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29]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10)] 열매로 알리라 (롬2:6-11) 문병호 목사

조회수 155


[20160529]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10)] 열매로 알리라 (롬2:6-11) 문병호 목사


(롬 2: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롬 2: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롬 2: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롬 2: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롬 2: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롬 2: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녹취록>



좋은 씨앗이 옥토에 떨어져민 계절에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적당한 빛과 비, 온도 가운데 맛있는 열매가 맺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아브라함의 씨, 이삭의 씨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옥토와 같은 토양 가운데 떨어져서 시절을 좇아 성령의 빛과 단비로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열매는 궁극적으로는 영생이요, 세부적으로는 행실로 나타내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옥토에 떨어진 씨앗이 되었으므로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마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믿음의 관(管)으로 수분과 양분을 받아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영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음의 관이 있어야 물도 양분도 전달되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성도의 믿음은 자녀로서의 삶을 시작할 때만 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하고 행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시작해서 율법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살아가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씀이 있으며, '믿음의 열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자입니다. 많이 기도하고 애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몸부림치다가 마지막에 육체로 마치는 것 말입니다. 항상 우리가 일을 할 때 어느 순간 고비가 있다고 하는데, 그 고비는 믿음의 고비입니다. 믿음으로 시작을 했다가 삶의 마디 마디 믿음이 아니라 행실로 해 보려고 하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다시금 믿음으로 돌이켜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의미 있는 일들은 모두 주신 것이요 그러므로 믿음으로만 일어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 '주여, 주여' 부른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행하라'는 것은 결국 믿음의 열매를 보라는 것입니다. 행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가 여물어져서 그 행함을 가져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에서 주님은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할 사람을 골라 내신다고 했습니다. 그 때 골라내는 기준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의인들이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라고 묻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되 행함이 없는 자들은 영벌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행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행한 것을 바라보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니, 바로 이 땅에서 내 이웃, 친구, 가족에게 행한 것이 곧 예수님께 행한 것이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다, 믿음이다'라고 하면서 선민이라는 것을 교만의 기회로 여기고 방종하여 오히려 세상을 멸시하고 세상 사람들을 무시하고 나만 괜찮다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은 스스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믿음으로 시작하여 행함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마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행함의 열매입니다. 곧 필히 행함이 있을 것이로되 그 행함은 믿음의 자연적인 열매라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도 길을 가다가 넝쿨 장미를 보았는데 그것이 큰 나무를 올라타서 나무가 장미 꽃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장미꽃을 보면 뭐라고 할까요, 소담스럽다고 할까요, 화려하기도 하지만, 모여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저는 오히려 넝쿨장미가 소박해보이곤 합니다. 사실 우리 믿음이 아무 것도 없어 보여도, 넝쿨장미에 가시와 가느다란 줄기가 있고 간혹 잎사귀가 달려있으나 꽃이 풍성하게 피는 것처럼,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안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모아도 어찌 꽃을 피우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와 뜻대로 그저 빛을 받고 땅에서 물을 끌어 올렸더니 그것이 믿음의 관으로 흐르니까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침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열매를 예비하시고 꽃을 주십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3:27) -- 법에는 행위가 따릅니다.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법'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일면 모순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행위가 아닌데 어떻게 행위가 필수조건인 법이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으로는 꽃을 피울 수가 없습니다. 꽃 주변을 아무리 살펴봐도 붉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장미는 붉게 핍니다.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붉은 색을 우리가 모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의 관으로 흐르니 놀라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즉, 믿음은 필히 열매를 맺으므로 행위로 열매를 알리라고 한 것입니다. 행실이 믿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오늘 로마서 1장의 본문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언약으로 시작했지만 교만해져서 이제 육체로 마치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입니다. 율법을 맡았고 지켰으나 위선자가 되어 자신을 내세우는 자가 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떠났음을 말씀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행위로 말미암아 행위로 이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필히 행실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7-18) --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모두 좋은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행실로 나아가는 것을 끌어 모은 것은 쓰레기 더미에 불과합니다. 그것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물과 양분을 모아 꽃을 피움은 생명의 역사입니다. 행실로 행실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함과 믿음으로 이릅니다. 그래서 내가 공부하고 일하는 것, 그것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관을 통해 이루어져야 놀라운 믿음의 꽃을 피웁니다.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울창한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가 아닌 세상이 헤아리는 행위의 세계입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 열매는 바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믿음으로 맺는 열매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원하십니다. 그 열매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기 원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여물게 하시고 맺게 하신 열매입니다. 세상의 열매는 마치 가시나무와 엉겅퀴와 같아서 궁극적으로 좁쌀같이 작고 쓸데 없는 열매를 맺습니다. 외양은 화려하지만 말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런 열매를 맺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많은 것을 해 놓았는데, 울창한 산에 먹을 열매가 없는 것처럼 되면 안됩니다. 본래 산에 열매가 많으려면 썩어야 합니다. 푸름이 많은 산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버섯도 없습니다. 두릅이니 하는 열매도 보면 바짝 말라 자기를 부인할 때 맺힙니다. 

