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15]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8)] 버려두심 (롬1:24-32)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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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5]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8)] 버려두심 (롬1:24-32) 문병호 목사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5)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6)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녹취록>



조금 낯선 표현일지 몰라도 우리는 예정론, 그리고 선택과 유기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명해서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지명'은 많은 사람 중에 택한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을 택한다면 지명이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 택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영생을 주실 뿐 아니라 돌보십니다.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고 간섭하고 다스리십니다. 반면 '내버려두었다'는 의미의 유기는 이러한 특별한 간섭, 다스리심과 돌보심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저주는 괜히 잘 걸어가는 사람에게 덫을 놓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썩어가는 고목과 같은 것을 그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 뿌리가 뽑혀 있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산에 갔는데 아주 큰 나무가 뿌리를 드러낸 채 누워 있었습니다. 그 나무 위에 파란 잎사귀가 있길래 죽은 나무에도 파란 잎사귀가 있나 했더니 역시나 옆의 나무가 가지를 뻗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군중 안에 있으면 돌보심을 받는다고 여기고 군중에서 떨어져 있으면 그렇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요셉, 야곱이 혼자 있어도 돌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같이 작은 교회는 하나님이 덜 돌보시는 것 같아도 어떻게 보면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착각을 하기 쉽습니다. 많은 무리 가운데 있으면 돌보심과 보호를 받는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성에 많은 사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 안의 사람이 아닌 도단 성의 엘리사, 엘리야가 돌보심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비록 작지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고 해서 전쟁 중에 폭탄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셔야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고 돌보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간섭을 받습니다. 제자는 스승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그렇습니다. 제자, 자식 쪽에서는 간섭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단어는 본질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본질은 돌봄입니다. 다른 동물과는 달리 오직 인간만이 울타리를 치고 야생의 생물을 길러 가축을 삼았습니다. 인간만이 교육을 했습니다. 이것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간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간섭하시는 최고 경지는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셔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할 것을 알게 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사 아홉 가지 맛을 내게도 하십니다 -- 한 열매에 아홉가지 맛이 있는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갈 5:23-24)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라고 간섭하십니다. 즐거워하라고 간섭하십니다. 성령의 간섭은 그저 비관주의,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계속 죄의식에 사로잡힌 자녀를 만들지 않습니다. 희락하고 화평하고 오래참고 자비롭게 하십니다. 불쌍히 여기게 하십니다. 양선은 '가려서 선을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진리에 속한 선한 것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온유하고 절제하라고 하십니다. 성령의 인도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법 아래 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특권이 율법을 맡은 것이었는데 우리는 이제 과거와 같이 율법 아래 매이지 않되, 모든 율법의 완성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법에 참된 순종을 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5:18)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은 주와 같이 가는 것입니다. 주와 같이 가는 것은 바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날마다 거룩해지는 자리에 있습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영이 임하니 십자가를 배우고 십자가의 훈련을 받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썩어져가는 구습의 옛사람을 버리고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명령과 말씀은 하나님의 간섭을 의미합니다. 예수에게서 듣고 그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구습에 속한 것을 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구습, 옛 습관은 혼자 기어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만의 터로, 나만의 은신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답답하고 힘들 때 나 혼자 어떤 굴을 만들어 놓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썩어져가는 구습입니다. 세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 상황, 장소, 사람에 기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으면서 그것을 간섭이라고 여기고 그를 멀리하는 그런 것이 아직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려움, 절망, 분을 느낄 때 어느 곳으로 도피합니까?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데 그 도피처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자신이 만든 굴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구습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도피처를 만들고 도피할 것을 궁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부르십니다. 혼자 두시는 듯 하지만, 그 때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절실히 부르시는 때입니다. 그 때 우리와 동행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에 갇혀 있는 야곱을 끄집어 내어 밧단아람으로 보내고 그 가운데 돌베게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벧엘에서 하나님의 집을 보게 하신 것, 또 다시 돌아올 때 브니엘에서 여호와의 얼굴을 보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사람 속에 파묻혀서 그것이 안식처라고 생각하고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미혹을 깨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간혹 주의 백성을 끄집어 내서 외롭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동행하심, 내버려두시지 않으심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다시금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새 학업이 직장이 하시는 사업이 잘 됩니까? 그래서 이 세상이 천국같이 여겨집니까?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역으로 내가 있는 곳이 너무 어렵고 힘들어 나만의 도피처를 찾고 있습니까? 그래서 한적한 곳으로 귀향, 낙향을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그럴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숱한 사람들 가운데서 나도 광대같이 서로 마주보고 움직이지만, 그 가운데 고독함이 있지 않습니까? 

