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6:1-2, 10-14)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11]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14]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녹취록
1. 추수감사와 가을
우리가 계속 복음서를 보다가 이제 모처럼 이사야서, 구약 말씀을 보게 됩니다. 제가 말씀을 전할 때 어쨌든 가급적 성도님들이 구약에 낯설면 안 되니 구약 말씀도 인용하려고 합니다. 제 마음속에는 항상 선지서에 대한 갈급함이나 즐거움이 있습니다. 선지서를 보면 우리를 혼내는 것 같으나 위로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연중 감사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 날을 정하는 것은 구약의 절기가 아니라 그 말씀을 기리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먹을 것을 바치는 그것이 추수감사절의 정신입니다. 미국에 청교도들이 처음 도착하여 먹을 것이 없어 많은 이들이 죽는 가운데 씨를 뿌려 첫 수확을 했는데 많은 것을 거두게 하시니 그것에 감사하고, 그리고 직업소명설에 따라 자기 직업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삼아 거둔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수장절이니 하는 절기가 아닙니다. 영국은 추수감사절을 조금 다르게 하나 제가 유학 시절 미국에서 본 것은 과일을 가져와서 단 앞에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 1회 추수감사주일 때 했던 것임을 생각하면 그 의미가 귀합니다.
가을이라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저는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나고 자랐습니다. 농부도 어중간한 농부입니다. 진짜 농부가 부러웠습니다. 저는 낫질도 잘 못하고 소 꼴 먹이는 것도 제대로 해 보지 못했습니다. 여름방학 때 과제를 주면 공부는 하는데 가장 힘든게 퇴비를 가져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풀을 베어서 학교 가져가면 쌓아서 비료를 만듭니다. 가을에 탈곡을 하는 시기는 대체로 추울 때입니다. 요즘 망년회니 하는데 사실상 추수 감사가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 어떤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을 당겨서 한다고 합니다. 곡물이 빨리 나오고 하니 말입니다. 아마도 지금 이 즈음이 가장 적절한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추수감사절을 굳이 구약으로 한다면 초막절, 장막절, 수장절과 비교할 만합니다. 이스라엘 달력은 이때가 한 해의 끝입니다. 현재 달력으로는 12월 정도가 맞습니다. 가을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추수입니다.
이 가을은 여름과 겨울 사이에 있습니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운데 가을이 그 사이에 껴 있습니다. 가장 얇고 가장 두꺼운 옷을 입는 계절 사이에 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를 지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 탕자가 돌아온다면 그것은 아마도 가을일 것입니다. 여름에는 어디 벤치에 누워도 집 생각이 안 납니다. 가을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뒷산의 짐승들도 보면 벌써 다람쥐나 이런 것들이 겨울을 준비합니다. 겨울은 흔히 소멸이니 적막이니 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가을걷이가 잘 되었는지에 따라 겨울이 안식이나 쉼이 될지, 아니면 궁핍과 고난의 계절이 될지 결정됩니다.
2.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본문 이사야서 말씀은 66장 마지막 장입니다. 예루살렘에게 기뻐하라고 하는데 여기서 예루살렘은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그 예루살렘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벌써 앞으로 다가올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64장을 보면 주는 하늘을 찢고 강림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십자가에서 휘장을 가른 일이 연상됩니다. 구약의 개념으로는 이것은 바로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선지서들은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소망이 됩니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사 64:1). 본문에도 보면 주님이 그 손으로 지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그 아들과 함께 자녀되고 상속자가 됩니다. 우리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산상복음의 가장 큰 주제는 하늘의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고 우리는 그의 자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은 구약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64장을 보면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우리를 토기로 칭합니다. 토기장이는 창조주를 의미합니다. 그분이 오셔서 우리가 다 주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사 64:8-9). 신약 백성의 특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말씀이 자세히 나오기도 합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사 65:17-19).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면 요한계시록 21장부터를 생각하는데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 지금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당겨서 살되 성취가 마지막 그 때 이루어지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의 인 친 백성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매를 주시는 제 1 법칙은 우리가, 내 자신이 열매, 분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자신을 최고의 열매로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악하다면 내가 먹는 게 선하겠습니까. 그런데 내 자신을 선한 열매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전 것을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우리가 거하는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마치 주를 모시는 곳이 천국이듯 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제는 땅이나 장소가 아닙니다. 변화된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본문과 그 이후에는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명령이 계속 나옵니다. 즐거운 성이라는 것이 따로 있습니까? 즐거운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즐거워야 즐거운 곳이고 즐거운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쁨이 되는 삶을 우리가 읽은 66장 10절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사 66:10).