본문 11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합니다. 중심을 보신다고 합니다. 내면, 내실을 가꾸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믿음이 있는가?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상대하는 것은 외모가 아니라 내실이요, 겉치장이 아니라 중심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6절은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라고 했습니다. 유력한 것, 유명한 것으로 취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대통령이나 장군이나 국회의원이 천국의 첫번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유명한 종교 지도자라고 먼저 하늘나라에 가 있지 않습니다. 유명한 것으로 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유명한 것은 그저 키가 크고 보기 싫게 산에 남아 열매 하나 없고 새도 깃들지 않습니다. 상전이라고 취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6:9). 로마 카톨릭은 계급을 만들고 그 순서에 따라 천국의 자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온갖 우상을 만듭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높낮이가 있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순서가 있을 뿐입니다. 외식으로 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외식의 유혹을 조심하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외식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질투합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내면의 중심을 가꾸어야 합니다. 온갖 외식이 이 세상에서 횡행할 때 나도 모르게 그것을 따라하고 못하게 되면 오히려 질투합니다. 베드로가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환상 가운데 광주리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며 음식이 정하거나 부정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보고 고넬료와 이방인들에게 갑니다. 하나님의 취하심은 이종이나 민족을 넘어서고 국경을 넘어섭니다. 그것을 베드로가 알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행10:34-35). 우리는 영적 수용력이 있어야 합니다. 같은 수분과 양분이 있지만 그것을 영적으로 끌어 당겨서 믿음의 관으로 흐르게 할 때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 꽃을 피워야 합니다. 그 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끌어 보은 것은 녹이 슬고 쓰레기 더미가 될 뿐입니다. 믿음의 관을 통해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애쓰는 것, 생업 가운데 힘 쓰는 것이 전부 다 믿음의 관으로 흘러들어올 때 우리에게 아름다운 열매가 맺힙니다. 