본문 24절은 '서로 욕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롬1:24)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서 이 이태원의 시장에서 더불어 사는 그 모습이 서로 욕되게 하는 삶은 아닌지요? 서로 
평안하다'고 하지만, 사람이 모인다고 한들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어떻게 막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도피처는 교회, 하나님의 품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는 길입니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함께 가려네, 주의 인도하심 따라.' --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입니다. 어거스틴은 성령이 우리 위에 기수로 올라타면 우리가 온전하게 물가로 가되 날뛰지 아니하고 온유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영이 우리 위에 올라타면 날뛰고 거품을 물고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간섭을 받아야 합니다. 자유가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우리는 '돌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어리고 연약하기 때문에 간섭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불평합니다. 자꾸 참으라고 하고 그 아홉가지 열매를 깨닫게 하십니다. 왜 계속 그렇게 간섭하실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기수가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말은 길들여져야 합니다. 우리는 다 날뛰는 말과 같습니다. 길을 들여야 우리는 거칠지 않고 또박또박 걸을 수 있는, 조련된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성령의 조련이 날마다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기수가 타지 않는 말은 언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이전에 제주도에 가서 말을 타 봤습니다. 그 목장에 펜스가 쳐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펜스를 쳐놓지 않으면 말이 뛰어넘어 차도로 달려 들어가 교통사고가 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말은 묶고 재갈을 먹여도 기수가 없으면 날뜁니다. 두려워합니다. 천둥번개가 칠 때면, 기수가 없이는, 무서워 그저 날뛰기만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험한 일이 있거나 어려움이 있으면 우리 심령이 교만하여 혹은 절망하여 날뜁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성령의 기수가 우리를 다스립니다. 잘 조련된 말의 걷는 소리가 얼마나 균형있고 조화롭습니까. 

성령의 소욕을 좇는 사람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한다고 합니다.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8:3) 우리 육신은 연약합니다. 육신을 믿지 마십시오. 내 도피처를 찾지 마십시오. 그것은 나를 끝내 미궁에 빠뜨립니다. 결코 어느 곳으로도 피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품 밖에 없습니다. 시골과 도회의 삶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내가 엮여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특히 직장에서, 얼마나 힘이 듭니까. 나 스스로가 또한 얼마나 남들을 많이 힘들게 합니까? 타인의 무표정과 무뚝뚝함에 힘겨워하면서 나 역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오직 쉴 곳은 오늘 이 예배입니다. 이 곳 외에 이 땅에는 쉴 곳이 없습니다 야곱이 120세가 되어 자신의 과거 인생을 험악한 삶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야곱이 그 삶에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닥다리가 내려와 하늘과 땅이 통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그것 외에는 길이 업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의 도피처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도피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런 신앙고백 가운데 읽어야 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너무 길게 다루고 싶지 않습니다. 유기되고 버림받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우리는 이미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과거에는 우리 역시 뿌리가 잘리고 죄 때문에 다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접붙여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제가 어제 본 산의 그 나무는 접붙임이 없으므로 죽은 것입니다. 밑둥 뿌리가 드러나서 죽어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내버려둠을 당하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이 죽었으나 접붙임을 받았으므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방인이고 나그네이지만 하나님의 접붙임을 받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는 자들은 첫째로 24절과 같이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둠을 당합니다. 그냥 더러운 대로 내어버려둠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 더러움은 바로 아래 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거짓된 것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된 것으로 바꾸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럽다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우상과 재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는 내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더러움에 내버려 두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자연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자연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긴대로 살자'고 합니다. 간혹 자연주의자가 낭만적이고 멋있어 보여도 그것은 거짓과 더러움 가운데 버려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씻김과 접붙임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을 통해 거듭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가 좋다고 하는 것을 성경은 더럽다고 얘기합니다. 거듭나는 것이 깨끗한 것입니다. 그냥 있는 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거듭나야 깨끗합니다. 텔레비전을 보니 비행기를 타고 항공촬영을 하여 자연이 아닌 자연 가운데 있는 절을 찍어서 보여 줍니다. 산 꼭대기에 부처를 닮은 바위가 있다고, 거기에 가서 절을 하는 사람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인간의 행위를 간절함이나 절실함으로 보지 않습니다. 더러움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인지상정이라 간절함으로 이해해 줄 법도 한데, 하나님은 그것을 더럽게 보십니다. 마땅히 섬길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으로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 그것을 하나님은 가장 싫어하십니다. 우리는 자연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자연을 만드시고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연이 아닌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 때 자연이 우리 품에 안깁니다. 