3.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인 하나님의 자녀들
성경에서 기쁨, 즐거움은 열매를 뜻합니다. 나무가 언제 즐거울까요. 열매를 맺을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쁨, 즐거움도 열매 맺을 때 있습니다. 사용하는 것과 즐기는 것은 다릅니다. 열매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즐겁게 사는 것이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베들레헴 목자들에게 하늘의 찬송이 들렸습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사 66:10). 예수님이 나셨을 때 부른 이 노래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가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내려옵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다고 합니다. 없어지는데 그냥 없어지지 않고 새로 창조합니다. 아무도 이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창조는 완성입니다. 옛 하늘과 땅과 바다가 없어지고 새 하늘과 땅에 거룩한 성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치 그 성은 신부같고 우리는 신랑 같다고 합니다. 신랑을 위해 단장한 신부같이 그 성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신부처럼 사용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그 자체로 도시나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의 터요, 성전의 터요, 오늘날로 하면 교회요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성전이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되어 열매 맺고 온전히 열매 맺는 것은 새 것을 먹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요단강을 건너가서 새해 첫 열매를 먹었던 것, 그 기쁨입니다.
본문 66장의 잔치는 천국 잔치요, 이 잔치는 마지막 때 새 하늘과 새 땅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지상의 교회가 바로 본문의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이 예루살렘에서 우리가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감사의 조건입니다. 우리가 조건을 따져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열매이니 그것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는 주님이 스스로를 첫 열매요 우리를 후속 열매로 칭하신 것을 증언합니다. 아무리 장미가 예쁜들 시들 때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팔꽃이라도 필 때는 생기가 넘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내 자신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감사의 조건인데 나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 입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스바냐서의 말씀이 이것입니다. 주님이 첫 열매가 되시고 우리도 후속 열매가 되니 그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좋지만 기뻐한다는 말도 동일하게 좋을 것입니다. 그 기뻐하는 것은 본문의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할 때의 감정이자 표정입니다. 이 땅에서 기쁨을 우리가 맛봅니다. 나는 내 생각이나 조건이 아닌 그 자체로 기쁨의 대상이자 조건입니다.
4. 감사로써 기뻐하라
그리고 기쁨은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고백하라는 말입니다. 기뻐하라는 명령은 그러므로 기쁘다고 고백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우리는 아멘 하게 하시고 친히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루시는 것은 기쁨입니다. 기쁨과 추수의 조건은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기뻐해야 열매가 맺히고 기뻐한 열매가 실한 열매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지게 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의 기쁨 가득하고 슬퍼할 것이 없는 상태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심령이 춤을 추는 것이, 즐거워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농부의 땀이 많이 있겠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색이 나오고 맛이 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이 기뻐하는 존재가 될 때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쁨은 그 기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쁨이 도리어 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기쁨의 최고의 방식은 감사입니다. 감사가 없는데 기쁨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감사가 기쁨을 붙들어 맵니다. 그래서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문에도 그리스도가 오시니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내가 기쁨거리입니다. 기쁘게 먹으면 기쁜 것입니다. 내 자신을 기뻐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기뻐하는 것이 명령입니다.
이토록 큰 기쁨을 누리는 우리가 너무 사소한 것으로 낙담하고 신경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남과 경쟁해서 조금 이기는 그것이 나로 말미암은 기쁨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없습니다. 기뻐함에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낭비가 아닙니다. 감사는 허비가 아닙니다. 우리가 영어로는 ‘give thanks’라고 합니다. 그런데 라틴어에서는 은혜를 미치는 표현으로 씁니다(gratiam agere). 남미에서는 실제로 은혜라는 어원의 단어를 감사로 사용합니다(Gracias). 감사가 기쁨을 유지해 줍니다. 불평은 감사를 앗아갑니다.
