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보다 먼저 가시는 하나님 | 신 1:29-33 | 문병호 목사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3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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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보다 먼저 가시는 하나님 | 신 1:29-33 | 문병호 목사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30101
29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녹취록>
1. 하나님의 첩경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간 길은 최단경로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홍해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시고, 극적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내 광야에 약 1년간 머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떠나게 하셔서, 우측으로 나오는 바란 광야라는 곳이 나오는데, 그곳으로 하나님이 이끄십니다. 오늘날 이집트 내 테러가 일어나는 지역입니다. 바란 광야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세렛 시냇가가 나옵니다. 그곳을 지나 모압, 암몬 지방으로 가면 가나안으로 불과 며칠만에 도착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시고 신 광야를 오른쪽으로 끼고 올라가서 나오는 헤브론, 조금 더 올라가면 예루살렘이 나오는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바로 가나안을 목전에 두는 그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 정탐꾼들이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블레셋 해변 지역까지 보게 하십니다. 그들이 이제 와서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하는데, 같은 사실을 보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평가가 다릅니다. 우리나라 임진왜란 때도 두 장수가 다른 방식으로 보고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런 시기에 보면 하나님 위주의 판단과 그렇지 않은 판단에 차이가 생깁니다. 본문은 이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항상 시원한 길, 한 번에 이루는 길을 찾습니다. 내 능력껏 시원시원하게 쭉쭉 펼쳐진 길로 가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길이 있다고 해서 첩경은 아닙니다. 아스팔트 길을 짐승이 간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이 길을 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석 길을 내실 수도 있고 초장 길을 지나게도, 물이 없는 길로도 이끄십니다. 극적으로 바위에서 물을 내시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천로역정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시각이 아닌 여호와의 뜻이 있는 곳이 우리의 첩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급한 마음, 조바심이 있는 마음도 다 아십니다. 높은 바위에 올라가는 사람이 욕심만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올라갈 힘이 누구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나조차도 내가 그곳에 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과 마음을 헤아리실 뿐 아니라 우리의 능력과 힘, 인내심도 아십니다. 하나님이 광야에 40년간 이스라엘 백성을 있게 하신 것이 징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준비하지 않았으면 가나안에서 살아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준비하여 그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 자들인지 어떤 성정을 가진 자들인지 깨닫고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강대국과 족속들을 활 한 번 쏘지 않고 이기게 하십니다. 이런 훈련을 40년간 시키신 것을 우리가 잘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해의 시작에 첩경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을 내가 헤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길입니다. 그것은 간혹 참아야 하는 길일 수 있습니다. 시원하게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꾹 참고 그저 가는 길일 수 있습니다. 협곡을 지나지 않고 초장이 나오지 않습니다. 협곡을 지나야 펼쳐지는 초장이 나옵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행로에 두 가지를 원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면서 우리를 복되게 하시기 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에게 복된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인생의 복됨이 함께 어우러지는 그 시간과 길을 정하십니다.
2. 온유한 사람 모세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진을 갖추게 합니다. 동쪽은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세 지파, 남쪽으로는 르우벤 지파와 세 지파, 서쪽은 에브라임을 기준으로 세 지파, 북쪽은 단 지파를 위시하여 세 지파, 그리고 중앙은 레위 지파, 제사장 지파를 세웁니다. 그리고 다 헤아리니 20세 이상 싸울 장정이 60만이었습니다. 전체 민족으로 헤아리면 200만이 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를 광야교회라고 불렀습니다. 200만이 움직이는 교회인 것입니다. 출애굽 2년차가 기록된 본문은 하나님이 유월절을 지키게 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신명기는 이미 있었던 일을 정리하여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같은 일이 두 번 일어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홍해를 건너 이끌었다는 것 자체가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도 그곳을 가봤는데 얼마나 더운지 알 수 없습니다. 수도꼭지에 나오는 물이 온수입니다. 하루도 견디기 힘든 그 지역을 하나님이 지나게 하신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죽는 곳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가 없으면 살 길이 없습니다. 장정이 낙타와 말을 타면 몰라도 아이와 노인과 여자와 양과 소가 포함된 민족은 절대 건널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하나님이 친히 행하여 건너게 하십니다.
