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에게 영광을 올려드리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때 복됩니다. 핑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십시오. '내가 옳은데 왜 안도와주세요'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옳으시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그것이 이미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하나님은 뜻하신즉 이루시기 때문에 이미 이루어진 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뜻하시는지도 모른채 무조건 기도해놓고 그 중 몇개가 이루어지면 응답 받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의 뜻을 알면 그것은 이미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뜻하신즉 이루시고 이루신즉 그 행사가 모두 선합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특별히 이 가정의 주간에, 감사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무조건 은혜를 받았으니 무조건 감사해야 합니다. 조건에 따라 감사하지 말고 그저 감사하십시오.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찬송하십시오. 학교에서 가르치다보면 똑똑한 교수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가장 옆에 두고싶고 편한 분이 있습니다. 그런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그래도 매일 보면 입에서 찬송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 분이 가장 귀하게 여겨집니다. 여러분, 감사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는 주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