5. 평강과 위로를 베푸시는 여호와의 손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가을에 우리가 나눔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따서 우리가 먹으려고 하기보다 남들이 먹을 수 있기를 바라고 베푸는 것입니다. 호박이 구석에 뒹굴면 그것을 꺼내 풀숲으로 옮겨서 자라게 하는 그런 마음은 어떨까요. 그게 감사라고 생각합니다. 땅에 남겨야 그것이 하늘의 상급입니다. 땅의 것을 다 취하려고 하지 말고 남기십시오. 진정한 감사가 있는 사람이 많아야 세상도 살 만한 곳이 됩니다. 서로 도와서 살아가게 됩니다.
한편 본문의 젖을 먹으라는 말은 나를 낳은 사람이 나에게 물리는 것인 젖의 특성상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심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서에서 신약에 해당되는 부분은 위로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사 66:12). “내게 강 같은 평화”라는 찬송이 이 구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평강이 강같이 우리 안에 흐르고 시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정에 이런 풍성히 베푸시는 젖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11절, 위로하시는 여호와의 품의 큰 사랑이 풍성하기를 원합니다. 위로의 품입니다. 위로라는 것은 맡기는 것이요 나를 낳아준 분이 나를 기른다는 믿음 가운데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도망치려고 해도 나를 사랑하십니다. 불가항력적인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믿어야 위로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거리, 기쁨거리라는 것을 매일 아침에 알게 되면 기쁨도, 세상에 대해 절제하고 자제하는 마음도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14절은 에스겔서의 마른 뼈가 살이 붙어 군사가 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무성함은 생기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마르고 갈급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채우는 것이 여호와의 손에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사 66:2). 여호와의 손이 모든 것을 지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떠는 자,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그가 복을 베푸십니다.
이 추수의 계절에 하나님이 더욱 풍성하게 하시고 평강의 강이 시내같이 흐르는 이리 있기를 축원합니다. 영적 본능으로 나는 기쁨거리라고 알고 내가 기뻐하지 못해 탈이지 원망이 부족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원합니다. 괜히 감사하면 감사할 거리를 더하게 하시는 일이 있을 줄 믿습니다.
2024년 11월 17일 주일낮예배 설교 | 추수감사주일
여호와의 위로하는 품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이사야 66:1-2, 10-14
(이사야 66:1-2, 10-14)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11]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14]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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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수감사와 가을
우리가 계속 복음서를 보다가 이제 모처럼 이사야서, 구약 말씀을 보게 됩니다. 제가 말씀을 전할 때 어쨌든 가급적 성도님들이 구약에 낯설면 안 되니 구약 말씀도 인용하려고 합니다. 제 마음속에는 항상 선지서에 대한 갈급함이나 즐거움이 있습니다. 선지서를 보면 우리를 혼내는 것 같으나 위로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연중 감사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 날을 정하는 것은 구약의 절기가 아니라 그 말씀을 기리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먹을 것을 바치는 그것이 추수감사절의 정신입니다. 미국에 청교도들이 처음 도착하여 먹을 것이 없어 많은 이들이 죽는 가운데 씨를 뿌려 첫 수확을 했는데 많은 것을 거두게 하시니 그것에 감사하고, 그리고 직업소명설에 따라 자기 직업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삼아 거둔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수장절이니 하는 절기가 아닙니다. 영국은 추수감사절을 조금 다르게 하나 제가 유학 시절 미국에서 본 것은 과일을 가져와서 단 앞에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 1회 추수감사주일 때 했던 것임을 생각하면 그 의미가 귀합니다.
가을이라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저는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나고 자랐습니다. 농부도 어중간한 농부입니다. 진짜 농부가 부러웠습니다. 저는 낫질도 잘 못하고 소 꼴 먹이는 것도 제대로 해 보지 못했습니다. 여름방학 때 과제를 주면 공부는 하는데 가장 힘든게 퇴비를 가져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풀을 베어서 학교 가져가면 쌓아서 비료를 만듭니다. 가을에 탈곡을 하는 시기는 대체로 추울 때입니다. 요즘 망년회니 하는데 사실상 추수 감사가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 어떤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을 당겨서 한다고 합니다. 곡물이 빨리 나오고 하니 말입니다. 아마도 지금 이 즈음이 가장 적절한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추수감사절을 굳이 구약으로 한다면 초막절, 장막절, 수장절과 비교할 만합니다. 이스라엘 달력은 이때가 한 해의 끝입니다. 현재 달력으로는 12월 정도가 맞습니다. 가을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추수입니다.