여기서 모세라는 지도자를 세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의 말씀으로 그는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한 자입니다. 모세는 왕이 될 수 있었던 뛰어난 자입니다. 그러나 양을 치는 목부로 40년을 지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택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집트의 호화로운 궁정에 살면서 이스라엘을 기억한 것, 자신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규정한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대화하듯 해주신 것입니다. 기도하고 그 가운데 지시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대면하여 여호와의 형상을 보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모세가 밝히 본 것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그는 특별히 온유함이 누구보다 더했던 자입니다. 당시 지도자의 덕목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온유함입니다. 200만 명을 끌어안고 온갖 원망과 한탄을 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 모두 온유하기 바랍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했습니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데 더 신경 쓴다면 온유해집니다. 그런데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더 많으면 온유가 아닌 분노가 입니다. 이렇게 되기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들을 말씀이 있습니다. 예배에서도 듣습니다. 모세는 이런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했습니다. 그래서 요새에도 유대인들에게 모세는 다윗보다도 더 위대한 인물로 인식됩니다.
3. 여호와의 말씀이 첩경이다
가나안 정탐꾼 중 오직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부정적인 얘기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이름을 바꾸어 줍니다. 호세아에서 여호수아로 바꾸신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라는 말과 관계되는 말인데, 호세아는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름이 구원인데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라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갈렙도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야말로 다윗과 같은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이들이 한 보고는 다름 아닌 젖과 꿀이 흐르는 예언된 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전제로 현실, 즉 주민이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는 것을 얘기한 것입니다. 똑같은 사실을 말하지만 먼저 얘기한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언하신, 약속하신 땅이니 쳐야 하는데 성읍이 하늘을 찌르듯 큰 곳이라는 현실을 이 전제 위에 말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이미 이 예언을 하나님이 하신 바 있습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8). 똑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급할 때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급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이 그들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내려가서 싸우면 집니다. 산지에서 국지전을 해야 하는데 그들의 말에서 내려가 싸운다는 말은 하나님이 싸우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려가서 싸운다는 말은 베드로에게 고기가 없는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이것을 여호수아와 갈렙이 하나님이 예언하신 것으로 상기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도 사람들이 취했다고 할 때 베드로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부어주신 것으로 한 것처럼, 말씀을 붙들면 급할 때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 저기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 알고 계십니다. 기도해서 응답 받으면 하나님 말씀만큼 구체적인 것이 없습니다. 막연한 이야기 같아도 그 안에 다 들어 있고 그것으로 길을 알려 주십니다.
4. 불신앙의 방황
갈렙이 이에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니 여호와께서 친히 취하신다’고 선언합니다. 우리 전쟁법과 맞지 않습니다. 어제 송구영신 예배에서 말씀한 것처럼 우리가 구름을 헤아리고 바람을 알지 못합니다. 사실상 우리가 많은 꾀를 내지만 연초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뢸 것은 주의 길을 내시고 주의 첩경을 곧게 하소서라는 것뿐입니다. 갈렙은 그 땅을 취하자고 합니다. 능히 취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지만, 여부스 땅을 정복하지 못할 때 갈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정탐꾼들은 기가 죽어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니 우리가 칠 수 없다고 합니다. 교만해서는 안 되지만 믿음 없이 살아서도 안 됩니다. 성도는 바위라도 뚫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 위로 솟구쳐 넘어가는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기가 죽어 있는 것인데 어떻게 전쟁이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히 하나님을 배제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전쟁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고 가나안 땅까지 들이고 친히 내려가 싸운다고 하셨는데 그들은 그 약속을 기억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자신만 생각한 것입니다.
새 한 해 동안 하나님을 우리가 기억합시다.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립시다. 우리가 씨를 뿌리고 열심히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길은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이끄셔야 복지가 될 줄 믿습니다. 내 기분으로 들어갔다가는 복지는커녕 사지가 됩니다. 롯이 눈에 보이는대로 소알 땅을 정했다가 유황불을 맞게 됩니다. 물론 롯은 살았지만 말입니다. 아브라함도 소알 땅이 더 기름진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먹기 좋은 것이라고 덥석 먹었다가는 그 안에 돌이 있을지 어떤 것이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여호와 앞에 시원 시원하게 해내고 사람의 뜻으로 자르고 행하는 것은 없습니다. 관계도 그냥 시원하게 잘라버리고 그러지 마십시오. 그저 내버려 두시고 참으십시오. 그것이 모세의 온유입니다.