하나님이 택한 나무가 아니면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잠잠할 때 바다를 건너게 됩니다. 배 없이도 말입니다. 잠잠할 때 철옹성과 같은 여리고를 무기 없이 무너뜨리게 됩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믿음이 열매를 맺습니다. 내 육신이 절뚝거려도, 할례를 받아 걷기도 힘든 몸이지만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이 이기게 하십니다. 필히 그열매를 맺게 하시는데 그 열매는 바다를 쪼개서 땅을 밟고 건너게 하시는 열매입니다. 우리를 죽음 가운데 부활시키는 부활의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취하시는 백성은, 믿음 가운데 사는 백성은 본문 7절에 다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2:7). 우선, 오래 참음의 열매입니다. 참음이라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내로 영혼을 얻으리라(눅21:19)고 할때 영혼은 영생입니다. 참아서 영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참아도 참음에는 더함이 없습니다. 모자랍니다. 더 참으십시오. 더 참으십시오. 길게 참고 오래 참으십시오. 이 참는 열매는 여문 열매입니다. 참지 못하고 삐죽거리면 아무 쓸모 없이 떨어질 뿐입니다. 오래 참아야 익은 열매, 여문 열매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참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참습니까.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 때 참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아시고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 때 우리가 참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면 절대로 참을 수 없습니다. 세상원리가 내 안에 담기면 진다는 생각이 들 뿐 전혀 참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대로 늦게된 자가 먼저 되게 하시고 말석에 앉은 자를 상석에 앉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때, 믿을 때 참게 됩니다. 이것이 아니고는 절대 못 참습니다. 우리의 인내를 믿지 마십시오. 기질상 잘 참고 온유하다는 등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정신병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병이 뭡니까? 조금 덜하고 더할 뿐입니다. 누구든지 중풍이 다 있다고 옛날 어느 의사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중풍이 있는데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여건, 상황이 되면 다 누구라도 다 참지 못하게 됩니다. 참으려면 단 한 가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보응하심을 믿어야 참을 수 있을 뿐, 우리 손에는 모두 방아쇠가 걸려 있습니다. 참는 것이 바로 열매 맺는 것입니다. 과수원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마지막 가을에 익기 전 떨어진 열매입니다. 먹지도 못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썩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첫번째는 이처럼 참음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는 선을 행하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는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의 뜻대로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전에도 시편을 나눌 때 이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구약의 "토브(טוב)" 라는 단어입니다. '선하다'는 말은 바로 질서대로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서 부유하거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높아지는 것은 선이 아닙니다. 선은 바로 양분이 풍부한 열매를 뜻합니다. 겉모습만 열매가 있으나 속은 알고 보면 부조리하고 더러운 것이 가득찬 열매는 양분이 없는 열매입니다. 

