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22]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9)] 하나님의 판단 (롬2:1-5)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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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2]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9)] 하나님의 판단 (롬2:1-5)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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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녹취록>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사도 요한이 특별히 많이 외쳤습니다. 칼빈은 '사랑의 시작은 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되 그 사랑은 의, 정의, 공의, 진리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의 핵심은 진리, 진리의 심판이 끝내는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판단하십니다. 가장 깊이 판단하시고 확실히, 완전히 판단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부터 미래로 과거에서 현재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저 끝에서 지금을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끝에서 역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을의 열매를 이미 보시고 봄의 꽃을 판단하십니다. 열매로 봄의 꽃의 생명력을 판단합니다. 가을의 열매가 없다면 봄의 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판단하시되 저 마지막, 영원에서 우리를 판단하시는데, 그 뜻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저 끝에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판단하시면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의인은 높이시고 악인은 낮추시는데, 하나님께 의인은 택하시고 부르신 자를 높임이며, 유기된 자는 그대로 낮게 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입니다 --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이어지는 7절에는 그 뜻을 가진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살전4:7) 우리는 우리가 거룩해져서 사랑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뜻을 미리 거룩함으로 정하시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날마다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판단은 사랑의 열매이고 작정이라고 부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정하신 작정이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그것이 매양, 매시, 각각의 행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 그가 부르신 자들을 빛의 자녀들처럼 사용하기를 원하시고 그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비쳐 주십니다. 우리가 넘어져도 절망하지 않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빛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그 가운데 끝까지 거하게 하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로만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을 영위해가므로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뜻입니다. 

우리는 오직 전적 은혜로 거듭났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고 나에게서 의미있고 가치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 뿐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것으로 분토같이 여겨지지 않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식, 재능, 성품이 아무리 뛰어나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가져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듭난 것을 영원한 것으로 삼지, 타고난 것이나 취한 것으로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씨앗이 떨어지되 썩혀야 합니다. 그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어야 하는데 그것이 거듭남입니다. 그것을 통해 맺는 열매만을 하나님은 알곡으로 곳간에 거두어 들이십니다. 살면서 아무 것도 없다고 여겨질 때 거듭난 것으로 풍성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없는 것을 들어 있는 것을 폐하고 무명한 자로 유명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아무 것도 없다고 세상의 풍조에 따라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럴 때 오히려 하나님이 거듭나게 해 주신 것이 부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소유가 아닌 존재를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받은 것 중에 하나도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로로, 아들의 공로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빚이 없습니다. 빚이 있으면 은혜가 아닙니다. 그러나 감사의 빚을 집니다. 그래서 감사는 눌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 봉사, 찬양하고 땅끝까지 가고 끝내 순교하는 것의 출발은 모두 감사입니다. 주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저 주셨습니다. 다른 어떤 소유가 아닌 온 존재로서 아들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도 우리의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것이 있다면 남을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0미터를 달린다면 판단하겠지요.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다른 대륙을 가로질러 날아갈 때는 아무도 서로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판단합니다. 이와 같이 은혜는 우리가 미칠 수 없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 아들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그 영역에서 우리가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비행기를 타고서 내가 더 잘 날았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영생의 세계에서 우리가 누구를 판단합니까. 남보다 잘 믿고 남보다 더 좋은 믿음의 역정을 가지고 있는 것 등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비행기를 타고 내가 더 잘 난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비행기보다 더 큰 것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놓고 우리가 누구를 판단합니까?