나머지 정탐꾼들의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그 땅을 악평한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이라고 하신 그 땅을 악평합니다. 하나님이 뭘 하라고 하시면 내 능력으로 판단하여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깎아 내립니다. 해야 할 일을 못하면 내가 못한다고 하면 되는데 해야 할 일이 나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게 선하거든 주어진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부족하거든 능력 달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취하게 하십니다. 갈렙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기에 이 산지를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악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으니 취하되 하나님께 의뢰한 것입니다. 우리의 일을 끌어 안아야 합니다. 악평하면 안 됩니다. 저 같은 경우 신학교를 안고 가야 합니다. 나머지 정탐꾼들은 ‘그들의 신장이 거대한 거인의 후손인데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순전히 내 모습과 그들의 모습을 비교한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이것이 2년 2개월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 후에 시내산 떠나고 사흘만에 불평하고 미리암도 원망합니다. 그러다가 나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을 겪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하다고 할 수 있어도 우리가 성경을 그렇게 볼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 자리에 가면 그럴 수 있습니다.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5. 먼저 길을 가 주시는 하나님을 따라가자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 땅에 대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여호와가 우리를 인도하시니 그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 하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은 병기로 나서지만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 자체를 풀기보다는 이 내용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본문 30절 입니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신 1:30). 우리보다 먼저 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신앙은 항상 과거에 대한 감사가 선행합니다. 우리를 어찌하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이끄신 것입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신 1:31). 이 말씀을 올해 1년간 보기 원합니다. 사실 우리는 안기면 됩니다.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 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안기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까지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33절은 여호와가 먼저 그 길을 가신 것을 말합니다. 새해에 우리가 먼저 길을 가려고 하지 말고 여호와가 먼저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그 길을 가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리고 장막 칠 곳을 찾으십니다. 광야의 백성들, 유목민들은 비가 많이 오면 동굴로 가서 먼저 잡니다. 그러다가 동굴을 못 구하면 장막을 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본적으로 떠도는 유목민입니다. 먼저 가서 장막을 치신다는 말은 이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올 한해 동안 여호와께서 우리를 안고 가실 줄 믿습니다. 시련과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계십니다. 만유의 만유이신 주께서 없는 것을 들어 있는 것을 폐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혹 늦게 되는 것 같아도 그것이 여호와의 첩경임을 아시고 하나님의 뜻에 하나님의 길에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보다 먼저 가시는 하나님 | 신 1:29-33 | 문병호 목사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30101
29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녹취록>
1. 하나님의 첩경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간 길은 최단경로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홍해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시고, 극적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내 광야에 약 1년간 머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떠나게 하셔서, 우측으로 나오는 바란 광야라는 곳이 나오는데, 그곳으로 하나님이 이끄십니다. 오늘날 이집트 내 테러가 일어나는 지역입니다. 바란 광야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세렛 시냇가가 나옵니다. 그곳을 지나 모압, 암몬 지방으로 가면 가나안으로 불과 며칠만에 도착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시고 신 광야를 오른쪽으로 끼고 올라가서 나오는 헤브론, 조금 더 올라가면 예루살렘이 나오는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바로 가나안을 목전에 두는 그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 정탐꾼들이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블레셋 해변 지역까지 보게 하십니다. 그들이 이제 와서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하는데, 같은 사실을 보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평가가 다릅니다. 우리나라 임진왜란 때도 두 장수가 다른 방식으로 보고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런 시기에 보면 하나님 위주의 판단과 그렇지 않은 판단에 차이가 생깁니다. 본문은 이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항상 시원한 길, 한 번에 이루는 길을 찾습니다. 내 능력껏 시원시원하게 쭉쭉 펼쳐진 길로 가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길이 있다고 해서 첩경은 아닙니다. 아스팔트 길을 짐승이 간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이 길을 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석 길을 내실 수도 있고 초장 길을 지나게도, 물이 없는 길로도 이끄십니다. 극적으로 바위에서 물을 내시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천로역정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시각이 아닌 여호와의 뜻이 있는 곳이 우리의 첩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급한 마음, 조바심이 있는 마음도 다 아십니다. 높은 바위에 올라가는 사람이 욕심만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올라갈 힘이 누구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나조차도 내가 그곳에 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과 마음을 헤아리실 뿐 아니라 우리의 능력과 힘, 인내심도 아십니다. 하나님이 광야에 40년간 이스라엘 백성을 있게 하신 것이 징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준비하지 않았으면 가나안에서 살아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준비하여 그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 자들인지 어떤 성정을 가진 자들인지 깨닫고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강대국과 족속들을 활 한 번 쏘지 않고 이기게 하십니다. 이런 훈련을 40년간 시키신 것을 우리가 잘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해의 시작에 첩경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을 내가 헤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시하시는 길입니다. 그것은 간혹 참아야 하는 길일 수 있습니다. 시원하게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꾹 참고 그저 가는 길일 수 있습니다. 협곡을 지나지 않고 초장이 나오지 않습니다. 협곡을 지나야 펼쳐지는 초장이 나옵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행로에 두 가지를 원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면서 우리를 복되게 하시기 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에게 복된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인생의 복됨이 함께 어우러지는 그 시간과 길을 정하십니다.
