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05]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11)] 자연적임의 한계 (롬2:12-1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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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5]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11)] 자연적임의 한계 (롬2:12-16) 문병호 목사
(롬 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롬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 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롬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2: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녹취록>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착한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하지만 그 착한 사람들이 교회에만 다 모여 있지 않습니다. 교회 밖에 혹은 오히려 교회 밖의 사람들이 더 착하다는 말까지 듣게 됩니다. 로마서 1장 28절은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상실한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의 행사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의 삶을 사는 동안에 이 로마서의 말씀이 항상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지 않은 모습이 우리 가운데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지만 광대한 자연을 아름답게 화폭에 담아내는 화가들이나 웅장한 심포니와 노래를 작곡하는 음악가들이나 자신의 사재를 출연해서 이웃을 돕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 본연의 심성에 얼마나 많은 은총을 주셨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험악한 소식도 많지만 그런 소식이 더 부각되서 그렇지 귀를 기울여 보면 작게 지나가듯 남을 위해 선행을 베푼 사람들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 중에 약속 있는 첫째 계명인 '부모를 공경하라'는 일반은총적인 명령입니다. 믿는 것과 상관없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머지 6~10계명 역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에서도 이야기하고 도둑질, 살인, 탐심, 거짓말 하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는 사람들을 선하지 않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평생 죄 한번 짓지 않고 살았다 싶은 분들을 주변에 두고 계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부모님들도 아주 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그를 통해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가르치고자 합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왜 저렇게 착한 분이 교회를 가지 않으려고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뚜렷한 구분을 믿는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낙도에 선교를 가 보니 아무도 믿지 않는 그곳에 사랑이 더욱 넘치고 이웃 간의 돌봄이 가득함을 보았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러 간 우리가 이기적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영국에서 공부할 때 그 지역의 교회를 대표목사로 섬긴 적이 있는데 그 당시 믿지 않는 분이 세계적인 학술지인 네이처에 논문발표를 하러 가족과 함께 오셨습니다. 영국에 딱히 지낼 곳이 없는 관계로 그 가족이 저희 집에 거의 한 달 가까이 지냈고 그 기간 동안 함께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던 이 분들이 교회에서, 교회에 대해 아무것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많이 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번은 예배 후에 교제가 있다는 광고를 하는데 '교제'라는 단어를 몰라서 '예배 후에 연회가 있겠다'고 광고를 해서 다 같이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쓰는 용어조차 모르는데, 그 때 모였던 70명 중에 가장 빛나고 헌신적이고 부지런했습니다. 과연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더 윤리적입니까? 초대교회는 어땠을까요. 오히려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더욱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더 편한 것을 구하고 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이 땅에서 자기를 끝없이 부인했는데 우리 가운데 그런 모습이 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윤리와 예술성과 질서의식, 비와 햇빛을 주셨습니다. 곡식을 거두는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을 주었고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히 양심에 더하여 율법을 주었습니다. 율법은 듣고 행해야 의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을 받아 무조건적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 이후에 자기 마음대로 울타리를 넘나들며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은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닌, 그것을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을 받음은 그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믿어서입니다. 그러나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행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입니다. 빛을 비추고 맛과 향기를 내라고 구원하고 자녀삼으신 것입니다. 어느덧 예배가 편리의 도구가 되고 가장 좋은 조건에서 예배를 드리게끔 교회당을 지으라는 요구와 그것을 수용하는 분위기가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할 것을 신학교 수업시간에서 가르쳐집니다. 우리는 예배가 그야말로 의식화된 세태를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신 4:1) -- '우리'가 말씀을 준행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을 다 지키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났기 때문에 이제는 더욱 이 말씀 가운데 살아야 살아있는 사람의 낙과 목을 누리고 그 가운데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 하셨을 때 그저 열매없는 나무로 접붙이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나무에 접붙여서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접붙이신 것입니다. 율법의 의는 율법의 명령을 완전히 지키는 행위에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의 명령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이제 은혜 가운데, 복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담대한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이루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 그런데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하늘나라에 가져갈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격과 행실입니다.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명예가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가져갈 것, 그것을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얻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말씀대로 사는 힘"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여호와의 말씀이 우리의 힘이 된다고 했습니다. 제일 먼저 구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고, 내가 지킬 수 없는 것을 주님이 지키셔서 구원하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구하기만 하면,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성도가 누리는 가장 큰 달콤함은 내가 친히 행할 수 없는 말씀을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게 될 때입니다. 그 의는 천국의 상급이 되어 하나님께 가져가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리하여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시 119:56)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소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것입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8:5). 우리는 살아났습니다. 이제는 다시 사망과 죽음과 저주와 불법의 그늘에 머물지 않습니다 새 생명을 주시고 빛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레위기 말씀이 폐지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난 자로서 말씀을 지키기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규례와 법규를 지키면 날마다 날개치고 하늘을 오르는 독수리같이 생생해지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명예와 재산이 많으면 뭐합니까, 내 삶이 죽어있고 즐거움이 없는데 말입니다. 진정한 삶의 즐거움은 여호와를 만나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여호와는 얼굴이 없습니다. 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통해 그의 뜻을 깨닫고 그가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 바로 여호와를 만나는 것입니다. 