참음은 여문 열매요 선은 양분 가득한 열매요, 세번째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입니다. 이런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영광이 무엇인가요? 영광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가장 큰 영광 가운데 있습니다. 왜요? 가장 완전하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존귀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존귀의 열매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상속자로 결국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직업에 귀천이 없습니다. 여호와를 찬미하고 찬송하고 노래하고 춤춘다면 그것이 존귀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다윗이 가장 존귀한 것은 그이 자리에 앉아 점잔을 떨 때가 아닌 법궤를 가져오면서 옷이 내려가는 것도 모르고 춤추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해야 합니다. 세상 것을 마음껏 구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세상에도 그런 말들이 있습니다: 재산은 3대를 못가고, 꽃이 10일을 못가며, 권세도 10년을 못간다는 말들 말입니다. 우리는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의 열매, 하나님의 곳간에 들이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렇게 세 가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오래 참아야 여문 열매가 되고 선한 행실을 해야 양분이 가득한 열매가 되고 존귀와 영광과 썩지 않음이 있어야 곳간에 들이는 열매가 된다고 말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이런 열매라는 것을 믿습니다. 다른 것도 추구하십시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이러한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이 택하신 옥토에 떨어진 씨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이 이곳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열심을 가지고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역으로 이와 같지 못한 세상의 백성들은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릅)"니다(롬2:8). 성경에서 보면 가장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것의 첫 열매는 당을 짓는 것입니다. 이 무리, 저 무리 모여 있는 것을 일컫습니다. 영어성경은 이를 self-seeking으로 표현했습니다. 자기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당을 지어서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을 내세웁니다. 설교를 듣기 보다는 설교를 평가하기에 바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사람들입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아집을 찾고 나의 의를 찾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을 짓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받는 것입니다. 저도 받고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당을 짓는 다는 것은 덜 여문 것의 증거입니다. 여문 나무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무성한 잎사귀가 있어도 열매가 없는 나무가 있습니다. 가을에 가장 맛있는 열매는 모든 잎사귀가 마르고 가지도 연약해져 그 모든 것을 열매로 올려보낸 나무에서 열립니다. 가장 맛있는 사과를 딸 때가 바로 그런 때입니다. 두번째는 불의를 좇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선한 열매를 맺는다고 했는데 세상 열매는 양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열매를 궁극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저 자녀를 사랑하고 기쁘게 여기며, 부모님을 공경하고 그 가운데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너무 세상의 불의를 놓고 컴플렉스에 시달리고 잠을 못 이루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약육강식이라는 말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것이 자연질서입니다만, 그것은 타락한 질서입니다. 무전유죄니 유전무죄니 이런 말도 '그런 말이 있으니 그럴 수 있다' 하며 은연 중에라도 인정해서는 안됩니다.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세상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말이 있으니 '부자니까 더 가져야되고 가난하니 더 가난해져야 한다'고 은연 중에라도 인정해서는 안됩니다. '좋은 것이 좋다, 너무 착하면 세상에서 살기 어렵다' 등 이런 모든 말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말씀을 통해 이것을 나눴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비의 말을 들으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말을 들으라고 한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명기고 잠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원론, 삼원론, 다원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 말이 맞고 세상에서는 저 말이 맞고 가정에서 맞는 말이 따로 있습니다. 저도 부모이지만 이런 부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단이니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은 아비의 말이 여호와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잠언에서 '아비의 훈계를 멸시치 말고 그 말을 듣고 심중에 헤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행위를 귀하게 여기지만 그것보다 믿음을 더 귀하게 여깁니다. 그 믿음과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행실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행실에 힘쓰시고 열매를 맺으십시오. 다만 그것이 믿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시62:12). 인자하시다면 행함을 보지 않을 것 같은데,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이 둘의 관계를 풀어내야 합니다 -- '인자하신데 행실을 갚으신다'. 이는 결국 '여호와의 인자하심으로 행실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많은 경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부분만 보면 안됩니다. 행실 혹은 인자만 강조해도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하나로 우리에게 들어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으로 우리에게 행실의 열매가 맺히고 우리가 날마다 더 열심히 도덕적인 삶을 살게 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잠24:12). 저는 한 때 이 본문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것과 영혼을 지키시는 것이 서로 모순되어 보였습니다. 우리를 헤아리시는 분이 바로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십니다. 우리는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맛을 내고 향기를 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구원받았는데 왜 그냥 살지 굳이 일을 하냐고 말하는 것이 어리석습니다. 아이로 태어났으면 어미 품에 안겨 젖을 먹어야 복된 것입니다. 이 지상에 온 것은 그저 생명으로 있다가 그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인데, 그것을 저울질하고 지키게 하시고 보응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126편도 그렇습니다. 2절과 3절에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을 연이어 강조하고 나서 5절과 6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신다고 해 놓고 또 다시 사람이 울며 씨를 뿌린다고 하니 모순 같지만, 이것이 모순이 아닙니다. 아이가 젖을 빠는 것을 어찌 수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열심히 사는 것, 직업소명설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귀합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십시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천하게 여기는 것이 천할 뿐입니다. 다만 우리는 여호와를 높이고 찬양하는 일, 그것을 존귀하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각자의 생업에 충실하십시오. 하나님이 큰 일을 행하시면서 우리가 눈물로 울며 씨를 뿌리게 하시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이미 높이셨습니다. 우리를 여물게 하실 것이요, 즙과 양분이 많은 열매로 삼을 것이요, 끝내 우리를 썩지 않을 열매로 곳간에 들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리새인, 서기관과 같은 삶을 버려야 합니다. 외식하고 내 의(義)대로 살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의 질서대로 살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참으십시오.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응하십니다. 말석에 거하시고 겸손하십시오. 이 사람 저 사람 나선다고 따라가지 마십시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나서지 않아도 등경을 말 위에 두어 세상을 비춥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에게 이 세태에 다시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의의 열매를 맺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