2. 온유한 사람 모세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진을 갖추게 합니다. 동쪽은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세 지파, 남쪽으로는 르우벤 지파와 세 지파, 서쪽은 에브라임을 기준으로 세 지파, 북쪽은 단 지파를 위시하여 세 지파, 그리고 중앙은 레위 지파, 제사장 지파를 세웁니다. 그리고 다 헤아리니 20세 이상 싸울 장정이 60만이었습니다. 전체 민족으로 헤아리면 200만이 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를 광야교회라고 불렀습니다. 200만이 움직이는 교회인 것입니다. 출애굽 2년차가 기록된 본문은 하나님이 유월절을 지키게 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신명기는 이미 있었던 일을 정리하여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같은 일이 두 번 일어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홍해를 건너 이끌었다는 것 자체가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도 그곳을 가봤는데 얼마나 더운지 알 수 없습니다. 수도꼭지에 나오는 물이 온수입니다. 하루도 견디기 힘든 그 지역을 하나님이 지나게 하신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죽는 곳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가 없으면 살 길이 없습니다. 장정이 낙타와 말을 타면 몰라도 아이와 노인과 여자와 양과 소가 포함된 민족은 절대 건널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하나님이 친히 행하여 건너게 하십니다.
여기서 모세라는 지도자를 세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의 말씀으로 그는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한 자입니다. 모세는 왕이 될 수 있었던 뛰어난 자입니다. 그러나 양을 치는 목부로 40년을 지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택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집트의 호화로운 궁정에 살면서 이스라엘을 기억한 것, 자신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규정한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대화하듯 해주신 것입니다. 기도하고 그 가운데 지시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대면하여 여호와의 형상을 보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모세가 밝히 본 것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그는 특별히 온유함이 누구보다 더했던 자입니다. 당시 지도자의 덕목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온유함입니다. 200만 명을 끌어안고 온갖 원망과 한탄을 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 모두 온유하기 바랍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했습니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데 더 신경 쓴다면 온유해집니다. 그런데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더 많으면 온유가 아닌 분노가 입니다. 이렇게 되기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들을 말씀이 있습니다. 예배에서도 듣습니다. 모세는 이런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했습니다. 그래서 요새에도 유대인들에게 모세는 다윗보다도 더 위대한 인물로 인식됩니다.
3. 여호와의 말씀이 첩경이다
가나안 정탐꾼 중 오직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부정적인 얘기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이름을 바꾸어 줍니다. 호세아에서 여호수아로 바꾸신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라는 말과 관계되는 말인데, 호세아는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름이 구원인데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라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갈렙도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야말로 다윗과 같은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이들이 한 보고는 다름 아닌 젖과 꿀이 흐르는 예언된 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전제로 현실, 즉 주민이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는 것을 얘기한 것입니다. 똑같은 사실을 말하지만 먼저 얘기한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언하신, 약속하신 땅이니 쳐야 하는데 성읍이 하늘을 찌르듯 큰 곳이라는 현실을 이 전제 위에 말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이미 이 예언을 하나님이 하신 바 있습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8). 똑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급할 때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급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이 그들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내려가서 싸우면 집니다. 산지에서 국지전을 해야 하는데 그들의 말에서 내려가 싸운다는 말은 하나님이 싸우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려가서 싸운다는 말은 베드로에게 고기가 없는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이것을 여호수아와 갈렙이 하나님이 예언하신 것으로 상기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도 사람들이 취했다고 할 때 베드로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부어주신 것으로 한 것처럼, 말씀을 붙들면 급할 때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 저기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 알고 계십니다. 기도해서 응답 받으면 하나님 말씀만큼 구체적인 것이 없습니다. 막연한 이야기 같아도 그 안에 다 들어 있고 그것으로 길을 알려 주십니다.