두번째 내버려두시는 것은 26절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두심입니다. --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롬1:26) 더러운 것이 우상숭배라면 부끄러운 것은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대로 쓰는 것입니다. 순리가 뭡니까 하나님이 이 땅을 세운 질서입니다. 역리는 하나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되 조화롭게 하셔서 지으신대로 사용되고 그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즐거워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무엇보다 순리를 거스리는 것을 본문은 남녀의 예로 설명합니다. 요새 동성연애를 합법화하는 법이 제안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도 큰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참된 인권은 동성애자들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돌이켜주는 것입니다. 남자는 남자답게 살아야 정상적인 것임을 알고 깨닫게 해야 합니다. 남자가 남자답게 살지 않는 것이 질병과 같은 상태임을 알게 해주는 것이 그들의 인권을 위하는 것입니다. 동성애도 경향입니다. 시대에 따라 그 경향의 강도에 차이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 로마의 폼페이 화석을 보면 동성연애 문화가 만연했습니다. 이것도 문화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지으신 것으로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 미국에서 동성애에 대해 신학적인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 순리입니까. 동성연애를 인정하면 자녀가 없는 가정이 생기고 그러면 또 입양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성공회도 루터교도 동성애 목사를 인정합니다. 무엇이 진정한 인권입니까. 하나님의 자리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시대가 갈수록 동성애는 더욱 만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가장 인권을 잘 보호하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남북통일 문제도 너무 정치적으로 접근하면 안됩니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북한을 도와주는 것에 저는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은 그렇게 하면서 복음을 너무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고 일단 사람들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하다보니, 지난 십 몇년간 교회가 북한을 가장 많이 도와줬지만, 복음은 전하지 않다보니 오히려 문제가 생깁니다. 이번에도 당대회를 앞두고 목사님이 피살을 당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면 될 것 같아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복음을 전하고 순교를 당해야 합니다. 복음과 순교 없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서 변화되고 부흥된 일은 기독교 역사 상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동성애자들이 우리 총신대에도 들어왔습니다. 또, 어제 교수님들 사이에 비상이라고 하여 문자가 왔는데 내용을 보니 신천지에서 집회허가를 받아 사당동 캠퍼스 앞에서 집회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럽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부끄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부끄러운 것은 순리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첫째가 우상숭배라면 말입니다. 마약이 치료용도로 사용되면 순리입니다. 그러나 어제 뉴스처럼 의사가 자기의 쾌락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역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깨끗하고 정직하고 올곧아야 합니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합니다. 여자는 여자다워야 합니다. 그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다만 여자다움이라고 해서 그저 연약하고 유약하기만 한 것이 아니며, 남자다움이라고 해서 그저 거칠기만한 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진정한 의미의 남자다움, 여자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둔다고 했습니다 --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 우리는 앞서 말한 더러운 마음, 부끄러운 마음에서 이미 건져 주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드리는 것이 증거입니다. 동성애에 대해서도 분명한 잣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상태에 내버려 두십니다. 본문 28절은 두 가지에 더불어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둔다'고 했습니다. 상실한 마음은 성령이 채워지지 않은 마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마음, 공허함입니다. 재물, 인맥, 가문으로 마음을 채워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상실한 마음입니다. 잃어버린 세대라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요즘이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먹고 사는 것과 시험,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회가 그렇게 몰고 갑니다. 책을 읽지도 않고 마음의 양식을 쌓지도 않습니다. 인성적으로 보면 과거로부터 오히려 후퇴입니다. 상실한 마음에는 하나님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28절은 그들이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한다'고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분명히 이러한 일을 한다고 이어지는 29-31절에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1:30-31)

우리가 잘 아는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T.S. Eliot이라는 시인이 한 말입니다. 그는 무신론에서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어 하나님에 관한 글을 많이 썼습니다. 그 중 황무지라는 세계적인 시집을 출간했는데 그 시집에서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본 성경구절을 들어 '이런 사람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이 꽉 찼다고 생각한 사람이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없고 불의와 추악과 탐욕과 악의 같은 것만 충만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간섭이지민, 돌보시고 이끄시고 양육하시고 끝내는 다 이루십니다.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기수가 우리를 타고 있습니다. 절망하지 마시고 반드시 여지를 남겨 두십시오.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절망할 권리도 없음을 알 것입니다. 우리는 치는 것 같아도, 나를 간혹 외롭게 하셔도 그것을 하나님의 귀한 돌보심, 하나님께 끌어당기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택하셨으니 인도하고 보호하시고 주장합니다. 세상과 같이 그냥 죽을 길에 머무르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다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이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오늘 새벽에배 말씀처럼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가, 그리스도께서 살리셨습니다. 죽었던 우리를 말입니다. 나무로 말하면 뿌리가 뽑혔던 우리를, 그냥 두면 썩어 먼지로 사라질 나무와 같은 존재를 접붙임하여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큰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이 주장하십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정박할 곳이 아닙니다. 본향은 천상에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 도피처가 없습니다. 더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께 피하십시오. 우리 밑 층의 여호와의 증인도 여호와께 피하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어찌 하나님께 피합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그리스도께서 살리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