이 가을은 여름과 겨울 사이에 있습니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운데 가을이 그 사이에 껴 있습니다. 가장 얇고 가장 두꺼운 옷을 입는 계절 사이에 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를 지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 탕자가 돌아온다면 그것은 아마도 가을일 것입니다. 여름에는 어디 벤치에 누워도 집 생각이 안 납니다. 가을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뒷산의 짐승들도 보면 벌써 다람쥐나 이런 것들이 겨울을 준비합니다. 겨울은 흔히 소멸이니 적막이니 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가을걷이가 잘 되었는지에 따라 겨울이 안식이나 쉼이 될지, 아니면 궁핍과 고난의 계절이 될지 결정됩니다.
2.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본문 이사야서 말씀은 66장 마지막 장입니다. 예루살렘에게 기뻐하라고 하는데 여기서 예루살렘은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그 예루살렘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벌써 앞으로 다가올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64장을 보면 주는 하늘을 찢고 강림하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십자가에서 휘장을 가른 일이 연상됩니다. 구약의 개념으로는 이것은 바로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선지서들은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소망이 됩니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사 64:1). 본문에도 보면 주님이 그 손으로 지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그 아들과 함께 자녀되고 상속자가 됩니다. 우리가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산상복음의 가장 큰 주제는 하늘의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고 우리는 그의 자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은 구약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64장을 보면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우리를 토기로 칭합니다. 토기장이는 창조주를 의미합니다. 그분이 오셔서 우리가 다 주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사 64:8-9). 신약 백성의 특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말씀이 자세히 나오기도 합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사 65:17-19).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면 요한계시록 21장부터를 생각하는데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 지금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당겨서 살되 성취가 마지막 그 때 이루어지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의 인 친 백성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매를 주시는 제 1 법칙은 우리가, 내 자신이 열매, 분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자신을 최고의 열매로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악하다면 내가 먹는 게 선하겠습니까. 그런데 내 자신을 선한 열매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전 것을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우리가 거하는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마치 주를 모시는 곳이 천국이듯 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제는 땅이나 장소가 아닙니다. 변화된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본문과 그 이후에는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명령이 계속 나옵니다. 즐거운 성이라는 것이 따로 있습니까? 즐거운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즐거워야 즐거운 곳이고 즐거운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쁨이 되는 삶을 우리가 읽은 66장 10절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사 66:10).
3.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인 하나님의 자녀들
성경에서 기쁨, 즐거움은 열매를 뜻합니다. 나무가 언제 즐거울까요. 열매를 맺을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쁨, 즐거움도 열매 맺을 때 있습니다. 사용하는 것과 즐기는 것은 다릅니다. 열매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즐겁게 사는 것이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베들레헴 목자들에게 하늘의 찬송이 들렸습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사 66:10). 예수님이 나셨을 때 부른 이 노래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가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내려옵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다고 합니다. 없어지는데 그냥 없어지지 않고 새로 창조합니다. 아무도 이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창조는 완성입니다. 옛 하늘과 땅과 바다가 없어지고 새 하늘과 땅에 거룩한 성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치 그 성은 신부같고 우리는 신랑 같다고 합니다. 신랑을 위해 단장한 신부같이 그 성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신부처럼 사용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그 자체로 도시나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의 터요, 성전의 터요, 오늘날로 하면 교회요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성전이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되어 열매 맺고 온전히 열매 맺는 것은 새 것을 먹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요단강을 건너가서 새해 첫 열매를 먹었던 것, 그 기쁨입니다.
본문 66장의 잔치는 천국 잔치요, 이 잔치는 마지막 때 새 하늘과 새 땅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지상의 교회가 바로 본문의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이 예루살렘에서 우리가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감사의 조건입니다. 우리가 조건을 따져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열매이니 그것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는 주님이 스스로를 첫 열매요 우리를 후속 열매로 칭하신 것을 증언합니다. 아무리 장미가 예쁜들 시들 때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팔꽃이라도 필 때는 생기가 넘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내 자신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감사의 조건인데 나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 입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스바냐서의 말씀이 이것입니다. 주님이 첫 열매가 되시고 우리도 후속 열매가 되니 그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좋지만 기뻐한다는 말도 동일하게 좋을 것입니다. 그 기뻐하는 것은 본문의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할 때의 감정이자 표정입니다. 이 땅에서 기쁨을 우리가 맛봅니다. 나는 내 생각이나 조건이 아닌 그 자체로 기쁨의 대상이자 조건입니다.