긴 밤, 깊은 밤에 우리가 홀로 무릎 꿇고 기도하고, 그 가운데 여호와의 뜻을 깨닫고 나의 부족함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호와여 나는 여호와의 백성과 자녀이오니 나를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온전히 이루소서'라고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모든 세포 하나라도 진정한 영적인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육체로만 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즐거움이 없고 불평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26). 이 구약의 말씀이 폐지됐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그 말씀에 '아멘' 하면 말씀에 맺혀있는 언약의 복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지만 이방인들은 자기 양심의 소리로 스스로 증거를 삼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도 선함이 있고 양심의 법정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시시비비와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이루려는 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롬 2:16)라고 했습니다. '나의 복음'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누가와 마태와 요한과 바울의 복음이 각각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같은 절에서 또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6)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여전한 부족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악인의 심판'이 아닌 오히려 '의인의 심판'이 우리 가운데 역사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담대함은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한 갈렙과 같이, 여호수아와 같이 '주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으니 이제 우리도 그 의를 의지하여 주의 말씀대로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북한에서, 중국에서 선교하는 것이 귀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지경을 야베스와 같이 넓히는 것입니다. 나는 좁아지고 사악해지는데 무슨 선교를, 어떤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다윗과 같이 은밀히 준비되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형들은 시장에서 명성을 쌓았지만 다윗은 목동으로 산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너무 들뜨지 마십시오. 성도의 생활은 예배에 충실하고 말씀보고 은밀히 기도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 앞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등경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말 위에 놓아 마을을 비추듯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심문 당하실 때 본디오 빌라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똑똑한 사람, 입지전적인 사람으로 로마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본래 가문이 좋다기보다 오히려 개인의 능력으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항상 강한 사람을 붙여 놓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이 헤롯이고 그 때 예수님이 나셨다면, 가장 똑똑한 사람은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진리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가 말한 진리는 편의주의, 실용주의, 지상에서 쓸모 있는 것, 기복주의입니다. 지금 이 곳에서 모든 것을 누리면 되는 삶, 그것이 본디오 빌라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와 주님의 연령이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도유망한 로마의 관리와 예수님이 대화하는데, 무엇이 진리인지 묻습니다.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진리를 떠나 어쨌든 이 땅에서 명성과 명망을 얻고 인기에 영합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오직 진리 가운데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말씀 가운데 나아가는 그것이 성도들과 성도 아닌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더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더 윤리적이고 더 많이 참고 더 많이 구제합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뚜렷한 말씀과 그리고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는 약속이 있습니다. 아빠 아버지라고 하면 그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제일(第一) 소망은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 가을에 무슨 열매를 맺을지 생각하면서 여름을 나라는 것입니다. 저 들의 오곡과 백합화만 보지 말고 내 영혼과 인생이 얼마나 이번 가을에 결실을 거둘지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내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천국은 아무 소유도 가졀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4) -- 우리가 무엇을 깨닫습니까? 무엇을 듣고 봅니까? 그것은 첫째로 뚜렷한 하나님의 진리요, 두번째로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다는 것을 뚜렷이 아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복음이라고 할 때, 그것은 '너의 것' 혹은 '그들의 것'도 아닙니다. 즉, '나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이 복음이 나에게 역사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의 의가 우리 안에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저부터 죄를 버려야 하겠습니다. 허탄한 생각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말과 행실이 다른 고질적인 쓴뿌리를 뽑아 버려야 하겠습니다. 버릇처럼 도사리는 많은 습성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많은 것을 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존귀케 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은혜의 말씀, 그 은혜 가운데서 어떻게 살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것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지만 날마다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 여름에 오히려 덥다고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더운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만큼 더울까요. 이 여름에 더 땀을 흘리되 육체의 땀만 흘리지 말고 영혼의 땀인 눈물을 많이 흘리십시오. 눈물 없는 기도는 다 거짓이라고 이번 주 신학교 강단에서 선포한 바 있습니다. 이 여름에 땀만 흘릴 것이 아니라 눈물을 많이 흘리면 좋겠습니다. 눈물로 울며 씨를 뿌리는 자가 가을에 기쁨으로 곡식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품을 더 발전시킵시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잘 의지하는 자가 거룩한 자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할 줄 아는 자, 기댈 줄 아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살고 일어나고 보좌에 앉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시금 말씀 가운데서 새롭게 나아가는 이 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오늘날 많은 질책들이 우리 교회를 향해 쏟아지고 있습니다. 많은 것이 있지만 크게 보면 한 가지, '왜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들의 유익만 추구하고 도무지 베풀 줄, 사랑할 줄 모른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가 북한을 가장 많이 돕고 이웃을 다른 어떤 종교보다 많이 구제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가 위안을 삼을 것이 아닙니다. 진정 우리의 모습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4:5).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선을 행합니다. 양심이 옳은 판단을 해서 많은 귀한 일들을 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질투하거나 오히려 업신여기면 안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일반적인 은총입니다. 그런 은총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특별히 특별한 은총을 이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이 말씀하면 아멘하고 행하고자 애쓰며,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특별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다 예수의 증인들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4-45) 복음을 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어려움은 우리가 말씀을 피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름이 그저 지루하고 답답하고 어떻게 보면 내 삶에 새로운 것이 없다고 여겨지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말씀의 찔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다시금 깊이 새기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그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고 그것으로 세상의 향기와 빛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160605] [주일낮예배:로마서강해(11)] 자연적임의 한계 (롬2:12-16) 문병호 목사
<녹취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