4. 불신앙의 방황
갈렙이 이에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니 여호와께서 친히 취하신다’고 선언합니다. 우리 전쟁법과 맞지 않습니다. 어제 송구영신 예배에서 말씀한 것처럼 우리가 구름을 헤아리고 바람을 알지 못합니다. 사실상 우리가 많은 꾀를 내지만 연초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뢸 것은 주의 길을 내시고 주의 첩경을 곧게 하소서라는 것뿐입니다. 갈렙은 그 땅을 취하자고 합니다. 능히 취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지만, 여부스 땅을 정복하지 못할 때 갈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정탐꾼들은 기가 죽어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니 우리가 칠 수 없다고 합니다. 교만해서는 안 되지만 믿음 없이 살아서도 안 됩니다. 성도는 바위라도 뚫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 위로 솟구쳐 넘어가는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기가 죽어 있는 것인데 어떻게 전쟁이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히 하나님을 배제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전쟁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고 가나안 땅까지 들이고 친히 내려가 싸운다고 하셨는데 그들은 그 약속을 기억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자신만 생각한 것입니다.
새 한 해 동안 하나님을 우리가 기억합시다.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립시다. 우리가 씨를 뿌리고 열심히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길은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이끄셔야 복지가 될 줄 믿습니다. 내 기분으로 들어갔다가는 복지는커녕 사지가 됩니다. 롯이 눈에 보이는대로 소알 땅을 정했다가 유황불을 맞게 됩니다. 물론 롯은 살았지만 말입니다. 아브라함도 소알 땅이 더 기름진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먹기 좋은 것이라고 덥석 먹었다가는 그 안에 돌이 있을지 어떤 것이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여호와 앞에 시원 시원하게 해내고 사람의 뜻으로 자르고 행하는 것은 없습니다. 관계도 그냥 시원하게 잘라버리고 그러지 마십시오. 그저 내버려 두시고 참으십시오. 그것이 모세의 온유입니다.
나머지 정탐꾼들의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그 땅을 악평한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이라고 하신 그 땅을 악평합니다. 하나님이 뭘 하라고 하시면 내 능력으로 판단하여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깎아 내립니다. 해야 할 일을 못하면 내가 못한다고 하면 되는데 해야 할 일이 나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게 선하거든 주어진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부족하거든 능력 달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취하게 하십니다. 갈렙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기에 이 산지를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악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으니 취하되 하나님께 의뢰한 것입니다. 우리의 일을 끌어 안아야 합니다. 악평하면 안 됩니다. 저 같은 경우 신학교를 안고 가야 합니다. 나머지 정탐꾼들은 ‘그들의 신장이 거대한 거인의 후손인데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순전히 내 모습과 그들의 모습을 비교한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이것이 2년 2개월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 후에 시내산 떠나고 사흘만에 불평하고 미리암도 원망합니다. 그러다가 나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을 겪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하다고 할 수 있어도 우리가 성경을 그렇게 볼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 자리에 가면 그럴 수 있습니다.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5. 먼저 길을 가 주시는 하나님을 따라가자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 땅에 대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여호와가 우리를 인도하시니 그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 하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은 병기로 나서지만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 자체를 풀기보다는 이 내용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본문 30절 입니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신 1:30). 우리보다 먼저 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신앙은 항상 과거에 대한 감사가 선행합니다. 우리를 어찌하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이끄신 것입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신 1:31). 이 말씀을 올해 1년간 보기 원합니다. 사실 우리는 안기면 됩니다.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 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안기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까지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33절은 여호와가 먼저 그 길을 가신 것을 말합니다. 새해에 우리가 먼저 길을 가려고 하지 말고 여호와가 먼저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그 길을 가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리고 장막 칠 곳을 찾으십니다. 광야의 백성들, 유목민들은 비가 많이 오면 동굴로 가서 먼저 잡니다. 그러다가 동굴을 못 구하면 장막을 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본적으로 떠도는 유목민입니다. 먼저 가서 장막을 치신다는 말은 이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올 한해 동안 여호와께서 우리를 안고 가실 줄 믿습니다. 시련과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계십니다. 만유의 만유이신 주께서 없는 것을 들어 있는 것을 폐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혹 늦게 되는 것 같아도 그것이 여호와의 첩경임을 아시고 하나님의 뜻에 하나님의 길에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