오늘의 말씀은 문맥상 특히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노아가, 그 누구에게 공로가 있습니까. 히브리서 11장 말씀처럼, 모두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남을 판단하는 사람'을 성경은 고유명사처럼 이름을 붙여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틈만 나면 남을 판단하므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선민의식식은 실상 귀한 것입니다. 남은 자로 하나님이 우리를 택했다는 것을 뚜렷이 의식하고 이 땅에서 택함받은 백성에 주신 은혜를 누리고 감사함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판단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도무지 우리 편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창세 전부터 작정하여 때를 좇아 이루신 것이므로 그것을 놓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무조건적 은혜, 불가항력적 은혜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남을 판단하는 것은 전적인 은혜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전적 은혜에 감사가 떠나면 판단이 들어옵니다. 우리도 다 기억합니다. 가장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허물과 죄를 내어 놓고 매달릴 때는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내가 된줄로, 스스로 섰다고 생각할 때 판단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북왕국을 통일하고 왕국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판단이 들어왔습니다. 다윗은 강성한 왕국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밧세바를 범한 것보다 오히려 이것을 더 싫어하셨습니다. 밧세바를 범한 것을 한 가정의 일로 여겨 벌하셨다면, 인구조사에 대해서는  국가적인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판단함은 전적 은혜의 믿음이 덜어진 것이요, 역설적으로 내 죄를 드러낸 것입니다. 나는 아직까지 옛 사람에 머문 죄인이라고 스스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그것으로 스스로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 전적인 은혜를 고백할 때 우리는 판단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 때 가장 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이 사건에서 돌을 들고 치려는 사람들에 대해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라고 했습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내가 간음한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죄가 뭔지도 모르고 돌도 못듭니다. 간음이, 죄가 뭔지 아니까 돌을 드는 것입니다. 간음죄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돌을 들 줄도 모릅니다. 내가 맑은 영혼, 전적인 감사를 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온전히 사함을 받고 온전한 감사에 거할 때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내가 옳아서 남을 판단하고 있는지 과연 내가 옳아서 더 가까이 하나님께 다가가서 사람들을 판단하게 됐는지, 아니면 하나님과 멀어져서 사람들을 판단하는 마음이 생겼는지 말입니다. 친구 간에도, 세상 속에서도, 심지어 가정 속에서도 남을 판단할 때는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의 공로를 헤아릴 때 남의 공로를 헤아리게 되고, 그럴 때 내 공로가 남의 공로보다 뛰어나다고 여기게 됩니다. 인간의 판단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공로가 없어야 합니다. 내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니 처음부터, 내 공로와 다른 사람의 공로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전적 은혜인 사람들은 남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꼼짝할 수 없이 날라다 주는 비행기를 탄 사람이 어떻게 더 빨리 도착했음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그저 실려 옮겨졌을 뿐인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로 우리를 실어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로 우리를 날랐습니다. 

성경의 가장 주요한 죄는 판단과 정욕 곧 욕심 입니다. 성경에 많은 죄가 열거될 때마다 이 두 가지를 잘 봐야 합니다. 당을 짓고 남을 음해하는 것이 모두 판단에서 나옵니다. 판단해서 나를, 남을 갉아먹고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정욕입니다. 판단을 할 때마다 욕심을 가집니다. 나의 공로가 없을 때 욕심이 사라집니다. 나의 공로가 없을 때 감사, 담대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맺힙니다. 내 공로는 쿡 지르는 못과 같을 뿐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양분을 받아들일 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내 공로로는 잘 해봤자 터지고 쏟아져 나갑니다. 판단을 버려야 합니다. 의인은 없되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담대함은 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자는 필히 외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저 사람이 어떻다고 할 때 나는 외식하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판단하고 음해하고 당을 짓지 마십시오. 이는 모두 판단에서 기인합니다. 우리는 그러면 그렇다고만 답하십시오. 너무 많은 것에 얽혀들어갑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면서 청교도들이 강조했던 직업소명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의 확신, 자녀됨을 확신하는 자로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살라고 하셨으니 그것으로 감사하면 될 뿐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남이 하는 일과 내 것을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악을 분별한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양심은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핑계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히 거듭난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스스로를 보게 하십니다. 또 내가 나를 먼저 보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합니다. 판단하는 사람보다 판단 당하는 사람이 더 죄가 많다고 보시면 확실합니다. 허물을 덮어줄 때 내가 거룩합니다. 더 세밀하고 날카롭고 강하게 판단할수록 나의 추함이 더욱 드러납니다. 죄성이 덕지덕지 붙어 있을 때 내가 그 죄를 시기합니다. 남을 판단할 때 그것은 선에 대한 시기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말로는 남의 죄를 욕하지만, 의도는 그 사람의 죄의 열매를 누리고자 하는 것, 시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들어 돌로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짜 착한 사람이 정죄를 당할까요 아니면 정죄를 할까요? 이 세상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는 절대 백 데나리온으로 시시비비 하지 않습니다. 