4. 감사로써 기뻐하라
그리고 기쁨은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고백하라는 말입니다. 기뻐하라는 명령은 그러므로 기쁘다고 고백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우리는 아멘 하게 하시고 친히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루시는 것은 기쁨입니다. 기쁨과 추수의 조건은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기뻐해야 열매가 맺히고 기뻐한 열매가 실한 열매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지게 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의 기쁨 가득하고 슬퍼할 것이 없는 상태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심령이 춤을 추는 것이, 즐거워하는 것이 기쁨입니다. 농부의 땀이 많이 있겠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색이 나오고 맛이 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이 기뻐하는 존재가 될 때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쁨은 그 기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쁨이 도리어 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기쁨의 최고의 방식은 감사입니다. 감사가 없는데 기쁨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감사가 기쁨을 붙들어 맵니다. 그래서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문에도 그리스도가 오시니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내가 기쁨거리입니다. 기쁘게 먹으면 기쁜 것입니다. 내 자신을 기뻐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기뻐하는 것이 명령입니다.
이토록 큰 기쁨을 누리는 우리가 너무 사소한 것으로 낙담하고 신경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남과 경쟁해서 조금 이기는 그것이 나로 말미암은 기쁨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없습니다. 기뻐함에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낭비가 아닙니다. 감사는 허비가 아닙니다. 우리가 영어로는 ‘give thanks’라고 합니다. 그런데 라틴어에서는 은혜를 미치는 표현으로 씁니다(gratiam agere). 남미에서는 실제로 은혜라는 어원의 단어를 감사로 사용합니다(Gracias). 감사가 기쁨을 유지해 줍니다. 불평은 감사를 앗아갑니다.
5. 평강과 위로를 베푸시는 여호와의 손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가을에 우리가 나눔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따서 우리가 먹으려고 하기보다 남들이 먹을 수 있기를 바라고 베푸는 것입니다. 호박이 구석에 뒹굴면 그것을 꺼내 풀숲으로 옮겨서 자라게 하는 그런 마음은 어떨까요. 그게 감사라고 생각합니다. 땅에 남겨야 그것이 하늘의 상급입니다. 땅의 것을 다 취하려고 하지 말고 남기십시오. 진정한 감사가 있는 사람이 많아야 세상도 살 만한 곳이 됩니다. 서로 도와서 살아가게 됩니다.
한편 본문의 젖을 먹으라는 말은 나를 낳은 사람이 나에게 물리는 것인 젖의 특성상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심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서에서 신약에 해당되는 부분은 위로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사 66:12). “내게 강 같은 평화”라는 찬송이 이 구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평강이 강같이 우리 안에 흐르고 시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정에 이런 풍성히 베푸시는 젖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11절, 위로하시는 여호와의 품의 큰 사랑이 풍성하기를 원합니다. 위로의 품입니다. 위로라는 것은 맡기는 것이요 나를 낳아준 분이 나를 기른다는 믿음 가운데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도망치려고 해도 나를 사랑하십니다. 불가항력적인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믿어야 위로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거리, 기쁨거리라는 것을 매일 아침에 알게 되면 기쁨도, 세상에 대해 절제하고 자제하는 마음도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14절은 에스겔서의 마른 뼈가 살이 붙어 군사가 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무성함은 생기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마르고 갈급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채우는 것이 여호와의 손에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사 66:2). 여호와의 손이 모든 것을 지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떠는 자,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그가 복을 베푸십니다.
이 추수의 계절에 하나님이 더욱 풍성하게 하시고 평강의 강이 시내같이 흐르는 이리 있기를 축원합니다. 영적 본능으로 나는 기쁨거리라고 알고 내가 기뻐하지 못해 탈이지 원망이 부족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원합니다. 괜히 감사하면 감사할 거리를 더하게 하시는 일이 있을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