작은 그 돈으로 여전히 시시비비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판단하기보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판단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입법자와 재판자로 삼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판단해 주십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 -- 숯불을 쌓음은 징벌입니다. 진정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거든 오히려 먹이고 마시우게 하라는 것입니다. 절대 원수, 죄인들을 징벌하지 마십시오. 징계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먹이십시오. 그들에게 물을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핀 숯으로 그들의 머리에 둔다고 했습니다. 부족한 종도 살면서 이런 것을 많이 생각합니다. 제가 뭔가 지적하고 싶고 말하고 싶을 때 참으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진리대로 그것을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판단과 심판은 다릅니다. 심판은 야구장에서 심판이 하는 것입니다. 판단은 관중의 야유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의 원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최초 인류인 아담은 판단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선고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을 때 그는 판단했습니다. 판단은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멘'하면서 따먹지 않았으면 인류가 영생의 삶을 온전히 누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옳다하는 바로 질책합니다. 판단을 하므로 의심이 생기고 의심하므로 불안하고 염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기 전에 유일한 판단자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십시오. 성경은 읽기는 읽되 판단하면서 읽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대로 순종하면서 읽으십시오. 판단은 남에게 향하여 있는 듯 해도 내 폐부를 찌릅니다. 내가 판단하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시들어 가는 것입니다. 판단하지 마십시오. 당을 지어서 수군거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유일하신 심판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예비한 진노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는 나에게 있었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인자하시고 용납하시고 길이 참으셨습니다. 나에게 인자하시고 나를 용납하시고 나를 끝까지 길이 참아주시는 그 풍성함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때 우리는 즐겁고 기쁘고 윤택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얻고 넝쿨이 담을 넘어가지만, 판단하는 사람은 다 가난합니다. 온유해야 합니다. 어쨌든 드러내고 밝혀내서 내가 못해도 괜찮으니 상대도 못하게 하면 다 죽습니다. 예전 어떤 연구에 의하면 다수의 피실험자들이 "내가 100만원을 받고 다른 사람이 120만원을 받는 것보다 나도 다른사람도 다 함께 80만원을 받는 것"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외국 유학을 가서 한 가지 다른 것을 배운게 있는데 그것은 좋은 논문을 쓰면 다른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렇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속 사정은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진짜로 누리고 기뻐합니다. 우리 안에 저렇게 멋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 십자가지기교회도 그것이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남보다 나를 더 낮게 여기고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인자와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역사가 남에게도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축복하고 기도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를 윤택하게 하고 부요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유하지 마시고 유일하신 판단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11) --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 돌을 던져 죽이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악인이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무조건 감사하십시오. 판단하면 믿음이 약해진 것으로 아십시오. 그것이 적신호입니다. 판단이 우리가 가장 두려워할 죄입니다. 친구를, 이웃을 용서하십시오. 넓게 관대하게 용서하십시오. 특히 같은 기독교인끼리 판단하는 것은 너무한 것입니다. 이미 거듭나서 교회에, 신학교에 함께 있는 사람들이 서로 판단하는 것은 정말 아닙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1-12) 우리가 판단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구할 자는 구하십니다. 우리가 판단하고자 하는 그 사람도, 삭개오도, 사마리아 여인도, 막달라 마리아도, 십자가의 강도도 구원할 만한 자는 구하신다고 했습니다. 누가 십자가의 강도가 낙원에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러나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여러분, 죄인들의 죄를 닮지 마십시오. 그러나 죄인들의 죄를 정죄하지도 마십시오. 허물을 덮는 것이 사랑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믿음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나의 믿음을 다른 사람의 믿음과 판단하지 마십시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14:22) -- 이 말씀에서 앞의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뜻,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뒤의 판단-'자기가 옳다 하는 바'-은 우리가 스스로 하는 판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특별히 은밀하고 내적인 성령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확신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표현하면 시들어집니다. 스스로 가지고 계십시오. 내가 옳다고 하는 순간 시들어버립니다. 내게 있는 믿음을 스스로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성령을 베푸시고 판단하시되 저 끝에서, 마지막에서 이미 열매를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에게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혹은 나에 대해 너무 절망하지도 마십시오. 나에게 아무 것도 없을 때 하나님은 은혜가 온전한 것입니다. 나는 전무할 때 하나님께서 만유가 되십니다. 내게 아무 것도 없을 때, 내가 마른 잎사귀 한 장만도 못하게 여겨질 그 때, 하나님의 부요하심의 역사가 있으며 만유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다고 할 때 만유가 되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할 때, 다 이루었다는 선포를 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